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그림자 위작단


11회: 위험한 만남
다음 날, 하늘은 평소처럼 학교에 갔다. 아무 일도 없는 척했다. 아버지에게도, 윤아에게도 오늘 밤 계획을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말릴 게 뻔했다.
수업 시간 내내 시계만 쳐다봤다. 시간이 너무 느리게 갔다. 동시에 너무 빨리 갔다.
점심시간, 윤아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하늘아, 어제 통화 후에 미안했어."
"아니야, 괜찮아."
"정말 미안해. 나 겁쟁이 같지?"
"아니야. 넌 이미 충분히 도와줬어."
윤아는 하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도와줄게."
"고마워."
하늘은 윤아를 껴안았다. 혹시 이게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그런 생각 하지 마.'
방과 후, 하늘은 집에 와서 저녁을 먹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내일 박민준을 만나 합의서에 서명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아빠, 저 오늘 늦을 수도 있어요."
"어디 가는데?"
"친구랑 과제 하기로 했어요. 도서관에서."
"너무 늦지 말고 와. 10시 전에는 들어와야 해."
"네..."
하늘은 죄책감이 들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말하면 절대 보내주지 않을 테니까.
오후 9시, 하늘은 조용히 집을 나섰다. 가방에는 호신용 호루라기, 휴대폰 보조배터리, 그리고 작은 녹음기를 챙겼다.
무슨 일이 생기든 증거를 남겨야 했다.
지하철을 타고 여의도역으로 갔다. 역에서 내려 한강공원으로 걸어가는 동안, 하늘의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가도 될까? 혼자서?'
하지만 발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한강공원은 어두웠다. 가로등 불빛만 희미하게 길을 밝히고 있었다.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가끔 조깅하는 사람이나 자전거 타는 사람만 스쳐 지나갔다.
약속 장소는 여의도 지구 끝자락, 잔디밭 근처 벤치였다.
하늘은 벤치에 앉아 기다렸다. 10시 5분 전.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10시가 되었다.
여전히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5분이 지났다. 10분이 지났다.
'속은 건가?'
하늘이 일어서려는 순간,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강하늘 학생."
하늘은 깜짝 놀라 돌아봤다. 3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어둠 속에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혹시 다른 사람한테 말했어요?"
"아니요. 혼자 왔어요."
"확실해요? 따라온 사람 없고?"
"네."
여자는 주변을 경계하듯 둘러보더니 하늘 옆에 앉았다.
"제 이름은 이수진이에요. 박민준 갤러리에서 3년간 매니저로 일했어요."
"매니저요?"
"네. 작가들 관리하고, 컬렉터들 응대하고, 전시 준비하고... 그런 일들이요."
"왜 그만두셨어요?"
수진은 한숨을 쉬었다.
"견딜 수가 없었어요. 매일 거짓말하고, 사람들 속이고... 양심이 허락하지 않더라고요."
"무슨 거짓말이요?"
수진은 가방에서 USB를 꺼냈다.
"이 안에 다 들어있어요. 박민준의 모든 비리."
하늘은 숨을 죽였다.
"뭐가 들어있는데요?"
"첫째, 실제 작가와 작품 제작자가 다른 모든 그림의 목록. 누가 실제로 그렸는지, 누구 이름으로 팔렸는지 다 기록되어 있어요."
"진짜요?"
"둘째, 금전 거래 내역. 박민준이 실제 작가들한테 얼마를 주기로 했고, 실제로는 얼마를 줬는지. 밀린 돈이 얼마인지."
하늘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셋째, 컬렉터들과의 대화 녹음 파일. 박민준이 작품을 팔 때 한 거짓말들이 다 녹음되어 있어요."
"어떻게 이런 걸..."
"제가 매니저였으니까요. 모든 서류를 다뤘고, 모든 대화를 들었죠. 그리고 조용히 복사해뒀어요. 언젠가 필요할 것 같아서."
수진은 USB를 하늘의 손에 쥐어주었다.
"이걸로 박민준을 고소할 수 있어요. 사기죄, 저작권 침해, 횡령... 여러 가지로요."
하늘은 USB를 꽉 쥐었다. 이게 진짜라면, 이건 결정적인 증거였다.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직접 고소하실 수도 있잖아요."
수진은 쓸쓸하게 웃었다.
"나는 이미 박민준한테 돈 받고 합의했어요. 비밀유지 서약서에도 서명했고요."
"그럼..."
"내가 직접 나서면 계약 위반이 돼요. 위약금 5천만 원을 물어야 하죠. 그리고... 박민준은 나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할 거예요."
"하지만 저한테 주시는 건 괜찮으세요?"
"당신은 계약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제3자가 증거를 입수해서 고소하는 건 제 책임이 아니에요."
수진은 하늘의 손을 잡았다.
"하늘 학생, 부탁이에요. 이걸로 박민준을 법의 심판대에 세워주세요. 저 같은 비겁한 어른 대신에."
"하지만... 저 혼자서는..."
"혼자가 아니에요."
수진은 메모지를 하나 더 꺼냈다.
"여기 연락처들이 적혀 있어요. 기자들, 변호사들, 그리고 미술계 인권 단체들. 이 사람들한테 연락하세요. 도와줄 거예요."
하늘은 메모지를 받았다. 떨리는 손으로.
"무섭지 않으세요? 박민준이 알면..."
"무섭죠. 엄청. 그래서 지금 이 대화 끝나면 저는 해외로 떠날 거예요. 한동안."
"어디로요?"
"말 못 해요. 안전하게 숨어 있어야 하니까."
수진은 일어섰다.
"하늘 학생, 조심하세요. 박민준은 위험한 사람이에요. 뒤에 큰 손들이 있어요."
"큰 손이요?"
"재벌들, 정치인들... 박민준은 그들의 검은 돈을 미술품으로 세탁해줘요. 그래서 건드리면 위험해요."
하늘은 온몸이 얼어붙었다.
"그럼 이거 고소하면 저도..."
"위험할 수 있어요. 하지만..."
수진은 하늘의 어깨를 잡았다.
"당신만큼 용감한 사람이라면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꼭 해야 해요. 이 악의 고리를 끊어야 해요."
수진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하늘은 USB와 메모지를 가방에 넣고 벤치에 앉았다.
손이 떨렸다. 무서웠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이 보였다.
드디어 진짜 무기를 손에 넣었다.
바로 그때,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감동적인 장면이네요."
하늘은 깜짝 놀라 돌아봤다.
박민준이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두 명의 남자. 덩치 큰 남자들.
"어떻게..."
"어떻게 여기 있냐고요? 이수진 씨를 미행했죠. 그 사람이 당신을 만날 줄 알았어요."
박민준은 웃으며 다가왔다.
"USB 주세요."
"싫어요."
"학생, 이건 당신을 위한 거예요. 그 USB는 불법으로 취득한 증거예요. 법정에서 효력도 없어요."
"그래도 안 줘요."
박민준은 손짓했다. 덩치 큰 남자 하나가 하늘에게 다가왔다.
"강제로 빼앗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네요."
하늘은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다른 남자가 뒤를 막고 있었다.
"도와줘요!"
하늘이 소리쳤다. 하지만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소리쳐봤자 소용없어요. 여긴 CCTV도 없는 곳이에요. 일부러 여길 택한 거예요."
박민준이 손을 내밀었다.
"USB 주면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집에 무사히 돌려보내 드리죠."
"안 돼요!"
하늘은 가방을 꽉 껴안았다.
"어쩔 수 없네요."
박민준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하늘에게 손을 뻗었다.
바로 그때.
"경찰이다! 손들어!"
밝은 불빛과 함께 목소리가 들렸다.
세 명의 경찰이 달려왔다. 그리고 그 뒤에...
"하늘아!"
아버지였다. 그리고 윤아도 함께였다.
박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이게 무슨..."
"강요 및 협박 혐의로 체포합니다."
경찰이 박민준에게 수갑을 채웠다.
"잠깐! 이건 오해예요! 우리는 그냥 대화하던 중이었어요!"
"대화요? CCTV에 다 찍혔는데요?"
경찰이 가리킨 곳에는 작은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다.
하늘은 아버지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아빠! 어떻게..."
"윤아가 연락했어. 네가 이상하게 행동한다고. 그래서 추적했지."
윤아가 미안한 얼굴로 다가왔다.
"하늘아, 미안. 네 휴대폰에 추적 앱 깔아뒀어. 혹시 몰라서."
"윤아야..."
"화났어?"
하늘은 윤아를 껴안았다.
"고마워. 진짜로."
경찰이 하늘에게 다가왔다.
"학생, 괜찮아요?"
"네, 괜찮아요."
"혹시 증거물 같은 거 있나요?"
하늘은 가방에서 USB를 꺼냈다.
"이게... 박민준의 모든 범죄 증거래요."
경찰이 USB를 받아 들었다.
"잘했어요. 용감한 학생이네요."
박민준이 끌려가면서 하늘을 쏘아봤다.
"이게 끝이 아니야. 내 뒤에 있는 사람들이..."
"닥쳐!"
경찰이 박민준을 밀어 넣었다.
경찰차가 떠나가는 것을 보며, 하늘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끝났어... 정말 끝났어."
"아직 아니야."
아버지가 말했다.
"이제 시작이야. 진짜 싸움은."
"무슨 뜻이에요?"
"박민준을 체포했지만, 재판이 남았어. 그리고 그의 배후들도 밝혀내야 해."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았다. 이건 시작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버지도 있고, 윤아도 있고, 증거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이 있었다.
"집에 가자, 하늘아."
"네, 아빠."
세 사람은 한강공원을 나섰다.
밤하늘에는 별이 빛나고 있었다.
도시의 불빛에 가려져 있던 별들이, 이제는 보였다.
하늘은 USB를 꽉 쥐며 생각했다.
'이제부터가 진짜야. 박민준뿐만 아니라, 그를 비호하는 모든 사람들과 싸워야 해.'
'하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절대로.'
그날 밤은 하늘에게 전환점이었다.
두려움에서 용기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그리고 혼자에서 함께로.
진짜 싸움은 이제 시작이었다.
12회: 언론의 주목
다음 날 아침, 뉴스는 박민준 체포 소식으로 시끌벅적했다.
"유명 갤러리 관장, 미술품 사기 혐의로 긴급체포"
"위작 유통 의혹, 미술계 발칵"
"검은 돈 세탁 의혹까지... 수사 확대될 듯"
하늘은 아침 식사를 하며 TV 뉴스를 봤다. 박민준이 수갑을 찬 채 경찰서로 들어가는 모습이 나왔다.
"...박 씨는 유명 작가 명의로 미술품을 판매하면서 실제로는 무명 작가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피해 규모는 수십억 원대로 추정됩니다."
"하늘아, 네 덕분이야."
아버지가 말했다.
"아니에요. 우리 모두 덕분이에요."
"그래도... 네가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했어."
휴대폰이 울렸다. 윤아였다.
"하늘아! 우리 학교 난리 났어!"
"왜?"
"너 뉴스에 나왔어! '중학생의 용기가 미술계 비리를 밝혀내다'라고!"
"뭐?"
하늘은 서둘러 인터넷 뉴스를 검색했다. 정말로 자신에 대한 기사가 여러 개 올라와 있었다.
"서울 모 중학교 3학년 강 모 양은 아버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을 보고 직접 조사에 나섰다. 중학생 신분으로 피해자들을 찾아다니고 증거를 수집한 끝에..."
얼굴은 모자이크 처리되어 있었지만, 학교 친구들은 다 알 것 같았다.
"윤아야, 학교 가기 싫은데."
"괜찮아. 다들 너 대단하다고 하더라. 오히려 영웅 취급이야."
하지만 학교에 도착한 하늘을 기다리고 있던 건 친구들만이 아니었다.
교문 앞에 기자 대여섯 명이 카메라를 들고 서 있었다.
"저기 강하늘 학생이다!"
"학생! 인터뷰 좀 해주세요!"
"어떻게 박민준의 비리를 알게 되었나요?"
플래시가 터졌다. 하늘은 당황해서 뒤로 물러섰다.
"비켜주세요! 학생입니다!"
선생님들이 나와서 기자들을 막았다. 하늘은 그 틈을 타 학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교실에 들어서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강하늘! 너 뉴스 봤어?"
"대박! 우리 반에 영웅 있었네!"
"사인 좀 받아도 돼?"
아이들은 신기한 듯 하늘을 쳐다봤다. 하늘은 얼굴이 빨개졌다.
"야, 다들 관심 끄고 자기 할 일이나 해."
윤아가 아이들을 쫓아냈다.
"괜찮아?"
"응... 그냥 좀 부담스러워."
"당연하지. 갑자기 유명인이 됐으니까."
점심시간, 교장 선생님이 하늘을 교장실로 불렀다.
"하늘 학생, 앉아요."
교장 선생님은 온화하게 웃었다.
"용감한 일을 했다고 들었어요. 학교의 자랑입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언론 인터뷰 요청이 많이 들어오고 있어요. 방송국에서도 출연 제의가 왔고요."
"저는... 안 하고 싶은데요."
"그럴 줄 알았어요. 학생 신분이니까 학업에 집중하는 게 맞죠. 학교에서 잘 막아줄게요."
"고맙습니다."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교장 선생님은 서류를 꺼냈다.
"다음 주 전교 조회 때 학생들 앞에서 짧게 소감을 발표해주었으면 해요. 너처럼 용기 있는 학생의 이야기를 듣는 게 다른 학생들에게도 좋은 교육이 될 것 같아서요."
하늘은 망설였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그날 오후, 집으로 돌아온 하늘은 아버지가 손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늘아, 왔니? 이분은 정형사님이야. 박민준 사건을 담당하고 계셔."
40대 중반의 형사가 일어나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하늘 학생. 어젯밤에도 봤지만 제대로 인사는 처음이네요."
"안녕하세요."
"용감한 학생이에요. 정말 대단해요."
정형사는 노트북을 펼쳤다.
"이수진 씨가 준 USB 분석 결과가 나왔어요. 어마어마하더군요."
"뭐가 있었어요?"
"5년간의 모든 거래 기록이요. 실제 그림 그린 사람, 명의상 작가, 판매 금액, 실제 지급 금액... 전부 다요."
정형사는 화면을 돌려 보였다.
"총 피해자가 27명이에요. 실제로 그림 그린 작가들이 17명, 명의를 도용당한 작가들이 10명."
"27명이나..."
"그리고 총 거래 금액이 47억 원. 이 중에서 실제 작가들에게 지급된 건 8억 원 정도예요."
"나머지는요?"
"박민준이 챙긴 거죠. 그리고 일부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어요."
"다른 곳이요?"
정형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이건 아직 확실하지 않아서 말하기 조심스럽지만... 정치인들과 재벌가 인사들 명단이 나와요. 박민준이 그들에게 미술품을 헐값에 넘기고, 그 대가로 뭔가를 받은 것 같아요."
"뇌물이요?"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하지만 증명하기는 어려워요. 겉으로는 정상적인 미술품 거래니까요."
하늘은 이수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박민준 뒤에 큰 손들이 있다'고.
"그 사람들도 잡을 수 있어요?"
"쉽지 않을 거예요. 그들은 법망을 피하는 데 능숙하니까요. 하지만..."
정형사는 하늘을 똑바로 쳐다봤다.
"우리는 최선을 다할 거예요. 학생이 위험을 무릅쓰고 증거를 확보했는데, 우리가 제대로 수사하지 않으면 안 되죠."
"감사합니다."
"그리고 학생, 조심하세요."
"무슨 뜻이에요?"
"박민준 배후의 사람들이 가만있지 않을 수도 있어요. 이미 여러 변호사들이 박민준 구속 취소를 신청했어요. 압력이 들어오고 있어요."
하늘은 긴장했다.
"저한테도 위험이 올 수 있나요?"
"가능성은 있어요. 하지만 경찰이 보호할 거예요. 그리고 이미 언론에 알려졌으니까 함부로 건드리기도 힘들 거예요."
정형사가 돌아간 후, 아버지가 하늘 옆에 앉았다.
"무섭지?"
"응... 좀."
"나도 무서워. 하지만 이제 돌아갈 수는 없어. 너도 알지?"
"응."
아버지는 하늘의 손을 잡았다.
"우리 끝까지 가보자. 함께."
그날 밤, 하늘은 윤아와 영상 통화를 했다.
"하늘아, 너 진짜 대단해. 나였으면 못 했을 거야."
"너도 도와줬잖아. 내 위치 추적한 거."
"그건 그냥... 걱정돼서. 근데 진짜 잘한 것 같아. 박민준 잡힌 거."
"아직 끝난 게 아니래. 재판도 남았고."
"그래도 가장 어려운 걸 해낸 거잖아. 증거 확보."
윤아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하늘아, 무섭지 않아? 정말로."
"무서워. 엄청."
"그럼 왜 계속해?"
하늘은 창밖을 바라봤다.
"포기하면... 아빠 같은 사람들이 계속 고통받을 거잖아. 그리고 박민준 같은 사람들은 계속 나쁜 짓을 하고."
"너 정의로운 사람이야."
"아니야. 그냥... 옳은 일을 하고 싶을 뿐이야."
다음 날, 하늘은 조민지 작가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하늘아, 만날 수 있어?"
"네, 언제요?"
"오늘 저녁. 중요한 사람을 소개하고 싶어."
저녁에 만난 조민지는 한 남자와 함께였다. 50대쯤 되어 보이는, 온화한 인상의 남자.
"하늘아, 이분은 김태훈 변호사님이야. 공익 변호를 전문으로 하시는 분이야."
"안녕하세요, 하늘 학생. 소문 많이 들었어요."
김 변호사는 악수를 청했다.
"저희가 도와드리고 싶어서 왔어요. 무료로요."
"무료로요?"
"네. 이런 사회적 약자 보호 사건은 제가 좋아하는 일이거든요. 박민준뿐만 아니라, 그의 배후까지 밝혀내고 싶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는요. 오히려 제가 감사하죠. 용기 있는 학생 덕분에 큰 사건을 맡게 됐으니까요."
김 변호사는 서류를 펼쳤다.
"일단 박민준에 대한 형사 고소부터 준비할게요. 사기, 저작권 침해, 횡령죄로요. 그리고 민사소송도 같이 진행할 거예요. 밀린 돈 받는 거요."
"다른 피해자들도 함께 하나요?"
"그게 좀 문제예요."
조민지가 끼어들었다.
"김진수 씨는 이미 합의했고, 최예린 씨도 움직이지 않으려고 해요. 다른 작가들도 대부분 두려워하고 있어요."
"그럼..."
"하늘이 아버지와 나, 그리고 용기 있는 몇몇 작가들만 모였어요. 총 다섯 명."
하늘은 실망했다. 27명 중 다섯 명뿐이라니.
"괜찮아요."
김 변호사가 말했다.
"다섯 명이면 충분해요. 그리고 재판 과정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낼 거예요. 승소하는 모습을 보면요."
"이길 수 있을까요?"
"증거가 확실하니까 가능성은 높아요. 하지만..."
김 변호사는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박민준 측 변호인단이 만만치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압력도 들어올 거고요."
"압력이요?"
"정치권, 재벌... 박민준과 연결된 사람들이 재판에 개입하려 할 거예요. 우리는 그것도 막아내야 해요."
하늘은 긴장했다. 싸움은 예상보다 훨씬 클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 마세요."
김 변호사가 미소 지었다.
"우리에게는 진실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하늘을 가리켰다.
"용감한 증인이 있잖아요."
그날 밤, 하늘은 일기를 썼다.
'오늘 김태훈 변호사님을 만났다. 좋은 분 같다. 우리를 도와주신다니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앞으로의 싸움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박민준뿐만 아니라 그 뒤의 큰 사람들과도 싸워야 한다니.
무섭다. 정말로.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아빠를 위해서.
조민지 작가님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예술가들을 위해서.
나는 계속 싸울 것이다.
끝까지.'
일기장을 덮고, 하늘은 창밖을 바라봤다.
도시의 불빛 너머로,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직 희망은 있었다.
그리고 하늘은 그 희망을 지킬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13회: 재판의 시작
한 달이 지났다. 박민준의 첫 공판 날이 다가왔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언론은 계속 이 사건을 다뤘고, 미술계는 술렁였다. 몇몇 유명 작가들이 자신도 비슷한 피해를 겪었다고 나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박민준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이건 미술계의 관행이다."
"작가와 제작자가 분리되는 건 흔한 일이다."
"박민준은 오히려 무명 작가들에게 일자리를 준 것이다."
하늘은 그런 기사를 볼 때마다 화가 났다. 어떻게 착취를 관행이라고 포장할 수 있을까?
공판 당일 아침, 하늘은 교복 대신 깔끔한 옷을 입었다. 아버지도 정장을 꺼내 입었다.
"긴장되니?"
"네... 엄청."
"나도. 하지만 우리가 할 일은 진실을 말하는 것뿐이야."
법원 앞에는 이미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강태수 씨! 한 말씀 해주세요!"
"따님이 증인으로 나오나요?"
"박민준 측과 합의 의사는 없나요?"
김태훈 변호사가 나서서 기자들을 막았다.
"질문은 재판 후에 받겠습니다. 지금은 비켜주세요."
법정 안으로 들어가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방청객석은 거의 꽉 차 있었다.
저쪽에는 박민준이 앉아 있었다. 양복을 말끔히 차려입고, 침착한 표정이었다. 그 옆에는 변호사 세 명이 앉아 있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판사가 입장했다. 50대 여성 판사였다.
"제2021고단5847호 사기 등 사건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검사가 먼저 일어나 기소 내용을 낭독했다.
"피고인 박민준은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아트스페이스 민준 갤러리를 운영하며, 실제 작품 제작자와 다른 작가 명의로 미술품을 판매하여 구매자들을 기망했습니다. 또한 실제 제작자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검사의 낭독은 10분 넘게 이어졌다. 사기죄, 저작권 침해, 횡령죄, 업무상 배임... 여러 혐의가 나열되었다.
박민준의 변호사가 일어섰다. 40대 중반의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였다.
"재판장님, 피고인은 모든 혐의를 부인합니다."
"부인한다고요?"
"네. 피고인은 정당한 계약에 따라 미술품 거래업을 했을 뿐입니다. 작가와 제작자가 분리되는 것은 미술계의 일반적인 관행이며, 모든 거래는 계약서에 명시된 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늘은 주먹을 쥐었다. 저게 말이 되나?
검사가 반박했다.
"계약서 자체가 불공정하고 기만적입니다. 그리고 구매자들에게는 실제 제작자가 다르다는 사실을 숨겼습니다."
"구매자들은 작품을 구매한 것이지, 누가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작가 명의로 판매하면서 어떻게 그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양측의 공방이 이어졌다.
판사가 망치를 두드렸다.
"증인 신문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고소인 측 증인 강태수 씨, 앞으로 나오십시오."
아버지가 증인석으로 걸어갔다. 손이 떨리는 게 보였다.
선서를 마치고, 검사가 질문을 시작했다.
"증인은 박민준 피고인과 어떤 관계입니까?"
"2021년부터 2023년까지 피고인의 갤러리에 그림을 납품했습니다."
"어떤 그림을 그렸습니까?"
"피고인이 지시한 대로, 유명 작가들의 화풍을 모방한 그림들을 그렸습니다."
"몇 점이나 그렸습니까?"
"정확히는 모르지만... 50점 이상은 될 겁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가는 얼마나 받았습니까?"
"한 작품당 80만 원을 약속받았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절반도 못 받았습니다. 계속 미루다가 결국 1,200만 원이 밀렸습니다."
"피고인은 뭐라고 했습니까?"
"'곧 준다', '컬렉터가 아직 돈을 안 줬다'는 핑계만 댔습니다."
검사는 서류를 제시했다.
"이것은 피고인 갤러리의 판매 기록입니다. 증인이 그린 그림들이 300만 원에서 800만 원에 판매되었습니다. 증인이 받은 돈과 차이가 크죠?"
"네..."
"왜 이런 불공정한 계약을 받아들였습니까?"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가 대답했다.
"생활이 어려웠습니다. 딸을 키워야 했고,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늘은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번에는 박민준 측 변호사가 일어섰다.
"증인, 계약서에 서명했죠?"
"네."
"계약서를 읽어봤습니까?"
"네... 하지만 법률 용어가 많아서 정확히는..."
"읽었으면 이해한 것으로 봐야죠. 증인은 자발적으로 계약을 맺은 겁니다."
"하지만 그건..."
"그리고 증인은 화가라고 했죠? 그림 그리는 게 일이잖아요. 일을 하고 돈을 받은 건데, 뭐가 문제입니까?"
"제 이름으로 팔린 게 아니잖습니까! 다른 사람 이름으로!"
"그건 계약 내용이었습니다. 증인은 '제작자'로 고용된 거고, '작가'는 따로 있는 겁니다."
"그건 사기예요!"
아버지가 목소리를 높였다.
판사가 망치를 두드렸다.
"증인, 침착하십시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비웃듯 말했다.
"증인은 자신의 무능력을 피고인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 아닙니까? 자신의 그림이 안 팔려서 이런 일을 한 거잖아요."
"뭐라고요?"
"증인, 20년간 화가로 활동했지만 제대로 된 전시회 한 번 못 열었죠? 그림이 팔린 적도 거의 없고. 그건 증인의 실력 부족 아닙니까?"
"이 사람이...!"
아버지가 벌떡 일어섰다. 김태훈 변호사가 서둘러 아버지를 진정시켰다.
판사가 다시 망치를 두드렸다.
"변호인, 증인을 모욕하는 발언은 자제하십시오."
"죄송합니다, 재판장님. 다만 증인의 동기가 의심스러워서요."
하늘은 분노로 몸이 떨렸다. 저렇게 아버지를 모욕하다니.
증인 신문이 끝나고, 이번에는 조민지가 증인석에 섰다.
조민지는 침착하게 자신의 경험을 증언했다.
"저는 제 이름으로 팔린 그림 중 절반 이상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피고인은 '조수가 도왔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그렸습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붓 터치, 색감, 구도... 모든 게 제 방식과 달랐습니다. 작가는 자기 작품을 알아봅니다."
"왜 처음에는 묵인했습니까?"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피고인이 '이게 업계 관행'이라고 했습니다. 저는 신인이었고, 거부하면 일을 못 할 것 같았습니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다시 공격적으로 나왔다.
"증인도 결국 돈을 받았죠?"
"일부만 받았습니다. 밀린 돈이..."
"하지만 받았잖아요. 그럼 합의한 거 아닙니까?"
"그건..."
"그리고 증인, 한때 피고인과 합의하지 않았습니까? 블로그에 사과문도 올렸죠?"
조민지의 얼굴이 붉어졌다.
"협박당해서 그랬습니다."
"증거가 있습니까?"
"내용증명을 받았고, 협박 전화도..."
"그건 정당한 법적 절차였습니다. 증인이 허위사실을 유포했으니까요."
공방이 계속되었다.
휴정 시간, 하늘은 아버지와 조민지를 위로했다.
"잘하셨어요. 진실을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저 변호사는..."
조민지가 한숨을 쉬었다.
"너무 공격적이야. 우리를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해."
김태훈 변호사가 다가왔다.
"예상했던 대로예요. 상대방은 피해자들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려는 전략이에요."
"그럼 우리가 질 수도 있나요?"
"아니요. 우리에겐 결정적 증거가 있잖아요."
김 변호사는 USB를 꺼냈다.
"이수진 씨가 준 자료. 오늘 오후에 제출할 겁니다. 이게 게임 체인저가 될 거예요."
오후 재판이 재개되었다.
검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중요한 증거를 제출하겠습니다."
검사는 USB 내용을 대형 모니터에 띄웠다.
"이것은 피고인 갤러리의 내부 거래 자료입니다. 5년간의 모든 거래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화면에는 엑셀 파일이 나타났다. 작품명, 실제 제작자, 명의상 작가, 판매 가격, 지급 금액... 모든 것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었다.
방청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박민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 자료에 따르면, 피고인은 총 412점의 작품을 판매하면서 실제 제작자와 다른 작가 명의를 사용했습니다. 총 판매액은 47억 원, 실제 제작자들에게 지급한 금액은 8억 원. 차액 39억 원은 피고인이 착복했습니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벌떡 일어섰다.
"이의 있습니다! 이 자료의 출처가 불분명합니다! 불법으로 취득한 증거일 수 있습니다!"
"출처는 피고인 갤러리의 전 직원입니다. 합법적으로 확보한 자료입니다."
"누구입니까? 그 직원이 누구냐고요!"
"증인 보호를 위해 신원은 밝힐 수 없습니다."
판사가 서류를 검토했다.
"검사, 이 자료의 진위를 어떻게 보증하겠습니까?"
"회계 전문가의 검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피고인 갤러리의 실제 거래 내역과 대조한 결과 일치합니다."
판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증거로 채택하겠습니다. 다만 출처에 대한 추가 검증이 필요합니다."
박민준 측 변호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재판은 오후 늦게까지 계속되었다. 양측의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다.
마침내 판사가 말했다.
"오늘 공판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공판은 2주 후입니다."
법정을 나오면서, 하늘은 박민준과 눈이 마주쳤다.
박민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하늘을 쏘아봤다. 그 눈빛에는 분노와 위협이 담겨 있었다.
하늘은 고개를 돌렸다.
'무섭지만... 물러설 수 없어.'
법원 밖에서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오늘 재판 어떠셨습니까?"
김태훈 변호사가 대답했다.
"진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박민준 피고인의 조직적인 사기 행각이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승소 가능성은?"
"높다고 봅니다. 증거가 확실하니까요."
기자 회견을 마치고, 하늘은 아버지, 조민지와 함께 근처 식당으로 갔다.
"오늘 수고 많으셨어요."
김 변호사가 말했다.
"특히 강태수 씨, 조민지 씨. 증인석에서 용기 있게 증언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야말로... 변호사님 덕분입니다."
"아직 끝난 게 아니에요. 앞으로 몇 차례 공판이 더 있을 겁니다. 그리고 상대방도 더 공격적으로 나올 거예요."
"준비됐어요."
아버지가 말했다.
"이미 여기까지 왔는데, 이제 물러설 수 없죠."
하늘은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바라봤다.
변한 것이 많았다. 한 달 전만 해도 모든 걸 포기하려 했던 아버지가, 이제는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하늘은 일기를 썼다.
'오늘 첫 공판이 있었다. 생각보다 힘들었다. 상대방 변호사는 아빠와 조민지 작가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진실이 있다. 그리고 증거도 있다.
김태훈 변호사님은 이길 수 있다고 했다.
나도 믿고 싶다.
하지만 무섭다. 박민준의 눈빛이 너무 무서웠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창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은 빗소리를 들으며 잠들었다.
내일은 또 다른 싸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준비되어 있었다.
진실을 위해 싸울 준비가.
14회: 역공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충격적인 기사를 발견했다.
"'박민준 사건, 조작된 증거 의혹'"
"전 직원 증언, '강요당해 거짓 자료 제공'"
"피해자로 알려진 작가들, 실은 공모자?"
하늘은 황급히 기사를 읽었다.
'박민준 측 변호인단은 어제 기자회견을 열고, 검찰이 제출한 USB 자료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변호인단은 "자료를 제공했다는 전 직원 이수진 씨가 박민준 관장과 개인적 원한 관계에 있었으며, 보복 목적으로 허위 자료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또한 고소인 측 작가들에 대해서도 의혹을 제기했다. "이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고도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거짓 고소를 한 것"이라며 "오히려 이들이 박민준 관장을 협박한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늘은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아빠! 이거 봐요!"
아버지도 기사를 보고는 얼굴이 굳었다.
"이게 무슨..."
휴대폰이 울렸다. 김태훈 변호사였다.
"강태수 씨, 기사 보셨죠?"
"네... 이게 대체..."
"전형적인 역공입니다. 상대방이 우리를 가해자로 몰아가는 전략이에요."
"하지만 이건 명백한 거짓말이잖아요!"
"물론이죠. 하지만 언론전은 진실보다 누가 더 설득력 있게 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일단 침착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오늘 오후에 우리도 기자회견을 열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아버지는 소파에 주저앉았다.
"하늘아, 미안하다."
"왜요, 아빠?"
"너까지 이런 공격을 받게 해서. 기사 보니까 너 이야기도 나오더라."
하늘은 다시 기사를 확인했다. 정말로 자신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특히 고소인 강태수 씨의 딸(14세, 중학생)이 이 사건의 주동자로 보인다. 미성년자가 어른들을 선동해 허위 고소를 주도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하늘은 화가 치밀었다. 자신을 주동자라고? 허위 고소라고?
학교에 가자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이들이 하늘을 보며 수군거렸다.
"야, 저거 진짜야? 하늘이가 거짓말했대."
"기사 봤어? 돈 뜯으려고 꾸민 거래."
"나 처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윤아가 달려왔다.
"하늘아, 괜찮아?"
"응...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주변의 시선이 따가웠다.
선생님도 하늘을 따로 불렀다.
"하늘아, 요즘 기사들 때문에 학교에서도 말이 많구나."
"죄송합니다."
"아니, 네 잘못은 아니야. 하지만... 학교생활에 지장이 있을 것 같으면 말해. 상담 선생님하고 이야기하거나, 필요하면 특별 조치를 취할 수도 있어."
"괜찮습니다. 제가 이겨낼게요."
하지만 하루 종일 주변의 시선과 수군거림을 견디는 건 쉽지 않았다.
점심시간, 윤아와 함께 옥상에 올라갔다.
"하늘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저 애들은 진실을 모르는 거야."
"알아. 근데... 힘들어."
"당연히 힘들지. 나도 네가 너무 안쓰러워."
윤아는 하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마. 우리가 옳은 일 하고 있는 거 알잖아."
"응..."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조민지였다.
"하늘아, 나 방송 인터뷰 제의 받았어."
"인터뷰요?"
"응. 시사 프로그램에서 우리 입장을 밝힐 기회를 주겠대. 나갈까?"
하늘은 잠시 생각했다.
"나가세요. 진실을 말해야죠."
"근데... 너도 같이 나와줬으면 좋겠어."
"저요?"
"응. 네가 나오면 더 설득력이 있을 것 같아. 실제로 증거를 찾아낸 당사자니까."
하늘은 망설였다. TV에 나간다는 게 두렵기도 했고, 더 많은 공격을 받을 것 같기도 했다.
"생각해볼게요."
오후에 김태훈 변호사의 기자회견이 열렸다. 하늘은 학교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
"박민준 측의 주장은 완전히 거짓입니다."
김 변호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수진 씨가 제공한 자료는 철저한 검증을 거쳤습니다. 회계법인의 검토 결과, 모든 내용이 사실로 확인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수진 씨가 박민준 씨와 개인적 원한이 있었다는 주장은?"
기자가 질문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이수진 씨는 양심의 가책으로 퇴사했을 뿐입니다."
"고소인 측 작가들이 공모했다는 의혹은?"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이분들은 수년간 착취당한 피해자들입니다. 오히려 박민준 씨가 피해자들을 가해자로 몰아가는 2차 가해를 하고 있습니다."
기자회견은 좋았지만, 그날 저녁 뉴스는 양쪽 주장을 동등하게 다뤘다.
"박민준 측은 조작 의혹을 제기하고, 고소인 측은 이를 부인하며 공방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마치 양쪽 다 맞을 수도 있다는 식의 보도였다.
하늘은 답답했다. 왜 진실과 거짓을 똑같이 취급하는 걸까?
그날 밤,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으며 TV를 봤다. 한 시사 프로그램에서 이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패널 중 한 명이 말했다.
"저는 박민준 씨가 억울할 수도 있다고 봅니다. 미술계에서는 작가와 제작자가 분리되는 게 흔한 일이거든요. 이걸 사기라고 하면, 많은 갤러리가 문제가 됩니다."
다른 패널이 반박했다.
"하지만 구매자를 속인 건 명백한 사기 아닙니까? '이 작가가 직접 그렸다'고 말하고 팔았는데, 실제로는 다른 사람이 그렸다면?"
"그건 해석의 문제죠. '작가의 감독 하에 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잖아요."
논쟁은 평행선을 달렸다.
하늘은 TV를 껐다.
"아빠, 우리... 이길 수 있을까요?"
아버지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대답했다.
"모르겠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야지."
"만약 지면요?"
"그래도 우리는 싸웠다는 게 중요해. 침묵하지 않았다는 것."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날, 하늘은 조민지에게 연락했다.
"작가님, 그 인터뷰... 저도 나갈게요."
"정말? 괜찮겠어?"
"네. 제가 직접 진실을 말해야 할 것 같아요."
"고마워, 하늘아. 용기 내줘서."
인터뷰는 주말에 녹화하기로 했다. 유명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토요일 오후, 하늘은 방송국에 갔다. 조민지와 아버지도 함께였다.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프로듀서가 들어왔다.
"오늘 인터뷰는 박민준 측 변호사와 함께 진행됩니다."
"네?"
"양측 입장을 모두 듣는 게 공정하니까요."
하늘은 긴장했다. 박민준 측 변호사와 직접 대면한다는 게.
스튜디오에 들어가니 이미 박민준의 변호사가 앉아 있었다. 그 날카로운 눈빛의 남자.
"안녕하세요."
변호사는 차갑게 인사했다.
녹화가 시작되었다.
진행자가 먼저 하늘에게 물었다.
"하늘 학생, 왜 이 일을 시작하게 되었나요?"
"아버지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걸 봤어요. 그래서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어떤 부당한 대우였나요?"
"아버지는 그림을 그렸지만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어요. 그리고 다른 사람 이름으로 팔렸고요."
"하지만 계약서에 동의하지 않으셨나요?"
박민준 측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아버님은 성인이고, 계약 내용을 이해하고 서명했습니다. 그런데 왜 나중에 문제를 제기하는 겁니까?"
하늘은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계약서가 불공정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약속한 돈도 주지 않았잖아요."
"밀린 돈은 갤러리 사정 때문이었습니다. 사기가 아니라 일시적인 현금 흐름 문제였죠."
"1년 넘게요? 그게 일시적인가요?"
하늘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진행자가 끼어들었다.
"변호사님, USB 자료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조작된 자료입니다. 출처도 불분명하고, 신뢰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회계법인 검증을 받았다고 하던데요?"
"그 검증도 의심스럽습니다. 어떤 회계법인인지, 어떤 방식으로 검증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조민지가 끼어들었다.
"저는 실제 피해자입니다. 제 이름으로 팔린 그림을 제가 그리지 않았어요. 이게 사기가 아니면 뭡니까?"
"증인은 계약서에 '갤러리가 작품 제작 과정에 조수를 투입할 수 있다'는 조항에 동의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가도 받았고요."
"저는 조수가 도와준다고 알았어요. 전체를 다 그릴 거라고는 몰랐고요!"
"그건 증인의 착각입니다."
공방이 치열했다.
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다. 저 변호사는 어떻게든 책임을 피하려고 했다.
"하늘 학생."
변호사가 하늘을 쳐다봤다.
"솔직히 말해보세요. 혹시 이 일로 돈을 받거나 유명해지려는 건 아닙니까?"
"뭐라고요?"
"중학생이 이렇게 큰 일을 주도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습니까? 누가 뒤에서 조종하는 건 아니고요?"
하늘은 분노로 얼굴이 빨개졌다.
"아무도 저를 조종하지 않아요! 저는 그냥 옳은 일을 하려는 거예요!"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면 무고한 사람을 함정에 빠뜨려도 되나요?"
"박민준 씨가 무고하다고요? 수십 명을 속이고 착취한 사람이?"
"그건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재판이 진행 중이니까요."
"증거가 있잖아요!"
"조작된 증거요."
하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당신들은 계속 거짓말만 하네요! 진실은 하나예요! 박민준은 나쁜 사람이고, 많은 예술가들을 괴롭혔어요!"
진행자가 개입했다.
"자, 진정하시고요. 우리 광고 후에 계속하겠습니다."
광고 시간에 하늘은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진정해. 진정하라고.'
조민지가 따라왔다.
"하늘아, 괜찮아?"
"네... 그냥 너무 화가 나서요."
"나도. 저 사람은 진실 따위는 관심 없어. 그냥 이기는 게 목표야."
"우리... 이길 수 있을까요?"
조민지는 하늘의 어깨를 잡았다.
"이겨야지. 포기하면 안 돼."
녹화가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진행자가 마무리 질문을 했다.
"마지막으로 시청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요?"
하늘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봤다.
"저는 거짓말하지 않았어요. 제 아버지도, 조민지 작가님도, 다른 피해자분들도 모두 진실을 말하고 있어요. 박민준은 많은 예술가들을 착취했어요. 그리고 지금도 거짓말로 빠져나가려고 해요. 하지만 우리는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방송은 일요일 저녁에 방영되었다.
시청률은 높았고, SNS에서는 논쟁이 뜨거웠다.
어떤 사람들은 하늘을 응원했다.
"저 어린 학생이 얼마나 용감한가. 응원한다."
어떤 사람들은 비난했다.
"중학생이 어른 일에 나서는 게 적절한가?"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모두가 이 사건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진실이 무엇인지, 곧 밝혀질 것이라는 것.
하늘은 방송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돌아갈 수 없어. 끝까지 가야 해.'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15회: 새로운 동지들
방송 이후,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월요일 아침, 하늘의 휴대폰에는 수십 통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저도 박민준 갤러리 피해자입니다. 도와주세요.'
'제 친구가 비슷한 일을 겪었어요. 연락 가능할까요?'
'용기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증언하고 싶습니다.'
하늘은 놀라서 아버지에게 보여줬다.
"아빠, 이거 봐요. 피해자들이 연락해왔어요."
아버지도 놀란 표정이었다.
"이렇게 많아?"
김태훈 변호사에게도 연락이 쏟아졌다. 오전에 급히 회의가 소집되었다.
"현재까지 연락 온 사람이 23명입니다."
김 변호사가 노트북 화면을 보여줬다.
"모두 박민준 갤러리와 관련된 피해자들입니다. 실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돈을 못 받은 사람, 이름을 도용당한 사람, 비슷한 수법으로 다른 갤러리에서 피해를 본 사람..."
"이렇게 많았어?"
조민지가 놀라며 말했다.
"방송의 힘입니다. 하늘 학생이 나와서 용기 있게 말하니까,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낸 거죠."
김 변호사는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가 유리해졌어요. 피해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이게 조직적인 범죄라는 게 명백해지니까요."
"그럼 이 분들을 어떻게 해요?"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죠. 진술서를 받고, 증거를 모으고. 추가 고소인으로 참여하실 분도 계실 거고요."
하늘은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혼자가 아니게 되는 것이다.
그 주 내내, 김 변호사 사무실에서는 피해자들과의 면담이 이어졌다.
첫 번째로 만난 사람은 박수진이라는 30대 여성 작가였다.
"저는... 3년 전에 박민준 갤러리와 계약했어요."
박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좋았어요. 제 그림이 팔린다는 게 신기했고, 돈도 들어왔으니까. 근데 1년쯤 지나니까 이상한 거예요."
"뭐가요?"
"제가 안 그린 그림이 제 이름으로 전시되고 있더라고요. SNS에 올라온 전시회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그건 제 그림이 아니었거든요."
"박민준한테 물어보셨어요?"
"물어봤죠. 그랬더니 '아, 그건 조수가 도와준 거다', '네 화풍을 학습한 사람이 그렸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는..."
박수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협박했어요. '이 일을 밖에 말하면 계약 위반이라 위약금 3천만 원을 내야 한다'고. 저는 그럴 돈이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참았어요. 2년을. 그러다 올해 초에 계약이 끝나서 갤러리를 나왔어요. 하지만 밀린 돈 700만 원은 못 받았어요."
김 변호사가 메모를 했다.
"계약서는 가지고 계세요?"
"네, 여기 있어요."
박수진이 꺼낸 계약서를 보니, 아버지의 것과 거의 똑같았다. 같은 형식, 같은 교묘한 조항들.
"이분도 추가 고소인으로 참여하시겠어요?"
"네.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아요."
두 번째는 이철민이라는 40대 중반 남자였다.
"저는 박민준한테 5년간 일했습니다."
이철민은 수척한 얼굴에 깊은 다크서클이 있었다.
"처음에는 '실력 있는 작가'로 대우해주더니, 점점 노예처럼 부리더라고요. 한 달에 그림 10점씩 그려야 했어요."
"10점이요?"
"네. 밤새워 그렸어요. 가족도 못 보고. 건강도 망가지고."
이철민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팔에는 물감 알레르기로 인한 발진 자국이 가득했다.
"몸이 이렇게 되어도 쉴 수 없었어요. 쉬면 돈을 안 주니까. 그리고 이미 밀린 돈이 있으니까 계속 일할 수밖에 없었어요."
"밀린 돈이 얼마예요?"
"2,400만 원입니다."
하늘은 충격을 받았다. 아버지보다 두 배나 많았다.
"저도... 고소에 참여하고 싶습니다. 제 인생을 돌려받고 싶어요."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피해자들의 이야기는 비슷하면서도 각자 아팠다.
어떤 사람은 박민준 때문에 빚을 졌고,
어떤 사람은 가정이 파탄 났고,
어떤 사람은 건강을 잃었다.
모두가 예술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박민준은 그 사랑을 이용해 착취했다.
일주일간의 면담 끝에, 총 17명이 추가 고소인으로 참여하기로 했다.
"이제 우리는 19명입니다."
김 변호사가 회의실에 모인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혼자였을 때는 약했지만, 함께 모이니 강해졌습니다. 우리는 이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지만, 같은 고통을 겪었기에 금방 가까워졌다.
"그런데 변호사님."
박수진이 손을 들었다.
"박민준 측에서 반격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물론 반격할 겁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도 준비되어 있어요."
김 변호사는 서류를 꺼냈다.
"여러분의 증언과 증거를 모두 정리했습니다. 계약서, 작업 지시 메일, 밀린 돈 내역... 모든 게 패턴을 보입니다. 이건 우연이 아니라 시스템이에요."
"다음 공판은 언제예요?"
"다음 주 금요일입니다. 그때 추가 증인으로 여러분이 출석하실 수 있어요."
사람들은 긴장한 표정이었다. 법정에 선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섭습니다."
이철민이 솔직하게 말했다.
"저도요."
박수진이 동의했다.
"하지만 해야죠. 안 그러면 박민준은 계속 나쁜 짓을 할 테니까."
하늘이 일어서서 말했다.
"저도 무서워요. 진짜로. 학교에서도 힘들고, 협박도 받았어요. 하지만..."
하늘은 사람들을 둘러봤다.
"우리가 포기하면, 앞으로 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거예요. 우리가 막아야 해요."
사람들의 눈빛이 변했다. 두려움에서 결연함으로.
"맞아요. 우리가 해야죠."
"이제 우리가 많잖아요. 혼자가 아니니까 할 수 있어요."
회의가 끝나고, 하늘은 아버지, 조민지와 함께 커피숍에 앉았다.
"많이 달라졌지?"
조민지가 말했다.
"한 달 전만 해도 우리 다섯 명뿐이었는데, 이제는 19명이야."
"방송의 힘이 컸어요."
아버지가 하늘을 보며 말했다.
"하늘아, 네가 TV에 나와서 용기 있게 말해줘서 이렇게 됐어. 고맙다."
"저는 그냥..."
"아니야. 네 덕분이야. 네가 없었으면 우리는 여전히 숨어서 두려워하고 있었을 거야."
하늘은 부끄러웠지만 뿌듯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윤아에게 전화가 왔다.
"하늘아, 너 대박이야!"
"왜?"
"학교 분위기 완전 바뀌었어. 다들 네 편이야!"
"진짜?"
"응. 추가 피해자들 나왔다는 기사 보고, 다들 '하늘이가 진짜였구나', '박민준이 진짜 나쁜 놈이구나' 이러더라."
"휴... 다행이다."
"그리고 내일 학교 오면 깜짝 놀랄 거야."
"왜?"
"비밀! 내일 와봐."
다음 날 학교에 가니, 정말로 깜짝 놀랄 일이 있었다.
교실 칠판에 큰 종이가 붙어 있었다.
'하늘아, 응원해! 우리가 널 믿어!'
그 아래에는 반 아이들의 서명이 빼곡했다.
"우와..."
"놀랐지?"
윤아가 웃으며 다가왔다.
"내가 어제 애들 모아서 만들었어. 다들 응원한대."
반 아이들이 하나둘 다가왔다.
"하늘아, 미안해. 우리가 너무 쉽게 의심했어."
"맞아. 진짜 대단한 일 하고 있더라."
"우리가 도울 수 있는 거 있어?"
하늘은 눈물이 났다. 좋은 눈물이었다.
"고마워, 얘들아."
그날 점심시간, 교장 선생님이 다시 하늘을 불렀다.
"하늘 학생, 요즘 더 힘들어진 것 같던데 괜찮아?"
"네, 이제는 괜찮아요."
"다행이네.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교장 선생님은 서류를 꺼냈다.
"학교에서 하늘 학생에게 '청소년 정의상'을 수여하기로 했어. 다음 주 조회 때 시상식이 있을 거야."
"정의상이요?"
"응. 옳은 일을 위해 용기 있게 행동한 학생에게 주는 상이야. 하늘이가 딱 맞지."
하늘은 얼떨떨했다.
"감사합니다..."
"천만에. 하늘이는 우리 학교의 자랑이야."
그 주말, 하늘은 새로 참여한 피해자들과 함께 준비 모임을 가졌다.
다들 각자의 증거와 진술서를 준비해왔다.
"제 경우에는 작업 지시 이메일이 200통 넘게 있어요."
"저는 박민준이 컬렉터들한테 거짓말하는 걸 녹음한 파일이 있어요."
"저는 밀린 돈 독촉하는 문자 메시지 기록이..."
증거가 쌓여갔다. 각자는 약했지만, 함께 모으니 강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김 변호사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공판에서 박민준 측을 완전히 압도할 수 있어요."
"정말요?"
"네. 이제 이건 단순한 개인 간 분쟁이 아니에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사기 사건이에요. 검찰도 더 강력하게 수사할 거예요."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보였다.
모임이 끝나고, 하늘은 아버지와 한강을 걸었다.
"아빠, 우리 이길 것 같아요."
"나도 그렇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불가능할 것 같았는데..."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너와 나, 그리고 모두가."
아버지는 하늘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말했다.
"하늘아, 아빠가 너한테 배웠어. 용기를."
"제가요?"
"응. 너는 열네 살인데도 두려워하지 않고 옳은 일을 했잖아. 아빠는 마흔이 넘도록 숨어만 있었는데."
"아빠도 이제는 용기 내셨잖아요."
"네 덕분이지."
두 사람은 한강 다리 위에 서서 야경을 바라봤다.
불빛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은 있었다.
"아빠, 우리 이기면 뭐 하고 싶으세요?"
"글쎄... 그림을 그리고 싶어. 내 이름으로."
"어떤 그림이요?"
"너를 그리고 싶어. 용감한 내 딸을."
하늘은 아버지를 껴안았다.
"그럼 저도 아빠 그릴래요. 저를 지켜준 아빠를."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지만 상쾌했다.
하늘은 생각했다.
'우리는 이길 거야. 반드시.'
'그리고 모든 예술가들이 자유롭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거야.'
'그게 우리의 싸움이야.'
다음 주 금요일, 두 번째 공판이 열린다.
이번에는 달랐다.
19명의 피해자가 함께 법정에 섰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리고 진실은, 숫자로도 증명될 것이었다.
하늘은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 싸움을 위해.
16회: 증언대의 진실들
두 번째 공판 날 아침, 법원 앞은 더욱 붐볐다.
19명의 고소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기자들의 카메라가 쉴 새 없이 플래시를 터뜨렸다.
"이번 공판의 의미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기자가 김태훈 변호사에게 물었다.
"개인의 싸움이 아닌, 시스템에 대한 도전입니다. 오늘 우리는 미술계의 어두운 관행이 범죄임을 증명할 것입니다."
법정 안으로 들어가니 방청석은 이미 만석이었다. 피해자들의 가족, 미술계 인사들, 언론인들로 가득했다.
박민준 측도 준비를 단단히 한 모양이었다. 변호사가 다섯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판사가 입장했다. 같은 여성 판사였다.
"제2021고단5847호 사기 등 사건 두 번째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검사가 먼저 일어섰다.
"재판장님, 지난 공판 이후 추가로 17명의 피해자가 나타났습니다. 모두 피고인 박민준과 유사한 피해를 입었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17명이나요?"
판사도 놀란 표정이었다.
"네. 이는 피고인의 범행이 일회성이 아닌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벌떡 일어섰다.
"이의 있습니다! 추가 고소인들의 진술은 검증되지 않았습니다. 혹시 모방 범죄나 편승 고소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증언과 증거를 오늘 제출하겠습니다."
검사는 두꺼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17명의 진술서, 계약서, 이메일 기록, 금전 거래 내역... 모두 여기 있습니다."
판사가 서류를 받아 훑어봤다.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증인 신문을 진행하겠습니다. 첫 번째 증인, 박수진 씨 나오십시오."
박수진이 떨리는 걸음으로 증인석에 섰다.
"증인은 피고인과 어떤 관계입니까?"
"2020년부터 2023년까지 피고인의 갤러리와 계약 관계에 있었습니다."
"어떤 일을 겪었습니까?"
박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증언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 그림이 팔린다고 기뻤습니다. 하지만 1년 후, SNS에서 제 이름으로 전시된 그림을 봤는데... 제가 그린 게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작가는 압니다. 자기 작품과 남의 작품을. 붓 터치, 색감, 구도... 모든 게 달랐습니다."
"피고인에게 항의했습니까?"
"했습니다. 그랬더니..."
박수진의 목소리가 떨렸다.
"협박했습니다. '계약 위반이니 위약금 3천만 원을 내라', '업계에서 못 살게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반대 신문에 나섰다.
"증인, 계약서를 읽어보고 서명했죠?"
"네, 하지만..."
"그럼 계약 내용에 동의한 겁니다. 그런데 왜 나중에 문제를 제기합니까?"
"계약서가 교묘하게 쓰여 있어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건 증인의 책임 아닙니까? 성인이면 계약서를 제대로 읽어야죠."
박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하늘은 주먹을 쥐었다. 저 변호사는 계속 같은 방식으로 공격하고 있었다.
두 번째 증인은 이철민이었다.
"저는 5년간 매달 10점씩, 총 600점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600점이요?"
판사가 놀라며 물었다.
"네. 밤낮으로 그렸습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가족도 못 보고..."
이철민은 소매를 걷어 올렸다.
"몸이 이렇게 망가졌습니다. 하지만 멈출 수 없었습니다. 밀린 돈 2,400만 원을 받아야 했으니까요."
"피고인은 돈을 주지 않았습니까?"
"조금씩, 아주 조금씩만 줬습니다. '다음 달에 준다', '컬렉터가 아직 입금 안 했다' 핑계를 대면서요. 그렇게 저를 계속 일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철민의 증언은 가슴 아팠다. 방청석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
증인들이 차례로 나와 증언했다.
모두의 이야기는 비슷했다.
처음에는 희망을 주고, 점점 착취하고, 결국 협박으로 입을 막는다.
박민준의 시스템이었다.
점심 휴정 시간, 복도에서 하늘은 다른 피해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다들 잘하고 계세요."
"너무 떨려요. 저 변호사가 너무 공격적이에요."
"괜찮아요. 우리가 진실을 말하는 거예요."
그때 박민준이 변호사들과 함께 지나갔다.
박민준은 하늘을 보더니 냉소를 띠었다.
"중학생이 어른들 선동해서 여기까지 왔네. 대단하다."
하늘은 그를 똑바로 쳐다봤다.
"진실은 숨길 수 없어요."
"진실? 내가 니네 아버지들한테 일자리 준 게 진실이지. 감사는 못 할망정 고소를 하다니."
"일자리가 아니라 착취였어요."
박민준은 비웃었다.
"너 같은 애가 뭘 알아. 세상이 얼마나 냉정한지. 재능 없는 화가들이 얼마나 많은지."
"우리 아빠는 재능 있어요! 당신이 그걸 이용한 거잖아요!"
하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주변 사람들이 쳐다봤다.
박민준의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그만하시죠. 재판정에서 봅시다."
오후 재판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검사가 증거 자료를 제시했다.
"재판장님, 피고인 갤러리의 판매 장부와 실제 작가들에게 지급한 금액을 비교한 표입니다."
대형 모니터에 표가 나타났다.
작품명 | 판매가 | 실제 제작자 지급액 | 차액
도시의 리듬 | 800만원 | 80만원 | 720만원
고요한 울림 | 500만원 | 80만원 | 420만원
...
표는 계속 이어졌다. 수백 개의 항목.
"총 차액은 39억 원입니다. 이 돈은 어디로 갔습니까?"
검사가 박민준을 쳐다봤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대답했다.
"갤러리 운영비, 마케팅 비용, 전시 비용... 정당한 비용입니다."
"39억 원이 모두 비용이라고요?"
"갤러리 운영에는 돈이 많이 듭니다."
"그렇다면 장부를 제출하십시오.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
박민준 측 변호사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그건... 영업 비밀입니다."
"영업 비밀이요? 형사 재판에서요?"
"준비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판사가 끼어들었다.
"다음 공판까지 장부를 제출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불리하게 판단하겠습니다."
박민준의 얼굴이 굳었다.
검사는 계속해서 증거를 제시했다.
이메일 기록, 문자 메시지, 통화 녹음...
박민준이 작가들을 협박하고, 구매자들을 속이고, 돈을 착복한 증거들이었다.
특히 결정적인 것은 컬렉터와의 통화 녹음이었다.
"이 작품은 김현우 작가가 직접 그린 겁니까?"
"물론입니다. 작가가 3개월간 공들여 완성했습니다."
"정말 본인이 직접요? 조수나 다른 사람이 아니고요?"
"100% 작가 본인이 그렸습니다. 제가 보증합니다."
녹음이 재생되자 방청석이 술렁였다.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아버지나 다른 작가가 그렸으니까.
박민준은 얼굴이 창백해졌다.
"변호인, 설명하시겠습니까?"
판사가 물었다.
"저, 그건... 업계 관행상 '작가'라는 개념이..."
"예 아니면 아니오로 대답하십시오. 피고인은 구매자에게 거짓말을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변호사는 대답하지 못했다.
마침내 하늘의 차례가 왔다.
"증인 강하늘, 앞으로 나오십시오."
하늘은 떨리는 다리로 증인석에 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선서를 마치고, 검사가 질문했다.
"증인, 이 사건을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아버지 작업실에서 우연히 봤습니다. 유명 작가들의 그림과 똑같은 그림을 아버지가 그리고 계셨어요."
"그때 어떤 생각이 들었습니까?"
"이상했어요. 아버지는 평생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겠다고 하신 분이었거든요. 왜 다른 사람 그림을 베끼고 계실까 궁금했어요."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조사하기 시작했어요. 친구 윤아와 함께요. 갤러리도 가보고, 피해자분들도 만나고..."
하늘은 지난 두 달간의 일들을 차분히 증언했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반대 신문에 나섰다.
"증인, 중학생 신분으로 이런 복잡한 일을 조사했다는 게 믿기 어렵네요."
"사실이에요."
"혹시 누가 뒤에서 시킨 건 아닙니까? 어떤 단체나 경쟁 갤러리 같은 곳에서?"
"아니에요. 저 혼자 결정했어요."
"14살 아이가요?"
"나이가 중요한가요? 옳고 그른 것은 나이와 상관없잖아요."
하늘의 대답에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졌다.
판사가 망치를 두드렸다.
"정숙!"
변호사는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공격했다.
"증인은 아버지를 위해 거짓 증언을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에요. 저는 진실만 말하고 있어요."
"하지만 증인은 미성년자이고,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있습니다.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그럼 변호사님은요?"
하늘이 반박했다.
"변호사님도 박민준 씨한테 돈 받고 일하시잖아요. 그럼 객관적일 수 없는 거 아닌가요?"
방청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변호사는 얼굴이 붉어졌다.
"이의 있습니다! 증인이 무례합니다!"
판사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변호인이 먼저 공격했으니 증인이 반박하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하늘의 증언은 계속되었다.
어떻게 증거를 모았는지, 이수진을 어떻게 만났는지, 한강공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든 것을 솔직하게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검사가 말했다.
"증인은 왜 이 일을 했습니까? 위험도 많았고, 협박도 받았는데요."
하늘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아버지가... 매일 밤 다른 사람 그림 베끼면서 괴로워하시는 걸 봤어요. 그게 너무 슬펐어요. 아버지는 예술가인데, 자기 이름으로 그림을 못 그리잖아요."
하늘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조민지 작가님, 이철민 선생님, 모든 분들이... 꿈을 가지고 그림을 시작했는데, 박민준 씨 때문에 고통받고 계셨어요. 그게 잘못됐다고 생각했어요."
"용감했습니다."
검사가 말했다.
"이상입니다."
하늘이 증인석에서 내려오자, 아버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라는 입모양이었다.
재판은 저녁까지 계속되었다.
마침내 판사가 말했다.
"오늘 공판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다음 공판에서 피고인 측의 입장을 듣겠습니다. 그리고..."
판사는 박민준을 쳐다봤다.
"피고인 측은 다음 공판까지 갤러리 운영 장부를 제출하십시오. 39억 원의 사용처를 명확히 밝혀야 합니다."
박민준의 얼굴은 창백했다.
법정을 나오며, 김태훈 변호사가 말했다.
"오늘 우리가 이겼습니다."
"정말요?"
"네. 증언도 좋았고, 증거도 확실했습니다. 무엇보다..."
김 변호사는 법정 문을 가리켰다.
"저들이 흔들리고 있어요. 장부 제출하라는 명령에 당황하는 게 보였죠? 제출 못 할 겁니다. 실제로는 박민준이 착복했으니까요."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보였다.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건가요?"
박수진이 물었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그날 밤, 뉴스는 오늘 재판을 대서특필했다.
"박민준 재판, 19명의 증언으로 정국 반전"
"법원, 갤러리 장부 제출 명령... 박민준 궁지에"
"중학생 증인의 당당한 증언, 방청객 감동"
하늘은 뉴스를 보며 생각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조금만 더.'
하지만 박민준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반격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예상보다 빨리, 예상보다 강하게 왔다.
17회: 마지막 반격
재판 다음 날 아침, 하늘은 충격적인 기사로 잠에서 깼다.
"박민준 측, 고소인들 무고죄로 맞고소"
"'조직적 사기극' 주장... 총 19명 전원 고소"
"손해배상 100억 원 청구"
하늘은 벌떡 일어나 기사를 읽었다.
'박민준 측 변호인단은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강태수 씨를 비롯한 고소인 19명 전원을 무고죄로 고소했다고 밝혔다. 변호인단은 "이들은 박민준 관장으로부터 정당한 대가를 받고도 더 많은 돈을 뜯어내기 위해 거짓 고소를 했다"며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사기극"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민사소송으로 총 10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박민준 씨의 명예 훼손과 갤러리 영업 손실을 이유로 고소인 1명당 약 5억 원씩을 청구한 것이다.'
하늘은 손이 떨렸다. 5억 원? 그런 돈이 어디 있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렸다. 조민지, 박수진, 이철민... 모두가 공황 상태였다.
"하늘아, 이거 봤어?"
조민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네... 방금 봤어요."
"5억 원이래. 나 그런 돈 없어. 집도 팔아야 할 거야."
"작가님..."
"무섭다, 하늘아. 진짜 무서워."
다른 피해자들도 같은 반응이었다.
"변호사님, 이거 진짜예요? 우리가 5억씩 물어줘야 해요?"
이철민의 목소리도 패닉 상태였다.
김태훈 변호사는 긴급 회의를 소집했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이건 전형적인 공포 마케팅입니다."
"하지만 정말 고소했잖아요!"
"고소는 누구나 할 수 있어요. 중요한 건 그게 받아들여질지 여부입니다."
김 변호사는 서류를 펼쳤다.
"무고죄가 성립하려면, 우리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고의로 고소했다는 걸 증명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진실을 말했고, 충분한 증거도 있습니다. 무고죄는 성립하지 않아요."
"그럼 손해배상은요?"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박민준이 실제로 피해를 입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데, 오히려 그가 가해자라는 증거가 더 많죠."
하지만 사람들의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래도... 만약에 지면 어떡해요?"
"그럴 일 없습니다."
김 변호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건 우리를 겁주려는 전략일 뿐입니다. 흔들리면 안 돼요."
하지만 그날 저녁, 첫 번째 이탈자가 나왔다.
"미안합니다. 저는... 고소를 취하하겠습니다."
한 40대 남성 작가가 고개를 숙였다.
"5억 원은 너무 커요. 제게는 아내도 있고, 아이들도 있어요.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요."
"하지만 함께 싸우기로 했잖아요!"
조민지가 말했다.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저는... 못 하겠어요."
그는 그렇게 떠났다.
그리고 그 다음날, 또 한 명이 떠났다.
"저도... 죄송합니다."
젊은 여성 작가였다.
"부모님이 너무 걱정하셔서요. 계속하지 말라고..."
19명이었던 고소인은 이틀 만에 17명으로 줄었다.
하늘은 불안했다. 이렇게 하나씩 떨어져 나가면 어떡하지?
학교에서도 분위기가 다시 이상해졌다.
"야, 하늘이가 100억 소송 당했대."
"진짜? 대박..."
"만약 지면 어떡하지? 집도 다 날릴 거 아냐?"
수군거림이 다시 시작됐다.
윤아가 다가왔다.
"하늘아, 괜찮아?"
"응... 괜찮아."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박민준의 반격은 예상보다 강력했다.
그날 오후, 더 충격적인 뉴스가 터졌다.
"박민준 갤러리, 유명 재벌가와 정치인 후원 받아"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 명목으로 수십억 지원"
"고위층 인사들 박민준 옹호 성명"
기사를 읽어보니 놀라운 내용이었다.
재벌 그룹 회장, 국회의원, 전직 장관... 이런 사람들이 박민준을 옹호하는 성명을 냈다.
"박민준 관장은 오랫동안 신진 작가 발굴에 힘써온 미술계의 중요한 인물이다."
"일부 불만 세력의 음해로 무고한 사람이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된다."
"박민준 관장의 무죄를 믿으며, 사법부의 공정한 판단을 기대한다."
하늘은 충격을 받았다. 이수진이 말했던 '뒤의 큰 손들'이 드러난 것이다.
아버지도 기사를 보고 얼굴이 굳었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아빠, 우리... 이길 수 있을까요?"
"모르겠다, 하늘아. 상대가 너무 크다."
그날 밤, 긴급 회의가 열렸다.
남은 17명의 고소인들이 모였지만, 분위기는 침울했다.
"이건...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싸움이 아닌 것 같아요."
박수진이 말했다.
"재벌이랑 정치인들까지 나서는데,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요?"
"포기하시려는 건가요?"
하늘이 물었다.
"포기라기보다는... 현실을 봐야죠. 우리는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에요. 돈도 없고, 권력도 없고..."
"하지만 진실은 있잖아요!"
"진실만으로는 안 돼요, 하늘아."
이철민이 한숨을 쉬었다.
"세상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아요. 돈과 권력이 진실을 이기는 경우가 많아요."
김태훈 변호사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싸우는 거 아닙니까? 그런 불공정한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요."
"하지만 변호사님,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우리가 유리합니다."
김 변호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증거가 있고, 증인이 있고, 법이 우리 편입니다. 저 유명인들의 성명이 뭐가 중요합니까? 그들은 재판의 당사자도 아니에요."
"하지만 여론을 움직일 수 있잖아요."
"여론은 우리도 움직일 수 있어요."
바로 그때, 회의실 문이 열렸다.
낯선 50대 남자가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저는 MBC 시사 프로그램 PD 김성호라고 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여러분의 이야기를 다큐멘터리로 만들고 싶습니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다큐멘터리요?"
"네. 1시간짜리 특집으로요. '미술계의 어둠, 그리고 싸우는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요."
PD는 자료를 꺼냈다.
"이미 취재를 시작했습니다. 박민준 갤러리의 비리, 피해자들의 증언, 그리고 배후 세력까지... 모두 다룰 겁니다."
"방송이 나가면... 어떻게 되나요?"
"여론이 바뀔 겁니다. 지금은 박민준을 옹호하는 목소리가 크지만, 실체가 드러나면 달라질 거예요."
하늘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언제 방송되나요?"
"다음 주 일요일 밤 9시. 골든타임입니다. 수백만 명이 볼 거예요."
사람들의 얼굴에 희망이 돌아왔다.
"정말... 우리 이야기를 제대로 다뤄주실 건가요?"
"물론입니다. 저도 이 사건을 보고 분노했습니다. 예술가들이 착취당하는 걸 보고만 있을 수 없었어요."
김 PD는 진지한 눈빛으로 말했다.
"여러분이 용기를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저희가 여러분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회의 후, 하늘은 아버지와 함께 집으로 걸어갔다.
"아빠, 우리 다큐멘터리 찍는 거예요?"
"그런 것 같구나."
"무섭지 않으세요?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는 거잖아요."
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바라봤다.
"무섭지. 하지만... 이제는 숨고 싶지 않아. 당당하고 싶어."
"아빠..."
"하늘아, 너 덕분이야. 네가 나한테 용기를 줬어. 이제 나도 떳떳하게 싸우고 싶어."
하늘은 아버지를 껴안았다.
다음 주 내내 다큐멘터리 촬영이 진행됐다.
아버지의 작업실, 조민지의 작업실, 다른 피해자들의 인터뷰...
그리고 하늘도 인터뷰를 했다.
"왜 이 일을 시작했나요?"
PD가 물었다.
"아버지를 도와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하늘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봤다.
"예술가들이 정당한 대우를 받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어요. 재능이 착취당하지 않는 세상이요."
촬영팀은 박민준 갤러리도 찾아갔다. 하지만 인터뷰는 거부당했다.
대신 갤러리 앞에서 피켓을 든 사람들을 만났다.
"박민준 규탄!"
"예술가 착취 중단!"
"진실을 밝혀라!"
시민단체와 미술 대학 학생들이 모여 시위를 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시위하셨어요?"
"일주일 전부터요. 뉴스 보고 너무 화가 나서요."
한 대학생이 대답했다.
"저도 미술 전공인데, 나중에 저렇게 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까 남 일 같지 않았어요."
시위는 점점 커졌다. 처음에는 몇 명이었지만,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SNS에서도 해시태그 운동이 일어났다.
#박민준_규탄
#예술가를_지켜라
#강하늘_응원
특히 젊은 세대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중학생도 용기 냈는데, 우리가 가만있으면 안 되지."
"이건 단순히 미술계만의 문제가 아니야. 을의 입장에서 갑에게 착취당하는 모든 사람들의 문제야."
여론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드디어 일요일이 왔다.
다큐멘터리 방송 날.
하늘은 가족, 윤아, 그리고 몇몇 피해자들과 함께 TV 앞에 앉았다.
밤 9시, 방송이 시작됐다.
"미술계의 어둠, 그리고 싸우는 사람들"
화면에는 아버지가 그림 그리는 모습이 나왔다.
"저는 20년간 화가로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제 이름으로 그림을 판 적은 거의 없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다큐멘터리는 체계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민준의 수법, 피해자들의 증언, 증거 자료, 그리고 배후 세력까지...
1시간 동안 모든 진실이 공개됐다.
특히 마지막에 나온 하늘의 인터뷰는 강렬했다.
"저는 그냥 중학생이에요. 아무 힘도 없어요. 하지만 옳은 일을 할 수는 있어요. 나이나 힘이 중요한 게 아니라, 용기가 중요한 거예요."
방송이 끝나자, SNS가 폭발했다.
"눈물 났다..."
"박민준 진짜 최악이네"
"강하늘 학생 존경합니다"
"이거 봐야 함. 진짜 충격적"
실시간 검색어 1위부터 10위까지가 모두 이 다큐와 관련된 단어였다.
다음 날 아침, 모든 신문이 이 사건을 1면에 실었다.
"다큐 '미술계의 어둠' 충격... 시청률 15% 돌파"
"박민준 옹호했던 인사들, 침묵"
"검찰, 박민준 배후 세력 수사 착수"
여론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리고 이틀 후,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다.
"강태수 씨!"
김태훈 변호사가 흥분해서 전화했다.
"박민준이 합의 제안했습니다!"
"합의요?"
"네! 모든 혐의를 인정하고, 밀린 돈 전액 지급하고, 추가 위자료까지 주겠대요!"
하늘은 아버지 옆에서 전화를 듣고 있었다.
"그럼... 우리가 이긴 건가요?"
"거의 다 이긴 겁니다! 이제 합의 조건만 협상하면 돼요!"
하늘은 믿기지 않았다.
정말... 이긴 걸까?
긴 싸움이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진짜 승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재판에서의 공식적인 승리.
그리고 시스템의 변화.
하늘의 싸움은 계속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혼자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하고 있었다.
18회: 합의의 조건
김태훈 변호사 사무실에 고소인들이 모였다. 박민준 측의 합의 제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합의 조건은 이렇습니다."
김 변호사가 서류를 펼쳤다.
"첫째, 박민준은 모든 혐의를 인정합니다. 둘째, 밀린 돈 전액과 추가 위자료 30%를 지급합니다. 셋째, 공개 사과문을 발표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 안도가 번졌다.
"그럼... 끝난 건가요?"
박수진이 물었다.
"아직 조건이 더 있습니다."
김 변호사는 다음 장을 넘겼다.
"넷째, 고소인들은 형사 고소를 취하합니다. 다섯째, 향후 이 사건에 대해 어떤 공개 발언도 하지 않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잠깐만요."
조민지가 손을 들었다.
"형사 고소를 취하하면, 박민준은 처벌을 안 받는 거잖아요?"
"그렇습니다."
"그럼 안 되죠! 돈만 받고 끝나면, 박민준은 또 똑같은 짓을 할 거예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맞아요. 처벌을 받아야죠."
"공개 발언도 못 한다고요? 그럼 진실을 말할 수도 없잖아요."
하늘도 불편했다. 이건 정의가 아니라 거래였다.
"여러분."
김 변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현실적으로 생각해봅시다. 재판을 계속하면 1년, 어쩌면 2년이 더 걸릴 수 있습니다. 그동안 여러분은 계속 불안하게 살아야 해요."
"하지만..."
"그리고 박민준 배후에는 큰 세력이 있습니다. 그들이 개입하면 재판이 어떻게 될지 몰라요. 지금 합의하는 게 안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철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합의하고 싶습니다. 2,400만 원만 받아도 저는 새 출발할 수 있어요."
"저도요."
다른 사람도 동의했다.
"이제 그만 싸우고 싶어요. 너무 지쳤어요."
하나둘 동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하늘은 답답했다.
"하지만 이렇게 끝나면, 박민준은 또 다른 사람들을 괴롭힐 거예요!"
"하늘아."
아버지가 하늘의 손을 잡았다.
"사람들이 지친 거야. 더 싸우라고 강요할 수는 없어."
"하지만 아빠..."
"나도 알아. 이게 완전한 승리는 아니라는 거.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을 둘러봤다.
"각자 사정이 있어. 빚도 있고, 가족도 있고. 더 견디기 힘든 사람도 있는 거야."
김 변호사가 말했다.
"투표로 결정하시죠. 합의에 찬성하시는 분?"
17명 중 12명이 손을 들었다.
"반대하시는 분?"
하늘, 아버지, 조민지, 그리고 두 명이 더. 총 5명이었다.
"다수결로 합의가 결정되었습니다."
하늘은 주먹을 꽉 쥐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나고, 하늘은 조민지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이건... 아니잖아요."
하늘의 목소리가 떨렸다.
"우리가 이렇게까지 싸웠는데, 돈 받고 입 다물라고요?"
"나도 화가 나. 진짜로."
조민지도 눈물을 글썽였다.
"하지만 어쩌겠어. 사람들이 원하는데."
"그럼 박민준은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처벌도 안 받고?"
"검찰이 직권으로 수사할 수도 있어. 우리가 고소를 취하해도."
"그럴까요?"
"모르겠어. 하지만..."
조민지는 하늘의 어깨를 잡았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 그걸로 충분해."
"충분하지 않아요!"
하늘이 소리쳤다.
"박민준은 계속 나쁜 짓을 할 거예요! 우리가 막아야 했는데!"
"하늘아..."
"저는... 합의 안 할래요."
하늘은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계속 싸울 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물었다.
"정말 계속 싸울 거니?"
"네."
"힘들 거야. 혼자서는."
"괜찮아요."
하늘은 창밖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해야 하잖아요."
아버지는 한참을 운전하다가 말했다.
"나도 함께할게."
"네?"
"나도 합의 안 할 거야. 너 혼자 두고 갈 수 없지."
하늘은 아버지를 보며 눈물을 흘렸다.
"고마워요, 아빠."
그날 밤, 윤아에게 전화가 왔다.
"하늘아, 들었어. 합의한다고."
"응... 대부분이 원했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나는 안 해. 계속 싸울 거야."
윤아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나도 도와줄게."
"윤아야..."
"나 처음에 겁먹고 도망쳤잖아. 이번에는 끝까지 함께할게."
하늘은 눈물이 났다. 좋은 눈물이었다.
"고마워. 진짜로."
다음 날, 김태훈 변호사를 다시 찾아갔다.
"변호사님, 저희는 합의 안 할래요."
"강태수 씨, 강하늘 학생, 그리고 조민지 씨... 세 분이군요."
"네. 우리는 재판을 계속하고 싶어요."
김 변호사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알고 계시죠? 다른 사람들이 합의하면, 여러분만 남습니다. 훨씬 힘들어질 거예요."
"알아요. 하지만 해야 해요."
하늘이 단호하게 말했다.
"박민준이 처벌받는 걸 보고 싶어요. 그래야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낼 수 있어요."
김 변호사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제가 도와드리죠. 끝까지."
"감사합니다."
"하지만 조건이 있어요."
"뭔데요?"
"이제부터는 더 전략적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언론도 활용하고, 시민단체도 연대하고, 국회도 움직이게 해야 해요."
"어떻게요?"
"일단 기자회견부터 합시다. 왜 우리가 합의를 거부했는지 밝히는 거죠."
이틀 후, 기자회견이 열렸다.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모였다.
"저희는 박민준 측의 합의 제안을 거부했습니다."
김 변호사가 발표했다.
"돈만 받고 입을 다물라는 조건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박민준은 반드시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기자들이 질문을 쏟아냈다.
"다른 고소인들은 합의했는데, 왜 세 분만 거부하셨나요?"
하늘이 마이크 앞으로 나섰다.
"우리가 원한 건 돈이 아니에요. 정의예요."
하늘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또렷했다.
"박민준이 처벌받지 않으면, 또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볼 거예요. 그걸 막고 싶어요."
"하지만 재판이 길어지면 힘들지 않나요?"
"힘들죠. 무서워요. 하지만..."
하늘은 카메라를 똑바로 쳐다봤다.
"옳은 일이니까 해야죠. 나이나 힘이 중요한 게 아니에요. 용기가 중요한 거예요."
그날 기자회견은 모든 뉴스에 나왔다.
"중학생의 용기... '돈보다 정의' 합의 거부"
"박민준 재판, 3인의 고소인만 남아"
"끝까지 싸우겠다는 강하늘 양"
SNS는 또다시 폭발했다.
"14살이 어른들보다 용감하네"
"돈 받고 입 다물라는 게 말이 돼?"
"하늘이 응원합니다"
여론은 다시 한번 하늘 편이 되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합의했던 고소인 중 세 명이 마음을 바꿨다.
"저희도... 다시 합류하고 싶습니다."
박수진이었다.
"하늘이를 보니까 부끄러웠어요. 14살 아이가 저렇게 용기 있는데, 저는 돈 때문에 포기하려 했다니..."
이철민도 왔다.
"저도 다시 싸우고 싶습니다.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한 명 더 합류했다.
다시 6명이 되었다.
"감사합니다."
하늘이 그들을 껴안았다.
"함께 해주셔서."
"우리가 고마워. 네가 우리에게 용기를 줬어."
김 변호사는 전략을 짰다.
"이제 우리는 소수지만, 더 강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서류를 펼쳤다.
"시민단체 12곳이 우리를 지지한다고 했어요. 미술인 협회도, 변호사 단체도, 교수 단체도요."
"정말요?"
"네. 그리고 국회의원 3명이 이 문제를 국정감사에서 다루겠대요."
"국정감사요?"
"네. 미술계 비리와 예술가 인권 문제로요. 박민준뿐만 아니라 시스템 자체를 바꾸는 거죠."
하늘의 가슴이 뛰었다.
'정말... 바꿀 수 있을까? 시스템을?'
한 달 후, 국회에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국정감사가 열렸다.
하늘과 아버지는 참고인으로 출석했다.
국회의원이 문화부 장관에게 물었다.
"장관님, 미술계의 불공정 거래와 예술가 착취 문제, 알고 계십니까?"
"네, 보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았습니까?"
"현재 검토 중입니다."
"검토만 5년째 하고 계시네요!"
의원은 서류를 탁 내려쳤다.
"박민준 사건만이 아닙니다. 수많은 갤러리가 비슷한 수법을 쓰고 있어요. 작가와 제작자를 분리하고, 부당한 계약을 강요하고, 돈을 떼먹고..."
"제도 개선을 추진하겠습니다."
"언제요? 또 5년 후요?"
"빠른 시일 내에..."
"구체적인 날짜를 말씀해주십시오!"
국정감사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하늘도 증언했다.
"저는 중학생이라 어려운 말은 잘 모르지만, 한 가지는 알아요. 예술가들이 자기 그림을 자기 이름으로 팔 수 있어야 한다는 거요. 당연한 권리잖아요."
"잘 말했어요."
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관님, 들으셨죠? 중학생도 아는 당연한 권리를 왜 보호하지 못합니까?"
국정감사 이후, 분위기가 바뀌었다.
문화부는 '미술 거래 공정화 방안'을 발표했다.
표준 계약서 제정, 갤러리 등록제, 분쟁 조정 기구 설치...
구체적인 대책들이었다.
"우리가... 바꾼 거예요?"
하늘이 믿기지 않아 물었다.
"바꾸기 시작한 거죠."
김 변호사가 말했다.
"완전히 바뀌려면 시간이 걸리겠지만, 첫걸음을 뗐어요. 여러분 덕분에."
그날 밤, 하늘은 일기를 썼다.
'오늘 국회에 갔다. 무서웠지만 뿌듯했다. 우리의 목소리가 정말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느꼈다.
아직 재판은 남았다. 박민준을 처벌받게 하는 일이 남았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많은 것을 이뤘다.
법이 바뀌고, 시스템이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나 혼자서는 못 했을 것이다.
아빠, 윤아, 조민지 작가님, 김 변호사님, 그리고 함께 싸운 모든 분들...
우리 함께 해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할 것이다.
끝까지.'
일기장을 덮고, 하늘은 창밖을 바라봤다.
별이 빛나고 있었다.
희망의 별이었다.
마지막 재판이 한 달 후로 잡혔다.
그곳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하늘은 준비되어 있었다.
마지막 싸움을 위해.
그리고 진짜 승리를 위해.
19회: 최후의 법정
최종 공판 전날 밤, 하늘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일이면 모든 게 결정된다. 박민준이 유죄를 선고받을지, 아니면 빠져나갈지.
새벽 4시, 하늘은 포기하고 일어나 책상에 앉았다.
그동안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아버지 작업실에서 그림을 발견했을 때.
윤아와 함께 조사를 시작했을 때.
조민지 작가님과 최예린 작가님을 만났을 때.
한강공원에서 이수진을 만나고 박민준에게 습격당했을 때.
그리고 수많은 피해자들이 모였을 때...
3개월이라는 시간이었지만, 하늘의 인생에서 가장 길고 힘든 시간이었다.
"하늘아, 안 자니?"
아버지가 방문을 열었다. 아버지도 잠을 못 이룬 모양이었다.
"네, 잠이 안 와요."
"나도."
아버지가 하늘 옆에 앉았다.
"긴장되지?"
"엄청요."
"나도. 하지만..."
아버지는 하늘의 손을 잡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나는 자랑스러워. 우리가 싸웠다는 것만으로도."
"만약 지면요?"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늘은 아버지를 안았다.
"아빠, 사랑해요."
"나도 사랑한다, 딸."
공판 당일 아침, 법원 앞에는 전에 없던 광경이 펼쳐졌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강하늘 응원합니다!"
"예술가의 권리를 지켜라!"
"박민준 처벌하라!"
현수막과 피켓을 든 사람들이 법원을 둘러쌌다.
미술대학 학생들, 시민단체, 일반 시민들...
모두가 이 재판을 지켜보러 온 것이었다.
"와..."
하늘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 사람들이 다 우리를 응원하러 온 거예요?"
"그런 것 같구나."
아버지도 감동한 표정이었다.
한 대학생이 다가왔다.
"하늘 학생 맞죠? 저희 미대생들이에요. 응원하러 왔어요!"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저희가 감사하죠. 학생 덕분에 우리도 용기를 얻었어요."
법정 안으로 들어가자, 방청석은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추첨을 통해 선발된 50명만 들어올 수 있었는데, 경쟁률이 20대 1이었다고 했다.
박민준도 이미 와 있었다. 그의 얼굴은 수척해 보였다. 지난 몇 달간 그도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하늘은 동정하지 않았다. 그는 수많은 사람들을 괴롭힌 사람이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판사가 입장했다.
"제2021고단5847호 사기 등 사건 최종 공판을 시작하겠습니다."
검사가 먼저 최종 의견을 진술했다.
"재판장님, 검찰은 피고인 박민준에게 징역 7년을 구형합니다."
방청석에서 웅성거림이 일었다.
"피고인은 5년간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예술가들을 착취했습니다. 27명의 피해자, 47억 원의 피해액. 이는 단순한 사기가 아닙니다. 예술에 대한, 그리고 예술가들에 대한 모욕입니다."
검사는 서류를 들어 보였다.
"피고인은 재능 있지만 가난한 작가들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척하면서 착취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막기 위해 협박했습니다."
"특히 악질적인 것은..."
검사가 하늘을 가리켰다.
"미성년자인 하늘 학생까지 위협했다는 점입니다. 정의를 위해 용기 낸 아이를 협박한 것입니다. 이는 가중 처벌 사유입니다."
박민준 측 변호사가 일어섰다.
"재판장님, 검찰의 주장은 과장되었습니다."
변호사는 침착하게 말했다.
"피고인은 미술계의 관행에 따라 행동했을 뿐입니다. 작가와 제작자의 분리는 흔한 일입니다. 패션 업계에서도, 음악 업계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하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습니다!"
검사가 반박했다.
"구매자들에게 '이 작가가 직접 그렸다'고 말하는 건 명백한 사기입니다!"
"그것은 해석의 문제입니다. '작가의 지휘 하에 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피고인이 언제 작가들을 지휘했습니까? 오히려 작가들도 모르게 제작자를 고용했잖습니까!"
공방이 이어졌다.
판사가 망치를 두드렸다.
"피고인, 최후 진술 하시겠습니까?"
박민준이 일어섰다.
처음으로 그가 직접 말하는 것이었다.
"재판장님..."
박민준의 목소리는 떨렸다.
"저는... 잘못했습니다."
방청석이 술렁였다.
"처음에는 정말 작가들을 돕고 싶었습니다. 재능 있지만 팔리지 않는 그들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욕심이 생겼습니다. 돈을, 명예를, 권력을 원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했습니다."
박민준은 하늘을 쳐다봤다.
"특히 강하늘 학생과 강태수 씨, 그리고 모든 피해자분들께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그는 깊게 고개를 숙였다.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한 일은 잘못이었습니다.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하늘은 박민준을 바라봤다.
진심일까? 아니면 형량을 줄이기 위한 연기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제 피해자들의 최후 진술을 듣겠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아버지가 일어섰다.
"저는... 20년간 화가로 살았습니다."
아버지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단호했다.
"제 그림은 팔리지 않았습니다. 재능이 없어서였을까요? 아니면 운이 없었을까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박민준을 만났을 때, 희망을 가졌습니다. 드디어 제 재능을 인정받는구나, 그림으로 돈을 벌 수 있구나..."
아버지는 눈물을 닦았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습니다. 저는 이용당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제 재능은 인정받은 게 아니라 착취당하고 있었습니다."
"가장 아팠던 건..."
아버지는 하늘을 보았다.
"제 딸 앞에서 떳떳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매일 밤 다른 사람 그림을 베끼면서, 저는 제 딸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하늘아."
아버지가 하늘에게 말했다.
"고맙다. 아빠를 구해줘서. 그리고 아빠에게 용기를 줘서."
하늘은 울었다. 참을 수 없었다.
조민지가 다음으로 일어섰다.
"저는 작가입니다. 아니, 작가였습니다."
조민지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박민준을 만난 후, 저는 제가 누군지 모르게 되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팔리는 그림이 제 것이 아니었으니까요."
"어떤 그림이 내 거고, 어떤 그림이 남의 것인지... 경계가 흐려졌습니다. 정체성이 무너졌습니다."
"하지만 이 재판을 통해 다시 찾았습니다. 제가 누구인지를. 저는 조민지, 화가입니다. 누구의 그림자가 아니라, 제 자신의 이름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입니다."
조민지는 박민준을 쳐다봤다.
"당신은 제 정체성을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다시 찾았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예술가의 영혼은 빼앗을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하늘의 차례였다.
하늘은 천천히 일어섰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떨렸다.
하지만 해야 했다.
"저는... 강하늘입니다. 중학교 3학년이에요."
하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또렷했다.
"3개월 전만 해도 저는 그냥 평범한 학생이었어요. 그림 그리기 좋아하고, 친구들과 놀기 좋아하는 보통 아이였어요."
"하지만 아빠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뭔가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하늘은 방청석의 사람들을 둘러봤다.
"처음에는 무서웠어요. 어른들의 세계고, 법도 복잡하고, 돈도 많이 드는 싸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어요. 왜냐하면..."
하늘은 박민준을 쳐다봤다.
"옳지 않았으니까요. 아무리 관행이라고 해도, 아무리 흔한 일이라고 해도, 사람을 속이고 착취하는 건 잘못된 거예요."
"제가 배운 건..."
하늘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정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예요. 누군가 나서야 해요. 누군가 용기를 내야 해요."
"그게 어른이든, 아이든, 상관없어요. 옳은 일을 해야 한다는 건 나이와 관계없으니까요."
하늘은 판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재판장님, 박민준을 처벌해주세요.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용기를 낼 수 있어요. '나도 싸워도 되는구나', '정의가 이길 수 있구나'라고 믿을 수 있게요."
하늘이 자리에 앉자, 방청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판사는 망치를 두드렸지만, 박수는 멈추지 않았다.
한참 후에야 법정이 조용해졌다.
"최종 변론을 마치겠습니다."
판사가 말했다.
"판결은 2주 후 선고하겠습니다. 2월 28일 오전 10시, 이 법정에서."
망치 소리가 울렸다.
공판이 끝났다.
법정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늘아! 잘했어!"
윤아가 달려와 안겼다.
"너 진짜 멋있었어!"
다른 사람들도 하늘을 둘러쌌다.
"감동했어요!"
"당신이 희망입니다!"
"우리의 영웅!"
하늘은 부끄러웠지만 행복했다.
김태훈 변호사가 다가왔다.
"하늘 학생, 훌륭했어요. 판사님도 감동하신 것 같았어요."
"정말요?"
"네. 판결이 기대됩니다."
그날 밤, 하늘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2주 후면 모든 게 결정된다.
박민준이 유죄를 선고받을까?
징역형을 받을까?
아니면 빠져나갈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는 것.
그리고 이미 많은 것을 바꿨다는 것.
법이 바뀌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고, 시스템이 바뀌기 시작했다.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하늘은 눈을 감았다.
2주 후, 최종 판결의 날.
모든 것이 결정될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하늘은 자랑스러웠다.
자신이, 아버지가, 그리고 함께 싸운 모든 사람들이.
우리는 용기를 냈다.
그리고 그것은 영원히 남을 것이다.이어서 써줘
20회: 판결의 날
2주는 길고도 짧았다.
하늘은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려 했다. 학교에 가고, 숙제를 하고, 친구들과 놀았다.
하지만 머릿속은 계속 판결 날짜를 세고 있었다.
2월 28일.
그날이 점점 다가왔다.
"하늘아, 너무 긴장하지 마."
윤아가 말했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너는 이미 충분히 해냈어."
"고마워, 윤아야."
학교에서도 선생님들과 친구들이 응원해줬다.
"하늘아, 우리 모두 응원하고 있어."
담임 선생님이 말했다.
"네가 우리 학교의 자랑이야."
판결 전날 밤, 하늘은 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버지도 거실에서 TV를 켜놓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빠, 안 주무세요?"
"응. 잠이 안 와서."
하늘이 아버지 옆에 앉았다.
"아빠, 무서워요?"
"그럼. 엄청 무섭지."
"만약에 박민준이 무죄를 받으면 어떡해요?"
아버지는 하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괜찮아.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지만..."
"하늘아."
아버지가 하늘을 똑바로 쳐다봤다.
"너 덕분에 아빠는 이미 많은 걸 얻었어. 용기를, 자존감을, 그리고 너와의 더 깊은 유대를."
"아빠..."
"그리고 무엇보다, 내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했어. 내 이름으로."
아버지는 작업실을 가리켰다.
"요즘 밤마다 그림 그려. 이번에는 누구 흉내도 안 내. 내가 그리고 싶은 걸 그려."
"정말요?"
"응. 보여줄까?"
아버지는 하늘을 작업실로 데려갔다.
이젤 위에는 그림이 있었다.
하늘이었다.
증인석에 서 있는 하늘.
떨리지만 당당한 표정의 하늘.
"아빠..."
"제목은 '용기'야. 내 딸, 그리고 나에게 용기를 준 그 순간을 그렸어."
하늘은 눈물을 흘렸다.
"너무 예뻐요."
"네가 예쁜 걸. 아빠는 그냥 그린 거야."
두 사람은 그림을 보며 한참을 서 있었다.
"하늘아, 내일 어떤 결과가 나와도..."
"네, 아빠. 알아요."
"우리는 이미 이긴 거야. 진짜로."
다음 날 아침, 2월 28일.
판결의 날이 밝았다.
하늘은 가장 단정한 옷을 입었다. 아버지도 정장을 차려입었다.
"출발할까?"
"네."
집을 나서는데, 윤아가 기다리고 있었다.
"깜짝이야! 넌 왜 여기 있어?"
"같이 가려고. 학교는 조퇴했어."
"윤아야..."
"혼자 가게 할 수 없지. 친구잖아."
셋은 함께 지하철을 탔다.
법원에 도착하니 이번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조민지, 박수진, 이철민, 그리고 다른 피해자들.
김태훈 변호사와 변호사 사무실 직원들.
시민단체 사람들.
미대생들.
기자들.
모두가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아!"
조민지가 달려와 안겼다.
"떨리지?"
"엄청요."
"나도. 손 좀 봐. 땀으로 흠뻑이야."
사람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법정 안으로 들어갔다.
방청석은 이번에도 만석이었다.
오전 10시.
판사가 입장했다.
"제2021고단5847호 사기 등 사건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하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판사가 서류를 들어 올렸다.
"주문. 피고인 박민준을 징역 5년에 처한다."
"!!"
방청석에서 탄성이 터졌다.
"정숙!"
판사가 망치를 두드렸다.
"추징금 39억 원을 징수한다. 피고인은 피해자들에게 피해액 전액과 위자료를 배상하라."
하늘은 믿을 수 없었다. 유죄? 징역 5년?
"이유를 말하겠습니다."
판사가 판결문을 읽기 시작했다.
"피고인은 2018년부터 2023년까지 5년간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예술가들을 기망하고 착취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민사상 계약 분쟁이 아니라 명백한 형사상 사기 범죄입니다."
"피고인은 재능 있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예술가들의 약점을 이용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는 척하면서 부당한 계약을 강요했고, 정당한 대가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특히 구매자들에게 '이 작가가 직접 그렸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소비자 기망 행위입니다. 이는 미술 거래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입니다."
판사는 잠시 멈췄다가 계속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을 심리하면서 깊이 고민했습니다. 미술계의 관행이라는 주장도 경청했습니다. 하지만..."
판사는 안경을 벗고 방청석을 둘러봤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불법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술가들도 노동의 정당한 대가를 받을 권리가 있고, 소비자들도 진실을 알 권리가 있습니다."
"특히 재판부는 이 사건을 고발하고 증언한 피해자들, 특히 미성년자인 강하늘 양의 용기에 감동했습니다."
판사가 하늘을 쳐다봤다.
"14세의 학생이 정의를 위해 나섰습니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협박을 견디며, 끝까지 싸웠습니다. 이는 우리 사회에 큰 귀감이 됩니다."
"재판부는 이 판결을 통해 명확히 하고자 합니다. 예술가 착취는 범죄입니다. 관행이 아닙니다.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법은 보호할 것입니다."
판사는 망치를 들었다.
"이상 선고를 마치겠습니다."
망치 소리가 울렸다.
그 순간, 방청석이 폭발했다.
"이겼다!"
"유죄다!"
"정의가 이겼어!"
사람들은 일어나 환호했다. 껴안고, 울고, 웃었다.
판사는 이번에는 제지하지 않았다. 잠시 그들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퇴장했다.
하늘은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
"아빠, 우리 이겼어요."
"그래, 하늘아. 이겼어."
아버지도 울었다. 5년간의 고통, 3개월간의 싸움, 모든 것이 해소되는 눈물이었다.
조민지가 달려와 함께 안겼다.
"우리가 해냈어! 정말로!"
박수진, 이철민, 다른 피해자들도 모두 모여 서로를 끌어안았다.
김태훈 변호사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법정을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던 수백 명의 사람들이 환호했다.
"하늘아! 이겼어?"
"유죄야! 징역 5년!"
"와아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사람들은 하늘을 어깨에 태우려고 했다.
"아, 안돼요! 부끄러워요!"
하늘은 얼굴을 붉히며 내려왔다.
기자들이 몰려들었다.
"하늘 학생, 지금 기분이 어때요?"
하늘은 마이크 앞에 섰다.
"기쁘고... 안도돼요. 정의가 이길 수 있다는 걸 증명했으니까요."
"앞으로 계획은?"
하늘은 웃었다.
"일단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할래요. 중간고사가 다음 주거든요."
사람들이 웃었다.
"그리고 미대 갈 거예요. 아빠처럼 화가가 되고 싶어요."
"어떤 화가가 되고 싶나요?"
"정직한 화가요. 제 이름으로 제 그림을 그리는 화가."
그날 저녁, 모든 뉴스가 이 판결을 톱뉴스로 다뤘다.
"박민준 징역 5년 선고... 예술가 착취 범죄 인정"
"14세 소녀의 용기, 미술계를 바꾸다"
"'관행' 아닌 '범죄'... 법원의 명확한 메시지"
SNS는 축하 메시지로 넘쳤다.
#강하늘_영웅
#정의가이겼다
#예술가인권
그날 밤, 하늘의 집에서는 작은 축하 파티가 열렸다.
아버지, 윤아, 조민지, 김 변호사, 그리고 몇몇 피해자들이 모였다.
"건배!"
"건배!"
사람들은 웃고 이야기하며 그동안의 긴장을 풀었다.
"하늘아."
김 변호사가 다가왔다.
"너 정말 대단해. 14살에 이런 일을 해내다니."
"저 혼자 한 거 아니에요. 다 같이 한 거죠."
"그래도 시작은 네가 한 거야. 네가 없었으면 우리는 아직도 숨어 살고 있었을 거야."
조민지가 끼어들었다.
"맞아. 하늘이가 우리한테 용기를 줬어."
"저도 여러분한테 용기를 받았어요."
하늘이 말했다.
파티가 끝나고 모두가 돌아간 후, 하늘은 아버지와 단둘이 거실에 앉았다.
"아빠, 이제 어떻게 하실 거예요?"
"글쎄. 일단 밀린 돈 받으면 빚부터 갚아야지."
"그다음엔요?"
아버지는 미소 지었다.
"그림 그릴 거야. 내 이름으로. 팔리든 안 팔리든,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저도 도와줄게요."
"넌 공부나 해. 미대 가려면."
"그것도 하고, 아빠도 도와드리고요."
아버지는 하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고맙다, 딸."
3개월 후
하늘은 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었다.
미술 영재 학교에 합격했다. 실기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축하해, 하늘아!"
윤아가 달려와 안겼다.
"너도 축하해! 언론학과 특별전형 합격했잖아!"
"둘 다 꿈을 이룬 거네."
두 사람은 웃었다.
아버지는 작은 개인전을 열었다.
제목은 '용기'.
하늘을 그린 그림을 비롯해, 그동안 그린 그림 20점을 전시했다.
규모는 작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이 그림 사고 싶은데요."
한 컬렉터가 말했다.
"어떤 그림이요?"
"'용기'. 저 증인석의 소녀요. 얼마예요?"
"500만 원입니다."
"삽니다."
아버지의 그림이 처음으로 정당한 가격에, 아버지 이름으로 팔렸다.
"축하드려요, 강태수 작가님."
갤러리 주인이 악수를 청했다.
"고맙습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맺혔다.
20년 만의 첫 판매였다.
박민준은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있었다.
가끔 뉴스에서 그의 소식이 들려왔다.
"모범수로 생활하고 있다더라."
"출소하면 뭘 할까?"
사람들은 궁금해했지만, 하늘은 더 이상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중요한 건 앞으로였다.
6개월 후
국회에서 '미술 거래 공정화법'이 통과되었다.
표준 계약서 의무화, 갤러리 등록제, 분쟁 조정 위원회 설치...
하늘이 싸워서 얻은 것들이 법으로 만들어졌다.
"하늘 양, 법 제정 기념식에 참석해주시겠어요?"
문화부 공무원이 전화했다.
"제가요?"
"네. 이 법이 만들어진 건 하늘 양 덕분이니까요."
기념식에서 하늘은 국회의원들과 악수했다.
"고맙습니다, 하늘 학생. 당신이 세상을 바꿨어요."
"저 혼자 한 게 아니에요. 많은 분들이 함께..."
"겸손하시네요. 하지만 시작은 당신이었어요."
1년 후
하늘은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다.
미술 영재 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며 꿈을 키웠다.
윤아는 언론반에서 활동하며 기자의 꿈을 키웠다.
아버지는 꾸준히 그림을 그리며 조금씩 이름을 알렸다.
어느 날, 하늘은 학교에서 과제를 받았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일"
하늘은 펜을 들고 쓰기 시작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의미 있었던 일
강하늘
작년 이맘때, 나는 싸움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위한 싸움이었지만, 결국 모든 예술가를 위한 싸움이 되었다.
힘들었다. 무서웠다. 포기하고 싶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옳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배웠다.
정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누군가 나서야 한다는 것을.
나이, 힘, 돈...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라는 것을.
용기가 중요하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 함께할 때 더 강하다는 것을.
이제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앞으로 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아버지처럼, 하지만 아버지와는 다르게.
내 이름으로, 내 그림을, 정직하게 그리는 화가가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또 누군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는 다시 용기를 낼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알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용기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그것이 내가 배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늘은 글을 다 쓰고 창밖을 바라봤다.
봄이었다.
벚꽃이 피고 있었다.
새로운 시작의 계절이었다.
하늘은 미소 지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왜냐하면 하늘은 알았다.
용기만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하늘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ebook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그림자 위작단 : 하이틴로멘스 04 (0) | 2026.02.21 |
|---|---|
| 그림자 위작단 : 하이틴로멘스 03 (0) | 2026.02.21 |
| 그림자 위작단 : 하이틴로멘스 01 (0) | 2026.02.21 |
| 시대를 앞선 자들의 노래 : 하이틴로멘스 04 (1) | 2026.02.19 |
| 시대를 앞선 자들의 노래 : 하이틴로멘스 03 (0) | 2026.02.19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