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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선 자들의 노래

21회 — 편지 한 통, 형제의 마지막 안부

강진에 눈이 내렸다.

다산초당 마당의 차나무 위에 흰 눈이 쌓였다. 연못은 얇게 얼었다. 잉어가 보이지 않았다. 깊은 곳으로 내려갔을 것이었다. 약용은 그것을 보며 오늘도 혼자 아침을 맞았다.

유배 온 지 열여섯 해였다.

열여섯 해. 세어보면 길다는 걸 알면서도, 실감하면 더 길었다. 한양을 떠날 때 아이들이 어렸다. 이제 장성했을 것이었다. 아내의 편지에는 아들이 장가를 갔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자신은 그 혼례에 없었다. 손자가 태어나면 아마 그것도 편지로 알게 될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가슴 한쪽이 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약용은 그럴 때마다 붓을 들었다.

감정을 쓰는 것이 아니었다. 감정 위에 글을 덮는 것이었다. 슬픔이 올라오면 그 위에 문장을 올렸다. 그 문장이 목민심서가 됐고 경세유표가 됐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냉정하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약용은 알았다. 슬픔에 잠기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잠기지 않으려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썼다.

그해 겨울 흑산도에서 편지가 왔다.

형 약전의 편지였다. 글씨가 예전보다 떨렸다. 나이가 든 탓이기도 했고 손이 더 많이 굳은 탓이기도 했다. 하지만 내용은 여전히 약전다웠다.

용아.

흑산도에 올겨울 유독 파도가 크다. 어부들은 풍어라고 좋아하는데 나는 그 파도 소리에 잠을 잘 못 자고 있다. 나이 탓인지 소음에 예민해졌다.

자산어보가 거의 완성됐다. 마지막 부분을 다듬고 있다. 창대가 많이 도와줬다. 그 아이가 없었으면 반도 못 했을 것이다. 어부의 아들이 학자의 책을 완성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나라가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면 창대 같은 아이가 얼마나 많은 것을 했을지. 그 생각을 하면 아직도 가슴이 아프다.

동생아, 나는 요즘 몸이 좋지 않다. 숨이 차고 밥맛이 없다. 늙은 것이겠거니 하는데 섬에는 좋은 의원이 없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걱정할 것 없다. 그냥 알리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말한다. 우리가 쓴 것들이 남아야 한다. 내가 먼저 가더라도 자산어보는 남겨라. 네 목민심서도 남겨라. 그것들이 남아 있는 한 우리는 사라지는 게 아니다. 기억해라.

형 약전.

약용은 그 편지를 세 번 읽었다.

세 번 다 마지막 부분에서 멈췄다.

내가 먼저 가더라도.

형이 그 말을 썼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약용은 너무 잘 알았다.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의 말이었다. 아직 죽은 것이 아니지만 곧 올 수 있다고 느끼는 사람의 말이었다.

약용은 답장을 썼다.

형.

편지 받았습니다. 글씨가 떨리는 게 보여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형이 남긴 것들은 반드시 남기겠습니다. 자산어보는 내가 직접 챙기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한 가지만 부탁드립니다. 먼저 가지 마십시오. 내가 강진을 벗어나는 날 흑산도로 가겠습니다. 형을 직접 보고 싶습니다. 유배 온 이후로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보고 싶습니다.

동생 약용.

편지를 봉하면서 약용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참았다. 울면 글씨가 번질 것이었다. 번진 편지를 보내면 형이 걱정할 것이었다.

꾹 참고 봉했다.

심부름꾼에게 부탁해 흑산도로 보냈다.

그 답장이 형에게 닿았을 때, 형은 아직 살아 있었다.

하지만 그다음 해 봄,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눈을 감았다.

약용보다 먼저 갔다.

약용이 그 소식을 들은 것은 한참 후였다. 강진에 소식이 닿기까지 몇 주가 걸렸다. 소식을 전해준 것은 황상이었다. 황상이 말을 잇지 못하며 편지를 건넸다.

약용은 편지를 받아 들었다.

읽었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황상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생님."

약용이 말했다.

"괜찮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지 않다. 하지만 괜찮다고 해야겠다."

황상이 눈가를 훔쳤다.

약용은 그날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처음으로 붓을 들지 않은 날이었다. 대신 초당 앞마당에 오래 앉아 있었다. 하늘을 봤다. 구름이 흘렀다. 바람이 차나무를 흔들었다.

형과 함께 서점에서 책을 샀던 날이 생각났다. 형이 동생의 용돈이 부족하다며 돈을 꺼내던 손이 생각났다. 야, 네가 직접 찾아, 하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기록해. 어디서 무엇을 보든 기록해.

그게 형이 자신에게 준 가장 큰 가르침이었다.

약용은 다음 날 새벽부터 다시 붓을 들었다.

형을 위한 글이 아니었다. 형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 형이 원하는 건 동생이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동생이 계속 쓰는 것이었다.

그래서 썼다.

현재 시점, 강준호의 방.

준호는 수행평가 최종본을 완성하고 있었다.

파일 이름을 저장하려다 멈췄다. 파일 이름에 팀원 이름을 넣어야 했다. 강준호, 박서연, 최민재, 김도현. 네 이름을 적었다.

최민재의 이름을 적으면서 잠깐 생각했다.

발표는 최민재가 할 것이었다. 처음 약속대로였다. 하지만 이제는 다른 의미에서였다. 최민재가 자기 파트를 직접 쓴 이상, 자기 파트는 자기가 발표하는 게 맞았다. 준호와 서연의 파트는 준호와 서연이 맡기로 했다.

균형이 맞지 않았다. 여전히 준호와 서연의 비중이 훨씬 컸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나았다.

준호는 파일을 저장하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수행평가를 준비하면서 이상한 일이 생겼다. 장영실과 정약용의 이야기가 자꾸 자신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물론 규모가 달랐다. 자신은 조별 과제를 하는 중학생이었고 그들은 조선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구조는 같았다.

잘하면 이용당한다. 잘하면 미움받는다. 잘해도 공은 다른 곳으로 간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멈추지 않은 사람들이 결국 남는다.

준호는 노트를 꺼내 뭔가를 썼다.

수행평가 발표문이 아니었다. 그냥 자기 생각이었다.

나는 왜 공부를 잘하는 게 싫을 때가 있을까. 잘하는 게 나쁜 건 아닌데. 잘하면 이용당하니까. 잘하면 혼자가 되니까. 잘하면 미움받으니까. 근데 안 하면 내가 싫어지니까. 하기 싫어도 하게 되는 건 결국 나를 위해서다. 남한테 잘 보이려는 게 아니라 내가 나한테 부끄럽지 않으려고.

장영실도 그랬겠지. 세종이 칭찬해줘서 만든 게 아니었을 거다. 하늘을 보고 싶었고 물을 끌고 싶었고 시간을 재고 싶었던 거다. 그게 하고 싶으니까 한 거다.

그러면 나도 그렇게 하면 된다. 최민재가 어떻게 하든. 다들 어떻게 보든. 내가 하고 싶으니까 한다. 그게 전부다.

준호는 노트를 덮었다.

창밖에 밤하늘이 있었다. 서울 하늘이라 별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밝은 것 하나가 보였다. 준호는 그게 북극성인지 다른 별인지 몰랐다.

하지만 거기 있다는 건 알았다.

22회 — 역사는 그들을 다시 불렀다

1818년, 가을.

정약용이 강진에 온 지 십팔 년이 됐다.

그해 유배가 풀렸다.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노론 벽파의 핵심 인물들이 차례로 실각했다. 오랫동안 권력을 쥐고 있던 그들의 시대가 저물기 시작했다. 새로운 세력이 올라왔고 억울하게 유배된 사람들을 일부 풀어주는 분위기가 됐다.

정약용의 이름이 유배 해제 목록에 올랐다.

황상이 그 소식을 들고 달려왔다.

숨을 헐떡이며 초당 문을 열었다. 약용이 여느 때처럼 앉아서 글을 쓰고 있었다. 황상이 소리쳤다.

"선생님, 유배가 풀렸습니다!"

약용은 붓을 내려놓지 않고 말했다.

"알았다."

"알았다고요? 선생님, 집에 가실 수 있습니다! 한양으로!"

약용이 그제야 붓을 내려놨다.

천천히 일어섰다. 창밖을 봤다. 차나무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연못의 잉어가 수면 위로 올라와 입을 뻐끔거렸다.

십팔 년.

이 공간에서 십팔 년을 살았다. 처음엔 낯설었고 나중엔 익숙해졌다. 익숙해지면서 싫어졌다가 받아들이게 됐다. 이제는 이 마당, 이 차나무, 이 연못이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떠나야 하는구나."

황상이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선생님이 가시면 저는 어떻게 합니까."

약용이 황상을 봤다.

처음 만났을 때 어린 소년이었다. 이제 어엿한 청년이었다. 자신이 강진에서 키운 제자들 중 가장 오랫동안 곁에 있었던 아이.

"황상아, 내가 가르친 게 뭐냐."

황상이 울먹이며 말했다.

"기록하는 것이옵니다."

"그게 전부냐."

"현실을 봐야 한다는 것이옵니다. 책 속에만 있지 말고."

"그리고?"

"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옵니다."

약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내가 없어도 할 수 있겠구나."

황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약용은 황상의 어깨를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짐을 쌌다.

책들이 많았다. 십팔 년 동안 쓴 것들이었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그 외 수백 편의 글들. 황상이 보따리를 묶는 것을 도왔다.

초당을 떠나는 날 아침, 약용은 마지막으로 연못 앞에 섰다.

잉어가 올라왔다. 먹이를 주던 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약용은 손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손을 연못 위에 흔들었다.

"잘 있거라."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은 떠날 때와 달랐다.

떠날 때는 끌려갔다. 돌아올 때는 걸어왔다. 같은 길인데 다른 길이었다. 떠날 때는 앞을 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돌아올 때는 길 위의 모든 것이 보였다.

한양 근처에 다가올 때 마음이 이상했다.

기쁜 것도 아니었고 슬픈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래된 것이 끝났다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는 느낌.

한양에 도착한 날 가족이 나와 있었다.

아내가 머리가 하얗게 됐다. 자신도 마찬가지였을 것이었다. 아들이 장성해 서 있었다. 손자가 아내 옆에서 낯선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약용은 손자의 눈을 봤다.

호기심 가득한 눈이었다. 무서워하지 않았다. 그냥 궁금한 눈이었다.

약용은 그 눈을 보며 생각했다.

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조금이라도 나아야 한다. 그래서 썼다. 그 이유로 충분했다.

정약용은 한양으로 돌아온 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남은 생을 글을 다듬는 데 썼다. 강진에서 쓴 것들을 고치고 보완했다. 제자들을 만났다. 젊은 학자들과 이야기했다.

1836년, 정약용은 일흔다섯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가 남긴 책은 오백 권이 넘었다.

유배지에서 쓴 책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을 내쫓은 자들이 없애려 했던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역사는 그를 다시 불렀다.

죽고 수십 년 후, 그의 책들이 재발견됐다. 목민심서는 관리들의 필독서가 됐다. 경세유표는 조선 말기 개혁 논의에서 빠지지 않는 텍스트가 됐다. 흠흠신서는 법학 연구에서 중요하게 다뤄졌다.

형 약전의 자산어보도 마찬가지였다.

흑산도의 작은 초가에서 어부들과 함께 만든 책이, 수백 년 후 한국 해양 생물학의 선구적 연구로 재평가됐다. 창대라는 어부의 이름도 함께 기록됐다.

이름이 지워지지 않았다.

오래 걸렸을 뿐이었다.

현재 시점, 수행평가 발표 전날.

강준호는 발표 자료를 마지막으로 점검하고 있었다.

핸드폰에 서연의 메시지가 왔다.

박서연: 내일 발표 순서 봤어요? 3모둠이 네 번째예요.

강준호: 봤어요.

박서연: 긴장돼요?

강준호: 조금요.

박서연: 나도요. 근데 우리 자료 좋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강준호: 최민재 발표 잘할까요.

박서연: 못 해도 괜찮아요. 우리 파트가 있으니까.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잠깐 웃었다.

맞았다. 우리 파트가 있었다.

준호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발표 자료를 다시 봤다. 처음에 혼자 다 하려고 했던 것과 지금 것이 달랐다. 처음 것은 더 완벽했지만 한 사람의 것이었다. 지금 것은 덜 완벽했지만 여러 사람의 것이었다.

여러 사람의 것이 더 좋았다.

이상하게도.

23회 — 반에서 제일 잘하면 왜 왕따가 될까

발표 날 아침이었다.

강준호는 평소보다 일찍 학교에 왔다.

교실이 비어 있었다. 불을 켜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발표 자료를 한 번 더 읽었다. 사실 외울 정도로 알고 있었다. 읽는 게 의미가 없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읽는 행위 자체가 마음을 가라앉혔다.

아이들이 하나둘 들어오기 시작했다.

준호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자료를 보는 척했다. 사실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교실 안이 시끄러워지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웃는 소리, 가방 내려놓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최민재가 들어왔다.

준호를 봤다. 준호도 봤다.

최민재가 자기 자리로 가면서 지나치는 척 말했다.

"야, 오늘 발표 망하면 너 때문이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 수 없는 말투였다.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최민재가 자리에 앉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뭐야, 무시해."

김도현이 그 사이에서 눈치를 봤다. 준호 쪽을 봤다가 최민재 쪽을 봤다가. 결국 최민재 쪽으로 가서 앉았다.

서연이 들어온 건 그로부터 5분 후였다.

서연은 교실을 한 번 훑어보고 자기 자리로 갔다. 준호 자리 두 칸 옆이었다. 앉으면서 준호를 보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준호도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역사 선생님이 들어왔다.

선생님은 교단에 서서 수행평가 발표 순서를 한 번 더 확인했다.

"오늘 발표는 각 모둠이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인재를 대하는 방식의 공통점을 발표하는 거예요. 단순히 역사 사실 나열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이 들어가야 해요. 어떻게 연결했는지가 평가의 핵심이에요."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모둠이 발표했다.

발표들은 무난했다. 역사 사실은 잘 정리됐는데 현대 연결 부분이 약했다. 선생님이 그 부분에서 추가 질문을 했고 모둠들은 대답을 잘 못했다.

네 번째. 3모둠 차례였다.

최민재가 먼저 앞으로 나갔다. 준호와 서연이 따라 나갔다. 김도현도 나갔다.

최민재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시작했다.

"저희 모둠은 세 시대를 연결해서 발표하겠습니다. 장영실의 시대, 정약용 형제의 시대, 그리고 현재입니다."

목소리가 컸다. 자신감이 있었다. 최민재는 이것 하나는 진짜였다.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장영실 파트는 준호가 발표했다.

"장영실은 노비 출신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의 재능을 알아봤습니다. 앙부일구, 자격루, 측우기. 조선의 과학을 수백 년 앞당긴 것들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마 사고로 관직을 잃었습니다. 사고가 실수인지 의도적인 모함인지 역사는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장영실의 이름은 기록에서 사라집니다."

준호는 거기서 잠깐 멈췄다.

"하지만 그가 만든 것들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앙부일구는 전국에 설치됐습니다. 자격루는 수백 년 동안 조선의 시간을 재는 기준이 됐습니다. 사람을 지웠지만 그 사람이 한 일은 지울 수 없었습니다."

교실이 조용했다.

서연이 이어서 정약용 형제 파트를 발표했다.

차분하고 정확했다. 서연의 발표는 화려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용이 밀도 있었다.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쓴 약전, 목민심서를 쓴 약용. 그들을 내쫓은 이유가 무엇인지, 내쫓힌 후에 무엇을 했는지.

선생님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집중하는 눈빛이었다.

마지막이 현대 연결 파트였다.

최민재가 자기 파트를 발표했다. 처음엔 목소리가 컸다. 그런데 내용이 들어가면서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 서연에게 물어봐서 썼던 내용이었다. 자신이 이해한 것을 자신의 말로 발표했다.

"현재에도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잘하는 사람이 이용당하는 일, 능력보다 목소리 큰 사람이 인정받는 일, 품앗이를 착복하는 일. 학교에서도 일어나고 어른들 세계에서도 일어납니다."

거기서 최민재가 잠깐 멈췄다.

예상에 없던 말이 나왔다.

"사실 저희 모둠에서도 처음에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일은 일부 사람이 다 하고 발표는 제가 하려 했습니다. 그게 잘못됐다는 걸 중간에 알았고 고치려고 했습니다. 완벽하게 고쳐지진 않았지만."

교실이 살짝 술렁였다.

준호가 최민재를 봤다.

최민재는 앞을 보고 있었다. 얼굴이 약간 빨개져 있었다.

준호는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말했다.

"발표 잘 들었어요. 추가로 물어볼게요. 세 시대의 공통점이 무엇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까요?"

최민재가 답하려다 준호에게 눈짓을 했다.

준호가 말했다.

"잘하는 사람을 시기하는 구조는 시대가 바뀌어도 바뀌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잘하는 사람이 한 일은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장영실은 이름이 지워졌지만 해시계가 남았고, 정약용은 유배를 갔지만 책이 남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대로 한 일은 결국 남습니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발표였어요."

발표가 끝나고 자리로 돌아오면서 최민재가 준호 옆을 지나쳤다.

낮게 말했다.

"야, 아까 그 말. 일부러 나 깎아내리려고 한 거 아니지."

준호가 말했다.

"깎아내리는 게 아니라 사실이었잖아."

최민재가 잠깐 멈췄다.

"……그래. 사실이었어."

그리고 자기 자리로 갔다.

준호는 자리에 앉았다. 서연이 쪽지를 건넸다.

잘했어요.

준호는 그 쪽지를 보며 짧게 웃었다. 노트 사이에 끼웠다.

창밖에 하늘이 맑았다.

오늘 하루가 완벽하지는 않았다. 최민재가 완전히 달라진 것도 아니었다. 준호가 반에서 갑자기 친구가 많아진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뭔가 하나가 또 달라졌다.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이었다.

24회 — 조별 과제의 진실, 품앗이를 훔치다

수행평가 결과가 일주일 후에 나왔다.

3모둠은 반에서 두 번째로 높은 점수를 받았다.

선생님의 총평이 붙어 있었다.

세 시대를 연결하는 관점이 탁월했습니다. 특히 현대 연결 부분에서 추상적인 주제를 구체적인 사례로 연결한 점이 좋았습니다. 모둠원이 각자의 파트를 명확하게 소화했고, 발표에서 자기 생각이 담긴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최민재가 그 총평을 보며 말했다.

"오, 꽤 잘 받았잖아."

준호는 점수표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이 각자의 파트를 명확하게 소화했다고 하셨어."

최민재가 준호를 봤다.

"그게 무슨 뜻이야."

"각자 자기 것을 했다는 뜻이지."

최민재는 잠시 멈췄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김도현이 셋을 번갈아 보다가 말했다.

"야, 우리 점심 같이 먹자. 이번 수행평가 고생했으니까."

준호는 잠깐 최민재를 봤다.

최민재가 먼저 말했다.

"그래, 가자. 내가 살게."

준호는 그 말에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서연이 옆에서 조용히 말했다.

"가요?"

준호가 말했다.

"가죠."

넷이 함께 식당으로 갔다. 어색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처음보다는 훨씬 나았다. 밥을 먹으면서 수행평가 이야기를 했다. 최민재가 정약용 유배 이야기가 생각보다 재밌었다고 했다. 김도현이 장영실 해시계 만드는 부분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준호는 그 대화를 들으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수행평가 때문에 처음으로 이 사람들과 제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장영실과 정약용이 다리가 된 셈이었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이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명을 연결해줬다.

서연이 준호 옆에서 밥을 먹으며 말했다.

"강준호 씨, 오늘 발표 정말 좋았어요."

"서연 씨도요."

최민재가 들었는지 말했다.

"야, 왜 둘이 씨 씨 거려. 친구 아니야?"

준호가 서연을 봤다. 서연도 준호를 봤다.

둘 다 웃었다.

최민재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을 했다.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준호는 서연과 나란히 걸었다.

최민재와 도현은 앞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연이 말했다.

"수행평가 하면서 뭔가 달라진 것 같아요, 강준호 씨."

준호가 말했다.

"뭐가요."

"예전엔 그냥 혼자 다 하고 끝냈을 것 같은데. 이번엔 달랐잖아요. 최민재한테 말도 하고."

준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달라진 게 있으면 서연 씨 때문이에요."

서연이 준호를 봤다.

"내가 뭘 했다고요."

"말하지 않고 당하는 것과 말하고 당하는 것은 다르다고 했잖아요. 그 말이 계속 생각났어요."

서연이 잠깐 침묵했다가 말했다.

"그 말 나도 누군가한테 들은 거예요."

"누구한테요?"

"정약전한테요."

준호가 웃었다.

서연도 웃었다.

수백 년 전 흑산도의 유배인이 흑산도 어부에게 했을 법한 말이 지금 이 골목에서 두 중학생 사이에 흘렀다.

시대가 달랐다. 사람이 달랐다. 하지만 필요한 말은 같았다.

그날 저녁 준호는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중학교 올라오면서 일기를 그만뒀었다. 쓸 것도 없고 쓰고 싶지도 않았다. 매일 비슷한 하루였으니까.

오늘은 달랐다.

오늘 수행평가 결과 나왔다. 생각보다 잘 받았다. 근데 점수보다 다른 게 더 남는 것 같다.

장영실은 이름이 지워졌는데 해시계가 남았다. 정약용은 유배를 갔는데 책이 남았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죽었는데 자산어보가 남았다.

나는 뭐가 남을까. 아직 모르겠다. 근데 오늘 수행평가를 하면서 한 가지는 알았다. 제대로 하면 남는다는 것. 이용당하지 않으려면 제대로 해야 한다. 제대로 하면 언젠가 남는다.

그리고 서연이가 생겼다. 친구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게 생각보다 다른 것 같다.

최민재는 오늘 발표에서 사실을 말했다. 예상 못 했다. 완전히 달라진 건 아니지만 뭔가 하나는 달라진 것 같다.

장영실도, 정약용도, 한 번에 세상을 바꾼 게 아니었다. 조금씩이었다. 아주 조금씩.

나도 그러면 되는 거겠지.

준호는 일기를 덮었다.

창밖에 하늘이 있었다. 오늘은 구름이 없었다. 별이 보였다. 서울 하늘에서도 몇 개는 보였다.

그 중 가장 밝은 것 하나를 찾았다.

북극성인지 아닌지는 몰랐다.

하지만 거기 있다는 건 알았다.

언제나처럼, 그 자리에.

25회 — SNS 시기, 좋아요가 칼이 되다

수행평가가 끝나고 일주일이 지났다.

교실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최민재는 여전히 친구들 사이에서 크게 웃고 있었다. 김도현은 여전히 눈치를 봤다. 준호는 여전히 혼자 자리에 앉아 책을 읽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서연이 가끔 옆에 앉는다는 것이었다.

가끔이었다. 매번은 아니었다. 서연도 자기 리듬이 있었다. 혼자 있고 싶을 때는 혼자 있었다. 준호 옆에 앉고 싶을 때 앉았다. 그게 편했다. 매번 챙겨야 하는 관계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 달라진 것 하나가 눈에 띄었나 보았다.

인스타그램이 문제였다.

아이들은 대부분 인스타그램을 했다. 사진을 올리고 좋아요를 받고 댓글을 달았다. 준호는 계정이 있었지만 거의 쓰지 않았다. 팔로워도 별로 없었고 게시물도 없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오니 분위기가 묘했다.

몇몇 아이들이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킥킥거렸다. 준호가 지나가자 웃음을 멈췄다. 준호는 그냥 자리에 앉았다.

쉬는 시간에 서연이 준호에게 말했다.

"인스타 계정 있어요?"

"있긴 한데 안 써요."

"지금 한번 열어봐요."

준호가 핸드폰을 꺼내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알림이 여러 개 와 있었다. 준호의 예전 게시물에 댓글이 달려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계정에 갑자기 댓글이 여러 개였다.

열어봤다.

익명 계정들이었다. 프로필 사진도 없고 팔로워도 없는 계정들이 일제히 댓글을 달았다.

공부만 하는 찐따ㅋㅋ

친구도 없고 혼자 사는 애

박서연이랑 붙어다니는 거 진짜 웃김ㅋ 둘 다 아웃사이더끼리

전교1등이면 뭐해 학교에서 왕따인데

준호는 화면을 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서연이 옆에서 그 댓글들을 같이 봤다.

"언제부터 달렸어요?"

"어젯밤인 것 같은데."

"누가 했는지 알 것 같아요?"

준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익명이었으니까.

서연이 말했다.

"신고하고 댓글 지워요."

"신고해봤자 뭐가 바뀌겠어요."

"바뀌지 않아도 해야 해요. 기록 남기는 거예요."

준호는 서연을 봤다.

또 그 말이었다. 기록.

준호는 화면 캡처를 먼저 했다. 그다음 신고 버튼을 눌렀다. 그다음 댓글을 지웠다.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힘들죠?"

"모르겠어요. 화가 나는 건지 슬픈 건지."

"둘 다겠죠. 화나도 되고 슬퍼도 돼요."

준호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창밖을 봤다. 하늘이 흐렸다.

"서연 씨는 이런 거 당해봤어요?"

서연이 잠깐 침묵했다.

"당해봤어요."

"어떻게 했어요."

"처음엔 아무것도 못 했어요. 그냥 참았어요. 근데 참는다고 멈추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나중엔 신고하고 부모님한테 말하고 선생님한테 말했어요."

"그랬더니 멈췄어요?"

"완전히 멈추진 않았어요. 하지만 줄었어요. 그리고 내가 뭔가 했다는 게 중요했어요.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그날 오후 준호는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준호가 선생님을 직접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선생님도 놀란 것 같았다.

"강준호, 무슨 일이야?"

준호는 캡처 화면을 보여줬다.

선생님이 화면을 보며 표정이 굳었다.

"이게 어제 달린 거야?"

"예."

"익명이네. 계정 특정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하지만 학교 친구들 중 누군가인 것 같아요."

선생님이 한참 화면을 봤다.

"준호야, 이런 거 있으면 혼자 갖고 있으면 안 돼. 바로 말해줘야 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요."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알아볼게. 학교 사이버폭력 담당 선생님한테도 전달할게. 그리고 준호야."

"예."

"잘 왔어. 진짜 잘 왔어."

준호는 그 말에 뭔가 가슴 한쪽이 느슨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잘 왔어.

칭찬받은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 말이 좋았다.

선생님실에서 나오면서 준호는 생각했다.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당하면서도 글을 썼던 것, 그것이 기록이었다. 기록이 나중에 증거가 됐다. 지금 자신이 한 것도 비슷했다. 캡처를 했다. 신고를 했다. 선생님에게 말했다.

작은 것이었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과 한 것은 달랐다.

다음 날 교실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졌다.

담임 선생님이 조례 때 공식적인 언급을 했다.

"여러분, 어제 한 학생의 SNS에 익명으로 악성 댓글이 달리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이버 폭력은 직접 만나서 하는 것과 똑같이 처벌받습니다. 학교 쪽에서 계정 추적을 요청한 상태입니다."

교실이 조용해졌다.

준호는 앞을 보고 있었다.

뒤쪽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했냐는 소리, 걸리면 어떻게 되냐는 소리.

최민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준호는 최민재를 보지 않았다. 봐서 확인하고 싶지 않았다. 알게 되면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쉬는 시간에 서연이 말했다.

"선생님한테 말했군요."

"어제 말했어요."

"잘했어요."

"서연 씨 말 들어서요."

서연이 고개를 흔들었다.

"내 말 들은 게 아니라 자기가 결정한 거잖아요."

준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반반이에요."

서연이 웃었다.

창밖에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어제와 같은 하늘인데 달랐다.

26회 — 선생님도 모르는 교실 권력

사이버 폭력 사건은 결국 흐지부지됐다.

계정을 특정하려 했지만 완전히 확인하기 어려웠다. 학교 측에서는 전체 주의를 주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누가 했는지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준호는 그 결과에 실망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일이기도 했다. 세상이 한 번에 바뀌는 경우는 없었다. 장영실도 한 번에 관직을 얻은 게 아니었다. 정약용도 하루아침에 유배에서 풀린 게 아니었다. 시간이 걸렸다.

준호는 그것을 생각하며 교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다.

평소에 준호에게 무관심하거나 비웃던 아이들 중 몇 명이 그날 준호에게 말을 걸었다.

이준서라는 아이가 수학 문제를 들고 왔다.

"야, 강준호, 이거 어떻게 풀어?"

준호는 잠깐 멈췄다.

이준서는 최민재 무리 중 하나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준호에게 말을 건 적이 없었다.

준호는 문제를 봤다. 이차방정식이었다.

"여기 인수분해 되는데. 이렇게 하면 돼."

준호가 간단하게 설명해줬다. 이준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갔다.

점심시간에 다른 아이가 또 왔다. 영어 해석이 안 된다고 했다.

준호는 또 설명해줬다.

서연이 그것을 보며 말했다.

"갑자기 왜 다들 물어봐요?"

준호가 말했다.

"모르겠어요."

서연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SNS 사건 이후인 것 같아요."

"무슨 상관이에요."

"선생님이 공식적으로 언급했잖아요. 그게 신호가 된 거예요. 준호 씨 편을 들어준 거니까. 그러니까 이제 준호 씨한테 대놓고 나쁘게 하면 안 된다는 걸 다들 느끼는 거죠."

준호는 그 말을 듣고 씁쓸했다.

"그러면 선생님이 언급 안 했으면 계속 그랬을 거네요."

"그렇겠죠. 권력이 그런 거잖아요. 힘 있는 사람이 어느 쪽이냐에 따라 사람들이 움직이는 거."

준호가 말했다.

"그러면 선생님이 없는 곳에서는 또 달라지겠네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진짜 바뀌는 게 어려운 거예요. 구조가 바뀌지 않으면 힘 있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계속 달라지니까."

준호는 창밖을 봤다.

교실 권력이라는 게 있었다. 선생님도 모르는 권력. 선생님이 없을 때 작동하는 권력. 누가 인기 있는지, 누가 무리를 이끄는지, 누가 따르는지로 결정되는 권력.

그 권력에서 준호는 항상 바깥이었다.

공부를 잘한다는 것이 그 권력 안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오히려 방해가 됐다. 자신이 못한다는 걸 상기시키는 존재가 되니까.

"서연 씨는 그 구조를 어떻게 봐요."

서연이 말했다.

"못생겼다고 생각해요. 구조 자체가."

"바꿀 수 있을까요."

"한 교실에서는 모르겠어요. 근데 한 사람한테서는 바꿀 수 있어요."

"무슨 뜻이에요."

"최민재가 뭔가 달라졌잖아요. 조금이지만. 그게 한 교실을 바꾼 건 아니지만 최민재라는 사람 안에서는 뭔가 바뀐 거잖아요."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 사람 안에서의 변화. 작지만 진짜인 변화.

장영실이 물시계를 고쳤을 때 조선 전체가 바뀐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고을의 시간이 정확해졌다. 정약용이 목민심서를 썼을 때 조선 전체가 개혁된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은 누군가는 달라졌다.

세상이 한 번에 바뀌지 않아도 됐다.

한 사람씩이면 됐다.

그 주 금요일 오후였다.

청소 당번 시간이었다. 준호와 최민재가 같은 구역이었다. 복도 청소였다.

둘이 나란히 빗자루를 들고 청소를 했다.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최민재가 먼저 말했다.

"야."

"왜요."

"그 댓글 단 거 나 아니야."

준호는 빗자루를 멈추지 않고 말했다.

"알아요."

사실 몰랐다. 하지만 최민재가 그렇게 말한다면 아닐 수도 있었다. 최민재는 대놓고 나쁜 짓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익명 뒤에 숨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근데 누가 했는지 알아."

준호가 멈췄다. 최민재를 봤다.

"말하지는 않을 거야. 내 친구라서."

준호는 잠깐 최민재를 바라봤다.

"그러면 왜 말해요."

"몰라. 그냥 네가 알았으면 해서."

준호는 다시 청소를 시작했다.

"자기 친구가 한 거면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말렸어. 선생님 공지 나오고 나서 씹어줬어."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최민재가 친구를 감쌌다. 하지만 동시에 말렸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사실이었다. 단순하지 않았다.

청소를 마치고 빗자루를 정리하면서 최민재가 말했다.

"야, 강준호."

"왜요."

"너 발표 때 한 말 있잖아. 제대로 한 일은 결국 남는다는 거."

"예."

"그거 진짜야?"

준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장영실이 증명했고 정약용이 증명했어요."

최민재가 잠시 침묵했다.

"……나는 제대로 한 게 없는데."

준호는 그 말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결국 말했다.

"아직 중학교 2학년이잖아요."

최민재가 피식 웃었다.

"그게 위로야?"

"사실이에요."

최민재는 더 말하지 않고 교실로 들어갔다.

준호는 복도에 혼자 서서 그 대화를 되새겼다.

최민재가 이런 말을 한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제대로 한 게 없는데. 그 말이 솔직하게 들렸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았다.

최민재도 단순하지 않았다.

27회 — 나만 이상한 건가요

그날 저녁 준호는 혼자 방에 있었다.

수학 문제를 풀려고 펼쳐놨는데 집중이 안 됐다. 최민재와의 대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제대로 한 게 없는데.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준호는 노트를 꺼냈다. 요즘 들어 생각이 복잡할 때 노트를 꺼내는 습관이 생겼다. 쓰면 정리가 됐다. 정리되면 조금 가벼워졌다.

최민재가 오늘 이상한 말을 했다. 나는 제대로 한 게 없는데. 최민재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게 놀라웠다. 나는 최민재를 나쁜 애라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근데 나쁜 것과 부족한 것은 다를 수 있다.

최민재는 부족한 거다. 나쁜 게 아니라. 아직 제대로 할 줄 모르는 것들이 있는 거다.

그러면 나는? 나는 제대로 하는 게 뭐가 있지. 공부는 잘한다. 근데 그게 전부인가. 친구 사귀는 건 잘 못한다. 말하는 건 최근에 조금 나아졌다. 감정을 표현하는 건 아직도 잘 모르겠다.

서연이한테 고맙다는 말을 아직 제대로 못 했다.

준호는 거기서 멈췄다.

고맙다는 말.

언제부터 고맙다는 말이 어려워졌는지 몰랐다. 어릴 때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어색해졌다. 말하면 상대방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았다. 왜 갑자기 고맙다고 해, 라고 할 것 같았다.

준호는 잠깐 생각하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카카오톡을 열었다. 서연과의 대화창.

한참 봤다.

결국 입력창에 썼다.

서연 씨, 요즘 여러 가지로 고마워요. 말하는 게 늦었는데.

보내기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내렸다. 다시 올렸다가 내렸다.

세 번째에 눌렀다.

전송됐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상했다. 고맙다는 말 하나에 이렇게 긴장한다는 게.

5분 후에 답장이 왔다.

나도요.

딱 두 글자였다.

준호는 그 두 글자를 보며 웃었다. 서연다운 답장이었다. 길게 쓰지 않았다. 필요한 것만 썼다.

창밖을 봤다. 오늘 밤은 별이 잘 보였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서연이 먼저 말했다.

"어젯밤에 고마워요 문자 보내고 긴장했죠?"

준호가 멈칫했다.

"어떻게 알아요."

"나도 그랬거든요. 나도요 답장 보내고 잘 받았는지 계속 신경 쓰였어요."

준호가 웃었다.

"뭐가 그렇게 어려운지 모르겠어요. 고맙다는 말 하나인데."

서연이 말했다.

"말이 적었던 사람들한테는 말 하나하나가 크게 느껴지는 것 같아요. 자주 말하는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것들이."

준호는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말이 적었던 사람. 그게 준호였다. 필요한 말만 했다. 필요하지 않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고맙다는 말, 미안하다는 말, 좋다는 말 같은 것들이 전부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분류돼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말들이 필요한 말이었다.

"서연 씨는 전 학교에서 힘들었을 때 그 말들을 못 했겠네요."

서연이 잠깐 침묵했다.

"못 했죠. 도와달라는 말을 못 했어요. 힘들다는 말도 못 했고. 그냥 혼자 버텼어요."

"왜요."

"말하면 더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요. 저 약한 애구나 하고. 공부 잘하는 애가 이런 거에 상처받냐고 할 것 같아서."

준호는 그 말이 자신의 이야기처럼 들렸다.

"나도 그랬어요. 전교 1등이 왕따당한다고 말하면 더 이상하게 볼 것 같았어요."

"맞아요. 잘하면 강해야 한다는 이상한 고정관념이 있어요. 잘하면 상처받으면 안 된다는."

둘은 잠시 침묵했다.

복도에 아이들이 지나갔다. 웃는 소리,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준호가 말했다.

"장영실도 그랬을 것 같아요. 가마 사고로 관직을 잃었을 때. 자격루 만든 사람이 설마 억울해하겠어, 이런 시선."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약용도요. 목민심서 쓴 사람이 설마 외롭겠어."

"근데 다 사람이잖아요."

"맞아요. 잘한다고 사람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준호는 그 말을 들으며 뭔가 가슴 속에서 오래된 것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잘한다고 사람이 아닌 게 아니잖아요.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당연한 말인데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해준 적이 없었다. 선생님도, 부모님도. 다들 잘하니까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괜찮지 않을 수 있었다.

잘해도 괜찮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사실을 서연이 처음으로 말해줬다.

28회 — 역사 수행평가, 장영실을 만나다

수행평가가 끝났지만 역사 선생님은 프로젝트를 하나 더 제안했다.

"희망자에 한해서 자유 탐구 보고서를 쓸 수 있어요. 이번 수행평가에서 다룬 주제를 더 깊이 파고 싶은 학생은 한 달 후에 제출하면 추가 점수를 줄게요."

대부분의 아이들은 관심이 없었다. 수행평가가 끝났는데 또 하겠다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준호는 달랐다.

수행평가를 준비하면서 장영실에 대해 더 알고 싶어졌다. 조사하면 할수록 모르는 것이 늘었다. 가마 사고의 진상은 역사적으로 아직도 논쟁이었다. 그 이후 장영실이 어떻게 됐는지가 정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도 이상했다.

선생님한테 남은 후에 말했다.

"선생님, 장영실에 대해 보고서 써도 될까요."

선생님이 반겼다.

"물론이죠.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쓸 건가요?"

"가마 사고가 의도적인 모함이었을 가능성에 대해서요. 역사적으로 어떤 근거가 있는지 찾아보고 싶어요."

선생님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거 쉽지 않아요. 기록이 거의 없으니까요."

"기록이 없다는 것 자체가 근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왜 없는지."

선생님이 잠깐 준호를 봤다.

"좋은 관점이에요. 써봐요."

그날 저녁 준호는 도서관에 갔다.

학교 도서관이 아니라 동네 도서관이었다. 조선왕조실록 관련 책들을 찾았다. 장영실이 나오는 세종실록 부분을 읽었다.

세종실록에는 장영실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 자격루를 만들었다는 기록, 관직을 받았다는 기록, 가마 사고로 처벌받았다는 기록까지.

그런데 그다음이 없었다.

처벌 이후 장영실의 이름이 실록에서 사라졌다. 죽었다는 기록도 없었다. 어디 갔다는 기록도 없었다. 그냥 없었다.

준호는 그게 이상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모든 일을 기록하는 문서였다. 신하들의 죽음도 기록됐다. 유배지에서 죽으면 그것도 기록됐다. 그런데 장영실만 사라졌다.

누군가 지웠을 가능성이 있었다.

준호는 노트에 썼다.

질문 1: 왜 처벌 이후 기록이 없는가.

질문 2: 가마 사고 당시 목재를 고른 사람은 누구인가. 기록에 이름이 나오는가.

질문 3: 처벌을 주도한 사람이 누구인가. 이영준 계열의 사람들인가.

질문 4: 장영실을 제거함으로써 이익을 본 사람이 누구인가.

역사 탐구가 추리소설처럼 됐다.

준호는 그게 재밌었다.

공부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시험을 위해 외우는 공부가 아니었다.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서 하는 공부였다. 그 차이가 컸다.

서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강준호: 장영실 자유 탐구 보고서 쓰려고요. 같이 할 사람 있으면 좋겠는데 서연 씨 관심 있어요?

답장이 빨리 왔다.

박서연: 나는 정약전 쪽으로 쓰려고 했어요. 자산어보 창대라는 어부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강준호: 그것도 좋은 주제네요.

박서연: 따로 쓰고 나중에 합쳐서 발표하면 어때요? 두 이야기가 연결되잖아요. 장영실의 지워진 이름과 창대의 기록되지 않을 뻔한 이름.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멈췄다.

장영실의 지워진 이름과 창대의 기록되지 않을 뻔한 이름.

두 이야기가 연결됐다. 한쪽은 이름이 지워진 이야기고 다른 쪽은 이름이 겨우 남은 이야기였다. 그 차이가 무엇인지. 지워지는 것과 남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강준호: 그거 좋아요. 같이 해요.

박서연: 그러면 각자 조사하고 주말에 도서관에서 만나요.

강준호: 어느 도서관이요?

박서연: 동네 도서관. 저 거기 자주 가거든요.

준호는 그 메시지를 보며 웃었다.

동네 도서관. 자신이 오늘 간 곳이었다.

강준호: 저도 오늘 거기 갔어요.

박서연: 진짜요? 몇 시에요?

강준호: 저녁 7시쯤이요.

박서연: 저도 그때 거기 있었는데.

준호는 그 답장을 읽으며 창밖을 봤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는데 몰랐다.

이상한 우연이었다.

아니면 우연이 아닐 수도 있었다. 비슷한 사람은 비슷한 곳에 있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주말 도서관.

준호가 먼저 와서 자리를 잡았다. 5분 후 서연이 왔다.

각자 조사한 것을 펼쳤다. 준호의 노트에는 장영실 관련 질문들이 빼곡했다. 서연의 태블릿에는 자산어보와 창대에 관한 자료가 정리돼 있었다.

둘이 각자의 자료를 설명하며 교환했다.

준호가 말했다.

"장영실 기록이 사라진 이유를 추적하다 보니까 당시 권력 구조를 알아야 해요. 세종 이후 세조 연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서연이 말했다.

"창대는 자산어보에 이름이 나오긴 해요. 하지만 정약전이 기록해주지 않았으면 영원히 몰랐을 거예요. 그러면 창대와 장영실의 차이는 기록해준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인 것 같아요."

준호가 멈췄다.

"기록해준 사람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정약전은 창대를 기록했어요. 세종도 어느 정도 기록에 장영실을 남겼지만 이후 권력자들이 지웠어요. 기록이 남느냐는 혼자 잘하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기록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준호는 그 말을 노트에 썼다.

기록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 보고서의 핵심 주제가 될 것 같았다.

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잘한 것을 기록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기록을 지키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장영실에게는 그 사람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가 사라졌다. 세종이 있었지만 세종이 죽었다.

창대에게는 정약전이 있었다.

그 차이가 수백 년 후 이름이 남느냐 사라지느냐를 결정했다.

준호는 창밖을 봤다.

도서관 창밖으로 오후 햇살이 들어왔다.

서연이 집중해서 타이핑을 하고 있었다. 준호도 다시 노트를 펼쳤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각자의 것을 쓰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 이야기가 어디까지 갈지 아직 몰랐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좋았다.

그걸로 충분했다.

29회 — 도서관에서 발견한 낡은 노트

주말 도서관에서의 일이었다.

준호와 서연이 각자 자료를 찾다가 잠깐 휴식 시간을 가졌다. 준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장 사이를 천천히 걷었다. 도서관 특유의 냄새가 좋았다. 오래된 종이 냄새, 먼지 냄새, 그 안에 섞인 잉크 냄새.

역사 섹션을 지나가다가 멈췄다.

책장 맨 아래 칸이었다. 다른 책들과 달리 정렬이 안 된 것들이 몇 권 있었다. 누군가 꽂다가 삐뚤어진 것들. 그 사이에 뭔가 끼어 있었다.

책이 아니었다.

노트였다.

겉표지가 낡았다. 갈색으로 변색돼 있었다. 표지에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준호는 그것을 꺼내 들었다. 생각보다 두꺼웠다. 손으로 들었을 때 약간 눅눅한 느낌이 났다. 오래된 것이었다.

펼쳐봤다.

첫 페이지 안쪽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박민준. 그리고 날짜. 2019년 3월 2일.

오 년 전이었다.

준호는 첫 페이지를 읽었다.

작은 글씨가 빼곡했다. 글씨체가 정갈했다.

오늘부터 이 노트를 쓴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려 한다. 잘하면 잘할수록 외로워지는 것이 왜인지 알고 싶다. 공부 잘하면 좋은 줄 알았는데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이 느낌을 기록해두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잊을 것 같다.

준호는 그 문장을 읽으며 손이 멈췄다.

잘하면 잘할수록 외로워지는 것이 왜인지 알고 싶다.

그대로였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것과 똑같은 문장이 오 년 전 이 노트에 적혀 있었다.

준호는 서연을 불렀다.

"서연 씨, 이것 좀 봐요."

서연이 와서 노트를 봤다.

"이게 뭐예요?"

"책장 사이에 끼어 있었어요. 누군가의 노트인 것 같아요."

서연이 첫 페이지를 읽었다.

눈이 커졌다.

"오 년 전이네요."

"읽어볼까요."

서연이 잠깐 생각했다.

"다른 사람 일기인데 괜찮을까요."

"일기라기보다 기록인 것 같아요. 첫 줄에 기록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도서관에 있었다는 건 누군가 읽으라고 둔 건지도 몰라요."

서연이 다시 노트를 봤다.

"아니면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고요."

"잃어버린 것이면 찾아줘야겠죠."

둘은 잠깐 서로를 봤다.

서연이 말했다.

"몇 페이지만 더 읽어봐요. 주인이 누군지 단서가 있을 것 같으니까."

두 사람은 자리로 돌아와 노트를 조심스럽게 넘겼다.

박민준이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중학교 2학년이었다. 공부를 잘했다. 그래서 겪는 일들이 적혀 있었다.

오늘 조별 과제에서 또 내가 다 했다. 애들이 처음부터 내가 할 거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고 당했다. 말했어야 했는데.

준호가 서연을 봤다. 서연도 준호를 봤다.

선생님이 나를 칭찬했다. 그런데 집에 오면서 기쁘지 않았다. 칭찬받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칭찬받으면 다음에 더 많이 시킬 것 같아서 무서웠다.

오늘 누군가 내 가방에 낙서를 해놨다. 누가 했는지 몰랐다. 선생님한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더 이상해질 것 같았다.

왜 잘하는 게 이렇게 힘들까. 잘하지 말까. 근데 잘하지 않으면 내가 싫어진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준호는 그 페이지에서 오래 멈췄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신이 노트에 썼던 말과 거의 같았다. 오 년이 지나도, 사람이 달라도, 같은 교실에서 같은 일을 겪으면 같은 말이 나왔다.

서연이 말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요."

"마지막 페이지까지 써져 있어요?"

서연이 뒤쪽을 넘겼다.

절반쯤 되는 페이지에서 글이 끝났다. 마지막 날짜는 2019년 12월이었다.

마지막 내용은 이랬다.

오늘 도서관에서 정약용에 대한 책을 읽었다. 유배지에서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나도 멈추지 않기로 했다. 잘하는 것이 잘못이 아니다. 이용당하는 것이 내 문제가 아니다. 나는 내가 할 것을 한다. 나중에 이 노트를 누군가 읽는다면 그 사람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멈추지 마세요. 당신이 한 것은 남습니다.

준호는 그 마지막 문장을 읽으며 손이 떨렸다.

그 사람에게 말하고 싶다. 멈추지 마세요. 당신이 한 것은 남습니다.

이 노트가 도서관 책장 사이에 끼어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았다. 박민준이라는 사람이 누군가 찾아 읽으라고 거기 뒀을 것이었다. 아니면 잃어버렸을 것이었다. 어느 쪽이든 지금 준호의 손에 있었다.

서연이 조용히 말했다.

"찾아줘야 할 것 같아요."

"어떻게요. 이름만 알고."

"학교 이름이 어딘가 적혀 있지 않을까요."

준호가 노트를 처음부터 천천히 넘겼다. 학교 이름을 직접 쓴 곳은 없었다. 하지만 중간에 힌트가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 제목을 적어둔 메모가 있었다. 그 옆에 작게 적힌 것이 있었다.

별빛중 도서관.

준호가 말했다.

"별빛중학교예요."

서연이 눈을 크게 떴다.

"우리 학교잖아요."

둘은 도서관을 나오며 이야기했다.

"우리 학교 졸업생이겠네요. 2019년이면 지금쯤 고등학교 졸업했거나 대학생이겠는데."

"이름으로 찾을 수 있을까요. 박민준."

"흔한 이름이에요. 학교에 물어보기도 어렵고."

둘이 걸으면서 생각했다.

서연이 말했다.

"일단 학교 졸업 앨범에 있지 않을까요. 2019년이면 우리 학교 졸업 앨범이 도서관에 있을 거예요. 학교 도서관에."

준호가 멈췄다.

맞았다. 학교 도서관에는 매년 졸업 앨범이 한 권씩 보관됐다. 2019년 졸업생이면 앨범이 있을 것이었다.

"월요일에 찾아봐요."

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이 나란히 걸었다.

가을 저녁 바람이 불었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흔들렸다. 준호는 그 잎을 보며 생각했다.

오 년 전의 박민준이 자신과 같은 고민을 했다. 같은 학교에서. 그리고 정약용을 읽고 멈추지 않기로 했다. 그 사람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잘 지내고 있을까.

30회 — 그 노트의 주인을 찾아서

월요일 점심시간.

준호와 서연은 학교 도서관으로 갔다.

사서 선생님에게 물었다.

"선생님, 졸업 앨범 보관하고 있나요?"

사서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있어요. 몇 년도 것 보고 싶어요?"

"2019년이요."

사서 선생님이 창고 쪽으로 가더니 잠시 후 두꺼운 앨범 하나를 들고 왔다. 초록색 표지에 별빛중학교 제26회 졸업 앨범이라고 적혀 있었다.

준호가 받아서 펼쳤다.

페이지를 넘겼다. 졸업생 사진이 이름과 함께 나와 있었다. 박민준을 찾았다.

있었다.

2학년 3반. 박민준.

사진 속 아이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조금 수줍어 보이는 얼굴이었다. 웃고 있었지만 웃음이 어색했다.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의 웃음이었다.

서연이 말했다.

"찾았네요."

"찾긴 했는데 이름이랑 사진만 알면 어떻게 하죠."

서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인스타나 SNS 찾아볼 수 있어요.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면 계정이 있을 수 있으니까."

"그게 사생활 침해 아닐까요."

"연락하려는 게 아니라 살아있는지 확인하는 거잖아요. 아니면 노트를 돌려줄 방법을 찾는 거고."

준호는 잠깐 생각했다.

맞는 말이었다. 노트를 돌려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날 오후 준호는 인스타그램에서 박민준을 검색했다.

계정이 여러 개 나왔다. 그 중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프로필 사진에 책이 있었다. 자기소개에 한 줄이 적혀 있었다.

멈추지 않는 것이 유일한 방법.

준호가 손이 멈췄다.

멈추지 마세요. 당신이 한 것은 남습니다.

노트의 마지막 문장과 연결됐다.

계정을 더 들여다봤다. 최근 게시물은 대학교 도서관 사진이었다. 책 사이에서 공부하는 모습. 얼굴은 반쯤 가려졌지만 안경을 쓴 것이 앨범 사진과 비슷했다.

서연에게 캡처를 보냈다.

강준호: 이 사람인 것 같아요.

박서연: 프로필 문구 보면 맞는 것 같아요. DM 보낼 거예요?

강준호: 뭐라고 하죠.

박서연: 그냥 솔직하게요. 도서관에서 노트를 찾았다고.

준호는 한참 DM 창을 열어두고 있었다.

낯선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오해를 살 수도 있었다. 노트를 읽었다는 것을 말해도 되는 건지 몰랐다.

하지만 노트 속의 박민준이 말했다.

당신이 한 것은 남습니다.

그 말을 한 사람에게 연락하는 게 두려울 이유가 없었다.

준호는 썼다.

안녕하세요. 저는 별빛중학교에 다니는 강준호라고 합니다. 동네 도서관 책장 사이에서 노트를 하나 찾았는데 이름이 박민준이고 별빛중 도서관이라는 메모가 있었습니다. 혹시 선배님 노트인가요? 돌려드리고 싶어서 연락드립니다.

보냈다.

심장이 뛰었다.

답장은 이틀 후에 왔다.

강준호 학생, 반가워요. 맞아요, 그 노트 제 거예요. 잃어버린 줄 알았는데 거기 있었군요. 혹시 읽어봤나요?

준호는 솔직하게 답했다.

읽었습니다. 죄송해요. 처음에 주인을 찾으려고 조금만 보려 했는데 읽다 보니 끝까지 읽었어요.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어서요.

잠시 후 답장이 왔다.

읽었어도 괜찮아요. 사실 그러라고 둔 거니까. 잃어버린 게 아니에요. 거기 일부러 두고 왔어요. 누군가 비슷한 고민을 할 때 읽으라고.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멈췄다.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의도적으로 뒀다.

그러면 선배님이 의도한 대로 된 거네요. 저랑 친구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요.

박민준의 답장이 왔다.

잘됐네요. 솔직히 말하면 거기 두고 나서 가끔 생각했어요. 누가 읽었을까. 아무도 안 읽었으면 어쩌나. 읽었어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그런데 강준호 학생처럼 연락해주는 사람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노트 내용처럼 살고 있나요?

준호는 그 질문을 읽으며 잠깐 생각했다.

조금씩요. 아직 많이 힘들지만 멈추지 않으려고 하고 있어요. 정약용이랑 장영실 공부하면서 많이 배웠어요.

박민준이 답했다.

저도 그때 정약용 읽고 버텼어요. 신기하네요. 몇 년이 지나도 같은 책이 같은 효과를 낸다는 게.

잠시 후 또 메시지가 왔다.

강준호 학생, 한 가지 알려줄게요. 저 지금 대학교에서 역사 공부해요. 장영실과 정약용 연구하는 교수님 밑에서 학부 연구생이에요. 결국 하고 싶은 걸 하고 있어요.

준호는 그 메시지를 읽으며 창밖을 봤다.

오 년 전 중학교 2학년이었던 박민준이 지금 대학에서 장영실과 정약용을 연구하고 있었다.

노트의 마지막 문장이 떠올랐다.

당신이 한 것은 남습니다.

박민준 자신에게도 남았다.

서연에게 대화 내용을 공유했다.

서연이 한참 읽더니 말했다.

이거 보고서에 써요. 장영실과 정약용의 이야기가 현재에 연결되는 실제 사례.

준호가 말했다.

선배한테 허락받아야 하지 않나요.

물어봐요.

준호가 박민준에게 물었다.

선배님, 저희 자유 탐구 보고서에 선배님 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괜찮으신가요. 익명으로 써도 되고요.

박민준이 빠르게 답했다.

익명으로 안 써도 돼요. 이름 써도 돼요. 오히려 기록되는 게 좋아요. 그게 남는 거니까.

준호는 그 답장을 읽으며 미소가 나왔다.

기록되는 게 좋아요. 그게 남는 거니까.

정약전이 창대에게 했을 법한 말이었다. 정약용이 황상에게 했을 법한 말이었다.

시대가 달라도 같은 말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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