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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선 자들의 노래


11회 — 다산의 소년 시절, 세상이 궁금하다
1762년, 경기도 광주 마현마을.
늦여름 햇살이 마당 가득 쏟아지던 날 오후, 열 살짜리 소년 하나가 사랑채 기둥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고 있었다. 아니, 읽는다기보다는 씨름하고 있었다. 눈썹이 잔뜩 찌푸려졌다가 펴졌다가를 반복했다. 입술이 달싹였다. 한 줄을 읽고 멈추고, 다시 읽고 또 멈췄다.
정약용이었다.
"형, 이거 봐봐."
사랑채 마루에 앉아 붓글씨를 연습하던 형 약전이 고개를 들었다. 열두 살이었다. 약전은 약용보다 두 살 위였지만 둘은 언제나 붙어 다녔다. 생김새도 달랐고 성격도 달랐는데 이상하게 잘 맞았다.
약용은 책을 들고 형 옆에 쪼그려 앉았다.
"여기 이 구절, 하늘이 만물을 낳는다고 했잖아. 그러면 하늘이 왜 어떤 건 크게 낳고 어떤 건 작게 낳았어? 왜 어떤 사람은 양반으로 낳고 어떤 사람은 노비로 낳았어? 하늘이 차별한 거야?"
약전은 붓을 내려놨다.
어린 동생이 또 시작했다는 걸 알았다. 약용은 어릴 때부터 이랬다. 스승이 가르쳐준 것을 그냥 받아들이지 않았다. 꼭 왜냐고 물었다. 그 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아버지한테 여쭤봐."
"아버지는 그냥 하늘의 이치라고 하실 거야. 그게 답이 아니잖아."
"그럼 스승님께 여쭤봐."
"스승님도 같은 말 하실 거잖아."
약전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러면 네가 직접 답을 찾아."
약용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어. 아무도 시원한 답 못 해주면 네가 찾아야지. 공부한다는 게 원래 그런 거 아니야? 선생한테 답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답 만드는 거."
열 살짜리가 열두 살짜리의 말을 곱씹었다.
그날부터 약용의 공부 방식이 달라졌다. 외우지 않았다. 질문했다. 이해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선생이 화를 내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진도는 느렸다. 하지만 한번 이해한 건 절대 잊지 않았다.
정약용의 집안은 남인(南人) 계열이었다.
조선 후기의 당파 싸움은 이미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노론, 소론, 남인, 북인이 권력을 두고 끊임없이 싸웠다. 정씨 집안은 남인 중에서도 학문을 중시하는 가문이었다. 아버지 정재원은 지방 관직을 전전하는 중하급 관리였다. 넉넉하지 않았지만 책만큼은 아끼지 않았다.
집 안에 책이 가득했다.
경서는 기본이었다. 역사서, 문집, 실용 농서까지 있었다. 약용은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읽다가 모르면 아버지에게 물었고, 아버지가 모르면 편지를 써서 아는 학자에게 물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성호 이익의 문집을 읽었다.
성호 이익은 이미 세상을 떠난 남인 계열의 대학자였다. 그의 문집에는 약용이 처음 보는 생각들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개혁해야 한다는 생각. 백성의 삶을 직접 들여다봐야 한다는 생각. 책상 위의 공부가 아니라 세상 속의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약용은 그 책을 세 번 읽었다.
세 번째 읽을 때 형 약전에게 말했다.
"형, 나 이 사람처럼 되고 싶어."
약전은 동생이 들고 있는 책을 봤다.
"성호 선생님처럼?"
"어. 책만 읽는 게 아니라 세상을 고치고 싶어. 백성들이 왜 가난한지, 왜 억울한지, 왜 노비는 평생 노비인지. 그걸 알아서 고치고 싶어."
약전은 한참 동생을 바라봤다.
"그러면 많이 힘들 거야."
"왜?"
"세상을 고치려는 사람은 세상이 싫어하거든."
열세 살 약용은 그 말의 의미를 반만 알아들었다.
나머지 반은 훗날, 유배지에서 완전히 이해하게 됐다.
서울 어딘가의 중학교 교실로 시선을 옮기면.
역사 수행평가 조가 발표됐다.
강준호는 칠판에 붙은 명단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3모둠. 이름 넷이 적혀 있었다. 강준호, 박서연, 최민재, 김도현.
최민재는 반에서 제일 목소리 큰 아이였다. 공부는 중간이었지만 존재감은 제일 컸다. 친구도 많고 선생님들한테도 인기가 좋았다. 강준호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최민재는 어른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골라서 했다. 칭찬을 잘 했고 분위기를 잘 맞췄다. 능력보다 처세가 뛰어난 아이.
김도현은 조용한 아이였다. 눈치가 빠르고 남의 눈치를 너무 많이 봤다. 강준호에게 개인적으로는 친절했지만 최민재 앞에서는 강준호를 모른 척하는 아이.
박서연은 잘 몰랐다. 최근에 전학온 아이였다. 말이 없었고 항상 책을 읽었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질문하면 정확하게 대답했지만 튀지 않았다.
준호는 이 조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최민재가 같은 조라는 게 불편했다.
첫 번째 모둠 회의는 점심시간에 도서관에서 열렸다.
최민재가 먼저 왔다. 의자를 제일 가운데 앉고 다리를 꼬며 말했다.
"야, 이번 수행 내가 총대 멜게. 발표도 내가 할 테니까 다들 자료조사만 잘해와."
준호가 앉으며 말했다.
"발표 준비도 같이 해야 하지 않아? 내용 파악을 해야 발표를 하지."
최민재가 준호를 봤다. 눈빛이 시원치 않았다.
"아, 강준호 너는 자료조사 담당이면 되잖아. 어차피 네가 조사 제일 잘하잖아."
"조사를 잘하면 발표도 해야지. 내용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발표해야 청중한테 잘 전달되잖아."
"에이, 발표는 따로 재능이 있는 거야. 나한테 맡겨. 나 지난번 발표 선생님한테 칭찬받았잖아."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준호는 그 발표를 기억하고 있었다. 내용은 허술했는데 목소리가 크고 자신감 있어서 좋아 보였을 뿐이었다.
박서연이 조용히 끼어들었다.
"역할 분담을 먼저 하고 나서 발표자는 나중에 정해도 되지 않을까요. 자료 보면서 결정하면 더 자연스러울 것 같아서요."
최민재가 서연을 봤다. 잠시 값을 치르는 눈빛이었다.
"뭐, 그래도 되지."
준호는 서연을 한번 봤다. 말이 없는 아이인 줄 알았는데. 말할 때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필요할 때 말하는 타입이었다.
모둠 회의는 어영부영 끝났다.
역할 분담은 했지만 최민재는 자기 파트를 제대로 할 것 같지 않았다. 준호는 그걸 알면서도 지금 지적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냥 내가 더 하면 되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가, 그게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서관을 나오며 서연이 준호 옆에 섰다.
"강준호 맞죠? 전교 1등이라고 들었어요."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서연은 짧게 웃었다.
"상관은 없고요. 그냥 궁금해서. 잘하면 힘들죠?"
준호는 걸음을 멈췄다.
"무슨 뜻이에요?"
"잘하면 다들 이용하려고 하잖아요. 근데 잘하는 사람이 싫다고 하면 이상한 사람 되고."
준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연은 그냥 걸어갔다.
준호는 그 자리에 서서 서연의 뒷모습을 봤다. 처음 만난 날 그런 말을 하는 아이가 낯설었다. 그리고 낯설게도, 조금 반가웠다.
12회 — 형제가 함께 꿈을 꾸다
1777년, 정조 즉위 이듬해.
한양의 봄은 언제나 성균관 은행나무에서 시작됐다. 수백 년 된 그 나무에 연두색 잎이 돋아나면 유생들의 마음도 설렜다. 과거 시험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됐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조가 즉위했다.
새 임금은 달랐다. 선왕들과 분명히 달랐다. 학문을 사랑했고 인재를 아꼈다. 노론의 독주를 견제하고 남인과 소론에게도 기회를 줬다. 규장각을 세우고 능력 있는 젊은 학자들을 모았다. 오랫동안 권력에서 밀려나 있던 남인들에게 정조의 즉위는 봄비 같은 소식이었다.
정약용은 열여섯 살이었다.
형 약전과 함께 처음으로 한양 나들이를 했다. 아버지의 지인 집에 머물면서 성균관 근처를 돌아다니며 책도 사고 학자들의 강의도 들었다. 두 형제에게 그 며칠은 평생 잊지 못할 시간이 됐다.
성균관 앞 서점에서 약용은 책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서양의 천문학과 수학을 담은 책이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 학문, 서학(西學)의 책이었다. 한자로 번역돼 있었지만 내용은 낯설었다. 지구가 둥글다는 것,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돈다는 것, 수학으로 천체의 운동을 계산할 수 있다는 것.
약용은 그 책을 서서 두 시간 동안 읽었다.
서점 주인이 눈치를 줘도 몰랐다. 형 약전이 팔꿈치를 쳐도 한 참 후에야 정신을 차렸다.
"사. 그냥 사."
형이 돈을 꺼냈다. 약용이 말렸다.
"형 돈 쓰면 안 돼. 이건 내가…"
"네 용돈으로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야. 내가 산다."
형제는 그 책을 한 권 샀다. 같이 읽기로 했다. 밤에 방에서 촛불을 켜고 나란히 앉아 읽었다. 모르는 부분에서 멈추고 이야기했다. 약용이 질문하면 약전이 같이 고민했다. 약전이 막히면 약용이 다른 방향으로 생각했다.
"형, 이 사람들은 하늘을 어떻게 이렇게 정확하게 계산한 거야?"
"관찰하고 기록한 거지. 수백 년 동안 계속."
"수백 년이면 죽고 또 죽고를 반복하면서 이어온 거잖아. 한 사람이 다 한 게 아니라."
"맞아. 지식이 대를 잇는 거야. 그러니까 기록이 중요한 거고."
약용은 책장을 덮고 생각에 잠겼다.
"형, 우리도 기록해야 해. 우리가 보고 생각한 것들을. 그게 다음 사람한테 이어지려면."
약전은 동생을 봤다. 열여섯 살짜리가 하는 말이라기엔 무게가 달랐다.
"그래. 기록하자."
그 약속은 두 형제의 평생을 관통하게 됐다.
이듬해 약용은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올라왔다. 성균관에 입학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다. 그 무렵 운명처럼 이벤트가 하나 일어났다.
성균관 입학 시험에서 정조가 직접 출제한 문제로 시험을 치렀다.
약용이 쓴 답안이 정조의 눈에 들었다.
당시 정조는 신하들의 문장보다 젊은 유생들의 글을 더 자주 읽었다. 기성 신하들은 이미 편 가르기가 됐지만, 유생들에게서는 아직 날 것의 생각이 보였다. 약용의 답안에는 그 날 것의 생각이 가득했다.
현실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분석, 구체적인 해결책, 그리고 무엇보다 두려움 없는 문장.
정조가 신하에게 물었다.
"이 글 쓴 자가 누구냐."
"정약용이라 하옵니다. 나주 정씨 집안 자제이옵니다."
정조는 이름을 기억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또 하나의 위험의 시작이기도 했다. 왕의 눈에 든다는 건 기회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경계심을 산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용은 그 이치를 형에게서 이미 들었다.
세상은 잘나가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현재 시점, 도서관 한 구석.
박서연은 혼자 앉아 태블릿으로 자료를 찾고 있었다.
검색어: 정약용 유배 이유.
화면에 결과가 떴다. 서연은 읽으면서 눈썹을 찌푸렸다. 천주교를 믿었다는 이유. 개혁적인 사상을 가졌다는 이유. 노론 권력자들의 표적이 됐다는 이유.
요약하면 하나였다. 너무 뛰어났고 너무 달랐기 때문에.
서연은 잠시 화면을 멍하니 봤다.
자기 전 학교 얘기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전 학교. 서연도 잘하는 편이었다. 잘했더니 친구들이 먼저 멀어졌다. 선생님이 칭찬하는 횟수가 늘었더니 쉬는 시간에 말 걸어오는 아이가 줄었다. 이유를 모른 채 혼자 지내다가 결국 전학을 왔다.
새 학교에서는 조용히 지내려고 했다. 튀지 않으려고.
그런데 오늘, 강준호에게 그 말을 해버렸다.
잘하면 힘들죠.
서연은 자기 자신에게도 한 말이었다.
태블릿 화면을 끄고 창밖을 봤다.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뛰어놀고 있었다. 그 속에 강준호는 없었다. 항상 없었다. 준호는 혼자 교실에 있거나 도서관에 있거나 어딘가 구석에 있었다.
서연은 다시 검색창을 열었다.
검색어: 장영실 가마 사고 의도적 모함 가능성.
13회 — 새로운 학문, 서학이 불러온 폭풍
1784년.
정약용이 스물두 살이 되던 해, 조선에 조용한 폭풍이 불어왔다.
중국에 다녀온 이승훈이라는 사람이 천주교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조선 최초의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 동료들에게 천주교를 전했다. 이벽, 정약전, 그리고 정약용도 그 자리에 있었다.
약용은 처음엔 호기심으로 들었다.
천주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었다. 그 안에는 서양의 자연과학, 철학, 윤리학이 담겨 있었다. 하느님 앞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사상은 조선의 신분제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그것이 약용의 마음을 건드렸다.
열 살 때 했던 질문. 왜 어떤 사람은 양반으로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노비로 태어나는가.
천주교는 그 질문에 대해 다른 방식의 답을 제시했다. 신 앞에서는 양반도 노비도 없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존엄하다.
약용은 그 사상에 이끌렸다.
형 약전도 마찬가지였다.
두 형제가 천주교에 빠져들고 있다는 소문이 조금씩 퍼지기 시작했다. 처음엔 작은 소문이었다. 하지만 조선에서 소문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자라고 변형됐다.
노론 쪽 관리들이 귀를 세웠다.
남인 집안, 정조의 총애를 받는 젊은 학자들, 그리고 서학 연루. 이보다 더 좋은 공격 빌미가 없었다. 서학은 이미 조선에서 위험한 학문으로 분류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조상 제사를 거부하는 사상은 유교 사회의 근본을 흔드는 것이었다. 임금 위에 하느님을 두는 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었다.
노론의 논리는 간단했다. 서학을 믿는 자들은 불충이고 불효다. 불충불효한 자들은 역적이다.
약용은 이 논리가 얼마나 위험한지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형 약전은 동생에게 말했다.
"용아, 우리 조심해야 해."
"알아, 형."
"아는 게 아니야. 지금 우리 집안 주시하는 눈이 여러 개야. 정조 임금이 계시는 동안은 괜찮을 거야. 하지만 임금도 영원하지 않아."
약용은 형의 말을 들으며 멀리 창밖을 봤다.
바람이 불면 나무가 흔들린다. 뿌리가 깊으면 버틴다. 하지만 폭풍이 되면 뿌리 깊은 나무도 쓰러진다.
이 폭풍이 그 정도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한편 그해, 약전은 과거를 준비하면서도 다른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자연이었다.
약전은 어릴 때부터 자연을 좋아했다. 새, 물고기, 곤충, 식물. 살아 있는 것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관찰하는 걸 좋아했다. 서학 책에서 서양의 자연 관찰 방법을 보고 더 체계적으로 기록하기 시작했다.
틈틈이 한강변을 걸으며 새를 봤다. 이름을 몰라도 생김새를 그렸다. 먹이를 먹는 방식, 둥지를 트는 위치, 우는 소리의 특징을 기록했다.
약용이 한번은 형의 기록 노트를 봤다.
"형, 이거 언제 다 쓴 거야?"
"조금씩."
"왜 이렇게 자세히 써?"
"나중에 내가 못 볼 수도 있잖아. 그러면 이걸 보는 다른 사람이 알 수 있게."
약용은 형의 그 대답에 멈칫했다.
내가 못 볼 수도 있다.
형이 그때 이미 알고 있었던 걸까. 언젠가 이 모든 것이 갑자기 멈출 수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의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는 걸.
중학교 교실.
최민재가 카카오톡 단체방에 메시지를 올렸다.
[3모둠 수행평가방]
최민재: 야 다들 자료 어디까지 했어? 나 이번 주 바빠서 못 했는데 ㅋㅋ
최민재: 강준호 너 정약용 파트 해줄 수 있어? 어차피 잘 알잖아
준호는 메시지를 보고 핸드폰을 내려놨다.
심호흡을 했다.
이미 자신이 맡은 장영실 파트와 현대 연결 파트를 다 조사해두었다. 최민재의 정약용 파트까지 하면 사실상 혼자 수행평가를 하는 거였다. 그리고 발표는 최민재가 하고 점수는 넷이 나눠 갖는 거였다.
말하지 않으면 또 이렇게 된다.
말하면 또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준호는 한참 고민하다가 답장을 쳤다.
강준호: 나도 내 파트 있어서 다른 파트까지 하기 어렵고. 민재야 이번 주 바쁜 거 알겠는데 기본 자료는 찾아올 수 있지 않아? 같이 하는 거잖아.
답장이 없었다.
한 시간 후에 최민재가 답했다.
최민재: ㅇㅋ ㅇㅋ 알았어 할게ㅋ
그 뒤로 며칠이 지나도 최민재는 아무것도 올리지 않았다.
김도현이 준호에게 조용히 카톡을 보냈다.
김도현: 야 그냥 네가 하는 게 낫지 않아? 괜히 싸우지 말고
강준호: 그게 맞는 거야?
김도현: 맞고 틀리고가 아니라 편한 게 낫잖아
강준호: 편한 게 옳은 건 아니잖아
답장이 없었다.
준호는 핸드폰을 책상 위에 엎어놨다.
창밖에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갔다. 준호는 그 구름을 보면서 생각했다. 왜 잘하는 사람이 더 많이 해야 하지. 왜 잘하는 사람이 참아야 하지. 왜 이게 당연한 것처럼 됐지.
수행평가 주제가 떠올랐다.
잘하면 잘할수록 미움받는 사람들의 이야기.
장영실이 그랬다. 아무도 못 만드는 걸 만들었더니 모함을 받았다. 정약용이 그랬다. 아무도 못 할 생각을 했더니 유배를 갔다.
그러면 지금 최민재가 하는 짓은 뭐지.
품앗이를 착복하는 것. 남이 한 일에 이름을 얹는 것. 수백 년이 지났는데 왜 이게 아직도 똑같지.
준호는 노트를 꺼내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수행평가 내용이 아니었다.
그냥 지금 자기 생각을 썼다.
14회 — 정적들의 눈, 붉게 타오르다
정조 15년,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사건이 터졌다.
윤지충이라는 양반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신주를 불태우고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조선에서 신주는 조상의 혼이 깃든 것이었다. 그것을 불태운 건 유교 사회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노론 신하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났다. 서학을 믿는 자들을 색출하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벌하라. 이것은 단순한 종교 문제가 아니라 나라의 기강 문제다.
정조는 일부 처벌은 피할 수 없었다. 윤지충을 처형했다. 하지만 전면적인 서학 탄압은 막았다. 정조는 알고 있었다. 서학 탄압을 구실로 노론이 남인 전체를 치려 한다는 것을.
그 중심에 정약용 형제가 있었다.
이미 두 사람의 이름은 서학과 연루된 자 목록에 올라가 있었다. 일부 신하들은 정조에게 두 형제를 처벌하라고 상소를 올렸다. 정조는 막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막을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정약용은 이 시기에 천주교와 거리를 뒀다.
믿음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현실이었다. 자신이 서학을 계속 가까이하면 집안 전체가 무너질 수 있었다. 형도, 아우들도, 아버지도. 신앙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 수 없었다.
하지만 거리를 두면서도 생각은 멈추지 않았다.
하느님 앞에 평등하다는 생각. 백성 하나하나의 삶이 소중하다는 생각.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시선이었다. 그 시선을 잃으면 아무리 좋은 정책을 만들어도 껍데기에 불과했다.
약용은 그 시선을 유지하면서 현실에서 일했다.
정조가 화성을 쌓으라 명했다. 새로운 성을 새로운 방식으로 지어야 했다. 정조는 약용에게 그 방법을 연구하라고 했다.
약용은 중국과 서양의 건축 기술서를 분석했다. 거중기(擧重機)를 설계했다. 무거운 돌을 적은 인원으로 높이 올릴 수 있는 기계였다. 수레와 도르래를 결합한 구조였다.
그것이 완성됐을 때 공사 기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백성들의 노역도 줄었다.
정조가 기뻐했다.
노론 신하들이 이를 갈았다.
이영준 같은 류의 인간들이 항상 있었다.
이름은 달라도 역할은 같았다. 능력 있는 자가 올라오면 내려야 했다. 자신의 자리가 위협받는다고 느끼면 공격했다. 공격 방법은 항상 같았다. 약점을 찾는 것. 없으면 만드는 것.
약용의 약점은 하나였다.
서학.
그 하나면 충분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거중기를 만들어도, 화성을 빨리 지어도, 서학과 연루됐다는 딱지 하나가 모든 공로를 지울 수 있었다.
그것을 정적들은 알고 있었다.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기다렸다. 정조가 살아 있는 동안은 때가 아니었다. 정조는 약용을 지켰다. 하지만 왕은 영원하지 않았다.
씨앗을 심어두는 것으로 충분했다. 소문을 조금씩 퍼뜨렸다. 기록을 조금씩 왜곡했다. 약용이 어디서 누구를 만났는지 추적했다. 편지 내용을 열어봤다. 지인들을 통해 흘렸다.
정약용은 그 시선을 느꼈다.
어딜 가도 누군가 보는 것 같은 느낌. 뒷목이 서늘한 느낌. 조심해야 한다는 것과 조심하다 보면 아무것도 못 한다는 것 사이에서 흔들렸다.
형 약전도 같은 감각을 느꼈다.
어느 날 밤 형제가 마주 앉았다.
촛불 하나를 두고 오래 침묵이 흘렀다.
약전이 먼저 말했다.
"용아."
"응."
"우리가 지금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세상이 우리한테 잘못하는 걸까?"
약용은 촛불을 바라봤다.
"둘 다인 것 같아. 세상이 우리한테 잘못하고 있는 건 맞아. 하지만 우리가 세상과 싸울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도 맞아."
"싸워야 해?"
"아니면?"
약전은 웃었다. 쓸쓸한 웃음이었다.
"아니면 기록이라도 해야지. 싸워서 이기든 지든, 기록은 남으니까."
약용도 웃었다.
촛불이 흔들렸다. 그림자가 벽 위에서 흔들렸다. 두 형제의 그림자가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했다.
그 밤이 함께 앉은 마지막 밤들 중 하나였다. 두 사람은 몰랐다.
현재 시점, 강준호의 방.
준호는 노트 두 페이지를 빽빽하게 채웠다.
수행평가 내용이 아니었다. 자기 생각이었다.
장영실은 물시계를 고쳤는데 아무도 이름을 몰라줬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만들었는데 나중에 유배를 갔다. 나는 조별 과제를 혼자 다 하는데 발표는 최민재가 한다. 규모는 다르지만 구조는 같다. 잘하는 사람이 일하고 목소리 큰 사람이 인정받는 구조.
그러면 잘하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지. 안 하면 욕먹고, 하면 이용당하고. 잘하는 게 잘못인가.
장영실은 멈추지 않았다. 정약용도 멈추지 않았다. 근데 둘 다 결국 한번은 무너졌다. 장영실은 관직을 잃었고 정약용은 유배를 갔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준호는 펜을 내려놨다.
창밖에 별이 보였다. 서울 하늘이라 흐릿했지만 밝은 별 하나가 보였다. 북극성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 별을 보며 준호는 생각했다.
장영실도 이 별을 봤겠지.
수백 년 전에, 같은 별을 보면서 같은 고민을 했겠지.
이상하게 외롭지 않은 기분이 들었다.
15회 — 유배령, 하룻밤에 무너진 인생
1800년 여름, 정조가 승하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건강하던 왕이 갑자기 쓰러졌다. 사흘을 버티다 눈을 감았다. 향년 마흔아홉. 재위 이십사 년.
그 소식이 전해진 날 밤, 정약용은 방 안에서 혼자 앉아 있었다.
울지 않았다.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 속에서 차갑고 단단한 것이 천천히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돌이 굳어지는 느낌. 따뜻했던 것이 식어가는 느낌.
정조가 없다.
그 한 문장이 의미하는 것을 약용은 너무 잘 알았다. 정조는 단순한 왕이 아니었다. 약용에게는 방패였다. 노론의 공격을 막아준 유일한 힘이었다. 그 방패가 사라졌다.
이제 아무것도 막아줄 것이 없었다.
형 약전이 방으로 들어왔다. 형제는 서로를 보았다. 오랜 침묵이 흘렀다.
약전이 먼저 말했다.
"준비해야 할 것 같다."
"무슨 준비."
"올 것이 오는 거야."
약용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란 말이 추상적이었다. 뭘 준비해야 하는지 사실 알 수 없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공격이 올지. 아는 건 반드시 온다는 것뿐이었다.
그날 밤 약용은 책상에 앉아 편지를 썼다. 지인들에게 보낼 것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였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들. 자신이 왜 이 공부를 시작했는지. 백성의 삶을 고치겠다는 처음의 마음. 형과 나눈 이야기들.
새벽까지 썼다.
정조가 승하하고 이듬해 봄, 신유박해(辛酉迫害)가 시작됐다.
순조가 즉위했다. 어린 왕 뒤에서 권력을 쥔 것은 노론 벽파의 핵심 세력이었다. 그들이 기다리던 때가 왔다. 서학을 빌미로 남인을 모조리 쳤다.
천주교 신자들이 잡혔다. 처형됐다. 이승훈이 죽었다. 이가환이 죽었다. 수백 명이 끌려갔다.
정약용의 이름이 올라왔다.
관리들이 새벽에 들이닥쳤다. 약용이 잠에서 깰 틈도 없었다. 포졸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약용은 끌려 나갔다. 아내가 마당에서 울었다. 아이들이 무슨 일인지 몰라 눈을 비볐다.
심문이 시작됐다.
서학을 믿었느냐. 천주교 집회에 참석했느냐. 이승훈과 어떤 관계였느냐. 유지충을 알았느냐.
약용은 사실대로 말했다. 한때 서학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수년 전에 이미 멀리했다. 천주교 신자가 아니다.
심문관들은 믿지 않았다. 혹은 믿어도 상관없었다. 증거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 과거의 편지들, 과거의 만남들, 과거의 기록들이 모두 불리하게 해석됐다.
판결이 내려졌다.
유배.
형 약전도 함께였다.
약전은 전라도 신지도로. 약용은 경상도 장기로.
끌려가는 날 아침이었다.
형제는 한강변에서 잠깐 같은 방향을 바라봤다. 각자 다른 곳으로 가야 했다. 언제 다시 만날지 몰랐다. 살아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약전이 동생의 어깨를 잡았다.
"용아."
"응."
"기록해. 어디서 무엇을 보든 기록해. 그게 남아야 한다."
"형도."
"나도 할게."
짧은 포옹이었다. 포졸들이 서두르라고 소리쳤다.
두 형제가 각자의 길로 갈라졌다.
약용은 걸으면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걸음이 멈출 것 같았다. 걸음이 멈추면 다시 시작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앞만 봤다.
길은 낯설었다. 끝이 어딘지 몰랐다. 하지만 걷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래서 걸었다.
현재 시점.
박서연은 도서관 창가 자리에서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태블릿과 노트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노트엔 빼곡하게 메모가 적혀 있었다.
장영실 파트는 이미 정리됐다. 신유박해와 정약용 유배 파트도 얼추 됐다. 이제 현대 연결 파트를 써야 했다.
서연은 펜을 굴리며 생각했다.
세 시대의 공통점이 뭘까. 선생님이 그 질문을 수행평가의 핵심으로 잡았다. 단순히 과거 사람들이 불쌍했다로 끝나면 안 됐다. 지금과 연결해야 했다.
서연은 노트에 썼다.
공통점 1 — 잘하는 사람이 시스템의 위협이 된다.
공통점 2 — 위협을 제거하는 방법은 언제나 같다. 약점을 찾거나 만든다.
공통점 3 — 제거당한 사람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래 걸릴 뿐이다.
마지막 줄을 쓰고 멈췄다.
오래 걸릴 뿐이다.
장영실은 수백 년 후에 다시 불렸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쓴 책들이 지금도 읽힌다. 오래 걸렸지만 사라지지 않았다.
서연은 그게 위로가 되는 건지 아닌 건지 몰랐다.
당사자에게 오래 걸린다는 건 그 긴 시간을 버텨야 한다는 뜻이니까.
마침 도서관 문이 열리며 강준호가 들어왔다. 서연을 발견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각자 자료를 봤다.
서연이 먼저 말했다.
"정약용 유배 파트 정리했어요?"
"어느 정도."
"신유박해 부분 자료 있으면 공유해줄 수 있어요? 내가 찾은 거랑 교차 확인하려고."
준호는 잠깐 봤다가 파일을 에어드롭으로 넘겼다.
서연이 받아서 열었다. 훑어봤다.
"꼼꼼하다."
"그냥 찾은 거예요."
"최민재 파트는요?"
준호가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준호를 봤다.
"아직 아무것도 없죠?"
"…아마도."
"그럼 우리 둘이 다 해야겠네요."
준호가 서연을 봤다. 화난 것도 아니고 체념한 것도 아닌 얼굴이었다. 그냥 사실을 말하는 얼굴.
"억울하지 않아요?"
서연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억울하죠. 근데 억울한 거랑 어떻게 할 건지는 별개잖아요. 최민재한테 화내봤자 우리 점수만 깎이고. 그렇다고 그냥 다 해줘버리면 계속 이렇게 되고."
"그러면?"
"최소한 기록은 해야죠. 누가 뭘 했는지."
준호는 그 말에 뭔가 걸렸다.
기록.
정약전이 형 약용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기록해. 어디서 무엇을 보든 기록해.
"무슨 기록이요?"
서연은 노트를 펼쳤다.
"모둠 회의록. 누가 언제 무엇을 했는지. 카톡 대화도 다 갈무리해뒀어요. 선생님한테 보여줄 수도 있고, 안 보여줄 수도 있고. 하지만 있어야 해요."
준호는 그 노트를 봤다.
서연의 글씨는 작고 정확했다. 날짜별로 정리돼 있었다. 최민재가 한 말, 하지 않은 것, 약속하고 지키지 않은 것들이 담담하게 기록돼 있었다.
"언제부터 이걸 했어요?"
"첫 번째 회의 날부터요."
준호는 잠시 서연을 봤다.
"처음부터 알았던 거예요? 이렇게 될 걸."
서연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한 일 전 학교에서도 있었거든요."
두 사람은 잠시 침묵했다. 도서관 안은 조용했다. 어딘가에서 책장 넘기는 소리만 들렸다.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나 이 수행평가 하면서 이상한 생각 했어요."
"어떤 거요?"
"장영실이랑 나랑 비교가 되더라고요. 물론 규모는 완전 다르지만. 잘하면 이용당하고, 공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고. 근데 장영실은 그래도 멈추지 않았잖아요."
"그러니까 지금도 우리가 그를 알죠."
"근데 당시에는 이름이 지워졌잖아요."
"지워졌다가 다시 불렸죠. 오래 걸렸지만."
준호는 창밖을 봤다.
"오래 걸리는 게 위로가 돼요?"
서연도 창밖을 봤다.
"글쎄요. 근데 지워지지 않는다는 건 위로가 되는 것 같아요."
16회 — 흑산도 바다 위의 정약전
흑산도까지 가는 길은 지옥이었다.
한양에서 전라도 끝까지 걸어서 내려가는 것만도 한 달이 걸렸다. 거기서 다시 배를 타야 했다. 바다를 건너야 했다.
정약전은 배 위에서 파도를 맞았다.
늦가을 남해의 파도는 거칠었다. 배가 기울고 물이 튀었다. 함께 유배 가는 다른 죄인들은 뱃전에 매달려 신음했다. 약전은 그러지 않았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눈을 크게 뜨고 바다를 봤다.
바다는 처음이었다.
마현마을에서 태어나 한양에서 공부했다. 바다는 책에서만 봤다. 그런데 실제 바다는 책과 달랐다. 훨씬 크고, 훨씬 시끄럽고, 훨씬 살아 있었다. 파도 하나하나가 다른 소리를 냈다. 물색이 깊이에 따라 달랐다. 갈매기가 배 주변을 따라왔다가 사라졌다.
약전은 유배 가는 사람이라는 걸 잠시 잊었다.
흑산도에 도착했다.
섬은 작았다. 사방이 바다였다. 산이 있었고 마을이 있었고 어부들이 있었다. 유배인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곳이었다. 특별히 잔인하게 대하지 않았다. 그냥 작은 방 하나를 내줬다. 나가지 말라는 규칙이 있었다. 섬을 벗어나지 말라는 규칙.
섬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건 섬 안을 다 돌아다녀도 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전은 첫날부터 섬을 걸었다.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조개껍데기를 주웠다. 처음 보는 생김새였다. 이름이 뭔지 몰랐다. 어부에게 물었다. 어부가 방언으로 이름을 알려줬다. 약전은 그 이름을 적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흑산도에는 물고기가 많았다.
당연한 말이었다. 섬이니까. 하지만 약전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한양에서 나고 자란 사람에게 이 종류의 다양함은 경이로움이었다. 시장에서 보는 생선은 몇 종류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바다에는 이름도 모르는 것들이 수십 종이었다.
어부들이 잡아온 것들을 매일 봤다. 이름을 물었다. 생김새를 그렸다. 어떤 계절에 잡히는지, 어떤 걸 먹고 사는지, 어떻게 요리하는지, 뼈가 몇 개인지, 이빨이 어떻게 생겼는지.
처음엔 어부들이 의아해했다.
"양반 나으리가 왜 이런 걸 물어보시오?"
"궁금해서요."
"이거 알아서 뭐에 쓰시려고요?"
"기록하려고요."
어부들은 이해하지 못했지만 딱히 거부하지도 않았다. 묻는 걸 답하는 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들이 평생 알아온 것들을 관심 있게 들어주는 사람이 신기하고 고마웠다.
약전은 매일 기록했다.
날씨, 조류, 조개 잡는 시간, 물고기의 움직임, 어부들이 경험으로 알고 있는 지식들. 어부들은 글을 몰랐지만 수십 년의 경험이 있었다. 그 경험 안에 엄청난 지식이 있었다. 약전은 그것을 글로 옮겼다.
유배는 형벌이었다.
하지만 약전은 그 형벌 속에서 한양에서는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을 얻고 있었다.
몇 달이 지나자 어부들이 먼저 약전을 찾아오기 시작했다.
"나으리, 오늘 이상한 것 잡혔는데 뭔지 아시겠소?"
그러면 약전은 함께 보고 관찰하고 기록했다. 모르면 어부에게 물었다. 알면 설명해줬다.
마을 사람들이 약전을 점점 좋아했다.
양반이지만 거들먹거리지 않았다. 자신들을 아래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진지하게 들었다. 그들의 경험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었다.
아이들이 약전을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약전은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아무것도 없는 섬에서 나뭇가지로 모래사장에 글을 썼다. 아이들이 눈을 빛내며 배웠다. 약전은 그 눈을 볼 때마다 기운이 났다.
어느 날 섬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어부 할아버지가 약전에게 말했다.
"나으리, 나으리는 참 이상한 양반이오."
"왜요?"
"나같은 늙은 어부 말을 이렇게 진지하게 듣는 양반을 나는 처음 봤소."
약전이 웃었다.
"바다를 수십 년 본 분이 저보다 더 많이 아시는 거 아닙니까."
할아버지가 허허 웃었다.
"허지만 그걸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소. 우리가 아는 건 학문이 아니라 그냥 경험이라고들 했으니."
약전은 그 말을 들으며 뭔가가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학문과 경험은 다르지 않다. 형식이 다를 뿐이다. 어부의 수십 년 관찰은 어떤 책보다 정밀할 수 있다. 그것을 기록하고 체계화하면 학문이 된다.
약전은 그날부터 책의 제목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흑산도의 물고기에 대한 책. 섬의 옛 이름인 자산을 쓰고, 어보는 물고기 기록이라는 뜻이었다.
유배는 계속됐다.
하지만 자산어보는 조금씩 두꺼워졌다.
현재 시점, 방과 후 교실.
모둠이 모였다.
이번엔 선생님이 중간 점검을 하겠다고 해서 교실에서 만났다. 네 명이 책상을 붙이고 앉았다.
최민재가 태블릿을 들고 나타났다. 화면에는 뭔가 자료가 있었다. 준호가 슬쩍 봤다. 인터넷에서 대충 긁어온 내용이었다. 정리가 전혀 안 돼 있었다.
준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연이 정리한 자료를 펼쳤다.
"일단 각자 조사한 거 공유하고 구성 잡아볼까요."
최민재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연이 먼저 자신이 정리한 장영실 파트를 설명했다. 간결하고 명확했다. 준호가 신유박해와 정약용 파트를 이어서 발표했다. 역시 내용이 탄탄했다.
최민재 차례가 됐다.
"나는 현대 연결 파트 맡았잖아. 근데 좀 더 생각해야 할 것 같아서 오늘 발표는 어렵고."
준호가 말했다.
"다음 주가 제출인데."
"알아. 이번 주 안에 할게."
"이번 주에도 바쁘다고 했잖아."
"바쁘긴 한데 할 수 있어."
김도현이 분위기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일단 구성이라도 같이 잡아보면 어때? 준호랑 서연이 한 거 보면서 민재 파트 방향 잡는 거."
그 말에 준호는 입을 닫았다.
한 시간 동안 구성을 잡았다. 사실상 준호와 서연이 대부분 이끌었다. 최민재는 중간중간 의견을 냈는데 대부분 방향이 맞지 않거나 이미 논의된 내용이었다. 김도현은 조율을 했지만 내용보다는 분위기를 맞추는 쪽이었다.
회의가 끝나고 최민재와 김도현이 먼저 나갔다.
교실에 준호와 서연만 남았다.
서연이 회의록을 적으며 말했다.
"최민재 파트는 우리가 해야 할 것 같아요."
"알아요."
"화나죠?"
"당연히."
"근데 할 거죠?"
준호는 대답하지 않다가 말했다.
"하긴 할 건데. 그냥 하고 싶지는 않아요."
서연이 펜을 내려놓고 준호를 봤다.
"강준호 씨, 한 가지 물어봐도 돼요?"
"왜 씨예요."
"그냥 존중하는 거예요. 물어봐도 돼요?"
"물어봐요."
"왜 지금까지 말 안 했어요? 최민재한테. 이건 아니다, 제대로 해와라. 왜 그 말을 못 했어요?"
준호는 잠시 침묵했다.
"분위기 이상해지잖아요."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게 싫어서요?"
"그것도 있고. 말해봤자 바뀌지 않을 것 같아서요."
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말 안 해서 바뀐 게 있어요?"
준호가 서연을 봤다.
없었다. 아무것도 바뀐 게 없었다. 말하지 않아서 분위기는 유지됐지만 상황은 그대로였다. 아니, 더 나빠졌다.
서연이 다시 말했다.
"정약용이 유배 가기 전에 딱 한 번 제대로 자기 생각을 말했으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 해봤어요. 아마 달라지지 않았을 거예요. 노론이 너무 강했으니까. 근데 적어도 본인은 달랐겠죠. 말하지 않고 당하는 것과, 말하고 당하는 것은 달라요."
준호는 그 말을 천천히 씹었다.
말하지 않고 당하는 것과, 말하고 당하는 것은 달라요.
창밖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교실 안 형광등이 윙 하고 울렸다. 준호는 한참 그 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었다.
17회 — 자산어보, 물고기에게 배우다
흑산도에 두 번째 봄이 왔다.
약전은 이제 섬의 리듬을 몸으로 알았다. 새벽에 어떤 새가 울면 날이 맑고, 어떤 구름이 끼면 오후에 비가 왔다. 조류가 어떻게 흐르면 고기가 많이 잡히고, 어떤 방향에서 바람이 불면 어부들이 나가지 않았다.
한양에서의 삶은 책으로 가득했다.
흑산도에서의 삶은 관찰로 가득했다.
둘이 다른 게 아니었다. 책은 과거의 관찰이고, 지금의 관찰은 미래의 책이 된다. 약전은 그 순환을 몸으로 이해했다.
자산어보의 분량이 두꺼워졌다.
물고기만 기록하는 게 아니었다. 해초, 조개, 갑각류, 바다 포유류까지. 각 생물의 형태, 습성, 서식지, 잡는 방법, 요리법, 약으로 쓰는 방법까지. 어부들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지식들이 하나씩 기록으로 남겨졌다.
어느 날 젊은 어부 창대가 약전에게 말했다.
"나으리, 저 오늘 이상한 거 잡았어요."
낚시에 걸려온 것이 보통 생선이 아니었다. 생김새가 괴상했다. 넓적하고 가시가 돋아 있었다. 색도 희한했다. 어부들 사이에서도 몇 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것이었다.
약전은 그것을 받아들었다.
한 시간 동안 관찰했다. 눈의 위치, 비늘의 방향, 아가미의 구조, 지느러미의 수. 손으로 만져보고 냄새를 맡았다. 그림을 그렸다. 창대에게 물었다. 이 생물이 어디서 잡혔는지, 어떤 깊이였는지, 어떤 것과 함께 있었는지.
기록이 완성됐다.
창대가 옆에서 구경하다가 말했다.
"나으리는 이걸 왜 이렇게 자세히 적어요?"
"나중에 이 생물을 처음 보는 사람이 알 수 있게."
"언제요?"
"내가 죽고 나서도."
창대는 그 말에 잠시 멈췄다.
"죽고 나서도요?"
"기록은 사람보다 오래 살아요. 나는 언젠가 여기서 나가거나 죽겠지만, 이 기록은 남아요. 이 물고기를 본 사람이 있었다는 게 남아요."
창대는 그 말을 들으며 뭔가 알 것 같으면서도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약전이 말을 이었다.
"창대야, 네가 아는 것들도 기록해야 해. 어부들이 아는 것들. 글 모르면 내가 대신 써줄게. 말로 해줘. 받아적을 테니까."
그날부터 창대와 약전은 매일 한 시간씩 앉아 이야기했다. 창대가 경험을 말하면 약전이 받아적었다. 창대가 쑥스러워하면 약전이 다시 물어봤다. 어부의 경험이 학자의 문장으로 정리됐다.
그것이 자산어보의 진짜 힘이었다.
한 사람이 쓴 책이 아니었다. 흑산도 어부들이 수십 년 동안 쌓아온 경험과, 정약전이 가져온 학문적 틀이 만나서 만들어진 책이었다.
그 무렵 강진에서 편지가 왔다.
동생 약용에게서였다.
약용은 장기 유배에서 다시 강진으로 이배됐다는 소식이었다. 강진은 전라도였다. 흑산도와 멀지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바다가 가로막고 있었다. 만날 수 없었다.
편지 내용은 길었다.
강진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공부하는지, 무엇을 쓰고 있는지.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 이런 문장이 있었다.
형, 저는 여기서 오히려 더 많이 보입니다. 한양에서는 권력 싸움에 눈이 흐려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여기서는 선명하게 보입니다. 백성들이 어떻게 사는지, 수령들이 얼마나 수탈하는지, 법이 얼마나 백성과 멀리 있는지. 형도 그렇습니까?
약전은 편지를 읽고 한참 바다를 봤다.
그렇다.
한양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여기서 보였다. 서울에서는 어부가 어떻게 사는지 몰랐다. 섬에서 아이들이 글도 못 배우고 자란다는 걸 몰랐다. 세금이 어떻게 매겨지고 어떻게 걷히는지 몰랐다.
유배지가 학교였다.
아무도 의도하지 않은 학교. 권력자들이 약전과 약용을 멀리 보내려 했는데, 오히려 더 가까운 곳에서 세상을 배우게 된 꼴이었다.
약전은 답장을 썼다.
그래, 나도 그렇다. 어부들이 나를 가르쳤다. 내가 배운 학문보다 그들이 경험으로 아는 것이 더 정확한 경우가 많다. 우리가 한양에서 알았다고 생각한 것들이 얼마나 좁은 창으로 본 것인지. 기록해라, 용아. 네가 보는 것을 다 기록해라. 그게 남아야 한다.
편지를 봉하면서 약전은 생각했다.
우리를 여기 보낸 자들은 우리를 지우려 했다. 하지만 지워지는 대신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쓰고 있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현재 시점, 점심시간.
준호는 혼자 급식을 먹고 있었다.
항상 그랬다. 혼자 먹거나 책을 들고 먹었다. 오늘은 책 대신 수행평가 자료를 보며 먹었다.
최민재가 친구들과 큰 소리로 웃으며 식판을 들고 지나갔다. 준호 옆을 지나치며 힐끗 봤다.
"야 강준호, 밥은 혼자 먹냐?"
"보면 알잖아요."
최민재가 비죽이 웃으며 지나갔다.
준호는 식판을 내려다봤다. 밥이 입에서 맛이 없었다.
그때 서연이 식판을 들고 옆에 앉았다.
준호가 놀라서 봤다.
서연은 그냥 앉아서 밥을 먹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었다.
한동안 둘 다 말없이 먹었다.
준호가 먼저 말했다.
"여기 왜 앉아요."
"밥 먹으려고요."
"다른 자리 많은데."
"네 옆이 편해서요."
준호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서연이 말했다.
"아까 최민재 말, 신경 쓰지 마요."
"신경 안 써요."
"얼굴에 다 써 있던데."
준호는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나도 전 학교에서 혼자 밥 먹었어요. 잘한다고 소문났더니 먼저 피하더라고. 이상하잖아요. 잘하면 같이 있고 싶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실제로는 반대야."
"잘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자기가 못해 보이니까요."
"그게 그 사람 문제이지 우리 문제는 아니잖아요."
준호는 잠깐 서연을 봤다.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돼요?"
"간단하지 않죠. 근데 간단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해요."
"어떻게요?"
서연은 숟가락을 내려놓고 말했다.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물고기 연구할 때, 유배 간 게 억울하지 않았을까요. 억울했겠죠. 근데 그 시간에 자산어보를 썼잖아요. 억울한 감정은 억울한 감정이고, 그 시간에 뭘 할지는 별개잖아요."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밥을 먹었다.
억울한 감정은 억울한 감정이고, 그 시간에 뭘 할지는 별개다.
쉬운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식판을 비울 즈음, 준호가 말했다.
"서연 씨는 왜 전학 왔어요?"
서연이 잠깐 멈췄다가 말했다.
"그 얘기는 나중에."
준호는 더 묻지 않았다.
두 사람은 식판을 들고 일어났다.
18회 — 강진 유배지, 다산초당의 탄생
강진의 겨울은 매서웠다.
전라도라 해도 겨울 바람은 칼날 같았다. 정약용이 강진에 처음 도착했을 때 받아준 곳은 동문 밖 주막이었다. 여관도 아니었다. 술과 밥을 파는 작은 주막의 골방 하나. 천장이 낮고 바닥이 차가웠다. 벽 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주막 주인 할머니는 처음엔 유배인을 보는 눈이 조심스러웠다.
죄인이었다. 나라에서 내쫓은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을 가까이하면 자신에게 불똥이 튈 수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밥만 주고 말은 섞지 않았다.
그런데 약용은 이상했다.
죄인인데 기죽지 않았다. 슬퍼 보이긴 했지만 무너진 사람 같지 않았다. 아침이면 일어나서 주변을 산책했다. 낮에는 앉아서 책을 읽거나 글을 썼다. 밥을 먹을 때는 꼭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어느 날 할머니가 밥상을 들여놓다가 약용이 쓰는 것을 힐끗 봤다.
"나으리, 지금 뭘 쓰시오?"
"이 고을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쓰고 있습니다."
"우리 사는 것을요?"
"네. 세금이 어떻게 매겨지는지, 관아에서 어떻게 대하는지, 뭐가 힘든지."
할머니는 의아했다.
"그걸 써서 뭐 하시게요."
"언젠가 이 나라 법이 바뀌어야 한다면, 실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를 알아야 하니까요."
할머니는 한참 약용을 봤다.
죄인이 나라 걱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내쫓은 나라의 백성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는 밥상에 반찬을 하나 더 올렸다.
강진에서의 첫 몇 년은 고통스러웠다.
한양에 두고 온 아내와 아이들이 보고 싶었다. 언제 돌아갈 수 있는지 기약이 없었다. 편지가 오고 가긴 했지만 몇 달에 한 번이었다. 편지가 오는 날은 좋았고 편지가 없는 날들이 더 길었다.
형 약전의 편지도 왔다. 흑산도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물고기 이야기, 어부 이야기, 섬 아이들 이야기. 약용은 그 편지를 읽으며 형이 잘 버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동시에 형이 거기서 혼자 얼마나 외로울지도 알았다.
약용은 슬픔을 공부로 눌렀다.
주막 골방에서 책을 읽었다. 고을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강진 현감이 어떻게 세금을 걷는지, 향리들이 어떻게 백성을 수탈하는지, 농민들이 왜 해마다 더 가난해지는지를 들었다.
듣고 기록했다. 기록하고 생각했다. 생각하고 또 썼다.
그러다 강진에 온 지 사 년째 되던 해, 운명 같은 만남이 있었다.
혜장 선사였다.
만덕산 백련사의 스님이었다. 약용은 어느 날 산책을 나갔다가 백련사 근처에서 혜장을 만났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자마자 이야기가 통했다. 종교가 달랐다. 하지만 학문에 대한 열정, 세상을 보는 방식이 비슷했다.
혜장은 약용에게 백련사 뒤편 산기슭의 공간을 써도 된다고 했다.
거기가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됐다.
다산초당은 크지 않았다.
작은 초가였다. 주변에 차나무가 많았다. 뒤로는 산이 있었고 앞으로는 강진만이 보였다. 아침이면 안개가 끼었다가 해가 오르면 사라졌다. 늦가을에는 단풍이 들었고 겨울에는 눈이 쌓였다.
약용은 거기서 비로소 자신의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자들이 생겼다. 강진 고을의 젊은이들이 약용에게 배우러 왔다. 약용은 단순히 경서만 가르치지 않았다. 현실을 봐라. 책 속에만 있지 말아라. 네가 사는 고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라.
제자들이 그 가르침에 따라 고을 곳곳을 살피고 돌아와 보고했다. 약용은 그것을 바탕으로 글을 썼다.
목민심서가 그렇게 탄생하기 시작했다.
수령이 어떻게 해야 백성을 제대로 섬기는지를 담은 책이었다. 이론이 아니었다. 실제 강진 고을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바탕으로 쓴 책이었다. 어떤 수령이 어떻게 잘못했는지, 어떻게 하면 더 나았을지를 구체적으로 썼다.
약용은 밤마다 썼다.
촛불이 짧아질 때까지 썼다. 손이 굳어지면 잠깐 쉬었다가 다시 썼다. 잠이 드는 날보다 쓰다 새벽을 맞는 날이 더 많았다.
다산초당 마당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약용은 거기에 잉어를 키웠다. 아침에 일어나면 잉어에게 먹이를 줬다. 잉어가 물 위로 올라와 입을 뻐끔거리는 걸 보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 작은 루틴이 유배 생활을 버티게 해줬다.
잉어는 강진을 벗어날 수 없었다.
약용도 강진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지만 약용이 쓰는 글은 달랐다. 그 글은 강진을 넘어 한양으로 갈 수 있었고 한양을 넘어 후대로 갈 수 있었다. 몸은 갇혀 있었지만 생각은 갇히지 않았다.
어느 봄날 아침이었다.
제자 중 하나인 황상이 초당으로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선생님, 고을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무슨 소문이냐."
"선생님이 여기서 반역을 도모한다는 소문이옵니다. 모른 사람들이 모여 나쁜 일을 꾸민다고."
약용은 찻잔을 내려놨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유배지에서도 감시는 계속됐다. 제자들이 모이는 게 눈에 거슬리는 사람들이 있었다. 혜장 선사와 자주 만나는 것도. 글을 쓰는 것도.
아무것도 안 하면 가만히 뒀겠지. 하지만 무언가를 하면 반드시 누군가 트집을 잡았다.
"황상아."
"예, 선생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공부하고 있사옵니다."
"그게 전부냐."
"예."
"그러면 됐다. 계속 해라."
황상이 불안한 얼굴로 물었다.
"하지만 소문이 퍼지면 더 큰 화가 생기지 않겠습니까."
약용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소문은 우리가 막을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소문이 거짓이 되도록 사는 것뿐이다. 반역을 도모한다고? 우리는 책을 쓰고 있다. 그 책이 증거다. 두렵다면 더 열심히 써라. 그게 우리 방어다."
황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약용은 다시 붓을 들었다.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오히려 더 차분해졌다.
현재 시점, 준호의 학교.
수행평가 제출이 일주일 남았다.
준호는 최민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준호: 민재야, 현대 연결 파트 자료 이번 주 수요일까지 보내줘. 그래야 전체 편집하고 제출 준비할 수 있어.
최민재는 두 시간 후에 답했다.
최민재: ㅇㅇ 알겠어
수요일이 됐다. 자료가 오지 않았다.
준호는 저녁에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강준호: 자료 오늘이었는데.
최민재: 아 미안 깜빡했어 내일 줄게
목요일. 역시 오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 준호는 학교에서 최민재를 직접 마주쳤다. 복도였다. 최민재는 친구들과 떠들다가 준호를 보고 살짝 눈길을 피했다.
준호가 다가갔다.
"민재야."
최민재가 돌아봤다.
"아 준호야, 자료 있잖아, 이번 주말에…"
"잠깐 얘기할 수 있어?"
친구들이 둘을 봤다. 최민재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어, 그래."
둘이 복도 한쪽으로 갔다.
준호가 말했다.
"솔직하게 물어볼게. 이번 수행평가 할 생각 있어, 없어?"
최민재가 눈썹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할 생각 있지."
"그러면 왜 계속 자료를 안 보내? 약속을 세 번 어겼어."
"바빠서 그런 거잖아.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냐."
준호는 숨을 한 번 쉬었다. 이 순간이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여기서 또 물러서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예민한 게 아니야. 조별 과제는 같이 하는 거잖아. 나랑 서연이가 다 하고 너는 발표만 하는 건 공정하지 않아. 그게 싫다는 거야."
최민재의 얼굴이 굳었다.
"야, 내가 발표를 얼마나 잘하는데. 발표가 제일 중요한 거 아니야?"
"발표도 중요하지. 근데 발표할 내용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잖아. 지금 그 내용을 나랑 서연이가 다 만들고 있어."
"그러면 니들이 잘하니까 하는 거지 뭐. 나는 내 역할 하면 되잖아."
준호는 그 말에 할 말이 많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 했다.
"민재야, 우리 지금 정약용이 왜 유배를 갔는지 공부하고 있잖아. 능력 있는 사람 것을 빼앗고 자기가 가져간 사람들 때문에. 근데 지금 우리 모둠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어."
최민재가 순간 말을 잃었다.
준호는 더 말하지 않았다. 돌아서서 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손이 약간 떨렸다. 말하고 나니 무서운 것도 있었다. 분위기가 나빠질 게 뻔했다.
하지만 서연이 말했던 게 떠올랐다.
말하지 않고 당하는 것과, 말하고 당하는 것은 달라요.
달랐다. 분명히 달랐다.
19회 — 목민심서는 왜 쓰였는가
다산초당에 가을이 왔다.
차나무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연못의 잉어는 여름보다 깊이 내려갔다. 약용은 그것을 보며 겨울이 오는 것을 알았다.
올해로 유배 온 지 칠 년이었다.
칠 년 동안 강진 고을을 봤다. 칠 년 동안 백성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칠 년이 목민심서의 뿌리가 됐다.
목민심서는 총 마흔여덟 편이었다.
부임부터 해관까지. 수령이 고을에 부임하는 첫날부터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날까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체적으로 썼다.
이론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었다. 세금을 걷을 때 어떻게 걷어야 백성이 억울하지 않은지. 향리들이 중간에서 착복하는 방법이 어떤 것이 있는지, 어떻게 막을 수 있는지. 죄를 지은 자를 처벌할 때 어떻게 해야 공정한지. 흉년이 들었을 때 구호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모두 강진에서 직접 보고 들은 것들이었다.
강진 현감이 세금을 걷는 방식을 봤다. 잘못된 점이 보였다. 어떻게 해야 나은지 생각했다. 그것을 썼다. 그 과정이 수백 번 반복됐다.
제자 황상이 어느 날 물었다.
"선생님, 목민심서를 완성하면 어디에 쓰실 겁니까. 유배 중에는 조정에 올릴 수도 없고."
약용은 붓을 잠깐 내려놨다.
"꼭 조정에 올려야 쓸모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요?"
"이 책이 남아야 한다. 언젠가 이 나라 어딘가에서 백성을 진심으로 섬기려는 수령이 나타날 것이다. 그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 된다. 내가 살아서 볼 수 없어도 상관없다."
황상이 말했다.
"선생님은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좋은 것을 쓰면서 정작 선생님은 아무 인정도 못 받으시는데."
약용은 웃었다.
쓸쓸하지만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억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인정이라는 게 뭐냐. 지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많으면 인정받은 것이고, 지금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인정받지 못한 것이냐. 장영실이 만든 해시계는 지금도 쓰이고 있다. 장영실은 죽고 없지만 해시계는 있다. 그게 인정 아니냐."
황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 말씀은 나중에 인정받으면 된다는 뜻입니까."
"아니다. 나중에 인정받기 위해 지금 하는 게 아니다. 지금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백성들이 억울하게 사는 게 지금 잘못된 것이다. 그것을 기록하고 고칠 방법을 쓰는 것이 지금 옳은 것이다. 나중에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그건 내가 정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황상은 그 말을 공책에 받아적었다.
약용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기록해두는 거냐?"
"예. 선생님 말씀은 기록해두어야 할 것 같습니다."
약용이 다시 붓을 들며 말했다.
"좋은 습관이다."
목민심서 외에도 약용이 강진에서 쓴 책은 많았다.
흠흠신서. 재판을 어떻게 공정하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었다.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으려면 증거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고문에 의한 허위 자백을 어떻게 막는지를 담았다.
경세유표. 나라의 제도 전체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책이었다. 토지 제도, 조세 제도, 관리 선발 방식까지 총망라한 국가 개혁 청사진이었다.
유배지에서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 책들이었다. 권력에서 밀려난 사람이, 강진이라는 작은 고을에서, 나라 전체를 설계했다.
어쩌면 권력 안에 있었다면 못 썼을 것이다.
권력 안에서는 권력을 지키는 일이 먼저였다. 권력 밖으로 나오니까 비로소 권력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서 썩었는지가 보였다. 유배는 벌이었지만 동시에 거리였다. 거리가 생기니까 전체가 보였다.
약용은 그것을 쓰는 밤마다 생각했다.
나를 여기 보낸 자들이 나를 죽이려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살게 했다. 더 중요한 것을 할 수 있게 했다. 아이러니였다. 하지만 그 아이러니를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원망은 힘을 소진시킨다. 소진된 힘으로는 아무것도 쓸 수 없다.
현재 시점, 수업 중.
역사 선생님이 칠판에 썼다.
목민심서 — 백성을 위한 목자의 마음
선생님이 말했다.
"정약용은 왜 목민심서를 썼을까요. 단순히 불만이 있어서? 유배 중 시간이 남아서?"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둘러봤다.
"강준호, 어떻게 생각해요?"
준호가 천천히 말했다.
"지금 잘못된 것이 있으니까요. 백성들이 억울하게 사는 게 지금 잘못된 것이고, 그것을 기록하고 고칠 방법을 쓰는 것이 지금 옳은 것이니까요."
선생님이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좋은 대답이에요. 어떻게 생각했어요?"
"수행평가 자료 조사하면서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이어졌다. 준호는 필기를 하면서 어딘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정약용의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지금 옳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최민재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몰랐다. 최민재가 달라질지, 분위기가 나빠질지. 하지만 말하는 것이 지금 옳은 것이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옆 자리의 서연이 쪽지를 건넸다.
작은 종이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최민재 어젯밤 모둠방에 자료 올렸어요.
준호가 서연을 봤다. 서연은 앞을 보며 필기를 하고 있었다.
준호는 그 쪽지를 노트 사이에 끼웠다.
말하지 않고 당하는 것과, 말하고 당하는 것은 달랐다. 실제로 달랐다.
20회 — 시기하는 자들은 왜 두려워했나
한양 조정. 순조 연간.
유배지의 정약용이 책을 쓴다는 소문이 들렸다.
제자들이 왕래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강진 고을 사람들이 유배인을 존경한다는 소문도 들렸다. 그 소문들이 한양에 닿을 때마다 노론 벽파의 핵심 신하들은 불편해졌다.
멀리 보냈는데 사라지지 않았다.
이름이 지워져야 하는데 오히려 더 커지고 있었다.
노론의 핵심 인물 중 심환지라는 자가 있었다. 그는 유배 처분을 주도한 인물 중 하나였다. 영리하고 냉정한 사람이었다. 정치적 계산에 밝았다.
그는 부하를 불러 말했다.
"강진의 정약용이 무엇을 쓰고 있는지 파악하라."
첩자가 강진으로 내려갔다.
돌아온 보고는 예상보다 심각했다.
목민심서. 수백 편에 달하는 글. 지방 수령의 잘못된 관행을 낱낱이 기록한 책. 거기에는 지방관들의 부패 사례가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다. 이름은 없었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누구를 말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경세유표. 나라 제도 전체의 개혁안. 거기에는 현재의 토지 제도가 어떻게 잘못됐는지가 적혀 있었다. 현재 토지 제도로 이익을 보는 건 누구인가. 양반 대지주들이었다. 노론 핵심 가문들이었다.
심환지는 그 보고를 들으며 표정이 굳었다.
이것이 세상에 나오면 안 됐다.
"유배인이 제자를 모으고 책을 쓰는 것을 제한하라. 그것이 법적으로 허용되는 것인지 검토하라."
검토가 시작됐다. 하지만 법적으로 막을 방법이 없었다. 유배인에게 독서와 저술을 금지하는 규정이 없었다.
"그러면 제자들의 왕래를 막아라."
강진 현감에게 압력이 갔다. 현감은 곤란했다. 정약용은 고을 사람들에게 인심을 얻고 있었다. 제자들을 막으면 고을 사람들이 반발할 것이었다. 하지만 위에서 압력이 오니 어쩔 수 없었다.
한동안 제자들의 방문이 줄었다.
하지만 황상은 포기하지 않았다. 밤에 몰래 왔다. 낮에 지나가는 척하며 심부름꾼을 통해 자료를 전달했다.
약용도 포기하지 않았다.
제자가 오지 못하면 혼자 썼다. 낮에 쓰고 밤에 또 썼다. 손이 아프면 쉬었다가 다시 썼다.
심환지는 그 보고를 받으며 생각했다.
왜 이 인간은 멈추지 않는가.
멈추지 않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권력도 없었다. 명예도 없었다. 돌아올 기약도 없었다. 그런데도 계속 썼다.
두려운 건 그거였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은 예측할 수 없다.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은 통제할 수 없다. 통제할 수 없는 사람은 언제 어떤 식으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지 알 수 없다.
심환지는 그 두려움을 절대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두려워한다는 걸 인정하는 순간 약해지는 것이었다.
대신 더 촘촘하게 감시망을 쳤다.
약용은 감시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모르는 척했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감시받는다고 멈추면 그들이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밤 혼자 앉아 생각했다.
심환지 같은 사람은 왜 자신을 두려워할까.
두려움의 정체가 무엇일까. 권력을 빼앗길까 봐? 자신들의 잘못이 드러날까 봐? 그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약용은 붓을 들어 생각을 썼다.
시기하는 자들은 왜 두려워하는가. 자신이 가진 것이 실력이 아니라 신분과 운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실력으로 얻은 것은 실력 있는 자가 나타나도 크게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신분과 운으로 얻은 자리는 실력 있는 자가 나타나면 흔들린다. 그래서 실력 있는 자를 지워야 한다. 지우지 않으면 자신들의 자리가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약용은 그것을 읽어봤다.
맞는 것 같았다.
자기 것이 진짜라면 남이 잘해도 두렵지 않다. 자기 것이 가짜라면 남이 잘할수록 두려워진다.
현재 시점, 교실.
최민재가 모둠방에 올린 자료를 준호가 열어봤다.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물론 준호나 서연이 한 것에 비하면 깊이가 없었다. 하지만 최소한 직접 쓴 것이었다. 인터넷 글을 복붙한 게 아니었다.
준호는 그 자료를 보며 잠시 생각했다.
말하기 전과 말한 후가 달랐다.
말하기 전의 최민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말한 후의 최민재는 적어도 뭔가를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잘하지 않아도.
서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준호: 최민재 자료 봤어요? 생각보다 괜찮던데.
박서연: 봤어요. 내가 가르쳐줬거든요.
강준호: 언제요?
박서연: 어제 방과 후에 도서관에서. 최민재가 먼저 물어봤어요. 어떻게 쓰는지.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멈췄다.
최민재가 먼저 물어봤다.
준호가 말한 그 날 이후에.
준호는 창밖을 봤다. 하늘이 높았다. 가을 하늘 특유의 높고 파란 색이었다.
무언가 작은 것이 달라졌다.
아주 작은 것이었다. 세상이 바뀐 것도 아니고 최민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하나가 달라졌다.
준호는 다시 수행평가 파일을 열었다.
최민재의 자료를 전체 구성에 맞게 편집하기 시작했다. 부족한 부분은 물음표로 표시했다. 서연에게 공유하고 보완할 부분을 메모했다.
처음으로 이 수행평가가 진짜 모둠 작업처럼 느껴졌다.
완벽하지 않았다. 여전히 불균형했다. 그래도 처음보다는 나았다.
나아지는 것, 그것으로 충분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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