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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의 친구라고? — 태종의 시대, 나는 내 길을 간다


제 17 회태종 2년 · 1401년 봄
다시 한양 평민으로
💡 과거의 경험은 나를 성장시킨다
한양 시전은 변한 게 없었다.
아침이면 두부 장수가 골목을 누비고, 점심 무렵이면 떡 냄새가 바람을 타고 흘렀다. 아주머니들이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며 수다를 떨고, 아이들이 골목을 뛰어다니다 넘어져 울었다. 할머니의 약방 문은 오늘도 일찍 열려 있었다.
새봄만 조금 달랐다.
아니, 많이 달랐다. 스스로도 알 수 있었다. 예전에는 두부 사러 가는 길에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은 골목 어귀를 지나치면서도 뭔가 자꾸 눈에 들어왔다. 글을 모르는 아이가 팻말 앞에서 머뭇거리는 것. 등이 굽은 할머니가 무거운 물건을 혼자 드는 것. 시전 한쪽에 구걸하는 아이가 있어도 아무도 눈길을 주지 않는 것.
전에도 있었을 텐데, 전에는 그냥 지나쳤던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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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변한 건지, 세상이 보이기 시작한 건지 모르겠어. 아니면 그동안 너무 좁게 살았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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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약방 앞에서 빗자루질을 하다 고개를 들었다.
"왔냐."
"네, 할머니."
할머니는 더 말씀하지 않았다. 물어보실 게 많으실 텐데. 어디 있었냐, 무슨 일이 있었냐, 왕자님은 어땠냐. 하지만 할머니는 그냥 빗자루를 건네셨다.
"반대쪽 쓸어라."
새봄이 빗자루를 받아 쓸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날렸다. 봄볕이 따뜻했다. 이상하게 이 평범한 순간이 뭉클했다.
한참 쓸다 할머니가 말씀하셨다.
"고생 많았지."
"별로 안 했어요."
"그래도."
그 두 글자가 새봄의 눈을 찡하게 만들었다. 꾹 눌렀다. 울면 안 됐다. 약방 앞에서.
며칠이 지나자 일상이 다시 돌아왔다. 약초 다듬기, 손님 맞기, 시전 심부름. 그런데 예전과 달리, 그 일들이 더는 지겹게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에 잡히는 것들이 소중했다.
그 무렵, 시전에 소문이 돌았다.
이방원이 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묘호가 태종이 될 것이라는 말도 들렸다.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강한 왕이 될 것이라고, 아니면 무서운 왕이 될 것이라고. 기대와 두려움이 반반인 소문이었다.
새봄은 그 소문을 들으면서 약을 빻았다. 절구를 내리치는 손이 잠깐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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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됐구나. 그러면 이제 진짜 거기랑 여기는 다른 세상이 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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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를 다시 움직였다. 약 냄새가 진하게 났다. 새봄은 눈을 내리깔고 손에 집중했다.
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이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이, 새봄은 그때 처음으로 알았다.
— 17회 끝 —
다음 회: 여자는 글을 배우면 안 된다고?
제 18 회태종 2년 · 1401년 봄 — 어느 날 아침
여자는 글을 배우면 안 된다고?
💡 배움의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시전 골목 끝에 훈장이 한 명 살았다.
나이가 지긋한 어른이었는데, 매일 아침 자기 집 마당에서 동네 남자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목소리가 크고 씩씩해서 골목 어디서도 그 소리가 들렸다. 새봄은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들으며 컸다.
그런데 궁에서 돌아온 뒤, 그 소리가 다르게 들렸다.
어느 날 아침, 새봄은 약초 심부름을 가다가 훈장네 집 앞을 지나쳤다. 마당에서 아이들이 글 소리를 내고 있었다. 새봄이 담장에 등을 기댔다. 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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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천자문이다.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 나도 알아. 할머니가 약재 이름 가르쳐 주실 때 글자도 같이 알려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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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은 자기도 모르게 훈장네 집 담장 가까이에 서서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글자를 읽는 소리를 따라가면서 속으로 같이 읽었다.
그렇게 한참 있다 보니 어느새 담장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훈장이 나왔다.
"거기 누구냐!"
새봄이 번쩍 일어섰다.
"저, 저기요, 그냥 지나가다가……."
"지나가다가 담장 옆에 앉아 있었느냐? 도둑질이냐?"
"아니에요! 그냥 글 소리가 들려서요. 들으면서 같이 읽었어요."
훈장이 새봄을 위아래로 훑었다.
"여자 아이가 글은 배워 뭐 하느냐."
새봄이 멈췄다. 그 말이 가슴 어딘가에 딱 걸렸다.
"……왜 여자는 글을 배우면 안 돼요?"
"배울 필요가 없으니까 그렇지. 밥 짓고, 바느질하고, 시집가면 그만인 것을."
"저는 약방 일 해요. 약재 이름 알고, 용법 알고, 처방 적어야 해요. 그게 다 글이에요."
훈장이 헛기침을 했다.
"그건 특별한 경우고——"
"왜 특별한 경우예요? 저처럼 글이 필요한 여자가 저 혼자예요? 시전에 장사하는 아주머니들도 글을 알면 계산이 쉬워지고, 저 골목 빨래터 아줌마들도 남편한테 편지 한 장 쓰고 싶을 텐데요."
훈장의 얼굴이 굳었다. 새봄도 본인이 이렇게 말이 많이 나올 줄 몰랐다. 그런데 입이 저절로 움직였다.
"배우고 싶은 사람이 못 배우는 게 이상한 거 아닌가요?"
훈장이 한참 새봄을 봤다. 그러더니 코웃음을 쳤다.
"말이 참 많구나. 어디서 배운 말버릇이냐."
"제가 배웠어요. 스스로요."
훈장이 문을 닫았다. 쾅 하고.
새봄은 닫힌 문 앞에 서서 숨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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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난다. 근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아. 내 말을 내가 했다는 게, 이상하게 시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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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봄은 심부름 바구니를 고쳐 들고 걸었다. 발걸음이 전보다 빨랐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뭔가 단단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날 저녁, 할머니한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머니, 저 글 제대로 배우고 싶어요. 약재 이름만 아니라, 진짜로요."
할머니가 약을 젓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싶었냐."
"네."
할머니가 잠깐 새봄을 보셨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내가 알려주마."
새봄은 그날 밤, 오랜만에 마음이 가벼웠다.
— 18회 끝 —
다음 회: 도윤아, 우리 친구 맞지?
제 19 회태종 2년 · 1401년 초여름
도윤아, 우리 친구 맞지?
💡 솔직한 거절도 배려다
도윤이 이상해진 건 새봄이 궁에서 돌아오고 나서였다.
말이 줄었다. 예전의 도윤은 골목에서 새봄을 보면 제일 먼저 달려와서 오늘 있었던 일을 쏟아냈다. 내관 아버지한테 들은 궁 소문이라든가, 시전에서 재밌는 사람을 봤다든가, 그냥 별거 아닌 이야기들을. 그게 도윤이었다.
그런데 요즘 도윤은 새봄 옆에 있어도 말이 없었다. 같이 있는 건 마찬가지인데 어딘가 거리가 생긴 것 같았다. 새봄은 그게 신경 쓰였다.
어느 오후, 한강 쪽으로 심부름을 다녀오다 도윤과 마주쳤다. 둘이 나란히 걸었다. 처음엔 아무 말이 없었다. 도윤이 먼저 말했다.
"방원 왕자님 생각 많이 해?"
갑자기 나온 말이었다. 새봄이 발이 약간 엇나갔다가 돌아왔다.
"왜 갑자기 그 얘기야."
"그냥. 궁금해서."
새봄은 잠깐 걸으면서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할까, 아닐까. 근데 도윤이 이렇게 물어보는 데 거짓말하는 건 더 이상했다.
"……가끔은. 많이는 아닌데, 가끔."
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앞을 보고 걸으니까.
"나는 말이야."
도윤이 천천히 말했다.
"새봄이 네가 거기서 돌아왔을 때 진짜 다행이다 싶었거든. 근데 동시에 뭔가 달라진 것 같아서 좀 무서웠어."
"내가 달라졌어?"
"응. 나쁘게 달라진 건 아닌데. 그냥 뭔가…… 멀어진 것 같았어."
새봄이 걸음을 멈췄다. 도윤도 멈췄다. 두 사람이 서로 봤다.
"도윤아."
"응."
"너 나한테 특별한 마음 있어?"
도윤이 눈을 깜박였다. 뺨이 조금 붉어졌다. 새봄은 도윤의 눈을 봤다. 도윤이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있으면 어떻게 할 거야."
새봄이 한숨을 작게 쉬었다.
"솔직하게 말할게. 지금 나는 그 마음을 받을 수가 없어. 내 마음이 어디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고, 네 마음을 받아주는 척 하면서 사귀는 건 도윤이한테 더 나쁜 거 같아서."
도윤이 아무 말이 없었다.
"그래도 넌 나한테 제일 중요한 친구야. 그게 사실이야. 그게 전부 거짓말처럼 들릴 수도 있는 거 알아. 근데 나한테는 진짜야."
도윤이 강가 쪽을 봤다. 물이 반짝였다. 한참 있다가 말했다.
"……알아."
"화났어?"
"아니. 근데 조금 슬퍼."
"미안해."
"사과는 됐어. 솔직하게 말해줘서 오히려 고마워."
도윤이 새봄 쪽을 봤다. 눈이 빨개지지 않았다. 울지 않았다. 그냥 솔직했다.
"근데 나 한동안 좀 어색할 것 같아."
"그럼 어색하면 돼."
"친구는 계속 하는 거지?"
"당연하지."
도윤이 피식 웃었다. 많이 웃는 웃음은 아니었지만, 진짜 웃음이었다.
두 사람은 다시 나란히 걸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편하게.
솔직한 말이 상처를 주는 것 같아도, 거짓 위로보다는 낫다. 진짜 친구라면 그 솔직함을 결국 받아들인다. 새봄도 도윤도 그걸 알았다.
— 19회 끝 —
다음 회: 시전에 나타난 궁 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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