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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는 누구의 것인가
- 한 보부상 소녀의 기록 -


8회. 첫 번째 사건
다음 날, 종로에는 소문이 퍼졌다.
"들었어?"
"어제 공터에서 큰일 났다던데."
"칼부림이 있었대."
"어제 크게 다쳤대."
"죽은 건 아니지?"
"아니, 살았어. 하지만 많이 다쳤대."
아침부터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전해졌다. 과장되고, 왜곡되고, 부풀려진 이야기들이 종로 전체를 휩쓸었다.
"누가 그랬는지는 아무도 몰라."
사실 모르는 게 아니었다. 많은 사람들이 봤다. 백무겸이 칼을 들고 있던 것을. 하지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돈번이들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보복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것이 더 안전했다.
서린은 아침 일찍 일어났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밤새 악몽을 꿨다. 칼이 빛나는 꿈, 피가 흐르는 꿈,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는 꿈.
"서린아, 밥 먹어야지."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아버지도 수저를 제대로 들지 못했다. 손이 떨렸다.
"아버지, 오늘 공터에 가야 해요?"
서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야지. 안 가면 우린 어떻게 먹고 살겠니."
"하지만 위험해요."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니. 이 세상 어디든 위험해."
아버지의 목소리는 지쳐 있었다. 체념이 섞여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밥을 먹었다. 밥은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공터로 가는 길은 더욱 무거웠다.
평소보다 사람이 적었다. 어제 일 때문에 많은 보부상들이 오지 않은 것 같았다.
공터에 도착했을 때, 서린은 놀랐다.
텅 비어 있었다.
평소라면 이미 여러 좌판이 펼쳐져 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몇몇만이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리고 어제 칼부림이 일어났던 자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는 아직 핏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서린은 그곳을 보며 멈춰 섰다.
"서린아, 가자."
아버지가 서린의 손을 이끌었다. 두 사람은 핏자국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천을 펼치고 물건을 놓았다. 하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다.
"오늘은 사람이 없네."
옆자리 보부상이 중얼거렸다.
"어제 일 때문이겠지."
"무섭긴 해. 칼까지 나왔으니."
"돈번이들은 올까?"
"모르지. 오면... 또 무슨 일이 생길지."
보부상들은 불안한 얼굴로 주변을 살폈다.
장터는 조용했다.
평소라면 시끌벅적했을 시간인데, 오늘은 고요했다. 외치는 소리도, 흥정하는 소리도, 웃음소리도 없었다.
그 침묵이 더 무서웠다.
마치 폭풍 전의 고요 같았다. 무언가 더 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시간이 흘렀다.
손님은 거의 오지 않았다. 어제 일에 대한 소문이 퍼져서, 사람들이 공터를 피하는 것 같았다.
서린은 멍하니 앉아 있었다. 장부를 꺼냈다. 어제 밤 쓴 기록을 다시 읽었다.
"균열이 깊어졌다. 이제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쓴 글이었지만, 다시 읽으니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걸까? 정말 이대로 끝나는 걸까?
"저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린이 고개를 들었다. 한 보부상이 다가오고 있었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었다. 얼굴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다들 모이자고 해.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
"무슨 얘기요?"
"앞으로 어떻게 할지. 여기 계속 있을지, 떠날지."
보부상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열 명 정도였다. 어제보다 훨씬 적었다.
"몇몇은 이미 떠났어."
한 보부상이 말했다.
"어디로요?"
"다른 장터로. 아니면 아예 한양을 떠난 사람도 있어."
한숨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졌다.
"우린 어떻게 하지?"
"계속 여기 있을 수는 없어. 위험해."
"그럼 어디로 가? 다른 곳도 마찬가지야. 종로상단은 어디든 있어."
"그래도 여기보단 나을 거야. 여긴 이제 돈번이들 땅이 돼버렸어."
보부상 몇은 종로를 떠나기로 했다.
"미안해. 하지만 가족이 있어. 위험을 감수할 수 없어."
"이해해. 조심해서 가."
그들은 짐을 꾸렸다. 작별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서둘러 공터를 떠났다.
남은 사람들은 더욱 적어졌다.
서린과 아버지도 그 중 하나였다.
"아버지, 우린 어떻게 해요?"
"모르겠구나. 하지만 일단은 여기 있어보자. 조금만 더."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없었다.
정오가 지났다.
그때 공터 입구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돈번이들이었다.
서린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들이 다시 왔다. 어제 그 일이 있었는데도.
백무겸도 그들 사이에 있었다.
보부상들은 긴장했다. 몸을 움츠렸다. 누군가는 슬그머니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돈번이들의 분위기는 어제와 달랐다.
그들은 더 당당해졌다.
더 거침없었다.
마치 어제 일로 인해, 자신들의 힘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기 자리 좋네."
한 돈번이가 말했다. 그는 핏자국이 남아 있는 바로 그 자리를 가리켰다.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돈번이들은 그곳에 천막을 펼치기 시작했다. 아무렇지 않게. 마치 어제 일은 없었던 것처럼.
무겸은 천막을 펼치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서린에게 머물렀다.
서린도 그를 보았다.
무겸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어제의 혼란은 보이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 진짜 모습인지도 몰랐다. 어제의 혼란이 잠깐의 약함이었고, 이것이 그의 본모습인지도.
서린은 고개를 돌렸다. 보고 싶지 않았다.
장사는 거의 되지 않았다.
손님도 없었고, 분위기도 최악이었다.
해가 기울 무렵, 서린과 아버지는 짐을 정리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팔지 못했다.
"내일은 어떻게 할까..."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일단 집에 가요. 생각해봐요."
두 사람은 공터를 떠났다.
뒤돌아보니 돈번이들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승리한 자들의 웃음 같았다.
종로 골목을 지나는데, 누군가가 서 있었다.
도윤이었다.
도윤은 골목 끝에 서서 공터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무언가를 목격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도윤은 골목 끝에서 서린을 보았다.
서린도 그를 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도윤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것 같았다.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서린은 장부를 품에 안고 있었다.
그 장부 안에는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었다. 불공평함, 폭력, 고통. 그리고 어제의 칼부림까지.
서린은 도윤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말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눈빛으로 말했다.
'당신도 이것을 봤죠? 당신도 알고 있죠?'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작게,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하지만 분명히 끄덕였다.
그리고 그는 돌아섰다. 종로 안쪽으로 걸어갔다. 자신의 집으로, 자신의 안전한 자리로.
서린도 돌아섰다. 공터 쪽으로, 자신의 불안한 자리로.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둘 다 알고 있었다.
이 장터에서, 이 싸움에서, 누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어제의 칼부림은 끝이 아니었다. 시작이었다.
균열은 더 깊어질 것이고, 폭력은 더 커질 것이고, 고통은 더 많아질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람들은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싸울 것인가, 도망칠 것인가.
침묵할 것인가, 말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마주할 것인가.
서린은 이미 선택했다. 기록하기로. 마주하기로.
도윤은 아직 선택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도 곧 선택해야 할 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서린은 다시 기록을 꺼냈다.
"오늘은 첫 번째 사건의 다음 날이었다."
서린은 썼다.
"보부상들은 떠났고, 돈번이들은 더 강해졌다. 공터는 조용했지만, 그 조용함은 평화가 아니라 공포였다."
"종로상인의 아들을 다시 봤다. 그도 이것을 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직은."
서린은 마지막 두 글자를 적으며 생각했다.
'아직은'이라는 말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할 수도 있다는 희망.
서린은 그것을 믿기로 했다.
믿지 않으면, 이 어둠 속에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밤은 깊어갔다.
종로의 불빛들이 하나둘 꺼졌다.
하지만 어딘가에서는 불이 켜져 있었다.
서린의 방에서는 등잔불이 켜져 있었다. 그녀는 계속 기록하고 있었다.
도윤의 방에서도 불이 켜져 있었다. 그는 창문 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공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핏자국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달빛 아래, 그 자국은 검게 빛났다.
첫 번째 사건의 흔적.
그리고 다가올 더 많은 사건들의 예고.
9회. 선택의 시간
다음 날 아침, 종로상단 앞에 공고문이 붙었다.
"자리세 납부 마감일. 오늘까지 납부하지 않은 자는 공터 사용을 금한다."
서린은 그 공고문을 멀리서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주머니를 만지작거렸다. 안에는 며칠간 모은 돈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서린아."
아버지가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떠나야 할 것 같구나."
서린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알고 있었지만, 막상 들으니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조금만 더 버텨볼 수는 없을까요?"
"자리세를 못 내면 쫓겨나. 그리고 다른 곳도 마찬가지일 거야. 종로상단의 영향력은 한양 전체에 미치니까."
"그럼 한양을 떠나야 하나요?"
아버지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저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공터로 가는 길, 서린은 장부를 꼭 안고 있었다. 그 안에는 지난 며칠간의 기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공터에 도착했을 때, 분위기는 더욱 암울했다.
보부상들은 눈에 띄게 줄어들어 있었다. 어제보다 더 적었다. 많은 사람들이 자리세를 내지 못하고 떠난 것이었다.
"김 서방도 어젯밤에 떠났어."
"이 서방네도 마찬가지야. 아예 고향으로 내려간다더군."
"우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절망적인 대화들이 오갔다.
그때 종로상단의 심부름꾼들이 나타났다. 손에는 명부를 들고 있었다.
"자리세 납부 확인한다!"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외쳤다.
"납부한 사람은 이름을 대라. 확인하겠다."
몇몇이 앞으로 나갔다. 떨리는 손으로 돈을 건넸다. 심부름꾼은 돈을 세고, 명부에 표시했다.
"윤서방, 납부 완료."
"박씨네, 납부 완료."
하지만 대부분은 나아가지 못했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못 낸 사람들은 오늘 안으로 짐 싸서 떠나라. 내일부터는 이 공터 출입을 금한다."
냉정한 선언이었다.
보부상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제발, 조금만 더 시간을..."
한 보부상이 애원했다.
"규칙은 규칙이다. 예외는 없어."
심부름꾼은 고개도 돌리지 않았다.
서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파고들었다.
'이건 잘못됐어. 이건 너무 잘못됐어.'
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힘이 없었다. 목소리가 없었다.
심부름꾼들이 떠나고, 공터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이제 어떻게 하지..."
누군가 중얼거렸다.
그때 한 사람이 일어났다. 나이가 많은 보부상이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같이 항의하면 안 될까?"
"항의?"
"그래. 종로상단에 가서, 자리세가 너무 높다고, 우리도 살아야 한다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용없을 거야."
한 사람이 말했다.
"그래도 해봐야지. 이대로 당할 순 없어."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같이 가면 돼. 많은 사람이 같이 가서 말하는 거야."
"그러다 더 큰 화를 당하면?"
두려움이 퍼졌다.
서린은 그 대화를 들으며 마음이 복잡했다.
항의하고 싶었다. 목소리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두려웠다. 칼부림을 겪고 나니, 더욱 무서워졌다.
"저는... 하겠습니다."
갑자기 서린의 입에서 말이 나왔다.
모두가 서린을 돌아보았다.
"서린아!"
아버지가 놀라 서린을 붙잡았다.
"저도 가겠어요. 종로상단에."
"안 돼. 위험해."
"하지만 아버지, 이대로는 안 돼요. 아무 말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바뀌어요."
서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눈빛은 단호했다.
나이 든 보부상이 서린을 바라보았다.
"어린 소녀가 용기를 내는구나. 우리 어른들이 부끄럽네."
그가 일어났다.
"나도 가겠네. 같이 가자."
하나둘 사람들이 일어났다. 모두는 아니었다. 하지만 몇몇은 일어났다.
"우리도 갑니다."
"같이 가요."
결국 열 명 정도가 모였다. 많지 않았지만, 그래도 혼자가 아니었다.
"좋아. 그럼 같이 가자. 종로상단에."
그들은 공터를 떠나 종로 안쪽으로 향했다.
서린도 그들과 함께 걸었다.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이었지만, 서린을 막지는 않았다.
종로상단 건물은 컸다. 기와지붕이 반짝였고, 문은 단단해 보였다.
그 앞에 보부상들이 섰다.
"문 좀 열어주시오!"
나이 든 보부상이 소리쳤다.
"주인어른께 할 말이 있소!"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점원 하나가 나왔다.
"무슨 일이오?"
"강만수 어른을 뵙고 싶소. 자리세 건으로 말씀드릴 게 있소."
점원은 보부상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경멸이 섞인 눈빛이었다.
"주인어른은 바쁘시다. 돌아가시오."
"제발 부탁이오. 잠깐만이라도."
"안 된다고 했다. 돌아가라!"
점원이 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냐?"
강만수였다.
점원이 황급히 허리를 굽혔다.
"주인어른, 보부상들이 찾아왔습니다."
"보부상들?"
강만수가 문 앞으로 나왔다. 그는 보부상들을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로 왔는가?"
나이 든 보부상이 앞으로 나섰다.
"자리세가 너무 높습니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금액입니다."
"그건 이미 정해진 일이네."
"하지만 우리도 살아야 합니다.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합니다."
"그건 자네들 문제지, 내 문제가 아니야."
강만수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조금만, 조금만 낮춰주실 수는 없습니까?"
"규칙에 예외는 없네. 못 내면 떠나게. 그게 전부야."
"하지만..."
"더 할 말 없으면 돌아가게. 내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강만수가 돌아서려 했다.
"기다리십시오!"
서린이 소리쳤다.
강만수가 멈춰 섰다. 서린을 돌아보았다.
"어린것이 감히..."
"전 여쭙고 싶습니다!"
서린의 목소리는 떨렸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 장터는 누구의 것입니까? 어른의 것입니까, 아니면 모두의 것입니까?"
강만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방자하구나."
"대답해주십시오. 누구의 것입니까?"
"힘 있는 자의 것이지. 그게 세상의 이치야."
"그게 옳습니까?"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게 아니야. 현실이 중요하지."
강만수는 서린을 쏘아보았다.
"돌아가라.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
그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 하지만 위협은 분명했다.
보부상들은 할 수 없이 물러났다.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나빠졌다. 강만수의 눈 밖에 났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 보부상들은 침울했다.
"소용없었어."
"그래도 해본 건 잘한 거야."
"이제 어떻게 하지..."
서린은 말없이 걸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아버지가 서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서린아, 용기 내줘서 고마워. 하지만 이제 그만하자. 더 위험해질 것 같구나."
"아버지..."
"우리 떠나자. 다른 곳으로 가자."
서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분노가 타올랐다.
'이대로 끝낼 순 없어. 이대로 져줄 순 없어.'
10회. 도윤의 결심
도윤은 창문 뒤에서 모든 것을 보고 있었다.
보부상들이 찾아온 것, 아버지가 그들을 내친 것, 서린이 소리친 것.
그리고 서린의 눈빛.
도윤은 가슴이 먹먹했다.
아버지가 방으로 돌아오자, 도윤은 사랑채로 향했다.
"아버지."
"또 그 얘기 하려고?"
강만수는 피곤한 얼굴이었다.
"저 사람들을 왜 그렇게 대하십니까?"
"도윤아, 내가 냉정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게 장사야. 감정으로는 장사를 할 수 없어."
"하지만 저들도 사람입니다."
"나도 안다. 하지만 내가 저들을 다 책임질 수는 없어. 나도 내 가족을, 내 사업을 지켜야 해."
"그렇게 해서 지킨 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강만수의 얼굴이 굳었다.
"의미? 네가 먹고, 입고, 공부할 수 있는 것. 그게 의미야."
"저는 그런 의미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럼 뭘 원하니?"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천천히 말했다.
"옳은 일을 하고 싶습니다."
"옳은 일?"
"네. 누군가를 밟고 올라서는 게 아니라, 함께 올라가는 것. 그게 옳은 일 아닙니까?"
강만수는 한참을 도윤을 바라보았다.
"너는 아직 어리다. 세상이 얼마나 냉혹한지 모르는 거야."
"알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세상이라면."
"도윤아..."
"저는 제 길을 가겠습니다."
도윤은 사랑채를 나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
도윤은 밤에 몰래 집을 나섰다.
공터로 향했다. 달빛만이 길을 비췄다.
공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도윤은 그곳을 걸으며 생각했다.
낮에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이곳이, 밤에는 이렇게 쓸쓸하다니.
그리고 내일이면 더 많은 사람들이 떠날 것이었다.
도윤은 핏자국이 남아 있는 자리에 섰다.
칼부림이 있었던 곳.
달빛 아래서 그 자국은 여전히 검게 보였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도윤은 자문했다.
힘이 없었다. 권력도 없었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힘일 수 있었다.
아버지의 아들이기 때문에, 안에서 변화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몰랐다.
도윤은 결심했다.
내일 아버지께 다시 말씀드리겠다. 아니, 말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이겠다.
보부상들을 도울 방법을 찾겠다.
어떻게 할지는 아직 몰랐다. 하지만 방법은 있을 것이었다.
도윤은 공터를 떠나 집으로 돌아갔다.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종이를 꺼내고 붓을 들었다.
그리고 쓰기 시작했다.
계획을. 생각을. 방법을.
서린이 기록하듯, 도윤도 쓰기 시작했다.
밤은 깊었지만, 도윤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서린의 방에도 불이 켜져 있었다.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변화를. 정의를. 희망을.
11회. 떠나는 사람들
다음 날 아침, 공터는 혼잡했다.
하지만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었다. 떠나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자리세를 내지 못한 보부상들이 짐을 꾸리고 있었다. 천막을 접고, 물건을 상자에 담고, 작별 인사를 나눴다.
"잘 가게."
"자네도 건강하게."
"어디로 가나?"
"경기도 쪽으로. 거기 작은 장터가 있다더군."
"그래, 잘 되길 바라네."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오랜 세월 함께 장사했던 사람들이었다. 가족 같았던 사람들이었다.
서린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서린아, 우리도 짐 싸자."
아버지가 말했다.
"네..."
서린도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다. 놋그릇, 비녀, 장신구들. 하나하나가 추억이었다.
그리고 장부. 기록이 담긴 장부.
서린은 장부를 가슴에 안았다.
'이건 버릴 수 없어. 이건 증거니까.'
"저기..."
누군가 서린을 불렀다.
고개를 들자, 나이 든 보부상이 서 있었다. 어제 함께 종로상단에 갔던 사람이었다.
"어제 용기 내줘서 고마웠네. 비록 소용은 없었지만."
"아니에요. 저도 아무것도 못 했어요."
"아니야. 젊은 사람이 그런 용기를 낸다는 게 중요하지. 우리 늙은이들은 이미 포기했거든."
그는 서린에게 작은 주머니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별거 아니야. 그냥... 여행길에 쓰게."
서린이 주머니를 열어보니 동전 몇 닢이 들어 있었다.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받게. 우리는 어차피 떠나잖아. 젊은 사람이 더 필요하지."
"하지만..."
"부탁일세. 받아주게."
서린은 눈물을 참으며 주머니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잘 살게. 그리고... 포기하지 말게. 세상은 변할 수 있으니까."
보부상은 떠났다. 등이 굽었지만, 걸음걸이는 단단했다.
서린은 그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정오쯤 되자, 공터는 거의 비었다.
절반 이상의 보부상들이 떠났다. 남은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서린과 아버지도 떠날 준비를 마쳤다.
"어디로 갈까, 아버지?"
"일단 남쪽으로 가보자. 수원 쪽에 장터가 있다더구나."
"멀지 않아요?"
"며칠 걸리겠지. 하지만 어쩌겠니."
두 사람은 짐을 등에 지고 공터를 떠나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
누군가 소리쳤다.
서린이 돌아보니, 도윤이 달려오고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땀을 흘리며.
"잠깐만요!"
도윤은 서린 앞에 멈춰 섰다.
"왜... 왜 그러세요?"
서린이 물었다. 당황스러웠다.
"떠나시는 겁니까?"
"네. 여기 더 있을 수 없어요."
"기다려주세요."
"뭘요?"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제가... 제가 방법을 찾아볼게요."
서린은 도윤을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방법이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분명 있을 거예요."
"당신이 뭘 할 수 있나요? 당신은 종로상단의 아들이잖아요. 우리를 내쫓는 쪽의 사람이에요."
도윤은 할 말이 없었다. 서린의 말이 맞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는 이게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바꾸고 싶어요."
"말만으로는 안 바뀌어요."
"알아요. 그래서... 행동하겠어요."
"어떻게요?"
"아직은 모르겠어요. 하지만 제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며칠만요."
서린은 아버지를 보았다. 아버지는 난처한 얼굴이었다.
"서린아, 우리 가야 한다."
"아버지..."
"이 젊은이의 마음은 고맙지만, 우리 현실을 봐야지."
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가 무력해서."
서린은 도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돕고 싶어 하는 마음이.
하지만 마음만으로는 부족했다.
"당신이 정말 돕고 싶다면..."
서린이 말했다.
"네?"
"당신 아버지를 설득하세요. 자리세를 낮추게 하세요. 아니면 우리에게 다른 자리를 주세요. 그게 진짜 도움이에요."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해보겠습니다."
"기대하지 않겠어요. 하지만... 혹시 정말 해내신다면..."
서린은 말을 잇지 못했다.
"감사하겠습니다."
도윤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서린과 아버지는 떠났다.
도윤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은 짐을 등에 지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가는 두 사람.
도윤의 가슴이 아팠다.
'나는 왜 이렇게 무력한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윤은 집으로 돌아가 아버지를 찾았다.
"아버지,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뭐냐?"
"자리세를 낮춰주십시오."
강만수의 얼굴이 굳었다.
"또 그 얘기냐?"
"네. 저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도윤아, 내가 몇 번을 말해야..."
"아버지, 제발요. 저들도 사람입니다. 살 권리가 있어요."
"나도 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
강만수가 소리쳤다.
"왜 없습니까? 아버지가 결정하시면 되잖아요!"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니야! 나도 위에 사람들이 있어! 상단 전체의 결정이야!"
도윤은 멈칫했다.
"위에... 사람들이요?"
"그래. 종로상단은 나 혼자 운영하는 게 아니야. 여러 사람의 자본이 모인 거고, 그들의 이익을 챙겨야 해. 내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도윤은 처음 알았다.
아버지도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아버지도 더 큰 힘에 눌려 있다는 것을.
"그럼...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없어. 방법이 없어. 그냥... 이게 세상이야."
강만수는 지친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도윤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아버지가 작아 보였다.
강하고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사실은 누군가에게 눌려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위에는 또 누군가가 있을 것이었다.
끝없는 사슬.
힘의 사슬.
도윤은 사랑채를 나왔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방법을 찾아야
11회. 떠나는 사람들 (계속)
도윤은 방으로 돌아와 창가에 섰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공터 쪽을 바라보니, 이제는 거의 텅 빈 것 같았다.
며칠 전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이던 그곳이, 이제는 황량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걸까.'
도윤은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 말이 맞았다.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로상단은 거대한 조직이었고, 그 위에는 더 큰 세력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도윤은 책상 앞에 앉아 다시 종이를 펼쳤다.
'만약 아버지가 할 수 없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도윤은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첫째, 직접적으로 자리세를 낮출 수는 없다. 아버지도 그럴 권한이 없다.
둘째, 그렇다면 보부상들에게 다른 방법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셋째, 아니면... 완전히 다른 접근이 필요할까.
도윤은 붓을 들고 썼다.
"보부상들이 필요한 것: 장사할 공간, 생계 수단, 안전"
"내가 줄 수 있는 것: ?"
물음표 앞에서 붓이 멈췄다.
내가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돈? 없다. 아직 어리고, 자산이 없다.
권력? 없다. 아버지의 아들일 뿐이다.
지식? 글을 읽고 쓸 줄 안다. 계산을 할 줄 안다.
인맥? 종로상단 사람들을 안다. 하지만 그들은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도윤은 한숨을 쉬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구나.'
하지만 그때,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잠깐. 정보는?'
도윤은 종로상단의 내부 사정을 알았다. 누가 얼마나 투자했는지, 어떤 결정이 언제 내려지는지, 상단의 약점이 무엇인지.
이것도 힘이 될 수 있을까?
도윤은 다시 붓을 들었다.
"상단의 약점: 평판, 관의 눈치, 상인들 간의 경쟁"
종로상단이 아무리 강해도, 완벽하지는 않았다.
평판이 나빠지면 거래처들이 떨어져 나갈 수 있었다.
관에서 문제 삼으면 영업에 제재가 들어올 수 있었다.
다른 상단들과의 경쟁에서 밀릴 수도 있었다.
'만약... 만약 보부상들의 문제가 더 크게 알려진다면?'
도윤은 생각을 이어갔다.
'만약 이것이 단순한 장사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로 인식된다면?'
하지만 어떻게?
도윤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방법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분명 있을 거야.'
도윤은 종이를 접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일부터 움직이겠다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겠다고.
밤이 깊어갔다.
서린과 아버지는 한양 성곽 밖 작은 주막에 머물고 있었다.
내일 아침 일찍 수원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서린아, 잠은 오니?"
"아니요, 아버지."
서린은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떠나는 게 맞는 걸까. 도망치는 게 아닐까.
"아버지도 잠이 안 오는구나."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하다, 서린아. 아버지가 무능해서."
"아니에요, 아버지."
"네가 태어날 때, 아버지는 다짐했단다. 이 아이만큼은 편하게 살게 해주겠다고. 하지만..."
아버지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구나."
"아버지,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서린이 일어나 아버지 옆에 앉았다.
"아버지는 항상 최선을 다하셨어요. 저는 알아요."
"고맙구나."
아버지가 서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일부터는 새로운 시작이야. 수원에 가면 더 나아질 거야."
하지만 그 말에는 확신이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알고 있었다. 수원도 한양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서린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품속에서 장부를 꺼냈다.
달빛에 비춰 글자들을 읽었다.
지난 며칠간의 기록들.
불공평함, 폭력, 절망.
하지만 그 사이사이에 다른 것들도 있었다.
용기, 연대, 희망.
서린은 새 페이지를 펼쳤다.
작은 연필을 꺼내 썼다. 어둠 속에서, 더듬거리며.
"오늘 우리는 떠났다. 한양을, 종로를, 그 공터를."
"하지만 이것이 끝은 아니다."
"언젠가 우리는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밀려나지 않을 것이다."
서린은 연필을 내려놓았다.
눈물이 흘렀다. 소리 내지 않으려 입을 막았다.
아버지가 들을까 봐.
하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분노의 눈물이었다. 슬픔의 눈물이었다. 그리고 결심의 눈물이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야.'
서린은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언젠가 돌아올 거야. 그리고 바꿀 거야.'
밤은 깊었다.
주막 밖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다.
내일이면 서린과 아버지는 한양을 떠날 것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12회. 백무겸의 이유
공터는 한산했다.
보부상들이 대부분 떠나고, 남은 건 돈번이들과 자리세를 낸 소수의 보부상들뿐이었다.
백무겸은 천막 안에 앉아 칼을 닦고 있었다.
그날 이후로, 그 칼을.
손이 떨렸다. 칼날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일그러져 보였다.
"무겸아."
동료 하나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뭐야."
"괜찮아? 요즘 얼굴이 안 좋던데."
"괜찮아."
"그날 일 때문에 그러는 거야?"
무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 잘못 아니야. 그냥 사고였어. 너도 그럴 생각 없었잖아."
"닥쳐."
무겸의 목소리가 낮았다.
"야, 나 너 걱정해서..."
"닥치라고!"
무겸이 소리쳤다. 동료는 놀라 물러섰다.
"알았어, 알았어. 혼자 있어."
동료가 나가고, 무겸은 다시 혼자가 되었다.
칼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왜 이랬을까.'
그날을 떠올렸다.
혼란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밀쳤다. 넘어질 뻔했다. 반사적으로 손이 나갔다.
그리고 그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평소에 호신용으로 차고 다니던 칼.
언제 꺼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순간적으로 꺼내져 있었다.
그리고... 그리고 누군가를 찔렀다.
깊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살았다.
하지만 무겸의 마음속에는 그 순간이 계속 재생되었다.
칼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 상대방의 신음소리. 손에 묻은 피.
'나는... 나는 사람을 다치게 했어.'
무겸은 칼을 내려놓았다.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무겸도 원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 무겸에게는 가족이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 여동생.
아버지는 작은 농사를 지었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다.
하지만 어느 해 흉년이 들었다. 세금을 낼 수 없었다.
양반 지주가 땅을 빼앗았다. 집도 빼앗았다.
가족은 떠돌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병들어 죽었다.
여동생은... 여동생은 무겸의 품에서 굶어 죽었다.
열 살이었다.
무겸은 그때 깨달았다.
이 세상은 약한 자에게 자비가 없다는 것을.
살아남으려면 강해져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무겸은 돈번이가 되었다.
힘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힘으로 물건을 팔고, 힘으로 살아남았다.
양심? 그런 건 배고픔 앞에서 무용했다.
정의? 그런 건 죽은 동생을 살리지 못했다.
무겸은 차갑게 변했다. 거칠어졌다.
하지만 사람을 다치게 하진 않았다. 그게 마지막 선이었다.
그런데 그 선을 넘어버렸다.
'나는 이제... 뭐가 된 거야.'
무겸은 괴로워했다.
밖에서 소리가 들렸다.
"무겸이 어디 있어?"
낯선 목소리였다.
무겸이 천막 밖으로 나가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종로상단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오?"
"주인어른께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십니다."
"강만수가?"
"예."
무겸은 의아했다. 종로상단 주인이 왜 자신을 부르는가.
"알겠소."
무겸은 남자를 따라갔다.
종로상단 건물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니, 강만수가 앉아 있었다.
"앉게."
무겸은 앉았다. 긴장했다.
"자네가 백무겸이라고 들었네."
"그렇소."
"며칠 전 일은 들었네. 칼부림."
무겸의 얼굴이 굳었다.
"그건..."
"변명은 필요 없네. 나는 자네를 비난하려고 부른 게 아니야."
"그럼?"
강만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제안이 있네."
"제안?"
"자네, 우리 밑으로 들어올 생각 없나?"
무겸은 놀랐다.
"무슨 말이오?"
"종로상단의 일원이 되라는 거야. 우리는 힘 있는 사람이 필요하네. 자네 같은 사람이."
"왜... 왜 나요?"
"자네는 강하지. 그리고 두려움을 줄 줄 아네. 그게 필요해."
무겸은 이해했다.
종로상단은 자신을 고용해서, 보부상들을 통제하려는 것이었다.
위협 수단으로.
"거절하면?"
"거절할 수 있지. 하지만 자네는 지금 갈 곳이 있나? 돈번이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겠나?"
무겸은 할 말이 없었다.
강만수의 말이 맞았다. 돈번이 생활은 불안정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조건은 좋네. 매달 정해진 돈을 주지. 잠잘 곳도 제공하고."
무겸은 고민했다.
한편으로는 유혹적이었다. 안정. 돈. 지붕.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면 나는 완전히 악인이 되는 거야.'
강만수는 무겸의 망설임을 읽었다.
"자네, 양심 때문에 고민하는 건가?"
"...그렇소."
"양심은 배를 채우지 못하네. 자네도 알잖나. 이 세상은 강한 자가 살아남는 곳이야."
무겸은 입술을 깨물었다.
"생각해보겠소."
"좋네. 사흘 안에 답을 주게."
무겸은 종로상단을 나왔다.
걸어가면서 계속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받아들이면 살아남을 수 있다. 하지만 영혼을 팔게 된다.
거절하면 양심을 지킬 수 있다. 하지만 계속 떠돌아야 한다.
무겸은 공터로 돌아왔다.
천막에 앉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여동생아,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대답은 없었다.
하늘은 그저 높고 푸를 뿐이었다.
13회. 수원의 장터
서린과 아버지는 사흘을 걸어 수원에 도착했다.
화성 성곽이 웅장했다. 하지만 서린의 마음은 무거웠다.
"여기가 수원 장터란다."
아버지가 한 공터를 가리켰다.
한양의 공터보다 작았다. 사람도 적었다.
"여기서 장사할 수 있을까요?"
"해봐야지. 다른 방법이 없으니."
두 사람은 자리를 잡았다.
천을 펼치고 물건을 놓았다.
하지만 손님은 많지 않았다.
"이거 얼마예요?"
가끔 묻는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은 값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비싸네."
"한양에서 왔어요? 거기 물건은 다 비싸다던데."
하루가 지났다. 거의 팔리지 않았다.
"아버지, 여기도 힘들 것 같아요."
"조금 더 해보자. 적응하면 나아질 거야."
하지만 이틀째, 사흘째도 마찬가지였다.
수원 사람들은 한양에서 온 장사꾼들을 경계했다. 가격도 안 맞았고, 물건도 다른 곳에서 구할 수 있었다.
일주일이 지났다.
서린과 아버지는 거의 돈을 벌지 못했다.
주머니가 가벼워졌다. 걱정이 깊어졌다.
"이러다가... 어떻게 되는 거지."
아버지가 한숨을 쉬었다.
서린도 불안했다. 하지만 아버지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다.
"괜찮을 거예요, 아버지. 방법이 있을 거예요."
하지만 방법은 보이지 않았다.
어느 날 저녁, 서린은 혼자 장터를 걸었다.
다른 상인들을 관찰했다. 무엇이 팔리는지,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리고 깨달았다.
'우리 물건이 문제가 아니야. 우리가 낯선 사람이라는 게 문제야.'
수원 사람들은 아는 사람과 거래하고 싶어 했다. 신뢰가 중요했다.
그렇다면...
'신뢰를 쌓아야 해.'
서린은 다음 날부터 달라졌다.
물건을 파는 것보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데 집중했다.
"안녕하세요. 날씨 좋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이 동네 맛집이 어디예요?"
처음에는 사람들이 경계했다. 하지만 서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웃으며 인사했다.
며칠이 지나자, 사람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한양에서 왔다고?"
"힘들었겠네."
"우리 동네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걸릴 거야."
서린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수원의 소식, 사람들의 고민, 생활의 어려움.
그리고 조금씩, 물건이 팔리기 시작했다.
"이 그릇 좋네. 하나 살게."
"비녀 예쁘다. 딸한테 사줘야지."
많지는 않았다. 하지만 전보다는 나았다.
아버지도 놀라워했다.
"서린아, 네가 어떻게 한 거니?"
"그냥... 사람들과 친해지려고 했어요."
"역시 우리 딸이야."
아버지는 서린을 껴안았다.
하지만 서린은 알고 있었다.
이것도 임시방편일 뿐이라는 것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을.
밤에 서린은 다시 기록을 꺼냈다.
"수원에 온 지 열흘이 되었다."
"조금씩 적응하고 있다. 사람들도 조금씩 마음을 열어준다."
"하지만 이것은 해결이 아니다. 도망이다."
"한양의 문제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여기도 같아질 것이다."
서린은 붓을 멈췄다.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한양 방향을 바라보았다.
'도윤은 어떻게 됐을까.'
'공터는 어떻게 됐을까.'
'무겸은... 그 사람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서린은 그들이 궁금했다.
미운 사람들도 있었고,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궁금했다.
'나는 언제 돌아갈 수 있을까.'
서린은 장부를 안고 잠들었다.
꿈속에서 서린은 한양에 있었다.
공터에 서 있었다.
사람들로 북적였다. 보부상들도, 손님들도, 모두 웃고 있었다.
도윤도 있었다. 무겸도 있었다.
그들은 서로 이야기하고, 웃고, 장사하고 있었다.
평화로웠다.
하지만 눈을 뜨자, 현실이었다.
수원의 작은 방. 차가운 아침 공기.
서린은 일어나 준비를 했다.
오늘도 장터에 가야 했다.
오늘도 살아남아야 했다.
그리고 언젠가, 돌아가야 했다.
14회. 도윤의 행동
도윤은 밤마다 공터로 나갔다.
몰래, 아무도 모르게.
그리고 남겨진 것들을 주웠다.
떠난 보부상들이 버리고 간 물건들, 부서진 천막 조각들, 잃어버린 작은 도구들.
도윤은 그것들을 모았다.
처음에는 이유도 몰랐다. 그저 무언가 해야 할 것 같아서.
하지만 점점 명확해졌다.
'증거를 모으는 거야. 이 불공평함의 증거를.'
도윤은 집 뒤편 작은 창고에 물건들을 쌓았다.
그리고 기록을 시작했다.
누가 떠났는지, 언제 떠났는지, 왜 떠났는지.
자리세가 얼마인지, 누가 결정했는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도윤은 상단의 장부도 몰래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방에 보관된 문서들을.
위험한 일이었다. 들키면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하지만 도윤은 멈출 수 없었다.
어느 날 밤, 도윤은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장부에 적힌 투자자 명단.
종로상단에 투자한 사람들의 이름.
그 중에는 고위 관리들도 있었다. 양반들도 있었다.
'아버지가 말한 "위의 사람들"이 이들이구나.'
도윤은 깨달았다.
종로상단은 단순한 상단이 아니었다. 권력과 돈이 얽힌 거대한 구조였다.
보부상들을 내쫓는 것도, 자리세를 올리는 것도, 모두 이들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이걸 어떻게 하지.'
도윤은 고민했다.
이 사실을 알리면? 누구에게? 어떻게?
관에 알리면? 하지만 관리들도 연루되어 있는데.
백성들에게 알리면? 하지만 어떻게?
도윤은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며칠 밤을 고민했다.
그러던 중,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글로 쓰는 거야. 그리고 퍼뜨리는 거야.'
도윤은 종이를 꺼내 쓰기 시작했다.
"종로 공터에서 일어난 일"
도윤은 목격한 모든 것을 적었다.
보부상들이 밀려난 것, 자리세가 부당하게 올라간 것, 칼부림이 일어난 것.
그리고 누가 이익을 보는
그리고 누가 이익을 보는지, 누가 이 구조를 만들었는지.
도윤은 투자자들의 이름까지 적었다. 고위 관리들, 양반들, 부유한 상인들.
"이들은 백성들의 고통으로 배를 불린다."
"보부상들은 먹고살 곳을 잃었다."
"이것이 정의로운가?"
도윤은 밤새 글을 썼다.
손이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서야 붓을 내려놓았다.
종이 몇 장에 빼곡히 적힌 글.
도윤은 그것을 읽고 또 읽었다.
'이걸 어떻게 퍼뜨리지?'
인쇄소에 맡기면? 하지만 돈이 필요했고, 인쇄소 주인이 거부할 수도 있었다.
직접 베껴 쓰면? 하지만 혼자서는 한계가 있었다.
도윤은 고민했다.
그때 문득 생각났다.
'성균관.'
도윤은 성균관에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함께 공부했던 동료들.
그들은 정의로운 사람들이었다. 백성을 걱정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부탁할 수 있을까?'
도윤은 다음 날, 성균관으로 향했다.
성균관에 도착하니, 몇몇 동료들이 마당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도윤이 아니냐?"
한 청년이 반갑게 맞았다. 이름은 정석이었다.
"오랜만이다, 석이."
"어떻게 된 일이냐? 요즘 공부는 하고 있느냐?"
"그게... 할 말이 있어서 왔다."
도윤은 정석을 한적한 곳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내가 본 것을 글로 썼다. 종로에서 일어나는 불공평한 일들을."
"불공평한 일?"
도윤은 품에서 종이를 꺼내 건넸다.
정석은 읽기 시작했다.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사실이냐?"
"내가 직접 본 것이다."
"이 이름들... 이들이 정말?"
"그렇다."
정석은 종이를 내려놓았다. 심각한 얼굴이었다.
"도윤아, 이건 위험한 일이다."
"알고 있다."
"이 글이 퍼지면, 너는 큰 화를 당할 것이다. 네 집안도."
"그래도 해야 한다."
"왜?"
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옳은 일이니까."
정석은 도윤을 오래 바라보았다.
"너는... 변했구나."
"뭐가?"
"예전의 너는 조용했다.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도윤은 미소 지었다.
"세상이 나를 변하게 만들었다."
정석도 미소 지었다.
"좋다. 도와주겠다."
"정말?"
"하지만 나 혼자서는 안 된다. 다른 친구들도 설득해야 한다."
"고맙다."
정석은 다른 동료들을 불렀다.
넷이 모였다. 정석, 민호, 준서, 그리고 도윤.
도윤은 다시 설명했다. 종로에서 일어난 일을, 자신이 본 것을, 그리고 하고 싶은 것을.
"이 글을 퍼뜨리고 싶다. 사람들이 알게 하고 싶다."
민호가 물었다.
"퍼뜨려서 뭐가 달라지는데?"
"모르겠다. 하지만 침묵하면 아무것도 안 달라진다."
준서가 말했다.
"위험하다. 우리 모두 화를 당할 수 있다."
"알고 있다. 그래서 부탁이다. 강요는 안 한다."
침묵이 흘렀다.
정석이 먼저 말했다.
"나는 하겠다."
민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준서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나는... 가족이 있다. 걱정된다."
"이해한다."
도윤이 말했다.
"네가 직접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비밀만 지켜줘."
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할 수 있다. 그리고... 도와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이 있으면 말해줘."
"고맙다."
그렇게 셋이 모였다.
정석, 민호, 그리고 도윤.
그들은 계획을 세웠다.
도윤이 쓴 글을 여러 장 베껴 쓸 것. 그리고 밤에 종로 곳곳에 붙일 것.
사람들이 볼 수 있게. 소문이 퍼질 수 있게.
"위험하다."
민호가 말했다.
"들키면 큰일 난다."
"조심하자."
정석이 말했다.
"밤에, 얼굴을 가리고, 빠르게."
그들은 며칠 동안 준비했다.
글을 베껴 썼다. 열 장, 스무 장, 서른 장.
손이 아팠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밤, 그들은 움직였다.
검은 옷을 입고, 얼굴을 가리고, 종로 거리로 나갔다.
한밤중이었다. 거리는 조용했다.
그들은 곳곳에 글을 붙였다.
주막 벽에, 큰 나무에, 상단 건물 앞에.
심장이 쿵쾅거렸다. 들킬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한 장, 두 장, 세 장.
거리 곳곳에 글이 붙었다.
모두 붙이고 나자, 동이 트고 있었다.
"빨리 돌아가자."
그들은 서둘러 흩어졌다.
도윤은 집으로 돌아와 방에 들어갔다.
심장이 아직도 뛰고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뿌듯함도 느껴졌다.
'해냈다. 첫걸음을 뗐다.'
도윤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거리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 글을 발견할 것이었다.
읽을 것이었다.
그리고... 무엇을 느낄까?
분노? 동의? 무관심?
도윤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침묵은 깨졌다.
15회. 소문
다음 날 아침, 종로는 술렁였다.
"이게 뭐야?"
"누가 붙인 거지?"
사람들이 벽에 붙은 글을 발견했다.
처음에는 몇몇만 모였다. 하지만 금세 소문이 퍼졌다.
"종로상단 이야기래."
"읽어봐, 대단한 내용이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글을 읽었다. 읽을 줄 아는 사람이 읽어주면,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들었다.
"보부상들이 쫓겨났다고?"
"자리세가 부당하다고 쓰여 있어."
"이 이름들 봐. 양반들이잖아."
"관리들도 있어."
웅성거림이 커졌다.
어떤 사람은 분노했다.
"이게 말이 되나? 백성들 고통으로 돈을 버는 거잖아!"
어떤 사람은 두려워했다.
"쉿, 조용히 해. 들키면 우리도 화 당해."
어떤 사람은 의심했다.
"이게 진짜야? 누가 거짓으로 쓴 거 아냐?"
하지만 대부분은 읽고, 생각하고, 이야기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주막에서, 장터에서, 골목에서.
"종로에 이상한 글이 붙었대."
"권력자들의 비리를 폭로한 거래."
"누가 썼는지는 모른대."
오후가 되자, 종로상단도 알게 되었다.
점원 하나가 황급히 달려왔다.
"주인어른! 큰일입니다!"
강만수가 나왔다.
"무슨 일이냐?"
"거리 곳곳에 이상한 글이 붙었습니다. 우리 상단 이야기가..."
강만수의 얼굴이 굳었다.
"가서 봐야겠다."
강만수는 직접 거리로 나갔다.
글을 읽었다.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이걸... 누가 쓴 거냐?"
"모르겠습니다. 밤 사이에 붙여진 것 같습니다."
"당장 다 떼어내라!"
"네!"
점원들이 달려가 글을 떼어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소문은 퍼졌다.
강만수는 집으로 돌아왔다.
화가 났다. 불안했다.
'누가 이런 짓을 한 거지?'
강만수는 의심했다.
보부상? 가능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떠났다.
경쟁 상단? 가능했다. 하지만 이렇게 위험한 일을 할까?
아니면... 내부?
강만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직원들을 의심했다.
하지만 가장 불안한 것은 따로 있었다.
투자자들의 반응.
저녁이 되자, 예상대로 한 투자자가 찾아왔다.
고위 관리였다.
"강만수, 이게 무슨 일인가?"
"죄송합니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처리? 이미 소문이 다 퍼졌네! 내 이름이 거리에 나돌고 있어!"
"범인을 찾겠습니다."
"빨리 찾게. 그리고 조용히 처리하게. 더 커지면 우리 모두 곤란해."
관리는 화를 내며 떠났다.
강만수는 한숨을 쉬었다.
'이거... 심각하네.'
강만수는 도윤의 방으로 갔다.
도윤은 책을 읽고 있었다.
"도윤아."
"네, 아버지."
"오늘 종로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느냐?"
도윤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하지만 표정은 유지했다.
"무슨 일인데요?"
"거리에 이상한 글이 붙었다. 우리 상단을 비난하는 글이."
"그래요? 누가 그랬는데요?"
"그걸 내가 알아야지."
강만수는 도윤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혹시 너... 아는 거 없느냐?"
"저요? 아니요. 왜요?"
"아니면 됐다. 밖에 나갈 때 조심해라. 요즘 거리가 어수선하니까."
"네, 알겠습니다."
강만수는 나갔다.
도윤은 책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들킬 뻔했어.'
하지만 동시에 뿌듯함도 느꼈다.
소문이 퍼졌다.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이제 시작이야.'
도윤은 창문을 열었다.
거리를 내다보았다.
사람들이 여전히 웅성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희망처럼 보였다.
한편, 수원에서도 소문이 들려왔다.
떠난 보부상 하나가 한양에 다녀왔다가 소식을 전했다.
"한양에 큰일이 났다더군."
"무슨 일인데?"
"종로상단 비리를 폭로한 글이 거리에 붙었대. 누가 썼는지는 모르지만."
서린은 그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누가 그런 일을?'
서린은 도윤을 떠올렸다.
'설마... 그 사람이?'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았다.
서린은 장부를 꺼냈다.
"한양에서 소식이 들려왔다."
서린은 썼다.
"누군가 용기를 냈다. 누군가 침묵을 깼다."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나도 무언가 해야 한다."
서린은 다짐했다.
수원에서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싸우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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