티스토리 뷰

ebook/소설

그림자 위작단 : 하이틴로멘스 01

breathinghappiness 2026. 2. 21. 07:49

그림자 위작단

장르: 청소년 성장소설, 미스터리, 사회고발

타겟: 중학생

테마: 예술의 가치, 정의, 청소년의 성장

주요 등장인물

강하늘 (중3): 미술 영재, 주인공. 아버지는 무명 화가

서윤아 (중3): 하늘의 친구, 뛰어난 관찰력을 가진 학생 기자

강태수 (40대): 하늘의 아버지, 성실한 화가지만 생활고에 시달림

박민준 (50대): 유명 갤러리 관장, 겉으로는 예술 후원자

최예린 (30대): 신진 작가, 피해자 중 한 명

정형사 (40대): 사건을 맡게 되는 형사

회차별 스토리라인

1부: 발견 (1-10회)

1-2회: 일상의 균열

하늘의 평범한 학교생활 소개

아버지 태수가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모습

태수가 점점 수척해지고 스트레스 받는 모습

3-4회: 숨겨진 비밀

하늘이 우연히 아버지 작업실에서 유명 작가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 발견

"이건 연습용이야"라는 아버지의 변명

하늘의 의심과 혼란

5-6회: 윤아의 등장

학교 신문부 윤아가 하늘의 이상한 행동 눈치챔

둘이 친해지면서 하늘이 고민 털어놓음

윤아, 함께 진실을 파헤치자고 제안

7-8회: 첫 번째 단서

박민준 갤러리에서 열린 전시회 방문

태수의 그림과 너무 비슷한 '유명 작가'의 작품 발견

전시 도록에서 이상한 점 발견: 작가 경력이 부풀려져 있음

9-10회: 피해자를 만나다

SNS를 통해 최예린 작가 발견

예린이 자신의 그림이 도용당했다고 호소하는 글

하늘과 윤아, 예린을 직접 만나러 가기로 결심

2부: 조사 (11-20회)

11-12회: 예린의 이야기

예린의 작품이 무단 복제되어 판매된 사연

계약금만 받고 잔금을 못 받은 여러 작가들의 존재

"박민준은 겉으로는 예술 후원자지만..."

13-14회: 시스템의 실체

박민준이 무명 작가들을 이용하는 수법 파악

가난한 작가에게 '모작 작업' 의뢰 → 유명 작가 이름으로 판매

정식 계약서 없이 구두 약속만, 증거 남기지 않음

15-16회: 아버지와의 대화

하늘이 용기내어 아버지에게 직접 물어봄

태수의 눈물: "너를 대학 보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어"

하늘의 갈등: 아버지를 이해하면서도 잘못된 걸 아는 괴로움

17-18회: 증거 수집

윤아의 기자 정신 발휘, 체계적인 증거 수집 시작

다른 피해 작가들 인터뷰

박민준 갤러리의 판매 기록 추적

19-20회: 위기

하늘과 윤아의 조사를 박민준이 눈치챔

태수에게 압력: "계속 일 하고 싶으면 조용히 해"

태수가 하늘에게 그만두라고 애원

3부: 갈등 (21-30회)

21-22회: 선택의 순간

하늘의 내적 갈등 심화

윤아: "네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야. 수많은 예술가들이 피해받고 있어"

하늘, 옳은 일을 하기로 결심

23-24회: 동지들

SNS를 통해 피해 작가들의 모임 결성

예린이 리더 역할, 하늘과 윤아는 막내로 참여

함께 법적 대응 방법 모색

25-26회: 언론의 힘

윤아가 학교 신문에 기사 게재

지역 언론의 관심, 인터뷰 요청

이슈가 점점 커지기 시작

27-28회: 박민준의 반격

박민준, 명예훼손으로 맞고소 위협

변호사를 통한 협박 편지

피해 작가들, 두려움에 떨며 일부는 포기

29-30회: 포기하지 않는 용기

하늘의 학교에서 '예술과 정의' 토론회 개최

많은 학생들이 지지 표명

지역 예술가 협회에서도 지원 약속

4부: 해결 (31-40회)

31-32회: 결정적 증거

정형사 등장, 사건에 관심

박민준의 비자금 계좌 추적

탈세 정황까지 발견

33-34회: 법의 심판

경찰 수사 본격화

박민준의 갤러리 압수수색

수십 명의 피해 작가 진술서 제출

35-36회: 아버지의 선택

태수, 증인으로 나서기로 결심

"내 아들에게 떳떳한 아버지가 되고 싶다"

법정에서의 용기 있는 증언

37-38회: 판결

박민준 유죄 판결

피해 작가들에게 배상 명령

하지만 실제 피해 회복은 쉽지 않다는 현실

39회: 새로운 시작

피해 작가들의 공동 전시회 개최

태수의 작품, 자신의 이름으로 정식 전시

하늘, 아버지의 진짜 그림에 감동

40회: 에필로그

1년 후

하늘은 미술 영재 고등학교 진학

윤아는 청소년 인권 기자로 활동

예술가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 개선 움직임

하늘의 독백: "예술의 가치는 돈이 아니라 진심에 있다"

교육적 포인트

예술의 가치: 예술 작품의 진정한 가치와 작가의 권리

사회 정의: 약자를 착취하는 구조적 문제

용기: 옳은 일을 위해 나서는 청소년의 용기

가족: 경제적 어려움 속 가족 간의 이해와 사랑

현실 인식: 예술계의 실제 문제를 중학생 눈높이로 전달

작품 특징

중학생 공감 포인트: 부모님의 경제적 어려움, 진로 고민

교육적 가치: 저작권, 계약의 중요성, 사회 정의

현실성: 실제 예술계 문제를 반영하되 희망적 결말

성장 서사: 주인공의 도덕적 성장과 용기

이 스토리는 실제 예술인들이 겪는 저작권 침해, 계약 불이행 등의 문제를 중학생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으로 풀어내면서도,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청소년의 성장을 그립니다.

1회: 균열의 시작

"강하늘, 또 그림 그리고 있어?"

담임 선생님의 목소리에 하늘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수학 시간인데 또 교과서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교실에 퍼졌다.

"죄송합니다."

하늘은 얼굴이 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도 이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손에 펜만 쥐면 저절로 무언가를 그리게 되는 것이다.

"그림은 미술 시간에만 그려. 알았지?"

"네, 선생님."

쉬는 시간이 되자 단짝 친구 서윤아가 다가왔다. 윤아는 학교 신문부 부장으로, 항상 노트북을 들고 다니며 기사거리를 찾아다니는 아이였다.

"야, 이번엔 뭘 그렸는데?"

"아무것도 아니야."

하늘이 교과서를 덮으려 하자 윤아가 재빠르게 낚아챘다. 교과서 귀퉁이에는 정교한 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손가락의 주름, 손톱의 질감까지 살아 있는 듯한 세밀한 묘사였다.

"미쳤다. 너 진짜 재능 있어. 이 정도면 미대 여유로 가겠는데?"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

하늘은 씁쓸하게 웃었다. 미대 진학. 그건 하늘의 꿈이었지만, 동시에 감히 꿈꾸기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하늘의 아버지 강태수는 화가였다. 정확히 말하면 '무명 화가'였다. 20년 넘게 그림을 그렸지만 제대로 된 전시회 한 번 열지 못했고, 그림으로 번 돈은 한 달 월세도 안 되었다. 어머니는 하늘이 초등학교 때 집을 나갔다. "그림만 그리는 남편과는 못 살겠다"는 말을 남기고.

그 후로 아버지와 하늘, 둘이서만 살았다. 아버지는 낮에는 인쇄소에서 일하고, 밤에는 좁은 원룸의 한쪽을 작업실로 만들어 그림을 그렸다. 하늘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랐다. 물감 냄새, 테레빈유 냄새가 배어 있는 집에서.

"너희 아버지 요즘 어때? 건강하시고?"

윤아의 물음에 하늘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으셔."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최근 몇 달 사이 아버지는 눈에 띄게 수척해졌다. 밤늦게까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었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상한 건 아버지의 표정이었다. 그림을 그릴 때 늘 행복해하던 아버지의 얼굴에서 요즘은 기쁨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날 밤, 하늘은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아버지 생각을 했다. 거실 한쪽에 설치된 간이 작업실에서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캔버스 앞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그리고 있었다.

"아빠, 저 왔어요."

"그래, 밥은 먹었니?"

"네, 학교에서 먹었어요."

하늘은 아버지 뒤로 살짝 다가가 캔버스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캔버스에는 형형색색의 추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역동적인 붓 터치, 대담한 색채 대비. 분명 아름다운 그림이었지만, 하늘이 놀란 이유는 따로 있었다.

'이 그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하늘아, 방해하지 말고 숙제나 해."

아버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날카로웠다. 하늘은 "네" 하고 대답했지만,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버지의 어깨가 유난히 축 처져 보였다.

밤 12시가 넘어서도 작업실 불은 꺼지지 않았다. 하늘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였다. 벽 너머로 아버지의 한숨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새벽 2시쯤, 목이 말라 일어난 하늘은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부엌으로 가려다가 작업실 쪽을 보니 불이 꺼져 있었다. 아버지는 침대로 가신 모양이었다.

물을 마시고 돌아가려던 하늘의 발걸음이 멈췄다. 작업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오늘은 왠지 발걸음이 그쪽으로 향했다.

작업실 안은 어두웠지만,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 덕분에 윤곽은 보였다. 이젤 위에는 오늘 아버지가 그리던 추상화가 놓여 있었다. 하늘은 스마트폰 손전등을 켜고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역시... 이 그림 본 적 있어.'

하늘은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틈만 나면 미술관 웹사이트를 둘러보곤 했다. 그래서 유명한 작품들은 대부분 기억하고 있었다. 이 그림은 분명 어디선가 본 적이 있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하늘은 스마트폰으로 '한국 추상화 유명 작품'을 검색했다. 여러 이미지를 넘기다가, 하늘의 손가락이 멈췄다.

"이거..."

화면에 뜬 그림은 아버지가 그린 그림과 놀라울 만큼 비슷했다. 아니,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똑같았다. 작품명은 '도시의 리듬', 작가는 김현우.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중견 작가라고 소개되어 있었다.

하늘은 다시 아버지의 그림을 보았다. 붓 터치의 방향, 색채의 배치, 심지어 화면 구성까지 일치했다. 이건 단순히 '영향을 받았다'는 수준이 아니었다. 완벽한 복제였다.

'왜 아빠가 다른 사람 그림을 똑같이 그리는 거지?'

하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버지는 평생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했던 사람이었다. "다른 사람 흉내 내는 건 예술이 아니야"라고 늘 말씀하시던 분이었다. 그런 아버지가 왜 유명 작가의 그림을 베끼고 있는 걸까?

하늘은 작업실을 둘러보았다. 구석에 쌓여 있는 캔버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

조심스럽게 캔버스를 한 장씩 넘겨보았다. 그리고 하늘의 얼굴은 점점 창백해졌다. 모든 그림이 어딘가에서 본 듯한 그림들이었다. 유명 작가들의 화풍, 유명 작품들과 비슷한 구도와 색채.

"뭐 하는 거니?"

갑자기 들린 아버지의 목소리에 하늘은 깜짝 놀라 캔버스를 떨어뜨렸다. 아버지는 문가에 서서 피곤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아빠... 저는 그냥..."

"방으로 가. 지금 당장."

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무언가 들켜서는 안 될 것을 들킨 사람의 목소리였다.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빠가 그림을 베끼고 있어. 왜? 돈 때문에? 누가 시킨 건가? 이게 불법인가?'

다음 날 아침, 아버지와 하늘은 어색한 아침 식사를 했다. 아버지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하늘아, 어젯밤 일은..."

"네?"

"그냥... 연습이야. 유명한 작품들을 모작하면서 기법을 배우는 거지. 미술 공부의 한 방법이란다."

아버지의 설명은 그럴듯했다. 실제로 많은 화가들이 거장의 작품을 모사하면서 실력을 키웠다. 하지만 뭔가 석연치 않았다. 아버지의 표정, 떨리던 목소리, 그리고 무엇보다 그 많은 똑같은 그림들.

"그래... 그렇구나."

하늘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느껴졌다.

학교에 가는 길, 하늘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머릿속은 온통 어젯밤 본 그 그림들로 가득했다.

"야, 강하늘!"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윤아가 달려왔다.

"너 표정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것도..."

하늘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윤아의 날카로운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신문부 부장답게 윤아는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 탁월했다.

"분명 뭔가 있네. 나한테 말 안 할 거야?"

"진짜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좀 피곤해서."

윤아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지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대신 "나한테 말하고 싶을 때 말해. 난 네 편이야"라고 속삭였다.

수업 시간 내내 하늘은 집중할 수 없었다. 칠판의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계속 같은 질문이 맴돌았다.

'아빠는 왜 거짓말을 하셨을까? 정말 단순한 연습이었다면, 왜 그렇게 당황하셨을까?'

하늘은 결심했다. 진실을 알아내야 한다고. 아버지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그날 오후, 하늘은 윤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어젯밤 본 그림들, 아버지의 이상한 반응, 그리고 자신의 의심까지.

윤아는 심각한 표정으로 듣더니 말했다.

"우리 같이 알아보자. 네가 혼자 고민할 일이 아니야."

"하지만 이건 우리 집안일이고..."

"친구잖아. 그리고 나 기자 지망생이야. 진실을 밝히는 게 내 일이라고."

윤아의 눈빛은 진지했다. 하늘은 고마우면서도 걱정스러웠다. 이 일이 어디로 향할지, 어떤 진실이 드러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미 균열은 시작되었고, 이제 뒤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

하늘과 윤아의 조사가 시작되었다.

2회: 숨겨진 진실

"먼저 정확히 뭘 봤는지 정리해보자."

방과 후, 윤아는 하늘을 학교 도서관 구석 자리로 데려갔다. 윤아는 노트북을 펴고 새 문서를 열었다. 기자답게 체계적으로 접근하는 모습이었다.

"아빠 작업실에서 본 그림들이 전부 유명 작가들 작품이랑 비슷했다는 거지?"

"응. 적어도 대여섯 점은 봤어. 전부 어디선가 본 그림들이었어."

하늘은 스마트폰을 꺼내 어젯밤 검색했던 이미지들을 윤아에게 보여주었다. 김현우의 '도시의 리듬', 박서연의 '고요한 울림', 이준호의 '경계의 풍경'. 모두 최근 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중견 작가들의 대표작이었다.

"와... 이 작가들 되게 유명한 사람들이네. 작품 가격도 수백만 원씩 하고."

윤아가 각 작가를 검색하며 말했다. 그러다 뭔가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잠깐, 하늘아. 이거 봐."

윤아가 화면을 돌려 보여주었다. 한 갤러리의 전시 공지였다. '아트스페이스 민준 - 신진작가 발굴 프로젝트'. 전시 작가 명단에 하늘이 본 작가들의 이름이 모두 올라가 있었다.

"아트스페이스 민준... 이거 강남에 있는 꽤 유명한 갤러리야. 관장이 박민준이라는 사람인데, 신진작가 발굴로 유명하대."

"그게 아빠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모르지. 하지만 네 아버지가 모작한 그림들의 작가가 전부 이 갤러리 소속이라는 건 우연치고는 이상해."

윤아의 말이 맞았다. 하늘은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뭔가 큰 그림이 보이는 것 같았다.

"우리 이 갤러리에 가보는 게 어때?"

"갤러리에? 우리가?"

"응. 토요일에 전시 오프닝이 있대. 일반인도 갈 수 있어."

하늘은 망설였다. 만약 거기서 아버지를 만나면 어쩌지? 아니면 더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면?

"괜찮아. 우리 그냥 구경만 하는 거야. 아무도 중학생 둘을 의심하지 않을 거야."

윤아의 말에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실을 알고 싶었다.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날 밤, 하늘은 다시 한번 아버지의 작업실 쪽을 주시했다.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아버지는 밤 12시가 넘도록 작업을 했다. 새벽 1시쯤 되어서야 불이 꺼졌다.

하늘은 조용히 일어나 작업실 문 앞까지 갔다. 문틈으로 살짝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는 이미 침대로 가신 모양이었다.

용기를 내어 문을 열었다. 어제보다 더 조심스럽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작업실 안으로 들어선 하늘은 스마트폰 카메라를 켰다. 증거를 남겨야 했다.

이젤 위에는 오늘 그린 그림이 놓여 있었다. 선명한 색채의 풍경화였다. 하늘은 그림을 사진으로 찍었다. 그리고 구석에 쌓인 캔버스들도 한 장씩 펼쳐 사진을 찍었다.

열 장쯤 찍었을 때, 뭔가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 눈에 띄었다. 하늘은 몸을 숙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손으로 쓴 메모였다.

'김현우 작 <도시의 리듬> - 2월 15일까지 완성

박서연 작 <고요한 울림> - 2월 20일까지 완성

이준호 작 <경계의 풍경> - 2월 25일까지 완성

민준 갤러리 납품 - 3월 1일 오전 10시

하늘의 손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연습이 아니었다. '납품'이라는 단어. 마감일. 그리고 민준 갤러리.

아버지는 이 그림들을 갤러리에 납품하고 있었다. 다른 작가의 이름으로.

하늘은 메모를 사진으로 찍고 조심스럽게 원래 자리에 놓았다. 그리고 최대한 조용히 작업실을 빠져나왔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웠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빠가... 위작을 만들고 있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평생 정직하게 살아온 아버지가, 예술의 순수성을 그 누구보다 강조하던 아버지가 다른 작가의 그림을 베껴 팔고 있다니.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아버지를 제대로 쳐다볼 수 없었다. 아버지도 뭔가 느낀 듯 말이 없었다.

"하늘아, 요즘 무슨 걱정 있니?"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니요, 없어요."

"학교생활은 잘하고 있고?"

"네, 걱정 마세요."

짧은 대화 후 침묵이 흘렀다. 아버지는 한숨을 쉬며 일어났다.

"아빠 오늘 일 좀 일찍 끝나. 저녁 같이 먹자. 네가 좋아하는 돈가스 사줄게."

"...네."

아버지가 나간 후, 하늘은 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어젯밤 찍은 사진들과 함께.

윤아야, 큰일이야. 이것 봐.

몇 분 후 윤아에게서 답장이 왔다.

헐. 이거 진짜야? 네 아버지가 위작을 만들고 있는 거잖아.

토요일에 꼭 그 갤러리 가보자. 뭔가 있을 거야.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윤아가 하늘을 옥상으로 끌고 갔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공간이었다.

"하늘아, 이거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일 수 있어."

윤아는 노트북을 펼쳐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미술품 위작 제작', '저작권 침해', '사기' 같은 단어들이 눈에 띄었다.

"위작을 만들어 판매하는 건 명백한 범죄야. 저작권 침해에 사기죄까지 적용될 수 있어."

"하지만 아빠는...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야."

하늘의 목소리가 떨렸다. 윤아가 하늘의 손을 잡았다.

"나도 알아. 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거. 하지만 누군가 네 아버지를 이용하고 있을 수도 있어. 그 박민준이라는 사람 말이야."

"무슨 뜻이야?"

"생각해봐. 네 아버지는 재능 있는 화가지만 유명하지 않잖아. 생활도 어렵고. 그런 사람들을 찾아서 위작을 만들게 하고, 유명 작가 이름으로 비싸게 파는 거지. 네 아버지는 아마 푼돈만 받고."

윤아의 추론은 논리적이었다. 하늘은 아버지의 수척해진 얼굴을 떠올렸다.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면서도 행복해 보이지 않던 모습.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아빠를 도와드려야 해."

"맞아. 그래서 우리가 증거를 모아야 해. 네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닐 거야. 분명 다른 피해자들도 있을 거야."

그날 수업 시간, 하늘은 전혀 집중할 수 없었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시나리오가 펼쳐졌다. 아버지가 체포되는 모습, 갤러리 관장과 대면하는 모습, 법정에 서는 모습.

'아니야,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아빠는 피해자야. 억울하게 이용당하고 있는 거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문도 들었다. 정말 아버지는 억지로 이 일을 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돈 때문에 스스로 선택한 걸까?

집에 돌아온 하늘은 아버지가 약속대로 돈가스를 사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식탁에는 하늘이 좋아하는 반찬들도 차려져 있었다.

"자, 어서 먹어. 식기 전에."

아버지는 평소보다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눈가의 다크서클과 수척한 볼은 숨길 수 없었다.

"아빠, 요즘 일이 많으세요?"

하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응? 아, 그냥 좀 바쁘긴 하지. 인쇄소 일도 있고, 그림도 그려야 하고."

"그림은... 무슨 그림 그리세요?"

순간 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젓가락을 든 채로 잠시 망설이더니 대답했다.

"그냥... 이것저것. 의뢰받은 것도 있고."

"의뢰요? 누가 의뢰하셨는데요?"

"하늘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너는 공부나 열심히 해. 아빠 일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

"하지만..."

"하늘아, 아빠가 뭘 하든 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너 고등학교 가면 학원비도 많이 들고, 미대 가려면 입시 학원도 다녀야 하잖아. 그 돈 마련하려고 열심히 일하는 거야."

아버지의 눈이 붉어졌다. 하늘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동안, 하늘은 아버지의 말을 곱씹었다. '너 잘되라고 하는 거야.' 아버지는 하늘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었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내 때문이야. 내가 미대에 가고 싶다고 했기 때문에...'

죄책감이 밀려왔다. 동시에 분노도 일었다. 왜 아버지 같은 성실한 사람이 이런 선택을 해야 하는 거지? 왜 재능 있는 화가가 자기 이름으로 그림을 팔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작품을 베껴야 하는 거지?

그날 밤, 하늘은 잠들기 전 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윤아야, 토요일에 꼭 가자. 그 갤러리.

아빠를 도와드리고 싶어.

이게 잘못됐다는 걸 증명하고 싶어.

윤아의 답장은 즉시 왔다.

그래. 우리 함께 진실을 밝히자.

네 아버지뿐만 아니라, 이런 일을 당하는 모든 예술가들을 위해서.

하늘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별들이 유난히 밝았다.

작업실에서는 여전히 물감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또 밤늦게까지 그림을 그리고 계실 것이다. 누군가의 이름으로 팔릴 그림을.

'꼭 진실을 밝힐 거야. 그리고 아빠가 아빠 이름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만들 거야.'

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열네 살 중학생에게는 너무 무거운 짐이었지만, 피할 수 없었다. 이미 진실을 알아버렸으니까.

토요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트스페이스 민준에서 열리는 전시 오프닝. 거기서 모든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하늘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3회: 갤러리의 비밀

토요일 오후 2시, 하늘과 윤아는 강남역 근처의 아트스페이스 민준 앞에 서 있었다. 5층 건물 전체가 갤러리였다. 유리로 된 외벽 너머로 하얀 벽과 조명이 비치는 세련된 공간이 보였다.

"와... 여기 진짜 고급지다."

윤아가 감탄하며 말했다. 입구에는 '신진작가 발굴 프로젝트 - 봄의 서곡' 전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포스터에는 하늘이 아버지 작업실에서 봤던 그림들이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들어가자."

하늘이 먼저 문을 열었다. 1층 로비는 넓고 밝았다. 리셉션 데스크에 앉은 직원이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전시 관람하러 오셨어요?"

"네, 학교 미술 수업 과제로 왔어요."

윤아가 능숙하게 거짓말을 했다. 직원은 의심 없이 팸플릿을 건네주었다.

"2층부터 4층까지 전시되어 있어요. 천천히 관람하세요."

두 사람은 2층으로 올라갔다. 하얀 벽에 그림들이 적절한 간격으로 걸려 있었다. 각 작품 옆에는 작가명과 제목, 가격이 적힌 작은 명판이 붙어 있었다.

"저기 봐."

하늘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벽면 중앙에 걸린 그림. '도시의 리듬 - 김현우 作, 500만원'

하늘은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틀림없었다. 아버지가 작업실에서 그리던 바로 그 그림이었다. 붓 터치 하나하나, 색채의 조합까지 완벽하게 일치했다.

"이거 네 아버지가 그린 거 맞아?"

"응... 100퍼센트 확실해."

윤아는 스마트폰으로 그림을 촬영했다. 그리고 하늘이 며칠 전 찍어둔 아버지 작업실 사진과 비교했다. 두 그림은 완전히 똑같았다.

"3층도 가보자."

3층에는 더 많은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하늘은 그 중 세 점을 더 발견했다. 모두 아버지가 그린 그림들이었다. 박서연의 '고요한 울림', 이준호의 '경계의 풍경', 그리고 또 다른 작가 최예린의 '내면의 정원'.

"이게 말이 돼? 네 아버지가 이 작가들 그림을 전부 그렸다는 거잖아."

윤아의 목소리에 분노가 섞여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게, 여기 있는 작가들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들이야. 인터넷에 검색하면 프로필도 나오고, 인터뷰 기사도 있어."

윤아가 스마트폰으로 검색 결과를 보여주었다. 김현우, 박서연, 이준호, 최예린. 모두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중견 작가들이었다. 각자의 홈페이지도 있고, SNS 계정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그럼 이 사람들이 네 아버지한테 그림을 의뢰한 건가? 아니면..."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고스트 페인터."

윤아가 속삭였다.

"작가는 따로 있고, 실제로 그림 그리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거야. 마치 소설가가 대필작가를 쓰는 것처럼."

바로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학생들. 전시 재미있게 보고 있나요?"

하늘과 윤아는 깜짝 놀라 돌아봤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우아한 미소를 띠고 서 있었다. 잘 다려진 셔츠에 고급스러운 시계를 찬 모습이었다.

"저는 이 갤러리 관장 박민준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작품을 감상하길래 반가워서요."

박민준. 아버지 메모에 적혀 있던 바로 그 이름. 하늘은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아, 네... 저희 학교 과제로 왔어요."

윤아가 다시 한번 침착하게 대답했다.

"어느 학교 다니세요?"

"서울 중앙중학교요."

"오, 좋은 학교네요. 미술에 관심 많은가 봐요?"

박민준은 친절했다. 하지만 하늘은 그의 눈빛이 너무 날카롭게 자신들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그림들 정말 멋있어요. 작가들이 다 젊으시네요."

윤아가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네, 저희 갤러리는 신진 작가 발굴에 힘쓰고 있어요. 재능 있지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가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죠."

"이 작가들은 어떻게 발굴하세요?"

"음, 여러 경로가 있죠. 공모전, 추천, 때로는 제가 직접 찾아다니기도 하고요."

박민준은 김현우의 '도시의 리듬' 앞으로 걸어갔다.

"이 작품 같은 경우는 김현우 작가의 대표작이에요. 5년 전부터 저희 갤러리와 함께 작업해왔죠. 이제 제법 이름이 알려지고 있어요."

5년 전. 하늘은 속으로 계산했다. 그때 자신은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때부터 이미 이 일을 하고 있었던 걸까?

"그런데 학생, 혹시 미술 전공할 생각 있어요?"

박민준이 갑자기 하늘을 향해 물었다.

"네? 아, 저는..."

"눈빛을 보니까 그림을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혹시 그림 그려요?"

"조금... 그리긴 해요."

"그래요? 나중에 작품 있으면 한번 보여줘요. 재능 있는 학생들을 항상 찾고 있거든요."

박민준이 명함을 건넸다. 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받았다.

"천천히 구경하세요.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고요."

박민준은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윤아가 하늘의 팔을 잡았다.

"야, 방금 그 사람이 박민준이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더 무섭다."

"나도..."

하늘의 손은 아직도 떨리고 있었다. 박민준의 친절한 미소 뒤에 무언가 어두운 것이 숨어 있는 것만 같았다.

"일단 사진 더 찍고 나가자. 여기 오래 있으면 의심받을 것 같아."

둘은 4층까지 빠르게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총 일곱 점의 그림이 아버지 작업실에서 본 것과 일치했다. 모두 다른 작가 이름으로 전시되어 있었고, 가격은 300만 원에서 800만 원까지 다양했다.

갤러리를 나오면서, 하늘은 뒤를 돌아봤다. 5층 유리창 너머로 누군가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박민준일까?

"카페 가자. 정리 좀 해야겠어."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은 윤아는 노트북을 꺼내 지금까지의 정보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정리해보자. 첫째, 네 아버지는 박민준 갤러리에 그림을 납품하고 있어. 둘째, 그 그림들은 다른 작가 이름으로 판매되고 있어. 셋째, 그 '작가들'은 실존 인물이야."

"그럼 그 작가들은 뭐야? 공범인 거야?"

"아니면 그들도 피해자일 수도 있어. 이름만 빌려준 거거나, 아니면 자기들이 그린 줄 아는 거거나."

윤아는 각 작가의 SNS를 뒤지기 시작했다. 김현우의 인스타그램에는 작업실 사진들이 올라와 있었다.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 전시 오프닝 사진들.

"잠깐, 이거 봐."

윤아가 화면을 확대했다. 김현우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는 사진이었는데, 배경에 보이는 그림과 오늘 본 '도시의 리듬'이 달랐다.

"이 사람 실제로 그림은 그리는 것 같은데... 근데 갤러리에 있는 건 네 아버지가 그린 거잖아."

"그럼 이 사람은 그림을 그리긴 하는데, 판매되는 건 다른 그림이라는 거네?"

둘은 다른 작가들의 SNS도 확인했다. 모두 비슷한 패턴이었다.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은 올라오지만, 판매되는 작품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이거 완전 조직적이야."

윤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박민준이 실제 작가들을 프론트로 내세우고, 실제 그림은 네 아버지 같은 무명 화가들한테 그리게 하는 거야. 작가들은 얼굴만 내밀고 전시회 다니고, 실제 그림은 대량으로 찍어내는 거지."

"그럼 아빠는 얼마나 받는 걸까?"

하늘이 중얼거렸다. 메모에는 금액이 적혀 있지 않았다.

"많지 않을 거야. 그림 한 점에 500만 원씩 팔리는데, 네 아버지한테는 50만 원, 아니 어쩌면 그것도 안 줄 수도 있어."

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아버지는 밤새 그림을 그리고, 박민준은 그걸로 수백만 원을 벌고 있었다.

"우리 뭘 해야 해, 윤아야?"

"증거를 더 모아야 해. 그리고..."

윤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다른 피해자들을 찾아야 해. 네 아버지만 이런 일을 당하고 있는 게 아닐 거야."

바로 그때, 하늘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여보세요?"

"하늘아, 어디야? 저녁 같이 먹으려고 했는데."

"아, 저 친구랑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어요. 조금 늦을 것 같아요."

"그래? 그럼 저녁은 알아서 먹고, 너무 늦지 말고 들어와."

"네, 아빠."

전화를 끊고 나자, 하늘은 죄책감이 밀려왔다. 아버지를 감시하고, 조사하고 있다는 사실이 무거웠다.

"괜찮아?"

윤아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물었다.

"응... 그냥, 아빠한테 미안해서."

"미안할 거 없어. 우리는 네 아버지를 도우려는 거야. 이 상황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윤아 말이 맞았다. 이건 아버지를 위한 일이었다.

"내가 오늘 찍은 사진들 정리해서 파일로 만들게. 그리고 각 작가들에 대해서도 조사해볼게."

"고마워, 윤아야."

"친구한테 고맙긴. 우리 끝까지 가보자."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하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둠 속으로 빠르게 지나가는 터널 벽. 자신도 지금 어둠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터널 끝에는 빛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벌써 작업실에 들어가 계셨다. 문틈으로 새어 나오는 불빛과 물감 냄새. 하늘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자기 방으로 갔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아빠,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아빠가 아빠 이름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아빠가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게.'

하늘의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4회: 첫 번째 목격자

일요일 오전, 하늘은 윤아에게서 온 메시지에 잠에서 깼다.

하늘아, 큰 거 발견했어. 지금 당장 만날 수 있어?

서둘러 옷을 입고 나온 하늘은 집 근처 공원에서 윤아를 만났다. 윤아는 노트북을 품에 안고 흥분한 표정이었다.

"이거 봐. 어젯밤 내내 조사했어."

윤아가 노트북을 펼쳤다. 화면에는 한 블로그가 떠 있었다. 제목은 '미술계의 어두운 진실 - 한 작가의 고백'이었다.

"이거 누가 쓴 건데?"

"최예린이라는 작가야. 어제 갤러리에서 봤던 그 작가 중 한 명."

하늘은 글을 읽기 시작했다. 글은 3개월 전에 올라온 것이었다.

'저는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5년간 제 이름으로 팔린 그림 중 절반 이상을 제가 그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갤러리 관장님이 "당신의 화풍을 이해하는 조수를 고용했다"고 했습니다. 바쁜 나를 위해 밑그림 정도만 도와준다고 했죠.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제가 손도 대지 않은 완성작들이 제 이름으로 팔리고 있었습니다.

문제를 제기하자 계약서를 들이밀었습니다. 거기에는 "갤러리는 작가의 화풍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애매한 조항이 있었습니다. 변호사를 만나봤지만, 소송을 걸기에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더 끔찍한 건 계약금만 받고 잔금을 받지 못한 작품이 수십 점이라는 겁니다. 그림은 이미 팔렸는데, "경기가 안 좋아서", "컬렉터가 아직 입금을 안 해서"라는 핑계로 돈을 주지 않습니다. 제가 독촉하면 "계약 파기하고 싶으면 하라"고 협박합니다. 그러면 저는 이 업계에서 매장당할 겁니다.

누가 실제로 제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무명 작가들이 착취당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히 잘못된 겁니다.'

하늘은 손이 떨렸다. 이건 단순한 추측이 아니었다. 실제 피해자의 증언이었다.

"댓글 봐."

윤아가 화면을 스크롤했다. 댓글은 수십 개가 달려 있었다.

'저도 비슷한 일 겪었어요. 다른 갤러리지만 수법이 똑같네요.'

'용기 내서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도 두려워서 말하지 못하고 있어요.'

'미술계 공공연한 비밀이에요. 다들 알지만 아무도 말 안 하죠.'

하지만 가장 눈에 띄는 댓글은 따로 있었다.

'예린 씨, 저도 피해자입니다. 개인적으로 연락하고 싶어요. 같이 대응하면 좋겠습니다.'

작성자는 '정직한붓'이라는 닉네임이었다.

"이 사람 프로필 들어가봤는데, 이메일 주소가 있더라."

윤아가 말했다.

"우리... 연락해볼까?"

"연락해야지. 이 사람이 우리한테 결정적인 증언을 해줄 수도 있어."

하늘은 망설였다. 모르는 사람에게 연락한다는 게 두렵기도 했고, 자신들이 중학생이라는 걸 밝히면 상대가 진지하게 받아들일지도 의문이었다.

"내가 먼저 메일 보낼게. 학교 신문부 명의로."

윤아는 즉석에서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미술계의 불공정 관행에 대해 조사하고 있는 학생 기자입니다. 최예린 작가님의 글을 보고 연락드립니다. 혹시 인터뷰가 가능하실까요? 익명 보장해드립니다.'

메일을 보내고 나서 두 사람은 공원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30분쯤 지났을까, 윤아의 노트북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답장 왔어!"

메일을 열어보니 짧은 답장이 와 있었다.

'학생 기자라니 의외네요. 하지만 이 문제에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 오후 3시에 만날 수 있을까요?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서요.'

윤아가 즉시 답장을 보냈다. 만남이 성사되었다.

오후 3시, 홍대입구역 근처의 조용한 카페. 하늘과 윤아는 구석 자리에 앉아 긴장한 채로 기다렸다.

"저기."

윤아가 입구를 가리켰다. 3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물감 자국이 묻은 청바지, 편한 운동화. 전형적인 작가의 모습이었다.

"혹시... 학생 기자분들?"

여성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네, 안녕하세요. 메일 보낸 서윤아입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조민지라고 합니다."

조민지는 자리에 앉으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중학생?"

"네... 하지만 진지하게 조사하고 있어요."

윤아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조민지는 씁쓸하게 웃었다.

"오히려 좋아요. 어른들은 다들 이 문제를 외면하거든요.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어떤 일을 겪으셨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세요?"

조민지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는 10년째 그림을 그리고 있어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이것저것 하면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죠. 하지만 현실은 녹록하지 않았어요. 전시회 한 번 열려면 수백만 원이 들고, 그림이 팔린다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그때 박민준 갤러리를 만나셨나요?"

하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조민지의 눈이 커졌다.

"어떻게...?"

"저희도 그 갤러리를 조사하고 있어요."

조민지는 한숨을 쉬었다.

"5년 전이었어요. 공모전에서 입선했는데, 박민준 씨가 직접 연락을 해왔어요. '재능이 보인다', '우리 갤러리에서 지원하고 싶다'고 했죠. 처음에는 정말 기뻤어요. 드디어 내 그림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겼다고."

"계약은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 3개월은 좋았어요. 월 200만 원을 지급하고, 그림은 갤러리에서 판매해서 수익을 나누기로 했죠. 실제로 돈도 잘 들어왔어요. 제 그림이 300만 원, 500만 원씩 팔린다고 했어요."

조민지는 잠시 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6개월쯤 지나니까 이상한 거예요. 제가 그린 그림보다 팔렸다는 그림 수가 더 많은 거예요. 물어보니까 '당신 화풍으로 다른 작가가 그린 것도 당신 이름으로 판다'고 하더라고요."

"그게 가능한 거예요?"

"계약서에 있었어요. 제가 제대로 안 읽었던 거죠. '갤러리는 작가의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작가 명의로 작품을 제작 및 판매할 수 있다'는 조항이요."

"그건 거의 사기잖아요!"

윤아가 분개하며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법적으로는 애매해요. 계약서에 서명했으니까요. 게다가 실제로 돈을 받았다는 게 문제예요. '네가 동의하고 받은 거 아니냐'고 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처음에는 참았어요. 돈이 필요했거든요. 부모님이 편찮으셔서 병원비도 들고... 하지만 점점 견딜 수 없었어요. 제 이름으로 팔리는 그림이 제 그림이 아니라는 게 너무 괴로웠어요."

조민지의 눈가가 붉어졌다.

"1년 전에 계약 해지를 요구했어요. 그랬더니 태도가 완전히 바뀌더라고요. '지금까지 투자한 돈 다 갚아라', '계약 위반이니 위약금 내라', 심지어 '업계에서 못 살게 해주겠다'는 협박까지 했어요."

"경찰에 신고는 안 하셨어요?"

"했어요. 하지만 '민사 문제니 알아서 해결하라'고 하더라고요. 변호사도 만나봤지만 소송 비용이 너무 많이 들고, 이길 확률도 장담할 수 없다고 했어요."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세 사람 모두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그런데 왜 저희를 만나주신 거예요?"

하늘이 물었다. 조민지는 쓸쓸하게 웃었다.

"혼자서는 못 싸워요. 하지만 여럿이 모이면 다를 수도 있잖아요. 최예린 작가님도 같은 생각이실 거예요."

"최예린 작가님은... 연락이 되세요?"

"요즘은 연락이 잘 안 돼요. 블로그 글 올린 후에 협박을 많이 받으셨나 봐요. 전화도 잘 안 받으시고..."

윤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저희가 조사한 게 있는데, 혹시 이거 보실 수 있으세요?"

윤아는 어제 갤러리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조민지는 사진을 보더니 깜짝 놀랐다.

"이거... 어떻게 구하셨어요?"

"직접 갤러리에 가서 찍었어요."

"이 그림들... 제가 그린 게 아니에요. 분명히. 근데 제 이름으로 팔리고 있네요."

조민지는 사진을 확대하며 하나하나 살펴보았다.

"붓 터치가 달라요. 색 쓰는 방식도 다르고. 이건 분명 다른 사람이 그린 거예요."

"그럼 누가 그렸을까요?"

조민지는 고개를 저었다.

"모르죠. 박민준은 절대 말 안 해줄 거예요. 하지만..."

조민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몇 년 전에 갤러리 뒷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을 본 적이 있어요. 전시 준비하러 갔는데, 우연히 봤죠.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어요. 수척하고, 물감이 잔뜩 묻은 옷을 입고 있었어요."

하늘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그 사람... 어떻게 생겼어요?"

"키는 중간 정도, 마른 체구, 머리는 약간 긴 편이었고... 왜요?"

하늘은 입술을 깨물었다. 조민지가 묘사한 사람은 아버지와 비슷했다.

"혹시 사진 찍으셨어요?"

"아니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걸 봤을 뿐이에요. 그때는 별생각 없었거든요."

윤아가 하늘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하늘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물었다.

"조민지 작가님, 혹시...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여러 명일 수도 있을까요?"

"당연히 그럴 거예요. 박민준 갤러리에서 취급하는 작가가 10명이 넘어요. 한 사람이 그걸 다 그릴 수는 없죠. 아마 무명 작가들을 여럿 고용해서 분업하고 있을 거예요."

조민지는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이건 하나의 시스템이에요. 조직적인 사기죠. 재능 있지만 가난한 작가들을 싼값에 고용하고, 그들이 그린 그림을 유명 작가 이름으로 비싸게 팔아요. 실제 작가들은 얼굴마담 역할만 하고요."

"그럼 실제 작가들도 공범인 건가요?"

"아니요, 대부분은 피해자예요. 저처럼 속은 거죠. 처음에는 자기 그림이 팔린다고 좋아했다가, 나중에야 진실을 알게 되는 거예요. 그때는 이미 계약에 묶여 있고, 빠져나오기 힘들어요."

하늘은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도 그런 피해자 중 한 명일 것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박민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우리... 이걸 밝혀낼 수 있을까요?"

하늘의 목소리는 떨렸다. 조민지는 하늘의 손을 잡았다.

"쉽지 않을 거예요. 박민준은 머리가 좋아요. 법적으로 빠져나갈 구멍을 다 만들어놨죠. 하지만 포기하면 안 돼요. 이런 일이 계속되면 더 많은 작가들이 피해를 볼 테니까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증거를 모아야 해요. 계약서, 금전 거래 내역, 실제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증언. 그리고 무엇보다..."

조민지는 진지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가 필요해요. 실제로 그림을 그린 사람이 나서서 증언해야 해요."

하늘은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를 설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할까? 아버지는 이 일을 들키고 싶어 하지 않았다. 수치스러워하고 있었다.

"천천히 생각해봐요. 혼자 결정할 일은 아니니까."

조민지가 명함을 건넸다.

"언제든 연락해요. 제가 아는 다른 피해 작가들도 소개해줄게요. 우리 함께 싸워봅시다."

카페를 나서면서, 윤아가 하늘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응... 그냥 생각보다 복잡한 것 같아서."

"우리 할 수 있어. 조금씩 하는 거야."

집으로 가는 길, 하늘은 조민지의 말을 되새겼다. '용기 있는 내부 고발자.'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을까? 아버지의 인생을 위험에 빠뜨리지 않고?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계셨다. 드물게 쉬고 있는 모습이었다.

"하늘아, 어디 갔다 와?"

"친구랑 공부하다가요."

"그래. 저녁은 먹었어?"

"네."

하늘은 아버지 옆에 앉았다. 아버지의 손을 보니 물감이 손톱 밑에 끼어 있었다.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물감. 화가의 손.

"아빠."

"응?"

"아빠는... 행복하세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아버지가 하늘을 돌아보았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

"그냥... 요즘 아빠가 힘들어 보여서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하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빠는 네가 행복하면 행복해. 그걸로 충분해."

하지만 아버지의 눈은 슬펐다. 하늘은 그걸 알았다.

그날 밤, 하늘은 윤아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윤아야, 나 결심했어.

아빠를 설득할 거야.

진실을 밝히는 게 아빠를 위한 일이라고 믿어.

윤아의 답장은 즉시 왔다.

나도 함께할게.

우리 끝까지 가보자.

하늘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제 진짜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눠야 했다. 진실을 털어놓고, 함께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

하늘은 밤새 그 고민을 안고 잠들지 못했다.

5회: 아버지와의 대화

월요일 아침, 하늘은 학교에 가지 않기로 했다. 아니, 정확히는 늦게 가기로 했다. 아버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야 했다.

아버지가 인쇄소에 출근하기 전, 하늘은 식탁에 앉아 기다렸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침밥을 차려놓았다. 밥, 김치찌개, 계란말이. 서툴렀지만 정성을 다했다.

"어? 하늘아, 이게 다 뭐야?"

아버지가 놀란 표정으로 부엌으로 들어왔다.

"아빠 요즘 아침도 제대로 못 드시는 것 같아서요. 같이 먹어요."

"그래... 고맙다."

아버지는 자리에 앉았다. 둘은 조용히 식사를 시작했다.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만 들렸다.

"아빠."

하늘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가 뭘 하고 계신지 알아요."

아버지의 손이 멈췄다. 젓가락을 든 채로 굳어버렸다.

"무슨... 소리니?"

"박민준 갤러리요. 다른 작가님들 그림 그려주시는 거요."

아버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젓가락이 손에서 떨어져 바닥에 떨어졌다.

"너... 어떻게..."

"작업실에서 봤어요. 그리고 갤러리에도 직접 가봤어요. 아빠가 그린 그림들이 다른 작가 이름으로 팔리고 있더라고요."

아버지는 고개를 떨구었다. 어깨가 축 처졌다.

"하늘아..."

"왜 그러세요, 아빠? 왜 아빠 이름으로 그림을 안 파세요?"

아버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강태수라는 이름으로는... 그림이 안 팔려. 20년 동안 그렸지만, 아무도 내 그림을 사지 않았어."

"그래도 이건 잘못된 거잖아요."

"알아. 나도 알아."

아버지의 목소리가 커졌다. 처음 보는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나도 알아! 이게 잘못됐다는 거! 내가 얼마나 수치스러운지! 매일 밤 다른 사람 흉내 내면서 그림 그리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아버지가 벌떡 일어섰다. 눈가가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어떡하니! 너 학원비, 생활비, 집세... 내가 벌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어! 인쇄소 월급으로는 턱도 없고, 내 그림은 안 팔리고!"

"아빠..."

"네가 '미대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정말 기뻤어. 내 딸이 예술을 좋아한다는 게. 하지만 동시에 두려웠어. 미대 학비가 얼마나 많이 드는지 알거든. 입시 학원비만 해도 1년에 천만 원이 넘어."

아버지는 벽에 기대 섰다.

"그때 박민준이 연락해왔어. 5년 전이었지. '당신 실력이면 충분히 할 수 있다'고 했어. 한 작품당 80만 원. 한 달에 세 점만 그리면 240만 원. 인쇄소 월급보다 많았어."

"그래도..."

"처음에는 나도 거절했어.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네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날, 낡은 운동화 신고 온 거 봤어. 다른 애들은 다 새 신발 신고 왔는데."

아버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날 박민준한테 전화했어. '하겠습니다'라고. 그게 시작이었어."

하늘도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고통이, 선택의 무게가 느껴졌다.

"아빠, 이제 그만하세요."

"어떻게 그만해? 지금 그만두면 우리 당장 다음 달 집세도 못 내."

"그래도 이건 범죄예요. 들키면 아빠가 감옥에 갈 수도 있어요."

아버지는 쓴웃음을 지었다.

"들킬 리가 없어. 박민준은 철저해. 계약서도 교묘하게 만들어놨고, 모든 거래는 현금이야. 증거가 남지 않게."

"하지만 피해자들이 있어요. 자기 이름으로 팔리는 그림이 자기가 그린 게 아니라는 걸 아는 작가들이요."

아버지가 하늘을 쳐다봤다.

"너... 얼마나 조사한 거니?"

"피해자 분들을 만났어요. 조민지 작가님이랑. 그분들은 정말 괴로워하고 계세요. 자기 이름이 도용되고 있다고."

아버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머리를 감싸 쥐었다.

"미안하다, 하늘아. 정말 미안해."

"아빠가 미안할 필요 없어요. 아빠도 피해자예요. 박민준이 아빠를 이용하고 있는 거라고요."

"아니야. 나는 돈을 받았어. 내가 선택한 거야."

"아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잖아요! 생활이 어려워서, 나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거잖아요!"

하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버지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아, 넌 이 일에서 손 떼. 아빠 일은 아빠가 알아서 할게."

"싫어요. 못 그만둬요."

"하늘아!"

"아빠가 이렇게 계속 살 순 없어요! 매일 밤 남의 그림 베끼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면서 살 순 없다고요!"

"그럼 어쩌란 말이니! 내가 뭘 할 수 있는데!"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작업실로 들어갔다. 문이 쾅 하고 닫혔다.

하늘은 식탁에 앉아 울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와 크게 싸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한참 후, 작업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 아버지가 나왔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하늘아."

아버지가 하늘 앞에 종이 몇 장을 놓았다. 계약서였다.

"이게 박민준이랑 맺은 계약서야. 읽어봐."

하늘은 떨리는 손으로 계약서를 집어 들었다. 법률 용어로 가득한 문서였지만, 핵심은 이해할 수 있었다.

'을(강태수)은 갑(아트스페이스 민준)이 지정하는 작품을 갑이 제시하는 양식과 기법에 따라 제작한다. 제작된 작품의 모든 권리는 갑에게 귀속되며, 을은 해당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이게... 말이 돼요?"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대. 나는 그냥 '제작자'일 뿐이고, '작가'는 따로 있는 거지. 마치 조각가가 조수를 고용하는 것처럼."

"하지만 실제로는 아빠가 전부 그리시잖아요."

"그게 증명이 안 돼. 작업 과정을 찍은 사진도 없고, 영상도 없어. 박민준은 그런 거 절대 허락 안 해."

하늘은 계약서를 계속 읽었다. 또 다른 조항이 눈에 들어왔다.

'을은 본 계약의 내용을 제3자에게 공개해서는 안 되며, 이를 위반할 시 위약금 5천만 원을 배상해야 한다.'

"5천만 원..."

"그래. 내가 이 사실을 누구한테 말하면, 5천만 원을 물어내야 해. 우리한텐 평생 모아도 없는 돈이지."

하늘은 계약서를 내려놓았다. 박민준은 정말 교묘했다. 법의 허점을 이용해서 완벽한 착취 시스템을 만들어놓았다.

"아빠,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예요."

"없어, 하늘아. 나 같은 사람이 수십 명이야. 다들 입 다물고 있어. 생활비 때문에, 빚 때문에, 가족 때문에. 박민준은 그걸 노리는 거야."

아버지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처음에는 나도 언젠가 이 일에서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어. 돈 좀 모으면, 네 학비 마련하면 그만두려고 했지. 하지만..."

"하지만?"

"점점 깊이 들어가게 돼. 한 번 들어가면 빠져나올 수가 없어. 박민준은 그림값을 제때 안 줘. '다음 달에 준다', '컬렉터가 아직 입금 안 했다' 핑계 대면서. 그러면 나는 계속 그림을 그려야 돼. 밀린 돈 받으려고."

"지금 얼마나 밀렸는데요?"

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1,200만 원."

"뭐라고요?"

"6개월치야. 그림 15점 값. 계속 미루다가 이렇게 됐어."

하늘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는 6개월이나 제대로 된 돈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우리 지금 뭘로 살고 있어요?"

"인쇄소 월급하고... 박민준이 조금씩 주는 '선급금'으로. 한 달에 50만 원 정도. 그걸로 집세 내고, 밥 먹고."

하늘은 주먹을 쥐었다. 이건 단순한 착취가 아니었다. 노예 계약이었다.

"아빠, 이거 노동청에 신고해야 돼요."

"소용없어. 나는 '직원'이 아니라 '프리랜서 계약자'거든. 노동법 적용도 안 돼."

"그럼 경찰은요?"

"뭘 신고해? 사기? 계약서에 다 나와 있는데? 오히려 내가 계약 위반으로 고소당할 수도 있어."

아버지는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하늘아, 아빠가 바보 같지? 이런 함정에 빠진 게."

"아니에요, 아빠."

하늘은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아빠는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우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신 거예요. 잘못한 건 박민준이에요."

"고맙다, 하늘아. 하지만 현실은 변하지 않아."

하늘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아빠, 제가 도와드릴게요."

"네가 뭘 어떻게..."

"친구가 있어요. 윤아라고, 학교 신문부예요. 그리고 조민지 작가님 같은 피해자들도 만났어요. 우리 함께 모으면 뭔가 할 수 있을 거예요."

아버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너까지 이 일에 휘말리게 할 순 없어."

"이미 휘말렸어요. 그리고 나는 아빠 딸이에요. 아빠가 힘들 때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아버지의 눈에서 또 눈물이 흘렀다. 이번에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었다.

"하늘아... 정말 미안해. 네가 이런 걱정을 하게 만들어서."

"미안할 필요 없어요. 대신 도와주세요. 함께 싸워요."

"어떻게?"

"일단 증거를 모아야 해요. 아빠가 그린 그림들, 받지 못한 돈, 박민준과의 대화 녹음... 뭐든지요."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해보자. 하지만 조심해야 해. 박민준은 위험한 사람이야."

"알아요. 조심할게요."

하늘은 아버지를 껴안았다. 아버지도 하늘을 꽉 안았다. 두 사람은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학교 안 가도 돼?"

아버지가 물었다.

"오늘은 좀 늦게 갈래요. 아빠랑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 고맙다."

그날 하늘은 오후가 되어서야 학교에 갔다. 윤아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달려왔다.

"야, 어디 갔었어? 연락도 없이."

"미안. 아빠랑 얘기했어."

"어떻게 됐어?"

"아빠가... 도와주시기로 하셨어. 같이 싸우기로."

윤아는 하늘의 손을 꽉 잡았다.

"잘했어. 진짜 잘했어."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응. 우리 함께 하자."

그날 밤, 하늘은 처음으로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아버지와 비밀을 공유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제는 함께 싸울 수 있었다.

작업실에서는 여전히 물감 냄새가 났다. 하지만 오늘은 그 냄새가 조금 달랐다. 희망의 냄새 같았다.

하늘은 일기장을 펼쳤다.

'오늘 아빠와 진짜 대화를 나눴다. 아빠의 고통을, 선택을, 후회를 들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아빠를 꼭 도와드리겠다고. 박민준 같은 사람들이 더 이상 예술가들을 착취하지 못하게 하겠다고.

나는 아직 중학생이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진실을 밝히는 것. 용기를 내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아빠, 제가 꼭 도와드릴게요.'

일기장을 덮고, 하늘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6회: 증거 수집

다음 날 방과 후, 하늘과 윤아는 조민지 작가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함께였다. 아버지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 나서는 것을 무척 망설였지만, 하늘의 설득 끝에 동의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태수입니다."

아버지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조민지는 따뜻하게 악수를 청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하늘이한테 많이 들었어요.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기라니요... 딸한테 떠밀려서 온 거예요."

아버지가 쓴웃음을 지었다. 네 사람은 조용한 스터디 카페 방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정확히 상황을 파악해야 해요."

윤아가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

"강태수 선생님, 박민준과는 언제부터 일하셨어요?"

"5년 전... 2021년 3월부터였어요."

"계약서는 있으시죠?"

아버지가 가방에서 서류 봉투를 꺼냈다. 계약서 사본과 함께 몇 장의 문서가 더 있었다.

"이건 작업 지시서예요. 박민준이 매번 이메일로 보내주는 거죠. 어떤 그림을 그려야 하는지, 마감은 언제인지."

윤아는 서류들을 꼼꼼히 살펴봤다.

"이거 증거로 쓸 수 있겠는데요. 작업 지시를 받았다는 증거니까."

"하지만 계약서 상으로는 제가 '용역 작업자'예요. 지시를 받는 게 당연하다고 할 수도 있어요."

조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저도 비슷한 계약서를 썼거든요. 법적으로 문제가 없게 만들어놨어요."

"그럼 우리가 증명해야 하는 건 뭐죠?"

하늘이 물었다.

"두 가지예요."

조민지가 손가락을 펴며 설명했다.

"첫째, 실제로 그림을 그린 사람과 작가명이 다르다는 것. 둘째, 박민준이 의도적으로 소비자를 기만했다는 것. 이 두 가지를 증명하면 저작권 침해와 사기죄를 적용할 수 있어요."

"저작권은 누구한테 있는 거예요?"

"복잡해요. 계약서상으로는 '작품의 모든 권리가 갤러리에 귀속'된다고 되어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 창작한 사람의 저작인격권은 포기할 수 없어요. 이게 법적 쟁점이 될 거예요."

윤아가 메모를 하며 물었다.

"그럼 우리가 모아야 할 증거는?"

"일단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증거요. 사진, 영상, 밑그림 스케치... 강태수 선생님이 실제로 그림을 그렸다는 걸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이요."

아버지가 난처한 표情을 지었다.

"그런 건 안 남겼어요. 박민준이 작업 과정은 절대 사진 찍지 말라고 했거든요."

"지금부터라도 찍으세요. 다음에 그릴 그림부터요."

"하지만 들키면..."

"들키지 않게 조심하면 돼요. 작업실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하거나, 스마트폰으로 틈틈이 찍거나."

아버지는 불안해 보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금전 거래 내역도 중요해요."

조민지가 덧붙였다.

"박민준이 돈을 얼마나 주기로 했고, 실제로는 얼마를 줬는지. 밀린 돈이 얼마인지. 이걸 정확히 정리해야 해요."

"대부분 현금으로 받았어요. 통장으로 받은 건 처음 몇 번뿐이고."

"현금 영수증이나 받은 메모 같은 거라도 있어요?"

아버지가 가방을 뒤지더니 구겨진 종이 몇 장을 꺼냈다.

"이런 거요. 돈 받을 때마다 박민준이 써준 간이 영수증이에요."

윤아가 그것들을 펴봤다. '작업비', '선급금', '부분 정산'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금액도 제각각이었다.

"이것도 증거가 될 수 있어요. 체계적이지 않은 지급 방식이 오히려 부당함을 보여주니까요."

"그리고..."

하늘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른 분들도 찾아야 해요. 아빠처럼 박민준한테 고용된 다른 작가님들이요."

아버지가 고개를 들었다.

"그 사람들을 어떻게 찾아요?"

"혹시 아시는 분 없으세요? 같이 일하는 사람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한 사람... 알긴 해요. 박민준 갤러리에 납품할 때 가끔 마주쳤어요. 나이는 저보다 좀 어리고, 한 40대 초반? 이름은 모르지만."

"그 사람한테 연락할 방법은?"

"없어요. 그냥 스쳐 지나가면서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에요. 서로 말도 안 했어요."

조민지가 끼어들었다.

"박민준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을 거예요. 작업자들끼리 연결되지 못하게. 서로 누군지 모르게."

"그럼 어떻게 찾아요?"

윤아가 턱을 괴며 생각했다.

"갤러리 주변을 잠복해야 할 것 같은데요. 납품하러 오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거죠."

"위험하지 않을까?"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심하면 돼요. 우리 중학생들이잖아요. 누가 의심하겠어요?"

하늘이 자신 있게 말했다. 아버지는 여전히 불안해 보였다.

"그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있어요."

조민지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최예린 작가님이요. 블로그 글 올린 후로 연락이 안 돼요. 전화도 안 받고, 메시지도 읽지 않고."

"무슨 일이 있는 건가요?"

"협박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아요. 박민준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거나, 아니면..."

조민지는 말을 멈췄다. 하지만 모두 그 뜻을 알았다. 더 심각한 위협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

"우리가 찾아가볼까요?"

하늘이 제안했다.

"주소를 아세요?"

"블로그 프로필에 작업실 동네가 나와 있어요. 찾을 수는 있을 거예요."

"위험할 수 있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만약 박민준이 감시하고 있다면..."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죠. 혹시라도 예린 작가님이 위험에 처했다면 도와드려야 해요."

윤아가 노트북에 뭔가를 입력했다.

"작업실이 성수동이라고 나오네요. 이번 주말에 가볼까요?"

모두가 동의했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면서, 조민지가 하늘을 따로 불렀다.

"하늘아, 너 정말 대단해."

"네?"

"네 나이에 이런 일을 하다니. 보통 용기가 아니야."

"저는... 그냥 아빠를 도와드리고 싶을 뿐이에요."

조민지는 하늘의 어깨를 두드렸다.

"네 아버지는 좋은 딸을 두셨어. 그리고 곧 자유로워지실 거야. 우리가 도울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버지가 하늘의 손을 잡았다.

"하늘아, 고맙다."

"왜요?"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줘서. 나는... 네가 이런 힘든 일에 휘말리는 게 싫지만, 동시에 네가 자랑스러워."

"아빠."

"너는 이미 훌륭한 사람이야. 앞으로 어떤 예술가가 되든, 네 마음만은 절대 잃지 마."

하늘은 아버지를 꼭 껴안았다.

그날 밤, 하늘과 윤아는 메신저로 작전을 짰다.

토요일에 성수동 가자.

최예린 작가 찾는 거?

응. 그리고 갤러리 주변도 한 번 더 정찰하자.

카메라 챙겨야겠다. 증거 사진 찍으려면.

그리고 아빠 작업실에 몰래 카메라도 설치해야 해.

어떻게?

내일 전자상가 가서 작은 카메라 살게.

돈은?

용돈 모은 거 있어. 이럴 때 쓰라고 모은 거지 뭐.

윤아는 잠시 후 답장을 보냈다.

하늘아, 우리 진짜 잘할 수 있을까?

해야지. 다른 선택이 없어.

무섭지 않아?

무서워. 근데 아빠가 더 무서워하시는 것 같아. 그래서 내가 강해져야 해.

나도 도울게. 끝까지.

고마워, 윤아야.

다음 날 방과 후, 하늘은 용산 전자상가로 갔다. 조그만 액션캠을 하나 샀다. 25만 원. 하늘이 2년간 모은 용돈의 전부였다.

집에 와서 아버지께 보여드렸다.

"이거... 뭐 하려고?"

"작업실에 설치할 거예요. 아빠가 그림 그리는 과정을 찍는 거죠."

"하늘아, 이거 비쌌을 텐데..."

"괜찮아요. 필요한 거니까."

아버지는 카메라를 들여다보았다.

"이걸 어디 설치하지?"

"책장 위에 두면 될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둘은 함께 작업실로 들어가 카메라를 설치했다. 책과 잡동사니 사이에 숨겨두니 눈에 잘 띄지 않았다.

"내일부터 새 그림 작업 시작해요?"

"응. 박민준이 오늘 메일 보냈어. 이준호 작 '봄의 시작'을 그리라고."

"그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찍혀요. 이게 증거가 되는 거예요."

아버지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몰래 찍는 게... 떳떳하지는 않네."

"아빠가 떳떳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박민준이 떳떇하지 않은 거죠."

"그래도..."

"아빠, 이건 아빠를 지키기 위한 거예요. 나중에 문제가 생겼을 때 아빠가 억울하게 당하지 않으려면 증거가 필요해요."

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해보자."

그날 밤부터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캔버스 앞에 앉아 밑그림을 그리는 모습. 사진 자료를 참고하며 붓질하는 모습. 밤늦게까지 작업하는 모습.

모든 것이 기록되었다.

토요일 아침, 하늘과 윤아는 성수동으로 향했다. 최예린 작가의 작업실을 찾기 위해서였다.

"블로그에 올라온 사진으로 추정하면 이 근처일 거야."

윤아가 스마트폰 지도를 보며 말했다.

"건물 외관이 빨간 벽돌이고, 카페 2층이라고 했어."

두 사람은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성수동은 작은 공장과 카페, 작업실이 혼재된 독특한 동네였다.

"저기!"

하늘이 한 건물을 가리켰다. 빨간 벽돌 건물 1층에 카페가 있었다. 2층 창문에는 '최예린 작업실'이라는 작은 간판이 보였다.

"찾았다!"

두 사람은 건물로 들어갔다. 좁은 계단을 올라가니 낡은 철문이 나왔다. 문에는 최예린이라는 이름표가 붙어 있었다.

똑똑똑.

하늘이 문을 두드렸다. 하지만 아무 대답이 없었다.

"최예린 작가님! 계세요?"

윤아도 소리쳤다. 여전히 조용했다.

"휴대폰으로 전화해봐."

하늘이 조민지에게 받은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문 안쪽에서 휴대폰 벨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안에 있었다.

"작가님! 저희 해코지하러 온 사람들 아니에요! 도와드리려고 왔어요!"

하늘이 문에 대고 외쳤다.

한참의 침묵 후, 문이 조금 열렸다. 체인이 걸린 채로.

문틈 사이로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핏기 없는 얼굴, 피곤에 찌든 눈.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였다.

"저희는 학생이에요. 조민지 작가님 소개로 왔어요. 박민준 갤러리 문제 때문에..."

최예린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급하게 문을 열었다.

"빨리 들어와요. 누가 볼까 봐."

두 사람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갔다. 최예린이 문을 닫고 체인을 다시 걸었다.

작업실 안은 어두웠다. 커튼이 다 쳐져 있었고, 그림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작가님?"

최예린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박민준이... 저를 고소했어요."

"뭐라고요?"

"명예훼손이래요. 제가 블로그에 쓴 글 때문에. 2억 원 배상하라고..."

하늘과 윤아는 숨이 막혔다.

박민준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7회: 협박과 공포

최예린은 떨리는 손으로 테이블 위의 서류를 집어 들었다. 법무법인 이름이 박힌 고급 용지였다.

"일주일 전에 받았어요. 내용증명이라고..."

윤아가 서류를 받아 읽었다. 법률 용어로 빼곡했지만 핵심은 명확했다. '허위사실 유포에 의한 명예훼손', '업무방해', '손해배상 청구 2억 원'.

"이게... 가능한 거예요?"

"변호사를 만나봤어요. 실제로 소송을 걸 수도 있대요. 제 블로그 글이 '증거 없는 일방적 주장'이라고 하면서요."

최예린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는 진실을 썼을 뿐인데... 제가 겪은 일을 말했을 뿐인데..."

"증거가 없으셨어요?"

"계약서는 있지만, 애매하게 쓰여 있어요. 그리고 실제로 제 그림이 아닌 걸 어떻게 증명해요? 박민준은 '작가님 화풍을 학습한 조수가 도왔다'고 주장하면 그만이에요."

하늘은 최예린의 작업실을 둘러봤다. 벽에 걸린 그림들, 곳곳에 쌓인 캔버스들. 모두 최예린의 손길이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섬세한 색감, 독특한 붓 터치.

"작가님 그림 정말 아름다워요."

최예린이 쓸쓸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어요. 박민준한테 고소당할까 봐, 또 무슨 일이 생길까 봐... 매일 밤 잠도 못 자요."

"전화도 많이 오셨어요?"

"하루에 수십 통씩요. 모르는 번호들에서. 받으면 아무 말도 안 하고 끊어요. 그냥... 겁을 주려는 거죠."

윤아가 노트북을 열었다.

"작가님, 저희가 증거를 모으고 있어요. 박민준의 부정을 밝힐 수 있는 증거요."

"무슨 증거요?"

"실제로 그림을 그린 사람들의 증언, 작업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들. 그리고..."

윤아는 하늘을 돌아봤다. 하늘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을 이었다.

"하늘이 아버지가 박민준 갤러리에서 일하셨어요. 작가님 그림도 그리셨을 거예요."

최예린의 눈이 커졌다.

"정말요?"

"네. 아버지가 직접 증언해주시기로 하셨어요.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 얼마를 받았는지, 모든 걸 말씀하시겠대요."

최예린은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눈물이 더 흘렀다.

"그럼... 제가 거짓말한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나요?"

"그렇게 만들 거예요. 하지만 작가님도 도와주셔야 해요."

"제가 뭘 할 수 있는데요..."

"작가님이 받은 협박 내역, 통화 기록, 박민준과 주고받은 메시지들. 모두 증거가 돼요."

최예린은 잠시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여기 다 있어요. 내용증명 받은 후로 오는 협박 전화들, 문자 메시지들..."

휴대폰 화면에는 수십 개의 부재중 전화가 표시되어 있었다. 모두 모르는 번호들이었다. 문자 메시지도 열어보니 섬뜩했다.

'입 닥치고 있는 게 건강에 좋을 거야.'

'가족들 조심하시길.'

'뭘 믿고 그렇게 나대는지 모르겠네.'

"이건... 완전히 협박이잖아요!"

윤아가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했어요. 근데 '모르는 번호니까 누가 보냈는지 확인이 안 된다', '직접적인 해를 가하지 않았으니 처벌하기 어렵다'고 하더라고요."

최예린은 고개를 떨구었다.

"저는... 이제 너무 무서워요. 블로그 글도 지웠어요. SNS 계정도 다 비공개로 돌렸고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어요."

"하지만 작가님이 포기하시면 박민준은 계속 이런 짓을 할 거예요."

하늘이 진지하게 말했다.

"다른 작가들한테도, 저희 아빠 같은 사람들한테도요. 누군가는 용기를 내야 해요."

"나도 알아요... 하지만 무서워요. 정말로 소송을 걸면 어떡해요? 2억이라는 돈, 저한텐 평생 모아도 없는 돈이에요."

최예린의 목소리는 절박했다.

그때 윤아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작가님, 변호사 선임은 하셨어요?"

"돈이 없어서... 무료 법률 상담만 받았어요."

"법률구조공단은요? 거기서 무료 변호를 지원해줄 수도 있어요."

"신청은 해봤는데... 대기자가 너무 많대요. 몇 달은 기다려야 한대요."

"그럼 언론에 알리는 건 어때요?"

하늘이 제안했다.

"기자들한테 연락해서 이 사실을 알리는 거예요. 박민준이 작가들을 협박하고 있다고."

최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더 심해질 거예요. 박민준은 그럴 사람이에요. 실제로 소송을 걸 거고, 제 인생은 끝날 거예요."

침묵이 흘렀다. 세 사람 모두 무력감을 느꼈다. 박민준은 완벽하게 시스템을 만들어놨다. 법적으로 빠져나갈 구멍도 있고, 피해자들을 침묵시킬 방법도 알고 있었다.

"작가님."

하늘이 최예린의 손을 잡았다.

"저희가 도와드릴게요. 혼자가 아니에요. 조민지 작가님도 있고, 저희 아버지도 계시고,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일 거예요."

"정말... 이길 수 있을까요?"

"해봐야죠. 안 하면 영원히 모르잖아요."

최예린은 한참을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해볼게요.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박민준은 위험한 사람이에요. 여러분도 표적이 될 수 있어요."

"저희 중학생이에요. 설마 중학생들한테까지 뭘 하겠어요?"

윤아가 웃으며 말했지만, 사실은 그녀도 두려웠다.

작업실을 나서면서, 하늘은 뒤를 돌아봤다. 최예린이 문 앞에 서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안과 희망이 섞인 표정이었다.

"우리 진짜 할 수 있을까?"

윤아가 조용히 물었다.

"해야지. 이미 시작했잖아."

두 사람은 근처 카페로 가서 오늘 모은 정보를 정리했다.

"협박 문자, 내용증명, 통화 기록... 이것들 다 증거가 될 수 있어."

윤아가 노트북에 파일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박민준이 직접 보낸 게 아니라는 거야. 다 모르는 번호들이잖아."

"추적은 못 하나?"

"경찰이 수사하면 가능하겠지. 하지만 경찰이 움직이려면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하늘은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가 직접 잠복해서 증거를 잡는 건 어때?"

"무슨?"

"갤러리 주변을 감시하는 거야. 아빠 말고 다른 작업자들도 찾고, 박민준이 뭘 하는지도 관찰하고."

"그거 위험하지 않아?"

"조심하면 돼. 우리 그냥 동네 구경하는 학생들처럼 보이면 되잖아."

윤아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다음 주말에 해보자. 갤러리 근처에서 하루 종일 관찰하는 거야."

두 사람이 계획을 짜고 있을 때, 하늘의 휴대폰이 울렸다. 아버지였다.

"여보세요?"

"하늘아, 어디야? 혹시 최예린 작가 만났니?"

"네, 지금 막 만나고 나왔어요. 왜요?"

"조민지 작가한테 연락 왔어. 박민준이... 나한테도 연락했대."

하늘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요?"

"오늘 오후에 갤러리로 오라는 메시지가 왔어.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아빠, 가시면 안 돼요!"

"나도 알아. 하지만 안 가면 의심할 거야. 뭔가 눈치챈 것 같아."

"그럼 어떡해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했다.

"가야 할 것 같아. 하지만 녹음기를 가져갈게.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녹음해서 증거로 남기는 거야."

"너무 위험해요!"

"괜찮아. 아빠 믿어. 조심할게."

전화를 끊고, 하늘은 윤아를 봤다.

"큰일이야. 아빠가 박민준한테 불려가셨어."

"뭐? 왜?"

"모르겠어. 근데 분명 좋은 일은 아닐 거야."

윤아는 재빨리 노트북을 닫았다.

"우리도 가자."

"어디?"

"갤러리로. 멀리서라도 지켜봐야지. 혹시 모르잖아."

두 사람은 서둘러 강남으로 향했다. 지하철 안에서 하늘은 계속 아버지 걱정이 됐다. 혹시 박민준이 폭력을 쓰지는 않을까? 아니면 더 큰 협박을 하지는 않을까?

갤러리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였다. 건물 맞은편 카페에 자리를 잡고 창가로 갤러리 입구를 지켜봤다.

"저기!"

윤아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버지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깨가 축 처진 것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아빠..."

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무력한 자신이 싫었다. 그저 여기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게.

30분이 지났다. 아버지는 나오지 않았다.

1시간이 지났다. 여전히 나오지 않았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윤아가 불안해하며 말했다.

"전화해볼까?"

하늘이 휴대폰을 꺼내려는 순간, 갤러리 문이 열렸다.

아버지가 나왔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박민준이 어깨에 팔을 두르고 함께 나왔다. 마치 친한 친구처럼.

두 사람은 잠시 대화를 나누다가 악수를 했다. 박민준은 웃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박민준이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고, 아버지는 터벅터벅 걸어갔다. 하늘과 윤아는 서둘러 카페를 나와 아버지를 뒤쫓았다.

"아빠!"

아버지가 돌아봤다. 얼굴이 창백했다.

"하늘아... 너희 왜 여기 있어?"

"걱정돼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아버지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서 얘기하면 안 돼. 일단 집으로 가자."

세 사람은 말없이 지하철을 탔다. 차 안에서도 아버지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얼굴에는 공포와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집에 도착해서, 거실에 앉자마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박민준이... 알고 있어."

"뭘요?"

"우리가 뭔가 꾸미고 있다는 걸. 증거를 모으고 있다는 걸."

하늘과 윤아는 얼어붙었다.

"어떻게요?"

"모르겠어. 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어. '요즘 이상한 학생들이 갤러리 주변을 배회한다더라', '최예린 작가가 수상한 사람들을 만났다더라' 이런 식으로 말하더라고."

아버지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경고했어. '계약을 잘 지키는 게 서로에게 좋다',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지 말라'고."

"협박이네요."

"협박이지. 하지만 증거는 안 남기고. 전부 빙 돌려서 말해."

아버지는 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냈다.

"그래도 녹음은 했어. 들어봐."

녹음 파일을 재생했다. 박민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 선생님, 우리 오랫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잖아요. 앞으로도 그러면 좋겠어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관계 말이에요."

"...네."

"요즘 미술계가 시끄러워요. 이상한 소문들이 도는데, 강 선생님은 그런 거 신경 쓰지 마세요. 우리는 우리 할 일만 하면 돼요."

"무슨 소문인데요?"

"아,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일부 작가들이 갤러리에 불만이 있나 봐요. 하지만 그건 그 사람들 문제고, 우리랑은 상관없죠."

"..."

"강 선생님 따님, 하늘이라고 했나요? 중학교 3학년이죠? 내년에 고등학교 가는데, 미대 준비한다고 들었어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어떻게 그걸..."

"아,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관심이 많아서요. 재능 있는 학생들한테. 혹시 필요하면 제가 좋은 학원도 소개해드릴 수 있어요. 미대 입시는 돈도 많이 들잖아요."

녹음은 거기서 끝났다.

하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박민준은 자신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름까지.

"이건... 완전히 협박이잖아요!"

윤아가 분노에 차서 말했다.

"맞아. 하지만 직접적으로 위협한 건 아니야. '도와주겠다'는 말만 했으니까. 법적으로 문제 삼기 어려워."

아버지는 하늘을 똑바로 쳐다봤다.

"하늘아, 이제 그만해야 할 것 같아. 너한테까지 위험이 미치면 안 돼."

"싫어요."

"하늘아!"

"아빠, 지금 포기하면 박민준이 이기는 거예요. 그 사람은 우리가 겁먹고 물러나길 바라는 거라고요."

"하지만 네 안전이..."

"저 괜찮아요. 아빠가 더 위험하잖아요. 제가 도와드려야죠."

아버지와 하늘은 한참을 서로를 바라봤다.

결국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너 정말 고집 세다. 누굴 닮았는지..."

"아빠 닮았죠."

윤아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럼 우리 더 조심하면서 계속하는 거예요?"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절대, 절대 위험한 일은 하지 마. 약속해."

"약속할게요."

그날 밤, 하늘은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박민준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누구를 통해서?

그리고 자신의 이름까지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우리 중에 박민준과 연결된 사람이 있는 걸까?'

불안한 생각이 스쳤지만, 하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조민지 작가님도, 최예린 작가님도 절대 그런 분들이 아니야.'

하지만 그렇다면 박민준은 어떻게 알았을까?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부터는 정말 조심해야 한다는 것.

적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8회: 내부의 적

다음 날 월요일 아침, 하늘은 학교에 가기 전 아버지의 작업실에 들렀다. 지난 며칠간 녹화된 영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아빠, 영상 좀 볼게요."

"그래, 메모리 카드 빼서 봐."

하늘은 작은 카메라에서 메모리 카드를 꺼내 노트북에 연결했다. 지난 주말 동안 찍힌 영상이 재생되었다.

아버지가 캔버스 앞에 앉아 그림을 그리는 모습. 밑그림을 그리고, 색을 칠하고, 디테일을 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이거면 충분해요. 아빠가 직접 그렸다는 명백한 증거예요."

"하지만 박민준은 '내가 시킨 대로 그렸을 뿐'이라고 할 거야."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아요."

하늘은 파일을 복사해서 USB에 저장했다. 윤아에게도 한 부 주기로 했다. 증거는 여러 곳에 보관하는 게 안전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윤아가 심각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아, 큰일났어."

"왜? 무슨 일인데?"

"조민지 작가님한테 연락 왔어. 최예린 작가가..."

윤아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하늘을 옥상으로 끌고 갔다.

"최예린 작가가 어떻게 됐는데?"

"블로그에 사과문을 올렸어. 그리고 이전 글들을 전부 거짓이었다고 했어."

"뭐라고?"

윤아는 스마트폰으로 최예린의 블로그를 보여주었다. 새로 올라온 글이 있었다.

'사과의 말씀

저는 지난 몇 달간 아트스페이스 민준 갤러리에 대해 사실과 다른 내용을 게시하여 갤러리와 관장님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저의 개인적인 오해와 감정적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며, 사실과 전혀 다릅니다.

박민준 관장님과 갤러리 측은 저에게 최선을 다해주셨고, 모든 계약 조건을 성실히 이행하셨습니다. 제가 올린 글로 인해 피해를 입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겠으며, SNS 활동도 당분간 자제하겠습니다.

최예린 드림'

하늘은 글을 읽으며 주먹을 쥐었다.

"이건... 강요당한 거잖아."

"당연히 그렇겠지. 박민준이 협박했을 거야. 소송 취하해주는 대신 사과문 올리라고."

"어제만 해도 우리랑 함께 싸우기로 했는데..."

"무서웠나 봐. 2억 원 소송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잖아."

하늘은 씁쓸했다. 최예린을 탓할 수 없었다. 그녀도 피해자였고, 생존을 위해 선택한 것이었다.

"조민지 작가님은 뭐래?"

"실망했지만 이해한대. 대신 우리가 더 조심해야 한다고. 박민준이 공격적으로 나오고 있으니까."

수업 시간 내내 하늘은 집중할 수 없었다.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최예린은 굴복했고, 박민준은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어떻게 우리 정보를 알았을까?'

하늘은 계속 그 의문을 되짚었다. 박민준이 자신의 이름과 학년을 아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누군가 정보를 흘린 것이다.

점심시간, 하늘과 윤아는 도서관 구석에 모여 대화를 나눴다.

"생각해봤는데 말이야."

윤아가 조용히 말했다.

"박민준이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가 몇 가지 있어."

"뭔데?"

"첫째, 우리를 미행했을 수도 있어. 갤러리 갔을 때나 최예린 작가 만났을 때."

"그럴 수도 있겠네."

"둘째, CCTV. 갤러리 주변에 CCTV가 많잖아. 우리 얼굴이 찍혔을 거고, 거기서 추적했을 수도 있어."

"그것도 가능성 있어."

"그리고 셋째..."

윤아는 말을 멈췄다. 하늘을 똑바로 쳐다봤다.

"우리 중에 정보를 흘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

"무슨 소리야? 우리가 누군데? 나, 너, 아빠, 조민지 작가님, 최예린 작가님... 이 중에 누가 박민준 편이라는 거야?"

"나도 믿고 싶지 않아. 하지만 가능성은 열어둬야지."

하늘은 불쾌했다. 하지만 윤아 말도 일리가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

"일단 정보 공유를 최소화하자. 중요한 건 너랑 나만 알고, 필요할 때만 다른 사람들한테 알리는 거야."

"아빠한테도?"

"아빠는... 괜찮을 것 같은데. 하지만 조민지 작가나 다른 사람들한테는 조금씩만 얘기하자."

하늘은 마음이 무거웠다. 함께 싸우기로 한 사람들을 의심해야 한다니.

방과 후, 두 사람은 계획대로 갤러리 주변 정찰을 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조심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다른 동네 학생처럼 위장했다.

갤러리 맞은편 공원 벤치에 앉아 관찰을 시작했다.

"저기."

윤아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한 남자가 갤러리 뒷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40대쯤 되어 보이는, 수척한 체구의 남자. 큰 가방을 들고 있었다.

"작품 납품하러 온 것 같은데?"

"사진 찍어."

윤아가 스마트폰으로 멀리서 사진을 찍었다. 남자의 뒷모습만 간신히 찍혔다.

30분쯤 지나서 남자가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가방이 비어 보였다. 남자는 주변을 경계하듯 두리번거리더니 빠르게 걸어갔다.

"뒤쫓아볼까?"

"아니, 너무 위험해. 대신 다음에 또 오면 그때 접근하자."

두 시간 동안 관찰한 결과, 비슷한 사람이 두 명 더 왔다. 모두 뒷문으로 들어가서 짧은 시간 머물다 나왔다.

"확실히 수상해. 일반 방문객들은 앞문으로 들어가는데, 이 사람들은 전부 뒷문으로 가."

"작품 납품하는 사람들일 거야. 아빠처럼."

"그럼 이 사람들도 피해자일 수 있어. 찾아야 해."

하지만 어떻게? 말도 못 걸고, 이름도 모르는데.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은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혹시 박민준 갤러리에 납품하는 다른 사람들 연락처 같은 거 없어요?"

"없어. 박민준이 일부러 우리끼리 연락 못 하게 해. 왜?"

"오늘 갤러리에서 몇 명 봤거든요. 그 사람들이랑 연대하면 좋을 것 같아서요."

"어려울 거야. 다들 겁먹고 있을 테니까."

전화를 끊고, 하늘은 한숨을 쉬었다.

"벽에 부딪힌 것 같아."

윤아가 하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직 포기하긴 일러.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그날 밤, 하늘은 인터넷을 뒤지다가 흥미로운 게시글을 발견했다. 한 미술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이었다.

'박민준 갤러리에서 일해본 사람?

나만 이상한 거 느꼈나? 그 갤러리 뭔가 수상해. 계약 조건도 이상하고, 작품 판매 방식도 불투명하고. 혹시 나처럼 느낀 사람 있으면 얘기 좀 나눠봤으면.'

글은 익명으로 올라와 있었고, 3일 전에 작성되었다. 댓글은 몇 개 없었다.

'저도 그렇게 느꼈어요. 근데 말하기 무섭더라고요.'

'혹시 계약 위반 아니에요? 조심하세요.'

'뭘 몰라서 그러시네. 미술계가 원래 그래요.'

하늘은 글쓴이에게 쪽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저도 박민준 갤러리 문제를 조사하고 있습니다. 혹시 직접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답장이 올까? 하늘은 기대 반 걱정 반으로 화면을 지켜봤다.

한 시간쯤 지나서 답장이 왔다.

'누구세요? 왜 조사하는 건데요?'

하늘은 신중하게 답장을 썼다.

'제 아버지가 그 갤러리에서 일하셨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고 계셔서 도우려고 합니다. 혹시 비슷한 경험 하신 분이라면 함께 이야기 나눴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답장이 빨리 왔다.

'조심하세요. 박민준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저도 피해자 중 한 명이지만, 지금은 말할 수 없어요. 협박받고 있거든요.'

'저희도 같은 상황입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혼자보다 여럿이 모이면 이길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잠시 답장이 없다가, 긴 메시지가 왔다.

'당신 용기는 대단하지만, 현실을 모르는 것 같네요. 박민준은 단순한 갤러리 관장이 아닙니다. 그 뒤에 더 큰 조직이 있어요. 미술품 유통, 세금 포탈, 심지어 검은 돈 세탁까지. 건드리면 다칠 수 있습니다.'

하늘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세금 포탈? 돈 세탁?

'증거가 있으신가요?'

'없어요. 다 추측일 뿐이에요. 하지만 제가 일하면서 느낀 건, 이게 단순한 사기가 아니라는 거예요. 훨씬 더 큰 시스템이에요.'

'그럼 어떡해야 하나요?'

'떠나세요. 당신 아버지도 그만두게 하고, 당신도 손 떼세요. 이건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하늘은 키보드 앞에서 망설였다. 뭐라고 답해야 할까?

결국 이렇게 썼다.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조언 감사합니다. 조심하겠습니다.'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하늘은 노트북을 덮고 침대에 누웠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박민준 뒤에 더 큰 조직이 있다? 그게 사실이라면 자신들이 상대하는 건 단순한 사기꾼이 아니라 범죄 조직이었다.

'그래도 포기할 순 없어.'

하늘은 이불을 덮으며 생각했다.

'아빠를 위해서, 조민지 작가님을 위해서, 최예린 작가님을 위해서. 그리고 앞으로 피해받을 수많은 예술가들을 위해서.'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윤아에게 어젯밤 대화 내용을 전했다.

"더 큰 조직이라고?"

"응. 단순한 위작 판매가 아니라, 그걸 이용한 돈 세탁일 수도 있대."

윤아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우리가 상대하는 건 조폭 수준이라는 거네."

"그렇게까지는..."

"하늘아, 이거 경찰한테 넘겨야 하는 거 아니야?"

"증거가 없잖아. 우리가 모은 것도 아직 부족하고."

"그래도 위험해."

바로 그때, 하늘의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강하늘 학생이죠?"

남자의 목소리였다. 낮고 차가운 음성.

"누구세요?"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당신이 지금 위험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거죠."

하늘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박민준 갤러리 조사하는 거 그만두세요. 당신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당신 자신을 위해서."

"당신이 누군데..."

"경고는 한 번뿐입니다. 다음에는 진짜 다칠 수 있어요."

전화가 끊어졌다.

하늘은 손이 떨려서 휴대폰을 제대로 쥘 수도 없었다.

"무슨 전화였어?"

윤아가 물었다.

"협박... 전화였어."

"뭐라고?"

하늘은 윤아에게 통화 내용을 전했다. 윤아의 얼굴도 창백해졌다.

"이거... 진짜 위험한데?"

"응."

"경찰한테 신고해야 해."

"증거가 뭐가 있어? 모르는 번호에서 온 전화 한 통?"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공포가 엄습했다.

"그래도 계속할 거야?"

윤아가 물었다.

하늘은 떨리는 손을 꽉 쥐었다.

"해야지. 지금 그만두면 그들이 이기는 거야."

"확실해?"

"응."

하지만 하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이제 진짜 두려움이 시작되었다.

보이지 않는 적이 그들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은 가까이에 있었다.

너무 가까이.이어서 써줘

9회: 균열과 의심

협박 전화를 받은 후, 하늘은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작은 소리에도 깜짝깜짝 놀라고, 창밖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감시하는 것만 같았다.

"하늘아, 괜찮아?"

아침 식사 때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하늘의 다크서클이 짙어진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응, 그냥 좀 못 잤어."

"혹시 무슨 일 있어?"

하늘은 망설였다. 협박 전화 이야기를 하면 아버지는 당장 모든 걸 그만두자고 할 것이다. 하지만 숨길 수도 없었다.

"아빠... 어제 전화 왔어요."

"무슨 전화?"

하늘이 협박 전화 내용을 전하자, 아버지의 얼굴이 굳었다.

"그만둬야 해. 지금 당장."

"아빠..."

"안 돼! 네 안전이 가장 중요해. 그림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아버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 보는 강한 어조였다.

"하지만 지금 그만두면..."

"그만두는 게 맞아. 나는... 나는 이렇게 살아도 돼. 20년을 이렇게 살았는데 앞으로도 그럴 수 있어. 하지만 네가 다치는 건 절대 안 돼."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미안하다, 하늘아. 아빠가 잘못했어. 애초에 이런 일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어."

"아빠 잘못이 아니에요."

"아니야, 내 잘못이 맞아. 내가 더 열심히 일했으면, 내 그림이 팔렸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하늘은 아버지를 껴안았다.

"아빠, 이건 시스템의 잘못이에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구조가 잘못된 거예요."

"그래도..."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해봐요. 제가 조심할게요."

아버지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한숨을 쉬었다.

"너 정말 고집 세다."

"아빠 닮았다니까요."

학교에 가는 길, 하늘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정말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아니, 착각일까?

교실에 들어서자 윤아가 창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아, 나도 전화 받았어."

"뭐?"

"어젯밤에. 너랑 똑같은 전화. '조사 그만두라'고."

두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대화를 나눴다.

"이제 우리 둘 다 타겟이 된 거야."

윤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어?"

"못 했어. 말하면 당장 그만두라고 할 거잖아."

"나도..."

두 사람은 난간에 기대 섰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체육 수업 중인 학생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평범한 일상. 저들은 이런 걱정 없이 살고 있을 것이다.

"하늘아, 솔직히 말해. 무섭지 않아?"

"무서워. 너무 무서워."

"그럼..."

"하지만 그만둘 순 없어. 지금 그만두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거잖아."

윤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 어젯밤에 생각했어. 우리가 정보를 공유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조민지 작가님이랑 최예린 작가님?"

"응. 그리고 생각해봤어. 최예린 작가가 갑자기 사과문 올린 거."

"그건 협박당해서 그런 거잖아."

"그렇게 보일 수도 있지. 하지만... 만약 최예린 작가가 처음부터 박민준 편이었다면?"

하늘은 깜짝 놀라 윤아를 쳐다봤다.

"무슨 소리야? 그분도 피해자라고."

"피해자인 척하는 거일 수도 있어. 우리한테 접근해서 정보를 캐내고, 박민준한테 넘기는 거지."

"그럴 리 없어. 우리 만났을 때 진짜 무서워하셨어. 협박 문자도 보여주셨고."

"그것도 연기일 수 있어."

하늘은 고개를 저었다.

"윤아야, 우리 지금 너무 예민해진 거 아니야? 모든 사람을 의심하고 있잖아."

"그래도 가능성은 열어둬야 해. 우리 정보가 새나가고 있다는 건 확실하잖아."

"조민지 작가님일 수도 있다는 거야?"

윤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답이었다.

"나는 믿고 싶어. 그분들을."

"나도 그러고 싶어. 하지만 우리 안전이 걸린 문제야."

점심시간, 하늘은 혼자 도서관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윤아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정말 우리 중에 내부자가 있는 걸까?'

하늘은 노트에 지금까지 만난 사람들을 적어봤다.

아버지: 절대 아님

윤아: 절대 아님

조민지 작가: ?

최예린 작가: ?

커뮤니티 익명 작성자: ?

물음표가 너무 많았다. 누구도 완전히 신뢰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 휴대폰에 메시지가 왔다. 조민지였다.

'하늘아, 오늘 저녁에 만날 수 있어? 중요한 얘기가 있어.'

하늘은 망설였다. 만나야 할까? 윤아의 경고가 떠올랐다.

하지만 만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진전이 없을 것이다.

'네, 어디서 만날까요?'

'홍대 입구역. 저번에 만났던 카페에서 6시에.'

'알겠습니다.'

하늘은 윤아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조민지 작가님이 저녁에 만나자는데, 같이 갈래?'

'나는 학원 가야 돼. 혼자 가도 괜찮아?'

'응, 괜찮아.'

'조심해. 주변 잘 살피고, 이상하면 바로 나와.'

'알았어.'

오후 6시, 하늘은 홍대입구역 근처 카페에 도착했다. 조민지는 이미 와 있었다. 하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하늘아, 여기!"

조민지 옆에는 40대쯤 되어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수척한 얼굴, 피곤한 눈빛.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분은 김진수 선생님이야. 나처럼... 박민준 갤러리에서 일하셨어."

하늘은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김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민지 작가한테 얘기 들었어요. 학생이 아버지를 도우려고 한다고."

"네..."

"용감하네요. 나는 그럴 용기가 없었어요."

세 사람은 자리에 앉았다. 조민지가 먼저 말을 꺼냈다.

"김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함께 싸우고 싶다고."

"정말요?"

김진수는 씁쓸하게 웃었다.

"싸우고 싶다기보다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어서요. 7년을 박민준 밑에서 일했어요. 수백 점의 그림을 그렸죠. 다른 사람 이름으로."

"지금도 일하고 계세요?"

"한 달 전에 그만뒀어요. 견딜 수가 없더라고요. 하지만..."

김진수는 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냈다.

"박민준이 밀린 돈을 안 줘요. 1,800만 원. 1년 넘게 밀렸어요."

하늘은 숨이 막혔다. 아버지는 1,200만 원이 밀렸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그보다 더 많았다.

"계약서는 있으세요?"

"있죠. 하지만 소용없어요. '작품이 아직 안 팔렸다', '컬렉터가 돈을 안 줬다' 핑계만 대요."

조민지가 끼어들었다.

"김 선생님이 중요한 증거를 가지고 계셔."

"무슨 증거요?"

김진수는 휴대폰을 꺼내 동영상 하나를 재생했다.

"몰래 찍은 거예요. 작년에 박민준이 컬렉터들한테 작품을 팔 때."

영상에는 갤러리 안이 찍혀 있었다. 박민준이 중년의 남녀에게 그림을 소개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김현우 작가의 대표작입니다. 작가가 3개월간 공들여 완성한 작품이죠. 가격은 800만 원입니다."

"작가가 직접 그린 거 맞죠?"

"물론입니다. 김현우 작가는 모든 작품을 직접 그립니다."

하늘은 숨을 죽이고 영상을 봤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그 그림은 김현우가 아니라 아버지나 김진수 같은 사람이 그렸을 것이다.

"이게 증거가 될까요?"

"될 수 있어요. 박민준이 구매자들을 속였다는 증거니까요. 사기죄로 고소할 수 있어요."

하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드디어 결정적인 증거를 찾은 것 같았다.

"이걸 경찰에 제출하면..."

"그게 문제예요."

김진수가 말을 끊었다.

"나 혼자서는 못 해요. 박민준이 뭘 할지 몰라요. 그래서... 여러 사람이 함께 고소하면 좋겠어요."

"저희 아버지도 함께 하실 거예요."

"그리고 나도."

조민지가 말했다.

"우리 셋이서 공동 고소하는 거예요. 밀린 돈 받기 위한 민사소송도 함께요."

하늘은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드디어 반격할 수 있는 기회가.

"언제 하실 건데요?"

"다음 주. 증거를 더 모으고, 변호사도 알아봐야 해요."

바로 그때, 카페 입구로 누군가 들어왔다.

40대 정도의 여자. 정장을 입고,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

그 여자는 직접 그들의 테이블로 다가왔다.

"김진수 씨, 조민지 씨, 그리고..."

여자는 하늘을 쳐다봤다.

"강하늘 학생이죠?"

하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누구세요?"

여자는 명함을 꺼내 테이블에 놓았다.

'법무법인 정상 - 변호사 한지영'

"박민준 관장님의 법률 대리인입니다."

카페 안이 조용해졌다. 김진수와 조민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어떻게..."

"어떻게 여기 있냐고요? 여러분이 만나는 걸 알고 있었죠."

한지영은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앉았다.

"여러분, 현명하게 생각하세요. 박민준 관장님과 싸워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우리한테 증거가 있어요."

조민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증거요? 불법 촬영한 영상 말하는 건가요? 그건 오히려 여러분이 처벌받을 수 있어요."

한지영은 서류 봉투를 꺼냈다.

"김진수 씨, 밀린 돈 1,800만 원이죠? 오늘 여기 수표로 준비했습니다. 받으세요. 대신 앞으로 박민준 관장님에 대한 어떤 법적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는 합의서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김진수는 수표를 쳐다봤다. 1년 넘게 기다린 돈. 하지만 그의 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조민지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밀린 돈 전액 드리겠습니다. 계약 해지도 깨끗하게 해드리고요."

"그 대신 입 닥치고 있으라는 거죠?"

"그렇게 표현하시니 기분 나쁘네요. 서로 원만하게 해결하자는 거죠."

한지영은 하늘을 향해 몸을 돌렸다.

"강하늘 학생. 학생은 아직 미성년자죠? 이런 복잡한 일에 휘말리면 안 됩니다. 아버지를 위한다면, 조용히 물러나는 게 맞아요."

"전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용감하네요. 하지만 용기와 무모함은 다릅니다."

한지영은 일어서며 명함을 하나 더 놓았다.

"생각해보세요. 이틀 드릴게요. 그때까지 답을 주시면 좋겠네요. 아니면..."

그녀는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법정에서 뵙게 될 겁니다. 물론 여러분이 피고석에 앉아서요."

한지영이 카페를 나가자, 세 사람은 말을 잃었다.

김진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우리가 여기서 만나는 걸 알았지?"

조민지가 테이블을 쳤다.

"누군가 정보를 흘린 거야!"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의심의 눈빛.

"설마... 너?"

"내가 왜? 나도 피해자라고!"

"그럼 누가?"

하늘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갈게요."

"하늘아!"

조민지가 불렀지만, 하늘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하늘은 골목길을 걸으며 생각했다.

'정말 우리 중에 배신자가 있는 걸까?'

아니면 박민준이 그들 모두를 감시하고 있는 걸까?

휴대폰이 울렸다. 윤아였다.

"하늘아, 어떻게 됐어?"

하늘은 오늘 있었던 일을 전부 말했다. 김진수의 증거 영상, 한지영 변호사의 등장, 그리고 의심과 분열.

"이거... 박민준이 의도한 거야."

윤아가 말했다.

"우리끼리 의심하게 만드는 거. 그래야 힘을 못 쓰니까."

"그럼 어떡해?"

"더 조심해야 해. 그리고..."

윤아는 잠시 멈췄다.

"하늘아, 나 무서워. 진짜로."

"나도."

두 사람은 전화기 너머로 서로의 두려움을 느꼈다.

"그래도... 계속할 거지?"

"응. 여기서 멈출 순 없어."

하늘은 집으로 걸어가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진 하늘.

자신들도 지금 어둠 속에 있었다.

보이지 않는 적과 싸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적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이어서 써줘

10회: 깨진 신뢰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아버지에게 어제 일을 전부 말했다. 김진수의 증거 영상, 한지영 변호사의 등장, 그리고 의심의 그림자.

"하늘아, 이제 정말 위험해진 것 같아."

아버지의 얼굴은 심각했다.

"박민준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거야. 우리를 하나씩 무너뜨리려는 거지."

"김진수 선생님이 돈을 받을까요?"

"모르겠다. 1,800만 원이면... 작은 돈이 아니니까."

아버지는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봤다.

"사람은 누구나 약점이 있어. 박민준은 그걸 정확히 파고들어."

"아빠는요? 만약 박민준이 밀린 돈 다 준다고 하면?"

아버지는 하늘을 똑바로 쳐다봤다.

"안 받을 거야."

"1,200만 원이나 되는데요?"

"돈보다 중요한 게 있어. 내 딸한테 떳떳한 아버지가 되는 것. 그리고..."

아버지는 주먹을 쥐었다.

"예술가로서의 자존심. 내 그림을 내 이름으로 그릴 권리."

하늘은 아버지를 껴안았다.

"고마워요, 아빠."

학교에 가는 길, 하늘은 계속 뒤를 돌아봤다. 정말 누군가 따라오는 것 같았다. 검은 재킷을 입은 남자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걷고 있었다.

'설마...'

하늘은 걸음을 빨리했다. 남자도 빨라졌다. 하늘이 모퉁이를 돌자, 남자도 따라 돌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하늘은 사람들이 많은 편의점으로 뛰어들어갔다. 숨을 헐떡이며 창밖을 봤다.

남자는 편의점 앞을 그냥 지나쳤다. 하늘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너무 예민해진 걸까?'

아니면 정말 미행당하고 있는 걸까?

학교에 도착하자 윤아가 창백한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아, 큰일 났어."

"또 뭔데?"

"김진수 선생님이... 돈 받았대."

"뭐?"

윤아는 스마트폰을 보여줬다. 조민지가 보낸 메시지였다.

'김진수가 합의했어. 1,800만 원 받고 합의서에 서명했대. 증거 영상도 삭제하기로 했고. 이제 우리 편이 한 명 줄었어.'

하늘은 무릎에 힘이 풀렸다.

"그럼... 증거 영상은?"

"없어진 거지. 김진수가 원본 파일 다 지웠을 거야."

"복사본은?"

"모르겠어. 아마 안 남겼을걸. 합의 조건에 모든 사본 삭제가 포함됐을 테니까."

두 사람은 옥상으로 올라갔다. 찬바람이 불었지만 신경 쓰이지 않았다.

"윤아야, 우리 이길 수 있을까?"

처음으로 하늘이 약한 모습을 보였다. 윤아도 확신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모르겠어. 솔직히."

"사람들이 하나씩 무너지고 있어. 최예린 작가님도, 김진수 선생님도."

"조민지 작가님은 아직 버티고 있어."

"언제까지?"

침묵이 흘렀다.

"하늘아, 혹시..."

윤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닐까?"

하늘은 윤아를 쳐다봤다. 윤아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너도 무서워?"

"응. 진짜 무서워. 어제 집에 가는데 계속 누가 따라오는 것 같았어. 그리고 오늘 아침에 우리 집 우편함에 이상한 편지가 있었어."

"무슨 편지?"

윤아는 가방에서 봉투를 꺼냈다. 손으로 쓴 주소, 발신인 없음.

안에는 짧은 메시지만 적혀 있었다.

'착한 학생은 공부나 열심히 해야지.'

하늘은 봉투를 떨어뜨렸다.

"이건... 완전히 협박이잖아."

"응. 그래서 부모님한테 말씀드렸어."

"뭐라고 하셨어?"

"당연히 걱정하시지. 경찰 신고하자고 하셨어."

"신고했어?"

"응. 근데 경찰이 뭐래는지 알아?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니 조치가 어렵다'래. '조심하라'고만 하더라."

윤아는 난간에 기대섰다.

"하늘아, 나 진짜 무서워. 내가 다칠까 봐서가 아니라... 우리 가족한테 뭔가 일이 생길까 봐."

하늘은 윤아의 손을 잡았다.

"미안해. 너까지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아니야, 내가 선택한 거야. 하지만..."

"알아. 너도 한계가 있는 거."

"하늘아, 나 나쁜 친구지?"

"무슨 소리야."

"여기까지만 하고 싶어. 미안해."

윤아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하늘도 눈물이 났다.

"괜찮아. 너 잘못 없어. 여기까지만 해도 엄청 도와줬어."

"정말 미안해."

"미안하긴. 고마워, 윤아야. 진짜로."

두 사람은 한참을 껴안고 있었다.

점심시간, 하늘은 혼자 도서관에 앉아 있었다. 윤아마저 떠났다. 이제 남은 건 아버지와 조민지 작가뿐이었다.

휴대폰이 울렸다. 조민지였다.

"하늘아, 나도... 합의하기로 했어."

하늘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네?"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하지만 나도 살아야 해. 박민준이 소송 취하해주고, 밀린 돈도 주고, 앞으로 일도 소개해준다고 했어."

"작가님..."

"나도 알아. 이게 옳지 않다는 거. 하지만 나도 생활이 있어. 부모님 병원비도 내야 하고, 작업실 월세도 내야 하고..."

조민지의 목소리는 울먹였다.

"하늘아, 너무 이상적으로 생각하지 마. 세상은 정의롭지 않아. 돈 없는 사람이 이길 수 없어."

"하지만 싸워보지도 않고..."

"싸웠어! 5년을 싸웠어! 하지만 졌어. 인정해야 해."

전화가 끊어졌다.

하늘은 책상에 머리를 묻었다. 모든 게 무너지고 있었다.

방과 후, 하늘은 터벅터벅 집으로 걸어갔다.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손에 편지를 들고.

"하늘아."

"네, 아빠."

"이거... 우편함에 있었어."

아버지가 편지를 건넸다. 하늘은 읽어보았다.

'강태수 씨.

현명한 선택을 하시길 바랍니다. 딸의 미래를 생각하신다면 말이죠. 참고로, 하늘이가 다니는 서울중앙중학교는 집에서 도보로 15분 거리죠. 등하교길이 참 한적하더군요.

걱정하는 사람 올림'

하늘의 손이 떨렸다. 이건 명백한 협박이었다. 자신을 해칠 수 있다는 협박.

"아빠..."

아버지는 편지를 빼앗아 구겨버렸다.

"그만둔다."

"네?"

"이거 다 그만둬. 당장. 박민준한테 연락해서 합의할 거야."

"아빠, 안 돼요!"

"안 돼는 게 아니야! 네가 다칠 수도 있어!"

아버지가 소리쳤다.

"그림이 뭐가 중요해! 돈이 뭐가 중요해! 네가 안전한 게 가장 중요하지!"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끝이야! 이제 끝이라고!"

아버지는 휴대폰을 꺼내 박민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박 관장님. 저 강태수입니다. 네... 합의하고 싶습니다."

하늘은 아버지의 전화를 빼앗으려 했지만, 아버지는 밀어냈다.

"네, 조건 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언제 만날까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가 끊어졌다.

"아빠!"

"미안하다, 하늘아. 하지만 이게 맞는 거야."

아버지는 작업실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하늘은 그 앞에 주저앉아 울었다.

모든 게 끝났다.

그날 밤, 하늘은 잠들지 못하고 천장만 바라봤다. 윤아도 떠났고, 조민지도 떠났고, 이제 아버지마저.

자신만 남았다.

열네 살 중학생 혼자서 뭘 할 수 있을까?

휴대폰이 울렸다. 새벽 2시. 누굴까?

모르는 번호였다. 하늘은 받지 않으려다가 호기심에 받았다.

"여보세요?"

"강하늘 학생?"

낯선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구세요?"

"제 이름은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제가 박민준 갤러리에서 일했다는 거죠."

하늘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지금도 일하세요?"

"아니요. 3개월 전에 그만뒀어요. 양심의 가책을 견딜 수 없어서요."

"왜 저한테 전화하신 거예요?"

"당신이 혼자 싸우고 있다는 걸 알아요. 다른 사람들은 다 포기했지만, 당신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죠?"

"어떻게..."

"나도 한때는 당신처럼 싸우려고 했어요. 하지만 무서워서 도망쳤죠."

여자는 잠시 침묵했다.

"하지만 당신을 보면서 생각했어요. 누군가는 용기를 내야 한다고. 그래서 연락했어요."

"증거를 주실 건가요?"

"그것보다 더 좋은 걸 드릴게요."

"뭔데요?"

"박민준의 약점. 그가 절대 숨기고 싶어 하는 진실."

하늘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뭔데요?"

"전화로는 못 해요. 만나야 해요. 내일 밤 10시, 한강공원 여의도 지구. 혼자 오세요."

"혼자요?"

"네. 다른 사람 있으면 안 돼요. 그리고 누구한테도 말하지 마세요. 박민준의 스파이가 어디 있을지 모르니까."

"하지만..."

"믿어요, 안 믿어요? 선택은 당신 몫이에요. 하지만 이건 마지막 기회일 거예요."

전화가 끊어졌다.

하늘은 침대에 앉아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쥐고 있었다.

이건 함정일까? 아니면 진짜 기회일까?

혼자 밤 10시에 한강공원에 간다는 건 위험했다. 엄청나게.

하지만 이게 정말 마지막 기회라면?

하늘은 새벽까지 고민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가기로.

위험하더라도, 함정일 수도 있더라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이제 정말 혼자였다.

하지만 그래도 싸워야 했다.

아버지를 위해서.

그리고 모든 예술가들을 위해서.

하늘은 일기장을 펼쳐 썼다.

'내일 나는 한강공원에 간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이 일기를 읽는 사람은 알아줬으면 한다. 박민준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 예술가들을 괴롭혔는지. 그리고 나는 끝까지 싸웠다는 것을.

강하늘'

일기장을 덮고, 하늘은 창밖을 바라봤다.

내일이 두렵지만, 동시에 기대되었다.

마지막 승부가 시작될 것이다.이어서 써줘

공지사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