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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31회 — "서아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며칠이 지났다.

살구나무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였다.

폐하가 오시는 날이 늘었다.

이틀에 한 번이던 게.

거의 매일이 됐다.

서아도 매일 갔다.

청소를 마치고.

혼자 걸어서.

그날은 흐린 날이었다.

구름이 많았다.

해가 가려져 있었다.

살구나무 그늘보다 하늘이 더 어두웠다.

그런데 더웠다.

여름이라서.

서아는 마당에 들어갔다.

폐하가 계셨다.

오늘은 돌 의자에 앉아 계셨다.

눈을 감고 계셨다.

잠드신 건지.

그냥 쉬시는 건지.

서아는 소리를 내지 않고 들어갔다.

나무 옆에 섰다.

폐하가 눈을 뜨셨다.

"왔느냐."

"예. 자고 계셨어요?"

"아니다."

"그러면요?"

"그냥 있었다."

서아는 폐하 옆에 앉았다.

"눈 감고 그냥 있으신 거예요?"

"그렇다."

"어때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뭐가."

"눈 감고 그냥 있으면."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소리가 들린다."

"어떤 소리요?"

"잎 흔들리는 소리. 바람 소리. 멀리서 사람 소리."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조용한 것들이요."

"그렇다."

"저도 해볼까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해봐라."

서아는 눈을 감았다.

잠깐.

소리가 들렸다.

잎들이 흔들리는 소리.

바람이 지나가는 소리.

멀리서 내관들이 오가는 소리.

그리고.

폐하 옆에 있다는 것을 아는 소리.

소리가 아닌데.

느껴지는 것이.

서아는 눈을 떴다.

"들렸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뭐가."

"잎 소리. 바람 소리."

"그리고?"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왕자님이 옆에 계신다는 게."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소리가 아닌데 들리는 것도 있는 것 같아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그러다가 폐하를 봤다.

폐하가 서아를 보고 계셨다.

눈이 마주쳤다.

폐하가 눈을 돌리지 않으셨다.

서아도 돌리지 못했다.

잠깐.

폐하가 말씀하셨다.

"나도."

서아는 그 두 글자를 들었다.

나도.

나도 소리가 아닌데 들리는 것이 있다는 말이었다.

서아가 옆에 있다는 게.

느껴진다는 말이었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눈을 내리깔았다.

나무를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한참이 지났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구름이 움직였다.

잠깐 햇살이 나왔다.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그늘이 일렁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요즘 잘 자느냐."

서아는 그 질문이 뜻밖이었다.

"예?"

"밤에 잘 자는지."

"예. 잘 자요. 왕자님은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그런대로."

"그런대로요?"

"잘 때가 있고. 못 잘 때가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왜 못 주무세요."

"생각이 많을 때."

"어떤 생각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여러 가지."

"여러 가지는 너무 많은 거잖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전에도 그런 말을 했다."

"예전에요?"

"처음에. 이 마당에서 처음으로 이야기할 때."

서아는 그 날이 생각났다.

매화나무 아래에서.

여러 가지라고 하셔서.

여러 가지는 너무 많은 거잖아요, 하나만 말씀해 주세요, 했던 것.

"기억하세요?"

"그렇다."

"저도 기억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때 이방원 이야기를 했다."

"예. 어릴 때는 그냥 동생이었다고."

폐하가 나무를 봤다.

"지금도 그렇다."

서아는 들었다.

"그냥 동생이에요?"

"어릴 때랑 다른데. 그래도."

폐하가 잠깐 멈추셨다.

"동생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잘 도와드리고 있어요?"

"그렇다."

"다행이에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왜 다행이냐."

"왕자님 혼자 무거운 것 지시는 것보다. 동생분이 옆에 있어 드리는 게 낫잖아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렇구나."

"예."

서아가 말했다.

"그리고 저도 있고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에서."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구름이 다시 해를 가렸다.

그늘이 원래대로 됐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목소리가 달랐다.

평소보다 더 낮았다.

더 조용했다.

서아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예."

폐하가 나무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그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또 불렀다.

"예."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그 말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폐하가 나무를 보셨다.

서아도 나무를 봤다.

눈이 시려졌다.

참으려고 했다.

참지 않기로 했다.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뺨을 타고.

서아는 손으로 닦지 않았다.

그냥 뒀다.

나무를 봤다.

폐하가 서아를 보셨다.

"서아야."

"예."

목소리가 떨렸다.

"우느냐."

"예."

"왜."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왜 우는 걸까.

"다행이라는 말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말이 좋아서요."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있어서 다행이라는 말이. 있어도 된다는 말 같아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있어도 된다."

"예."

"있어야 한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있어야 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눈물이 더 났다.

있어야 한다.

다행이라는 말보다.

더 무거운 말이었다.

있어도 되는 게 아니라.

있어야 한다고.

"왕자님."

서아가 불렀다.

"응."

"저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왕자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눈이 아직 시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울고 나면 가벼워진다고 했는데."

서아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눈물이 나면서.

"예. 가벼워져요."

"그렇구나."

폐하가 나무를 봤다.

서아도 나무를 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오늘은 가득 찼다.

한참이 지나서 폐하가 일어나셨다.

"들어가야겠다."

"예."

서아도 일어났다.

폐하가 마당을 나가시려다 멈추셨다.

돌아보셨다.

"서아야."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내일도 오겠느냐."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내일도 오겠느냐.

"예."

서아가 말했다.

"올게요."

폐하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래."

그리고 나가셨다.

서아는 마당에 혼자 남았다.

살구나무가 있었다.

잎이 무성한.

서아는 나무를 봤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있어야 한다.

그 말들이 마당 안에 아직 있는 것 같았다.

서아는 손으로 눈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숨을 내쉬었다.

가벼웠다.

진짜로.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울었어."

"응."

"마당에서?"

"응."

"폐하 앞에서?"

"응."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뭐라고 하셨어."

서아는 들은 말을 전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있어도 되는 게 아니라 있어야 한다.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한참 말이 없었다.

정이가 없는 시간이었다.

두 사람뿐이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폐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어."

"응."

"그게 어떤 말인지 알지."

"알아."

채린이가 앞을 봤다.

"서아야."

"응."

"이방원 왕자님이 마음 조심하라고 하셨잖아."

"응."

"폐하가 그 말을 아셔."

"알 것 같아."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알면서도 있어야 한다고 하신 거잖아."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이제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아니라."

채린이가 말했다.

"폐하가 결정하신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결정하셨다는 것.

있어야 한다고.

"채린아."

"응."

"무서워."

"알아."

"좋기도 하고."

"알아."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또."

"모르지."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근데 서아야."

"응."

"폐하가 결정하신 거잖아."

"응."

"그러면 서아가 결정할 필요 없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서아가 결정할 필요 없다.

폐하가 결정하셨으니까.

있어야 한다고.

"그러면 나는."

"그냥 있으면 돼."

채린이가 말했다.

"있어야 한다고 하셨잖아."

"응."

"그러면 있으면 되잖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단순한 말이었다.

그런데.

충분했다.

있어야 한다고 하셨으면.

있으면 됐다.

그냥.

"채린아."

"응."

"고마워."

"됐어."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언제나 자자였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있어야 한다.

그 말들이 귓속에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폐하 목소리로.

서아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구름이 걷힌 하늘에 별이 보였다.

기수와 익수가.

같은 하늘에.

다음 날 아침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청소를 하러 나갔다.

북쪽 행각을 쓸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있어야 한다.

어제 폐하가 하신 말씀이.

아침에도 귓속에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빗자루를 밀면서.

생각했다.

있어야 한다는 말이.

왕이 되신 분이 하시는 말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서아는 알 것 같았다.

알면서.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채린이 말대로.

그냥 있으면 됐다.

있어야 한다고 하셨으니까.

있으면 됐다.

청소를 마치고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폐하가 계셨다.

오늘도 오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봤다.

"왔느냐."

"예."

서아는 폐하 옆에 앉았다.

나무를 봤다.

구름이 어제보다 적었다.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왔다.

그늘이 일렁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어제 울었는데."

"예."

"오늘은."

서아는 폐하를 봤다.

"오늘은 괜찮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가벼워졌느냐."

"예."

서아가 웃었다.

"아침에 일어났더니 가벼웠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요즘은 자주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없었는데.

지금은 자주.

그게 좋았다.

"왕자님."

"응."

"오늘 별자리 가르쳐 주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어제는 가르쳐 주지 않았구나."

"예. 다른 이야기만 했어요."

폐하가 하늘을 봤다.

"진수(軫宿)다."

서아는 들었다.

"진수요?"

"하늘의 수레라고 불린다."

"수레요?"

"네 개가 수레 모양이다."

서아는 그 이름을 생각했다.

하늘의 수레.

"어디로 가는 수레예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어디든 갈 수 있는 수레."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어디든 갈 수 있어요?"

"수레는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어디로 가고 싶으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질문이 너무 직접적이었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너무——"

"괜찮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어디든."

"어디든이요?"

"정해진 곳이 없다면. 어디든 갈 수 있다면."

폐하가 잠깐 침묵하셨다.

"그냥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조용한 곳.

"여기 같은 곳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렇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그러면 여기가 수레 종착지예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종착지?"

"어디든 갈 수 있는데. 여기로 오시잖아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나무를 봤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조용하게 나왔다.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폐하의 수레가 향하는 곳.

살구나무 마당.

서아가 있는 곳.

그게 수레 종착지라는 것.

서아는 나무를 봤다.

잎들이 흔들렸다.

그늘이 일렁였다.

두 사람이 나란히.

나무를 봤다.

그날 저녁.

채린이와 둘이 있을 때.

서아가 말했다.

"채린아."

"응."

"오늘 폐하가 어디든 갈 수 있다면 조용한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면서 들었다.

"내가 여기가 수레 종착지 같다고 했어."

채린이가 바늘을 멈췄다.

"폐하가 뭐라고 하셨어."

"그렇구나 하셨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채린아."

"응."

"있어야 한다는 말이랑. 여기가 종착지라는 것이랑."

서아는 창밖을 봤다.

"다 같은 말인 것 같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어떤 의미로."

서아는 창밖을 봤다.

"폐하가 여기 오시는 이유."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잖아."

"응."

"말하지 않아도 알잖아."

"응."

채린이가 다시 바느질을 했다.

"서아야."

"응."

"잘 됐으면 좋겠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면서 말했다.

"두 사람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두 사람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것.

채린이 입에서.

채린이는 현실적인 아이였다.

이루어질 수 없다고 했다.

조심하라고 했다.

그런데.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채린아."

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왜."

"그 말이 고마워서."

채린이가 앞을 봤다.

"별 것도 아닌데."

"별 것이야."

서아가 말했다.

"채린아한테서 나온 말이니까."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바느질을 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그게 고맙다는 것이었다.

채린이 방식으로.

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늘을 봤다.

별이 보였다.

진수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하늘의 수레.

어디든 갈 수 있는.

폐하의 수레가 향하는 곳.

살구나무 마당.

서아가 있는 곳.

서아는 눈을 감았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진수를 찾았다.

네 개가 수레 모양으로.

찾았다.

"진수."

혼자 말했다.

하늘의 수레.

어디든 갈 수 있는.

서아는 그 별을 봤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있어야 한다.

여기가 수레 종착지.

그 말들이 다 사실이었다.

폐하가 하신 말씀들이.

다 사실이었다.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있어야 한다.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별들이 가득한.

기수와 익수와 진수가.

같은 하늘에.

우리만 아는 별들이.

32회 예고

"이방원의 경고"

이방원 왕자님이 나를 다시 불렀다. 이번엔 다른 눈빛이었다. 형님이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신다는 걸 안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형님 곁에서 물러나라고. 형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작가 한마디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있어야 한다.

폐하가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셨어요. 채린이가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저도 울 뻔했어요.

32회에서 이방원 왕자님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엔 더 무거운 말씀을 하세요. 함께 봐요.

32회 — 이방원의 경고

이방원 왕자님이 부르신 건 열흘 뒤였다.

서아는 오전 교육을 마치고 박 상궁을 마주쳤다.

박 상궁이 서아를 보더니 말씀하셨다.

"윤서아."

"예."

"정안군 나리께서 부르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굳었다.

또.

이방원 왕자님이.

"예."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쪽 내전으로 걸었다.

이방원 왕자님 처소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렸다.

"윤서아,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들어갔다.

이방원 왕자님이 앉아 계셨다.

오늘은 표정이 달랐다.

지난번보다 무거웠다.

뭔가 결정한 사람의 표정이기도 했다.

뭔가 말해야 하는 것을 아는 사람의 표정이기도 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앉아라."

서아는 앉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훑는 눈빛이었다.

지난번처럼.

그런데 지난번과 달랐다.

칼날 같은 건 여전했는데.

뭔가 다른 것이 섞여 있었다.

무거운 것이.

"윤서아."

"예."

"형님이 너를 특별하게 생각하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부정하지 않으셨다.

"예."

"알고 있었느냐."

"……예."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이 살구나무 마당에 매일 나오신다."

"예."

"너도 매일 간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형님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다고."

서아는 그 말에 굳었다.

어떻게 아셨을까.

수행 내관이 들었겠지.

"……예."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겠느냐."

"예."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네가 알면."

"예."

"형님도 아신다는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형님도 아신다.

자기가 하신 말이 어떤 말인지.

폐하도 아신다는 것.

"예."

"그리고."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내가 안다는 것도 아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이방원 왕자님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하신 말씀이었다.

있어야 한다고.

"알고 계세요."

서아가 말했다.

"예?"

"폐하가 왕자님이 아신다는 걸 아시면서."

서아는 이방원 왕자님을 봤다.

"그래도 하신 말씀이에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라졌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구나."

그 말이 나왔다.

짧고 조용하게.

형님답다는 말 같기도 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한참 말이 없으셨다.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윤서아."

"예."

"오늘 내가 할 말이 있다."

서아는 기다렸다.

"지난번에 형님을 위해서 멀어지라고 했다."

"예."

"오늘은 다른 말이다."

서아는 그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몰랐다.

"나라를 위해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나라를 위해서.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이 왕이 되셨다."

"예."

"왕은 왕비가 있어야 하고. 후궁이 있을 수 있다."

"예."

"그런데 그것도 정해진 격이 있다."

서아는 들었다.

"수습 궁녀는 그 격에 들어가지 않는다."

그 말이 나왔다.

수습 궁녀는 그 격에 들어가지 않는다.

서아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던 말이었다.

그런데 이방원 왕자님 입에서 나오니까.

더 단단하게 들렸다.

"예."

"형님이 네 곁에 두고 싶어 하신다는 게 알려지면."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신하들이 반대할 것이다."

"예."

"그 반대가 형님을 약하게 만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의 사사로운 감정은 약점이 된다고 지난번에도 말했다."

"예."

"지금은 더 그렇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이 왕위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예."

"이 시기에 왕의 감정이 흔들리는 것이 알려지면."

서아는 들었다.

"나라가 흔들린다."

그 말이 무거웠다.

형님이 다친다는 말과 달랐다.

나라가 흔들린다는 말은.

더 컸다.

서아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차가웠다.

"예."

"알겠느냐."

"예."

서아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 곁에서 물러나라."

그 말이 나왔다.

물러나라.

"살구나무 마당에 가지 마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 마당에 가지 마라.

"형님이 부르셔도."

"예."

"가지 마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형님이 부르셔도 가지 마라.

그게 이방원 왕자님이 하시는 말이었다.

나라를 위해서.

서아는 손이 더 차가워졌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할 말이 있으면 해봐라."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할 말이 있었다.

많이.

그런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왕자님."

"응."

"폐하가 아셔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뭘."

"왕자님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말이 없으셨다.

"모르신다."

"알려드려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왜."

"폐하가 결정하셔야 하는 것 같아서요."

서아가 말했다.

"제가 물러날지 말지를."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라졌다.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형님이 결정하면."

"예."

"물러나지 않겠다고 하실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걸 알면서도 형님한테 알려달라고 하느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오래.

"왜."

"폐하가 선택하셔야 하는 것 같아서요."

서아가 말했다.

"나라와 저 사이에서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걸 선택이라고 부르느냐."

"그렇게 부르면 안 되나요?"

"나라와 수습 궁녀 사이의 선택은."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선택이 아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답이 정해진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라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라는 말이었다.

"예."

서아가 말했다.

"그래도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래도?"

"폐하가 아셔야 할 것 같아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저한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이방원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달라졌다.

칼날 같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뭔가 인정하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래."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형님한테 말하겠다."

"감사합니다."

"고마워할 일이 아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형님이 알아도 결과는 같다."

"예."

"나라가 먼저다."

"알겠습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가봐라."

서아는 일어났다.

문 쪽으로 걸었다.

"윤서아."

멈췄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형님이 네 덕에 웃으셨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형님이 웃으셨다.

서아 덕에.

"그것만은."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고맙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고맙다고 하셨다.

서아한테.

형님이 웃으셨다고.

"예."

서아는 그것만 대답하고 나왔다.

복도에 나왔다.

서아는 걸었다.

발이 무거웠다.

나라를 위해서.

살구나무 마당에 가지 마라.

형님이 부르셔도.

그 말들이 발걸음마다 무겁게 눌렸다.

서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맞았다.

나라와 수습 궁녀 사이의 선택은 선택이 아니었다.

답이 정해진 것이었다.

나라가 먼저였다.

그런데.

폐하한테 알려달라고 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신다는 것을.

왜 그렇게 말했을까.

서아는 생각했다.

폐하가 아셔야 한다는 게.

폐하가 선택하셔야 한다는 게.

그게 서아한테 중요한 것이었다.

서아가 물러나는 것이.

강요가 아니라.

폐하가 아시고 나서의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

왜 중요한 건지.

서아는 알았다.

폐하가 선택하셨으면 했다.

나라를.

그러면.

서아가 물러나는 것이.

서아의 선택이 아니라.

폐하의 선택이 되는 거니까.

그게 덜 무거울 것 같았다.

서아는 멈췄다.

복도에.

손을 가슴 쪽에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이야."

"응."

채린이가 서아 옆에 앉았다.

서아는 들은 말을 전했다.

나라를 위해서.

살구나무 마당에 가지 마라.

형님이 부르셔도.

폐하한테 알려달라고 했다는 것.

이방원 왕자님이 형님이 웃으셨다고 고맙다고 하셨다는 것.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한참 말이 없었다.

"채린아."

"응."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맞아."

"알아."

"나라가 먼저야."

"알아."

"폐하도 아실 거야."

"알아."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서아야."

"응."

"폐하한테 알려달라고 한 거 잘했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왜."

"폐하가 아셔야 하잖아."

"응."

"폐하가 알고 나서."

채린이가 말했다.

"폐하가 결정하시면."

"응."

"그때 서아도 결정하면 되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결정하시면.

서아도 결정한다.

"폐하가 나라를 선택하시면."

"응."

"그때 서아도 물러나면 되잖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전까지는."

"응."

"살구나무 마당이 있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전까지는.

살구나무 마당이 있다.

"채린아."

"응."

"폐하가 어떻게 결정하실 것 같아."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추측이라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폐하가 있어야 한다고 하셨잖아."

"응."

"그 말을 하신 분이."

채린이가 잠깐 멈췄다.

"물러나라고 하실 수도 있고."

"응."

"아닐 수도 있고."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아닐 수도 있다.

물러나라고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것.

"그러면 어떻게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때 또 생각하면 되지."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지금 당장 결정 안 해도 되잖아."

"응."

"폐하가 알고 나서. 그때 결정하면 되잖아."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또 자자였다.

그런데 오늘은.

자자 소리가 이상하게 고마웠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천장을 봤다.

나라를 위해서 물러나라.

그 말이 무거웠다.

그런데.

형님이 네 덕에 웃으셨다.

그 말도 있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경고하면서도.

고맙다고 하셨다.

그게.

이방원 왕자님이 그냥 차갑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다.

형님을 걱정하는 분이었다.

나라를 걱정하는 분이었다.

그래서 하시는 말씀이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진수를 찾았다.

하늘의 수레.

찾았다.

그 옆에.

기수를 찾았다.

바람을 맞는 키.

찾았다.

익수를 찾았다.

날개.

찾았다.

세 별이 다 있었다.

우리만 아는 별들이.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폐하가 아시게 될 것이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폐하가 아시고.

결정하실 것이다.

그 결정이 어떤 결정이든.

서아는 따르기로 했다.

지금은.

살구나무 마당이 있었다.

내일도 갈 것이다.

폐하의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는.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나라를 위해서.

그 말이 무거웠다.

그런데.

지금은 별이 있었다.

살구나무 마당이 있었다.

그게 충분했다.

지금은.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교육을 마치고 청소를 하러 나갔다.

북쪽 행각을 쓸었다.

빗자루를 밀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오늘 살구나무 마당에 가야지.

폐하가 계실지 모르지만.

가야지.

청소를 마쳤다.

살구나무 마당으로 걸었다.

마당 앞에 섰다.

들어가려는데.

마당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내관 목소리였다.

"마당이 오늘부터 폐쇄됩니다."

서아는 멈췄다.

"폐쇄요?"

"예. 정비 작업이 있습니다."

서아는 마당 안을 봤다.

살구나무가 보였다.

잎이 무성한 나무가.

그런데.

마당 입구에 내관이 서 있었다.

막고 있었다.

"언제까지요?"

"모르겠습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모르겠다.

정비 작업.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돌아섰다.

걸었다.

걸으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정비 작업.

갑자기.

이방원 왕자님이 폐하한테 말씀드렸겠지.

그리고 폐하가 결정하셨겠지.

살구나무 마당을 막으셨겠지.

그게 폐하의 결정이었다.

나라를 선택하신 것이었다.

서아는 걸었다.

발이 무거웠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았다.

아직.

폐하가 결정하셨다.

그러면 서아도 결정해야 했다.

물러나는 것.

살구나무 마당에 가지 않는 것.

폐하를 뵙지 않는 것.

그게 서아의 결정이었다.

서아는 걸었다.

발이 무거웠다.

하늘이 맑았다.

여름 하늘이.

어딘가에 기수가 있을 것이다.

낮이라 보이지 않지만.

있다는 걸 알면.

밤에 찾을 수 있다.

폐하가 하셨던 말이었다.

서아는 그 말을 떠올리면서 걸었다.

있다는 걸 알면.

찾을 수 있다.

지금 보이지 않아도.

있다는 걸 알면.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살구나무 마당."

"응."

"막혔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어떻게 알았어."

"그럴 것 같아서."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어때."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울 것 같아?"

서아는 생각했다.

울 것 같은가.

"지금은 아닌 것 같아."

"나중에?"

"나중엔 모르겠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이 잠깐 말이 없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살구나무는 있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마당이 막혔어도."

채린이가 앞을 봤다.

"살구나무는 있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는 있다.

마당이 막혔어도.

나무는 거기 있다.

"응."

서아가 말했다.

"살구나무는 있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두 사람이 창밖을 봤다.

하늘이 맑았다.

여름 하늘이.

살구나무가 있는 방향으로.

바람이 불었다.

33회 예고

"우리 사이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살구나무 마당이 막혔다. 그런데 며칠 후에 폐하가 서아를 부르셨다. 처소로. 직접. 마당 밖에서. 나는 갔다. 가면 안 됐는데. 갔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우리 사이가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작가 한마디

이방원 왕자님이 고맙다고 하셨어요. 형님이 웃으셨다고. 그게 이분이 차갑기만 한 분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죠. 살구나무 마당이 막혔어요. 그래도 살구나무는 있다는 채린이 말. 33회에서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납니다. 함께 봐요.

 

33회 — 우리 사이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살구나무 마당이 막힌 지 사흘이 지났다.

서아는 청소를 했다.

교육을 받았다.

밥을 먹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다.

살구나무 마당 앞을 지나치지 않으려고 했다.

돌아가는 길로 다녔다.

그래도 가끔.

발이 그쪽으로 향했다.

멈추고.

돌아갔다.

채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옆에 있었다.

그게 충분했다.

정이는 눈치를 챈 것 같았다.

서아한테 말을 걸다가.

채린이가 눈짓을 하면 멈췄다.

정이도 나름의 방식으로 배려하는 것 같았다.

서아는 그게 고마웠다.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고 별을 봤다.

진수를 찾았다.

찾았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익수를 찾았다.

찾았다.

우리만 아는 별들이.

아직 있었다.

하늘에.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오래.

창문을 닫으려는데.

소리가 들렸다.

복도에서.

발걸음 소리였다.

서아는 멈췄다.

밤에 복도를 걷는 사람이 있었다.

늦은 시간이었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그러더니 처소 앞에서 멈췄다.

노크 소리가 났다.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채린이가 눈을 떴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쳤다.

또 노크 소리가 났다.

서아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내관이었다.

처음 보는 내관이었다.

"윤서아냐."

"예."

"따라오너라."

서아는 멈췄다.

"지금요?"

"그렇다."

"어디로요?"

내관이 말했다.

"폐하께서 부르신다."

서아는 굳었다.

폐하가.

이 밤에.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말했다.

조심해.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갔다.

내관을 따라 걸었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몰랐다.

살구나무 마당이 아니었다.

다른 쪽이었다.

내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 밤에 부르셨다.

무슨 일일까.

살구나무 마당이 막힌 것 때문인가.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드린 것 때문인가.

내관이 멈췄다.

서아도 멈췄다.

작은 마당이 있었다.

비가 왔던 날 갔던 그 마당이었다.

나무가 두 그루 있는.

마당 안에 폐하가 서 계셨다.

혼자였다.

수행 내관이 없었다.

내관이 서아한테 눈짓을 하고 멀어졌다.

서아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왔느냐."

"예."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

"고개 들어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밤이었다.

달이 있었다.

보름이 지난 달이었다.

그래도 밝았다.

폐하 표정이 보였다.

무거웠다.

뭔가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아는 표정이었다.

"앉아라."

폐하가 말씀하셨다.

마당 한켠에 돌 의자가 있었다.

서아는 앉았다.

폐하도 앉으셨다.

나란히.

달빛이 마당에 내려앉았다.

한참 말이 없었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서아도 나무를 봤다.

바람이 없었다.

밤이라서 조용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이방원이 말했다."

서아는 들었다.

"예."

"네가 폐하한테 알려달라고 했다고."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왜."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폐하가 아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

"제가 물러나는 것이. 강요가 아니라."

서아는 폐하를 봤다.

"폐하가 아시고 나서의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예."

폐하가 말씀하셨다.

"들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 마당을 막은 것도."

"예."

"알고 있었느냐."

"알고 있었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미안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미안하다.

"왜 미안하세요."

"네 자리를 없앤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네 자리.

살구나무 마당이 서아 자리였다고.

"왕자님."

서아가 불렀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 자리가 아니에요."

"뭐가."

"살구나무 마당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왕자님 자리예요. 처음부터 왕자님 자리였는데. 제가 있어도 된다고 하셨잖아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리고."

서아가 말했다.

"있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폐하가 눈을 내리깔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달빛이 마당에 있었다.

조용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이방원이 뭐라고 했느냐."

"나라를 위해서 물러나라고 하셨어요."

"그것뿐이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형님이 네 덕에 웃으셨다고. 고맙다고도 하셨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이방원이 그런 말을 했느냐."

"예."

폐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 아이답지 않구나."

"그래요?"

"그렇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답지 않다고.

그런데 하셨다는 것이었다.

"왕자님을 걱정하는 것 같았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이방원이?"

"예. 형님이 다치면 안 된다고. 그게 진심인 것 같았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무거웠다.

동생이 걱정한다는 것이.

그리고 그 걱정이 맞다는 것이.

두 가지가 다 담긴 것 같은 말이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오늘 부른 이유가 있다."

서아는 기다렸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을 막은 것은."

"예."

"이방원 말이 맞아서다."

서아는 들었다.

"나라가 먼저다."

"예."

"그 말이 틀리지 않는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런데."

폐하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뭔가를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살구나무 마당을 막으면서."

"예."

"네한테 말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렸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래서 오늘 불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직접 말하고 싶었다."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직접 말하고 싶었다.

살구나무 마당을 막은 것을.

서아한테.

직접.

"왕자님."

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예."

"고마워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뭐가."

"직접 말씀해 주셔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달빛이 폐하 옆모습에 내려앉았다.

서아는 그 옆모습을 봤다.

처음 봤을 때랑 달랐다.

왕자님이셨을 때.

살얼음 같던 인상이.

지금은 달랐다.

여전히 조용하고 담담하셨는데.

다른 무엇이 있었다.

서아한테는.

그 다른 무엇이 보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우리 사이가."

서아는 그 말에 멈췄다.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그 질문이 나왔다.

우리 사이.

어디까지가 괜찮은 걸까.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폐하가 물으셨다.

서아한테.

우리 사이 어디까지가 괜찮은 건지.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 질문의 무게가 너무 컸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대답하기 어렵겠구나."

"……예."

"나도 모르겠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나라를 위해서는 물러나야 한다."

"예."

"그런데."

폐하가 잠깐 침묵하셨다.

달빛이 나뭇잎에 내려앉았다.

"네가 있어야 한다."

그 말이 다시 나왔다.

있어야 한다.

"두 가지가 같이 맞는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물러나야 하는 것도 맞고."

"예."

"있어야 한다는 것도 맞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두 가지가 다 맞다.

그런데 두 가지를 같이 할 수 없다.

"왕자님."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어디까지가 괜찮은지."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런데요."

서아가 말했다.

"지금 여기는 괜찮은 것 같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지금 이 자리요."

서아가 말했다.

"달빛이 있고. 나무가 있고. 왕자님이 옆에 계신 지금은."

서아는 나무를 봤다.

"괜찮은 것 같아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오늘은 유독 무거웠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달빛이 마당에 있었다.

조용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진수 알지."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예. 하늘의 수레요."

"어디든 갈 수 있는."

"예."

폐하가 하늘을 봤다.

밤 하늘이었다.

별이 가득했다.

"지금 진수가 보인다."

서아도 하늘을 봤다.

"어디요?"

"저쪽."

폐하가 방향을 가리키셨다.

서아는 눈을 좁혀 봤다.

"보여요."

"네 개가 수레 모양으로."

"예. 보여요."

두 사람이 같은 별을 봤다.

같은 방향으로.

진수.

하늘의 수레.

"왕자님."

서아가 말했다.

"예."

"저 수레가 어디로 가면 좋겠어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네가 있는 곳."

그 말이 나왔다.

네가 있는 곳.

서아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하늘을 봤다.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예."

"또 우느냐."

"예."

"왜."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네가 있는 곳이라고 하셔서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그 말이 좋아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서아야."

"예."

"나는."

폐하가 하늘을 봤다.

진수가 있는 하늘을.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그 말이 나왔다.

조용하고 낮게.

나는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서아는 눈물이 더 났다.

닦지 않았다.

그냥 뒀다.

나무를 봤다.

달빛이 나뭇잎에 있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폐하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달빛 아래서.

폐하의 눈빛이.

오늘은 달랐다.

항상 담담하고 조용한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그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조금.

서아는 그 흔들림을 봤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흔들렸다.

아주 조금.

그게.

서아한테만 보이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눈을 마주봤다.

달빛이 마당에 있었다.

별이 하늘에 있었다.

진수가.

기수가.

익수가.

우리만 아는 별들이.

폐하가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서아야."

"예."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마지막.

"이렇게 만나는 것이."

폐하가 말씀하셨다.

"이방원이 옳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나라가 먼저다."

"예."

"그것도 안다."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런데."

잠깐 침묵이 흘렀다.

달빛이 흔들렸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오늘 밤은."

폐하가 말씀하셨다.

"여기 있어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오늘 밤은.

여기 있어도 된다.

"예."

서아가 말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서.

나무를 봤다.

달빛이 있었다.

별이 있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달이 조금 움직였다.

폐하가 일어나셨다.

"들어가야겠다."

서아도 일어났다.

폐하가 마당을 나가시려다 멈추셨다.

돌아보셨다.

서아를 봤다.

달빛 아래서.

"서아야."

"예."

폐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뭔가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씀을 고르시는 것 같았다.

한참.

폐하가 말씀하셨다.

"기수."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기수.

"예."

"우리만 아는 별."

"예."

폐하가 하늘을 봤다.

"저기 있다."

서아도 하늘을 봤다.

기수가 있었다.

바람을 맞는 키.

기울어진 채로 반짝이는.

"예."

"잊지 마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잊지 마라.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한 번.

그리고 나가셨다.

서아는 그 뒷모습을 봤다.

마당 밖으로 나가시는 뒷모습을.

사라지셨다.

서아는 마당에 혼자 남았다.

달빛이 있었다.

기수가 하늘에 있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났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작게.

아주 작게.

마당에.

달빛 아래에.

혼자.

울었다.

처소로 돌아왔다.

채린이가 눈을 뜨고 있었다.

자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 얼굴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이불을 펴줬다.

서아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채린이가 서아 옆에 누웠다.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옆에 있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말랐다.

기수.

잊지 마라.

그 말이 귓속에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폐하 목소리로.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그 말을 들었다.

오래.

달빛이 창문 너머에 있었다.

기수가 하늘에 있었다.

우리만 아는 별이.

잊지 않을 것이다.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달이 있는.

34회 예고

"서아가 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며칠이 지났다. 박 상궁이 나를 불렀다. 표정이 달랐다. 수습 기간이 끝나간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너는 궁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폐하가 결정하신 것이었다.

작가 한마디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 기수 잊지 마라.

폐하가 처음으로 눈빛이 흔들렸어요. 그게 서아한테만 보이는 것 같았다고 했죠.

34회에서 서아가 궁을 떠나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 나옵니다. 함께 봐요.

 

 

 

 

34회 — 서아가 궁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며칠이 지났다.

살구나무 마당은 여전히 막혀 있었다.

서아는 그쪽으로 가지 않았다.

가려고 하지 않았다.

폐하를 뵌 날 밤 이후로.

그 자리에 가면.

그날 밤이 생각날 것 같아서.

교육을 받았다.

청소를 했다.

밥을 먹었다.

하루하루가 비슷했다.

그런데.

예전과 달랐다.

뭔가 끝이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끝이 보이는.

그 느낌이 매일 있었다.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박 상궁이 서아를 불렀다.

"윤서아."

"예."

"따라오너라."

서아는 따라갔다.

박 상궁이 작은 방으로 들어가셨다.

교육 방이 아니었다.

박 상궁이 따로 쓰시는 방이었다.

들어가니 박 상궁이 앉으셨다.

서아도 앉았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표정이 달랐다.

딱딱하지 않았다.

뭔가 말씀하셔야 하는 것을 아는 표정이었다.

그런데 조심스러운 표정이기도 했다.

서아는 기다렸다.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수습 기간이 끝나간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제 정식 궁녀가 될지. 아니면 나갈지를 결정해야 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정식 궁녀가 될지.

나갈지.

"예."

"수습생들 중에 일부는 정식으로 배치된다."

"예."

"일부는 나가게 된다."

박 상궁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기다렸다.

"윤서아."

"예."

"너는."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궁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궁을 나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예."

서아가 말했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그냥 받아들이느냐."

"예."

"이유가 궁금하지 않느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알 것 같아서요."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윤서아."

"예."

"네가 잘못한 게 아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예."

"그것만은 알아라."

서아는 박 상궁을 봤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평소의 날카로운 눈빛이 아니었다.

뭔가 더 있는 눈빛이었다.

"예."

"수습 기간 동안 잘 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청소도 잘 했고. 교육도 잘 받았고."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최 상궁 앞에서 한 말도."

서아는 그 날이 생각났다.

박 상궁이 잘 가르쳤다고 했던 그 날.

"기억하고 있다."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그것도 잘 했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감사합니다."

박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언제 나가야 하나요."

"보름 뒤다."

보름.

"예."

"그때까지는 평소대로 해라."

"예."

박 상궁이 일어나셨다.

서아도 일어났다.

"가봐라."

"예."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나왔다.

복도에 나왔다.

서아는 걸었다.

발이 무거웠다.

보름 뒤.

궁을 나간다.

그게 폐하의 결정이었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대로.

나라가 먼저.

서아가 나가는 것이.

그 선택이었다.

서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울 것 같았다.

그런데 나오지 않았다.

아직.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를 보더니 말했다.

"박 상궁님이 부르셨어?"

"응."

"뭐라고 하셨어."

서아는 앉았다.

"보름 뒤에 나가야 한다고."

채린이가 멈췄다.

바느질 하던 손이.

"나간다고."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궁 밖으로?"

"응."

채린이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서아는 앞을 봤다.

"알고 있었어."

서아가 말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거."

"응."

"그런데 막상 오니까."

서아는 잠깐 멈췄다.

"생각보다 빨리 왔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울어도 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울어도 된다.

채린이가 또 그 말을 했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그런데 나오지 않았다.

"아직은 안 나와."

"괜찮아."

채린이가 서아 옆에 앉았다.

"나올 때 나오면 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보름 동안."

"응."

"뭐 하고 싶어."

서아는 생각했다.

보름 동안.

뭘 하고 싶은 걸까.

"모르겠어."

"청소는 계속 해야지."

"응."

"교육도."

"응."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서아야."

"응."

"폐하한테 마지막 인사 하고 싶어?"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마지막 인사.

폐하한테.

"……모르겠어."

서아가 말했다.

"하고 싶은 것 같기도 하고."

"응."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채린아, 어떻게 생각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또 모른다고."

"진짜로 모르겠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건 서아가 결정해야 해."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나는 말 못 해줘. 그건."

"알아."

채린이가 앞을 봤다.

두 사람이 잠깐 말이 없었다.

정이가 들어왔다.

"야, 오늘 교육에서——"

정이가 서아를 봤다.

멈췄다.

서아 표정을 봤다.

채린이 표정을 봤다.

정이가 말을 멈췄다.

잠깐 있다가.

"야, 오늘 밥이 맛있더라."

엉뚱한 말을 했다.

서아는 웃음이 났다.

눈이 시린 채로.

"그랬어?"

"응. 국이 되게 따뜻했어."

"그랬구나."

정이가 자기 자리에 앉았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다시 시작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하늘이 보였다.

여름 하늘이.

보름.

보름이 있었다.

저녁이 됐다.

교육이 끝나고 서아는 혼자 복도를 걸었다.

채린이한테 바람 쐬러 간다고 했다.

복도를 걸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다.

그냥 걸었다.

걷다 보니 살구나무 마당 쪽이었다.

서아는 멈췄다.

마당 앞에 섰다.

내관이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입구가 막혀 있지 않았다.

서아는 마당을 봤다.

살구나무가 보였다.

잎이 짙은 초록이었다.

여름이라서.

무성했다.

서아는 들어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막혀 있지 않았다.

그런데.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서서 봤다.

나무를.

살구꽃이 피던 나무를.

꽃이 지고 잎이 난 나무를.

지금은 잎이 무성한 나무를.

서아는 그 나무를 봤다.

오래.

"살구나무야."

혼자 조용히 말했다.

나무한테.

"나 보름 뒤에 나가."

나무가 대답하지 않았다.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게 대답 같았다.

"왕자님한테 잘 있어줘."

서아가 말했다.

"여기 오시면."

나무가 흔들렸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이번엔 나왔다.

눈물이.

소리 없이.

나무 앞에서.

혼자.

한참 울었다.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와 정이가 있었다.

정이가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야, 눈이 왜 그래."

"바람이."

"바람이 눈을 빨갛게 만들어?"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정이가 입을 다물었다.

서아는 자리에 앉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살구나무한테 다녀왔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울었어."

"알아."

"나무한테."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잘 했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뭐가."

"울고 왔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울고 왔잖아.

잘 했다고.

"그래."

서아가 말했다.

"울었어. 잘 했지."

채린이가 앞을 봤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또 자자였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기수를 찾았다.

바람을 맞는 키.

찾았다.

"기수."

혼자 말했다.

잊지 마라.

폐하가 하셨던 말이었다.

잊지 않을 것이다.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오래.

보름이 있었다.

그 보름 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청소를 할 것이다.

교육을 받을 것이다.

밥을 먹을 것이다.

별을 찾을 것이다.

그리고.

서아는 생각했다.

폐하한테 마지막 인사를.

해야 할까.

채린이는 서아가 결정해야 한다고 했다.

서아는 아직 모르겠다.

하고 싶다.

그런데.

하면 더 아플 것 같다.

안 하면 덜 아플까.

아니.

안 해도 아플 것이다.

서아는 기수를 봤다.

기울어진 채로 반짝이는 별.

바람을 맞으면서.

있는 별.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보름.

보름이 있었다.

그 시간이 있었다.

서아는 그 시간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괜찮아?"

서아는 생각했다.

괜찮은가.

"응."

서아가 말했다.

"괜찮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진짜로?"

"진짜로."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정이가 둘을 봤다.

"야, 나도 알아도 되는 얘기야?"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서아도 정이를 봤다.

정이가 눈을 깜빡였다.

서아가 말했다.

"나 보름 뒤에 궁 나가."

정이가 눈을 크게 떴다.

"왜?"

"수습 기간 끝나서."

"그, 그래?"

정이가 서아를 봤다.

뭔가 더 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묻지 않았다.

"……그렇구나."

정이가 말했다.

"아쉽다."

서아는 그 말이 고마웠다.

"나도."

"야, 나가기 전에 같이 밥 먹자."

"응."

"맛있는 거."

"그러자."

정이가 웃었다.

서아도 웃었다.

채린이도.

아주 조금.

며칠이 지났다.

청소를 했다.

교육을 받았다.

하루하루가 쌓였다.

보름이 줄어들었다.

열흘이 됐다.

아흐레가 됐다.

서아는 매일 밤 별을 찾았다.

기수를.

익수를.

진수를.

우리만 아는 별들을.

다 찾았다.

그리고.

새 별들도 찾았다.

익수 가르쳐 주실 때 보이지 않았던 별들이.

밤하늘에 있었다.

이름을 모르는 별들이.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이름을 모르는 별들도.

있었다.

다 이름이 있겠지.

폐하가 알려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 생각이 들었다.

닷새가 됐을 때였다.

청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박 상궁이 서아를 불렀다.

"윤서아."

"예."

"잠깐."

서아는 멈췄다.

박 상궁이 서아한테 가까이 오셨다.

목소리를 낮추셨다.

"오늘 오후에 서쪽 마당 쪽으로 가봐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서쪽 마당이요?"

"그렇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평소와 다른 눈빛이었다.

"누가 있을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이 어떤 뜻인지 알았다.

"예."

"청소 심부름으로 가는 것이다."

"예."

박 상궁이 돌아서셨다.

가시다가 멈추셨다.

"윤서아."

"예."

박 상궁이 돌아보지 않으셨다.

"잘 하거라."

그리고 가셨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잘 하거라.

박 상궁이.

서아한테.

잘 하거라.

오후가 됐다.

서아는 서쪽 마당으로 걸었다.

청소 도구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서쪽 마당은 작았다.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이름 모르는 나무였다.

잎이 넓었다.

그늘이 있었다.

서아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었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잎이 햇살에 반짝였다.

서아는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마당 안으로 들어왔다.

멈췄다.

"고개 들어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였다.

혼자였다.

수행 내관이 없었다.

서아는 폐하를 봤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말이 없었다.

잠깐.

그냥 봤다.

서로.

폐하가 말씀하셨다.

"왔구나."

"예."

"잘 있었느냐."

"예. 왕자님은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그런대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런대로.

"못 주무셨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왜."

"그런대로라고 하셔서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나무를 봤다.

"조금."

"왜요."

"생각이 많아서."

"어떤 생각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서아야."

"예."

"닷새 뒤에 나간다고."

"예."

폐하가 나무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도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미안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미안하다.

"왜 미안하세요."

"내보내는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내보낸다는 것.

"왕자님 때문이 아니에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나라 때문이에요."

서아가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맞잖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래도."

"그래도가 없어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맞는 결정이에요."

서아는 나무를 봤다.

"제가 나가는 게."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오늘은 울지 않으려고 했다.

폐하 앞에서.

마지막에.

울지 않으려고.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나가서."

"예."

"잘 지내거라."

그 말이 나왔다.

나가서 잘 지내거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눈이 더 시려졌다.

참았다.

"예."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여기서 잘 지내세요."

서아가 말했다.

"살구나무 마당에도 가시고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밥도 잘 드시고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잠도 잘 주무시고요."

서아는 나무를 봤다.

눈이 시린 채로.

"그리고."

서아가 말했다.

"웃음 잃지 마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 눈빛이 흔들렸다.

아주 조금.

달빛 아래서 봤던 것처럼.

서아는 그 눈빛을 봤다.

눈물이 났다.

한 방울.

뺨을 타고.

한 방울만.

서아는 닦았다.

빠르게.

폐하가 서아를 봤다.

"울지 마라."

"예."

"나가서도 잘 지낼 것이다."

"예."

폐하가 말씀하셨다.

"기수 알지."

"예."

"밤하늘에 있다."

"예."

"어디서든."

폐하가 말씀하셨다.

"기수는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어디서든.

기수는 있다.

밤하늘에.

서아가 어디에 있든.

기수는 있다.

그게.

우리만 아는 별이니까.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목소리가 떨렸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한 번.

오래.

그리고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있어서 다행이었다.

지금도.

그 말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머리를 숙인 채로.

"저도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계셔서 다행이었어요."

폐하가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한참.

폐하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마당을 나가시는 소리가.

서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사라졌다.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마당에 혼자였다.

나무가 있었다.

잎이 반짝였다.

햇살이 내려앉았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한 번.

두 번.

다 닦았다.

숨을 내쉬었다.

가벼웠다.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를 보더니 말했다.

"봤어."

"응."

"어땠어."

서아는 앉았다.

"잘 지내거라고 하셨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기수 어디서든 있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있어서 다행이었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잘 했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뭘."

"안 울고 왔잖아."

"한 방울 났어."

"한 방울은 안 운 거야."

서아는 웃음이 났다.

채린이 논리였다.

"그렇구나."

채린이가 앞을 봤다.

"서아야."

"응."

"보름은 보름이야."

"응."

"닷새가 있어."

"응."

"잘 보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잘 보내.

"응."

서아가 말했다.

"잘 보낼게."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언제나 자자였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닷새.

닷새가 있었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기수를 찾았다.

바람을 맞는 키.

찾았다.

어디서든.

있었다.

"기수."

혼자 말했다.

폐하가 하셨던 말이 생각났다.

어디서든 기수는 있다.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오래.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네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기수가 있는.

35회 예고

"마지막일 수도 있는 밤"

궁을 나가기 전날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채린이도 깨어 있었다. 둘이 나란히 누워서 별을 봤다. 채린아, 나 많이 울 것 같아. 채린이가 말했다. 울어. 나 여기 있을게.

작가 한마디

어디서든 기수는 있다, 그 말이 서아한테 남긴 것이 뭔지 느껴지시죠.

폐하가 눈빛이 흔들렸어요. 서아한테만 보이는 그 흔들림. 35회에서 채린이와 마지막 밤이 나옵니다. 함께 봐요.

35회 — 마지막일 수도 있는 밤

닷새가 지나갔다.

빠르게.

너무 빠르게.

하루가 하루였는데.

닷새가 금방이었다.

서아는 그 닷새를 평소대로 보냈다.

청소를 했다.

교육을 받았다.

밥을 먹었다.

채린이 옆에 있었다.

정이랑 같이 밥을 먹었다.

별을 찾았다.

그냥.

평소대로.

마지막 날 전날 밤이었다.

서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천장을 봤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인 숨소리.

자는 것 같았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별이 보였다.

기수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찾으려고 눈을 좁혔다.

"서아야."

채린이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놀랐다.

"깨어 있었어?"

"응."

"얼마나?"

"처음부터."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천장을 보고 있었다.

"자지 않았어?"

"잠이 안 와."

"나도."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서 천장을 봤다.

말이 없었다.

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여름 바람이었다.

뜨겁지 않은 밤바람이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내일이야."

"응."

"실감 나?"

서아는 생각했다.

실감이 나는가.

"……조금."

"조금만?"

"응. 아직 다 안 나."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나중에 나겠지."

"나가고 나서?"

"응."

"그때 나면 어떻게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냥 나면 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냥 나면 돼.

"채린아."

"응."

"나 많이 울 것 같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언제."

"나중에. 다 나가고 나서."

채린이가 다시 천장을 봤다.

"울어."

"응?"

"울어도 돼."

채린이가 말했다.

"나 여기 있을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나 여기 있을게.

눈이 시려졌다.

"채린아."

"응."

"여기 있어줘서 고마워."

채린이가 말이 없었다.

잠깐.

"됐어."

"됐어가 아니야."

"됐어."

서아는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뺨을 타고.

채린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있었다.

서아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그냥 뒀다.

한참.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별 볼래?"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창문 열어도 돼?"

"응."

서아가 일어났다.

창문을 열었다.

하늘이 보였다.

별이 가득했다.

서아는 다시 누웠다.

채린이 옆에.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서.

창문 너머 하늘을 봤다.

"기수 어딨어?"

채린이가 물었다.

서아는 눈을 좁혔다.

"저기."

"어디?"

"저 별 오른쪽으로 조금."

"저거?"

"응."

채린이가 봤다.

"기울어져 있네."

"응. 바람을 맞는 키야."

"그게 쓸모가 있다고?"

"응. 기울어진 게 더 잘 까불러지니까."

채린이가 그 별을 봤다.

"그렇구나."

"저 별 배울 때가 생각나."

서아가 말했다.

"처음으로 별자리를 배운 날."

"연못가에서?"

"응."

"새벽에."

"응."

채린이가 기수를 봤다.

"서아야."

"응."

"그때 좋았어?"

서아는 생각했다.

그때.

새벽 연못.

낮고 넓적한 돌.

별자리를 처음 배우던 날.

"좋았어."

서아가 말했다.

"엄청."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왜 됐어야."

"좋았잖아. 그 시간이."

"응."

"그러면 됐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좋았으면 됐다.

지금 없어지더라도.

좋았던 것이 있었으면 됐다.

"채린아."

"응."

"너는 생각이 깊어."

"그만해."

"맞잖아."

"그만하라고."

서아는 웃었다.

눈이 시린 채로.

채린이가 앞을 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하늘을 봤다.

한참 뒤에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내가 할 말이 있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하늘을 봤다.

"오늘 밤에 안 하면 못 할 것 같아서."

"응."

채린이가 잠깐 침묵했다.

하늘을 봤다.

별을 봤다.

"서아야."

"응."

"나는."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가 좋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친구로."

채린이가 덧붙였다.

"그냥 좋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하늘을 봤다.

뺨이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밤이라서 잘 안 보였지만.

"나도."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 좋아."

"그만해."

"채린이가 먼저 했잖아."

"그러니까 그만해."

서아는 웃었다.

채린이가 하늘을 봤다.

"처음엔 이상한 앤 줄 알았어."

"나?"

"응. 첫날에 사람 박고. 길 잃고."

서아는 그날이 생각났다.

"맞아. 이상했지."

"그런데."

채린이가 말했다.

"옆에 있으면 편했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편했어.

"나도."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 옆에 있으면 편했어."

채린이가 하늘을 봤다.

"나가서도 잘 지내."

"응."

"밥 잘 먹고."

"응."

"잠 잘 자고."

"응."

"별도 봐."

"응."

채린이가 말했다.

"기수는 어디서든 있으니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채린이가.

기수는 어디서든 있다는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응."

서아가 말했다.

"기수는 어디서든 있어."

두 사람이 나란히 하늘을 봤다.

기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기울어진 채로.

바람을 맞으면서.

정이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눈을 뜬 것 같았다.

"야, 너희 둘 안 자?"

채린이가 말했다.

"자려고 하는 중이야."

"창문은 왜 열었어."

"별 보려고."

정이가 일어나서 창문 쪽을 봤다.

별이 가득한 하늘을.

"와."

정이가 말했다.

"별 많다."

"응."

"저게 다 별이야?"

"응."

정이가 하늘을 봤다.

한참.

그러더니 말했다.

"야, 서아야."

"응."

"나가고 나서도 연락해."

서아는 정이를 봤다.

정이가 하늘을 보면서 말했다.

"밥도 같이 먹자. 나중에."

"응."

"꼭이야."

"꼭."

정이가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자자."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가 채린이를 봤다.

두 사람이 눈이 마주쳤다.

서아는 웃었다.

채린이도.

아주 조금.

창문을 닫았다.

이불을 덮었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정이가 옆에 있었다.

두 사람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으로.

서아는 천장을 봤다.

마지막 밤이었다.

아니.

마지막 밤처럼 느껴지는 밤이었다.

내일 나가도.

정이랑 또 밥을 먹을 것이다.

채린이랑 또 이야기를 할 것이다.

그게 이 안에서는 아니겠지만.

없어지는 게 아니었다.

달라지는 것이었다.

서아는 그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기울어진 채로 반짝이는.

어디서든 있는.

폐하가 하셨던 말이 들렸다.

어디서든 기수는 있다.

채린이가 했던 말이 들렸다.

기수는 어디서든 있으니까.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웃었다.

소리 없이.

잠들기 전에 서아는 생각했다.

궁에 온 지 얼마나 됐지.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짧았다.

그런데 긴 것 같았다.

이방원 왕자님 발을 밟았다.

이방과 왕자님한테 물을 끼얹었다.

길을 잃었다.

별자리를 배웠다.

살구나무 마당을 알게 됐다.

채린이를 만났다.

정이를 만났다.

울었다.

웃었다.

좋았다.

무서웠다.

그 모든 것이.

두 달 조금 넘었다.

서아는 그것들을 하나씩 생각했다.

기수.

낮고 넓적한 돌.

버드나무 그늘.

살구꽃.

살구나무 마당.

비 소리.

달빛.

별들.

우리만 아는 것들.

그것들이 다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서아는 그 사실이 따뜻했다.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천천히.

채린이 숨소리가 들렸다.

정이 숨소리가 들렸다.

여름밤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서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이 됐다.

눈이 떠졌다.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

별이 보였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었다.

어딘가에.

항상.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오래.

오늘 나간다.

그런데.

기수는 있다.

어디서든.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다시 누웠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정이가 옆에 있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조금 더 자야지.

오늘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어디서든 있는.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36회 예고

"왕의 눈물을 본 건 나뿐이야"

궁을 나가는 날이었다. 짐을 챙겼다. 채린이가 도와줬다. 정이가 밥 같이 먹자고 했다. 나오는 길에 복도에서 멈췄다. 살구나무 마당 쪽을 봤다. 그때 내관이 왔다. 폐하께서 잠깐 보자고 하신다고. 나는 갔다. 그리고 봤다. 왕의 눈물을.

작가 한마디

채린이가 서아가 좋다고 했어요. 처음으로. 그냥 좋다고. 이 장면에서 제가 제일 많이 울었어요. 기수는 어디서든 있으니까, 채린이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죠.

36회에서 마지막 만남이 나옵니다. 왕의 눈물을 보는 서아. 함께 봐요.

36회 — 왕의 눈물을 본 건 나뿐이야

아침이 됐다.

서아는 눈을 떴다.

하늘이 밝았다.

맑은 하늘이었다.

구름이 없었다.

오늘 같은 날에 나가는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채린이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서아를 봤다.

"일어났어."

"응."

"밥 먹고 짐 챙기자."

"응."

서아는 일어났다.

아침을 먹었다.

정이가 서아 옆에 앉았다.

"야, 오늘 뭐 먹고 싶어."

"밥."

"그게 다야?"

"배고프니까 밥이 좋아."

정이가 서아를 봤다.

"야, 너 오늘 나가는데 더 좋은 거 먹어야지."

"밥이 좋아. 진짜로."

정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 밥 먹자."

세 사람이 밥을 먹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먹었다.

그래도 좋았다.

밥을 먹고 처소로 돌아왔다.

채린이가 서아 짐을 같이 챙겨줬다.

서아가 가져온 것들이 많지 않았다.

옷 몇 벌.

작은 물건들.

그리고.

책 사이에 끼워둔 살구꽃잎 두 장.

채린이가 그걸 보더니 말했다.

"이거."

"응."

"가져가."

"응."

채린이가 조심스럽게 꺼내서 서아한테 줬다.

서아는 그 꽃잎을 받았다.

바래서 색이 달라진 꽃잎이었다.

그런데.

형태는 남아 있었다.

작고 얇은 꽃잎이.

"채린아."

"응."

"이거 챙겨줘서 고마워."

채린이가 앞을 봤다.

"됐어."

정이가 구석에 앉아서 둘을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봤다.

짐을 다 챙겼다.

보따리 하나였다.

크지 않았다.

서아는 보따리를 들었다.

처소를 한 번 둘러봤다.

작은 방이었다.

창문이 있었다.

이불이 있었다.

채린이 자리가 있었다.

정이 자리가 있었다.

서아 자리가 있었다.

이제 서아 자리는 비겠지.

서아는 그 자리를 봤다.

"가자."

채린이가 말했다.

"응."

복도로 나왔다.

박 상궁이 기다리고 계셨다.

"왔느냐."

"예."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준비 됐느냐."

"예."

박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나를 따라오너라."

서아는 따라 걸었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정이가 뒤에 있었다.

복도를 걸었다.

서아는 걸으면서 주변을 봤다.

이 복도를 얼마나 많이 걸었을까.

청소를 하면서.

교육을 받으러 가면서.

밥을 먹으러 가면서.

살구나무 마당으로 가면서.

이 복도가 익숙해졌는데.

이제 마지막이었다.

서아는 앞을 봤다.

나가는 문 쪽으로 걸었다.

그런데.

박 상궁이 방향을 바꾸셨다.

동쪽이 아니라.

다른 쪽으로.

서아는 그 방향이 낯설었다.

"상궁님."

"따라오너라."

서아는 따라갔다.

어디로 가는 건지 몰랐다.

내전 안쪽으로 들어갔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고개를 저었다.

모른다.

박 상궁이 멈추셨다.

작은 마당 앞이었다.

며칠 전 폐하를 뵀던 그 마당이 아니었다.

또 다른 마당이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박 상궁이 채린이와 정이를 봤다.

"너희는 저쪽에."

박 상궁이 옆을 가리키셨다.

채린이와 정이가 옆으로 갔다.

서아는 마당 앞에 혼자 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조용한 발걸음이었다.

한 사람.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멈췄다.

"고개 들어라."

폐하였다.

혼자였다.

수행이 없었다.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손에 뭔가를 들고 계셨다.

작은 것이었다.

천으로 싸인 작은 것.

폐하가 서아한테 내미셨다.

"받아라."

서아는 손을 내밀었다.

폐하가 그 것을 서아 손 위에 올려놓으셨다.

가벼웠다.

작았다.

서아는 그걸 봤다.

천을 열었다.

작은 옥(玉)이었다.

둥글고 작은.

손바닥보다 작은.

옅은 초록빛이었다.

"왕자님."

서아가 말했다.

"이게 뭐예요."

"가지고 가거라."

"이런 걸 받으면 안——"

"됐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가지고 가거라."

서아는 그 옥을 봤다.

초록빛이었다.

살구나무 잎 색 같았다.

"예."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예."

"잘 지내거라."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밥 잘 먹고."

"예."

"잠 잘 자고."

"예."

폐하가 말씀하셨다.

"별도 봐."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별도 봐.

기수가 있다는 말이었다.

어디서든.

"예."

서아가 말했다.

"볼게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 눈빛이 달랐다.

담담하고 조용한 눈빛이었는데.

오늘은.

뭔가 더 있었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폐하를 봤다.

폐하 눈이.

흔들렸다.

아주 조금.

서아는 그걸 봤다.

달밤에 봤던 것처럼.

흔들렸다.

그런데.

오늘은.

조금 더 흔들렸다.

서아는 그걸 보면서.

눈이 시려졌다.

참으려고 했다.

그런데.

폐하 눈에서.

무언가가 보였다.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폐하 눈가에.

아주 작은 것이.

반짝였다.

눈물이었다.

맺혀 있었다.

흐르지 않았다.

그냥.

맺혀 있었다.

서아는 그걸 봤다.

왕이.

눈물이 맺혀 있었다.

서아는 말하지 않았다.

보이지 않은 척 했다.

보이지 않은 척 해야 했다.

그런데.

그 눈물이.

서아 가슴 한가운데를.

꽉 쥐었다.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았다.

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옥을 봤다.

초록빛 작은 옥을.

손을 꽉 쥐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목소리가 떨렸다.

참았는데.

떨렸다.

"가거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를 봤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눈가의 것이.

아직 있었다.

흐르지 않았지만.

있었다.

서아는 그걸 보면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예."

그리고.

돌아섰다.

걸었다.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고 했다.

돌아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발걸음을 뗐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멈추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채린이가 옆으로 왔다.

조용히.

말없이.

옆에서 같이 걸었다.

정이도 반대쪽에서.

세 사람이 나란히 걸었다.

나가는 문이 가까워졌다.

박 상궁이 문 앞에 서 계셨다.

서아를 봤다.

"가거라."

"예."

"잘 하거라."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상궁님."

박 상궁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문이 열렸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채린이가 말했다.

"기수."

"응."

"어디서든."

"응."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가."

"응."

서아는 정이를 봤다.

정이가 서아를 봤다.

눈이 빨개졌다.

울 것 같았다.

"야, 울지 마."

서아가 말했다.

"나 안 울잖아."

"눈이 빨개."

"바람이."

서아는 웃었다.

"밥 같이 먹자."

"꼭이야."

"꼭."

서아는 돌아섰다.

문 쪽으로 걸었다.

문을 지났다.

밖이었다.

개경의 거리가 보였다.

햇살이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서아는 멈췄다.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문이 닫히고 있었다.

채린이가 보였다.

정이가 보였다.

박 상궁이 보였다.

그리고.

멀리.

아주 멀리.

복도 끝에.

폐하가 서 계셨다.

보이지 않을 것 같은 거리였는데.

보였다.

서아를 보고 계셨다.

서아는 그 모습을 봤다.

문이 닫혔다.

서아는 돌아섰다.

개경 거리를 걸었다.

보따리를 들고.

손에 초록빛 옥을 쥐고.

걸었다.

사람들이 오갔다.

저잣거리 냄새가 났다.

두부 굽는 냄새.

된장 끓이는 냄새.

서아는 그 냄새를 맡았다.

낯설지 않은 냄새였다.

여기서 왔으니까.

개경 저잣거리에서.

서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폐하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흐르지 않았다.

그냥 맺혀 있었다.

왕이.

눈물이 맺혔다.

서아는 그걸 봤다.

나만 봤다.

그 자리에서.

폐하 눈물을 본 건.

서아뿐이었다.

그게.

우리만 아는 것이 됐다.

기수처럼.

낮고 넓적한 돌처럼.

살구나무 마당처럼.

우리만 아는 것이 하나 더 생겼다.

서아는 손에 쥔 옥을 봤다.

초록빛.

살구나무 잎 색.

"왕자님."

혼자 조용히 말했다.

거리 한가운데서.

아무도 못 들을 말이었다.

"잘 지내세요."

그리고 걸었다.

눈물이 났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작게.

거리에서.

혼자.

그래도 걸었다.

눈물을 닦으면서.

걸었다.

집이 가까워졌다.

개경 남쪽 장터 쪽.

골목이 보였다.

낯익은 골목이었다.

서아는 골목 어귀에서 멈췄다.

눈물을 다 닦았다.

숨을 고르게 했다.

옷을 단정히 했다.

집 문을 두드렸다.

"엄마."

안에서 소리가 났다.

발걸음 소리가.

문이 열렸다.

어머니였다.

서아를 보더니 말씀하셨다.

"왔어?"

"예."

"밥은 먹었어?"

서아는 웃었다.

"아직요."

"들어와. 밥 해줄게."

서아는 안으로 들어갔다.

집이었다.

작고 낯익은 집이었다.

냄새가 났다.

된장 냄새.

나무 냄새.

집 냄새.

서아는 보따리를 내려놓았다.

손에 쥔 옥을 봤다.

초록빛.

주머니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어머니가 부엌에서 말씀하셨다.

"궁이 어땠어?"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궁이 어땠을까.

"좋았어요."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고생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지."

혼자 말했다.

조용히.

어머니한테 들리지 않게.

밤이 됐다.

집이 조용해졌다.

어머니가 주무시고 계셨다.

서아는 마당에 나왔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개경 하늘이었다.

궁 안에서 보던 하늘이랑 같은 하늘이었다.

서아는 눈을 좁혀 봤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었다.

어디서든.

"찾았어."

혼자 말했다.

기울어진 채로 반짝이는 별이.

있었다.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오래.

폐하 눈가에 맺혀 있던 것이 생각났다.

흐르지 않은 눈물이.

왕의 눈물을 본 건 나뿐이었다.

그게.

우리만 아는 것이 됐다.

서아는 기수를 봤다.

잊지 마라.

폐하가 하셨던 말이.

잊지 않을 것이다.

폐하 눈물도.

기수도.

살구나무 마당도.

우리만 아는 것들이.

다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달빛에 반짝였다.

서아는 그 옥을 봤다.

기수를 봤다.

달을 봤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별 보고 계세요?"

대답이 없었다.

그런데.

기수가 반짝였다.

그게 대답 같았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보고 있어요."

별이 반짝였다.

같은 하늘에서.

같은 별이.

폐하도 보고 계실 것이다.

지금.

그 생각이.

따뜻했다.

서아는 마당에 서서 오래 별을 봤다.

기수를 봤다.

익수를 봤다.

진수를 봤다.

우리만 아는 별들을.

다 찾았다.

다 있었다.

서아는 옥을 손에 쥐었다.

꽉.

그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펼쳤다.

누웠다.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에 서아는 생각했다.

왕의 눈물을 본 건 나뿐이야.

그게.

영원히 나만 아는 것이었다.

말하면 안 되는 것.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알고 있는 것.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그 사실을 가슴 안에 넣었다.

깨지지 않도록.

사라지지 않도록.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37회 예고

"이방원, 사실 오빠였다 (이게 무슨…)"

궁을 나온 지 며칠이 지났다. 저잣거리를 걷다가 낯익은 사람을 마주쳤다. 이방원 왕자님의 수행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 이방원 왕자님이 계셨다. 왕자님이 나를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잘 지내고 있느냐고. 그리고 하신 말씀이——

작가 한마디

왕의 눈물을 본 건 서아뿐이에요. 흐르지 않은 눈물. 그게 우리만 아는 것이 됐어요. 초록빛 옥을 받아 들고 나온 서아. 같은 하늘에서 같은 별을 보고 있다는 것.

37회에서 뜻밖의 만남이 기다리고 있어요. 기대해 주세요.

37회 — 이방원, 사실 오빠였다 (이게 무슨…)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다.

처음 이틀은 그냥 있었다.

아무것도 안 했다.

어머니가 밥을 주시면 먹었다.

잠이 오면 잤다.

그냥 있었다.

어머니는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냥 두셨다.

그게 고마웠다.

사흘째 되는 날.

서아는 아침에 일어나서 마당에 나왔다.

하늘이 맑았다.

여름 하늘이었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낮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기수가.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옥.

달빛에 보면 예뻤는데.

낮에 보니 더 예뻤다.

햇살에 반짝였다.

서아는 그걸 봤다.

한참.

어머니가 나오셨다.

"뭘 보고 있어?"

서아는 옥을 어머니한테 보여줬다.

"이게 뭐야?"

"받았어요."

"누구한테."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고마운 분한테요."

어머니가 옥을 봤다.

"좋은 거네."

"예."

"잘 간직해."

"예."

서아는 옥을 주머니에 넣었다.

나흘째 됐을 때.

서아는 저잣거리로 나갔다.

오래간만이었다.

두 달 넘게 궁에 있었으니까.

저잣거리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사람들이 오갔다.

생선 굽는 냄새.

나물 파는 소리.

어느 골목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걸음을 멈췄다.

고양이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봤다.

뒷골목이었다.

서아는 그쪽으로 걸었다.

골목에 들어서니 고양이가 있었다.

얼룩 고양이였다.

밥을 얻어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

서아는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가 서아를 봤다.

"야."

서아가 말했다.

고양이가 서아를 봤다.

"나 왔어."

고양이가 다가왔다.

발 앞에 와서 킁킁거렸다.

서아는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가 손을 냄새 맡았다.

그러더니 손에 얼굴을 비볐다.

서아는 웃었다.

"잘 있었어?"

고양이가 야옹 했다.

서아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오래.

한참 있다가 일어나려는데.

골목 어귀에서 사람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일어났다.

골목 쪽을 봤다.

내관 둘이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뭔가 기다리는 것 같았다.

서아는 그냥 나가려고 걸었다.

내관들 옆을 지나치려는데.

내관 하나가 말했다.

"윤서아냐."

서아는 멈췄다.

"예."

"잠깐 기다려라."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기다리라고.

내관이 뒤를 봤다.

저잣거리 쪽이었다.

서아도 그쪽을 봤다.

사람들 사이로.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이 걸어오고 있었다.

서아는 그 사람을 봤다.

눈이 날카로운 사람.

걸음이 빠르고 단단한 사람.

익숙한 사람.

이방원 왕자님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 앞에 멈추셨다.

"고개 들어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눈빛이 궁에서 봤던 것과 달랐다.

날카로운 건 여전했는데.

더 가벼웠다.

긴장이 덜한 눈빛이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잘 지내고 있느냐고.

"예. 왕자님은요?"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런대로."

서아는 그 말이 어딘가 폐하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형님은 요."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잘 계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잘 계신다.

"다행이에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에 다시 나오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 마당에.

다시.

"그렇군요."

"웃으신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가끔."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다행이에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잘 나왔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잘 나왔다.

나라를 위해서 물러나라고 하셨는데.

잘 나왔다고.

"예."

"형님한테 좋은 사람이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좋은 사람이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한테.

좋은 사람이었다고.

눈이 더 시려졌다.

참았다.

"감사합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돌아서시려는데.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이방원 왕자님이 돌아봤다.

"형님한테 잘 해주세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무거운 것 혼자 지시지 않도록요."

이방원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뭔가 달랐다.

칼날 같던 눈빛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예."

"걱정 마라."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돌아섰다.

걸었다.

수행 내관들이 따랐다.

저잣거리 사람들 사이로.

사라졌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골목에 혼자 섰다.

고양이가 다시 서아 발 앞에 왔다.

야옹 했다.

서아는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를 봤다.

"야."

고양이가 서아를 봤다.

"나 방금 이방원 왕자님 뵀어."

고양이가 야옹 했다.

"무서운 분인데."

서아가 말했다.

"오늘은 좀 달랐어."

고양이가 서아 손을 핥았다.

서아는 웃었다.

"형님한테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셨어."

고양이가 야옹 했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서아는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형님한테 좋은 사람이었으면 좋겠어."

고양이가 가르릉거렸다.

그게 그렇다는 말 같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생각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잘 지내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잘 나왔다고 하셨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셨다.

형님이 잘 계신다고.

웃으신다고.

가끔.

서아는 그 말들을 하나씩 생각했다.

이방원 왕자님은.

항상 날카로우셨다.

무섭기도 했다.

물러나라고 하셨다.

나라를 위해서.

그런데.

오늘은.

저잣거리까지 오셨다.

서아를 찾으셔서.

형님 소식을 알려주셨다.

잘 나왔다고 하셨다.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셨다.

서아는 그게.

이방원 왕자님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위로였다는 걸 알았다.

날카로운 분이.

할 수 있는 방식의.

"이방원 왕자님."

서아가 혼자 말했다.

걸으면서.

"사실 오빠셨네."

그 생각이 들었다.

형님을 걱정하는.

형님이 웃으면 고마운.

궁 밖까지 나와서 형님 소식을 전해주는.

그게.

오빠가 하는 일이었다.

서아는 웃었다.

걸으면서.

혼자.

집에 돌아왔다.

어머니가 마당에 계셨다.

"어디 갔다 왔어?"

"저잣거리요."

"뭐 샀어?"

"아무것도요."

"그냥 갔다 왔어?"

"고양이 봤어요."

어머니가 서아를 봤다.

"고양이."

"예. 뒷골목 고양이요."

"아직 있네."

"예. 잘 있더라고요."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밥 먹자."

"예."

서아는 어머니 뒤를 따랐다.

집 안으로.

저녁을 먹고 나서.

서아는 마당에 나왔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별이 하나씩 나왔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다."

혼자 말했다.

오늘도.

기수는 있었다.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별빛에 반짝였다.

서아는 그 옥을 봤다.

이방원 왕자님이 형님이 웃으신다고 하셨다.

살구나무 마당에 다시 나오신다고.

가끔.

그게.

충분했다.

가끔이어도.

웃으신다는 것이.

충분했다.

서아는 기수를 봤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웃으세요?"

기수가 반짝였다.

그게 그렇다는 말 같았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어요."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불을 폈다.

누웠다.

눈을 감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저잣거리까지 오셨다.

사실 오빠셨다.

형님을 걱정하는.

서아는 그 생각을 하면서 웃었다.

눈을 감은 채로.

그분이 무섭기만 한 줄 알았는데.

오빠였다.

형님이 웃으신다는 말을.

굳이 서아한테 알려주러.

저잣거리까지 오신.

그런 분이었다.

서아는 잠들기 전에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하면 좋을까.

궁 밖에서.

뭘 하면 좋을까.

모르겠다.

아직.

그런데.

기수는 있었다.

어디서든.

그게 있으면 됐다.

지금은.

서아는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잠이 왔다.

며칠이 더 지났다.

서아는 조금씩 나아갔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에 나왔다.

하늘을 봤다.

낮에는 저잣거리에 나갔다.

고양이를 봤다.

어머니 심부름을 했다.

두부를 샀다.

나물을 샀다.

예전이랑 똑같았다.

그런데 달랐다.

두부를 사면서도.

나물을 사면서도.

가끔 생각났다.

살구나무 마당이.

폐하가.

기수가.

그럴 때마다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옥을.

봤다.

그리고 다시 넣었다.

그게 충분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마당에 나왔다.

하늘을 봤다.

맑았다.

기수가 없었다.

낮이라서.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어머니가 나오셨다.

"서아야."

"예."

"요즘 많이 나아진 것 같네."

서아는 어머니를 봤다.

"그래요?"

"응. 처음 왔을 때는 좀 가라앉아 있더니."

"그랬어요?"

"응. 이제 좀 밝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밝아졌다고.

"그런가요."

"무슨 일 있었어? 궁에서."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좋은 일이요."

"어떤."

"좋은 사람들 만났어요."

어머니가 서아를 봤다.

"그렇구나."

"예."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밥 먹자."

"예."

서아는 어머니를 따라 들어갔다.

밥을 먹으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

채린이.

정이.

박 상궁.

그리고.

폐하.

이방원 왕자님.

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각자의 방식으로.

채린이는 옆에 있어줬다.

정이는 밥 같이 먹자고 했다.

박 상궁은 잘 하거라고 했다.

폐하는 기수를 알려줬다.

이방원 왕자님은.

사실 오빠였다.

서아는 밥을 먹으면서 웃었다.

어머니가 봤다.

"왜 웃어."

"그냥요."

"밥이 맛있어?"

"예. 맛있어요."

어머니가 웃으셨다.

두 사람이 밥을 먹었다.

집 안이 조용했다.

좋은 조용함이었다.

살구나무 마당의 조용함과 다른.

집의 조용함이었다.

서아는 그 조용함을 들었다.

괜찮았다.

밤이 됐다.

서아는 마당에 나왔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었다.

"있다."

혼자 말했다.

오늘도.

서아는 옥을 꺼냈다.

초록빛.

별빛에 반짝였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저 잘 지내고 있어요."

기수가 반짝였다.

"고양이도 보고."

반짝였다.

"두부도 사고."

반짝였다.

"이방원 왕자님이 사실 오빠셨더라고요."

기수가 반짝였다.

서아는 웃었다.

"아셨어요?"

반짝였다.

"알고 계셨겠네요. 형제니까."

서아는 기수를 봤다.

오래.

"잘 지내세요."

기수가 반짝였다.

"살구나무 마당에도 가시고."

반짝였다.

"웃음도 잃지 마시고."

반짝였다.

서아는 옥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췄다.

하늘을 한 번 더 봤다.

기수가 있었다.

익수가 있었다.

진수가 있었다.

우리만 아는 별들이.

다 있었다.

"잊지 않을게요."

혼자 말했다.

폐하가 하셨던 말.

잊지 마라.

잊지 않겠다.

서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폈다.

누웠다.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에 서아는 생각했다.

이방원, 사실 오빠였다.

그 생각이 아직도 웃겼다.

무섭기만 한 분인 줄 알았는데.

형님을 걱정하는 오빠였다.

그게.

이 이야기에서 제일 뜻밖이었다.

서아는 웃음이 났다.

눈을 감은 채로.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어디서든 있는.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별이 가득한.

38회 예고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시간이 지났다. 계절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느 가을 저녁에 채린이가 왔다. 궁을 나왔다고. 수습 기간이 끝났다고. 둘이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채린이가 물었다. 서아야,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작가 한마디

이방원 왕자님이 저잣거리까지 오셔서 형님 소식을 전해주셨어요.

사실 오빠셨다는 서아 생각에 저도 웃었어요. 형님한테 잘 해주세요, 라는 서아 말에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신 이방원 왕자님.

38회에서 계절이 바뀝니다. 함께 봐요.

 

 

 

38회 —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계절이 바뀌었다.

여름이 가고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달라졌다.

뜨겁지 않은 바람이었다.

서늘했다.

저잣거리의 냄새도 달라졌다.

여름 냄새가 빠지고.

가을 냄새가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아는 마당에서 그 바람을 맡았다.

달라지는 계절이.

느껴졌다.

궁을 나온 지 한 달이 됐다.

서아는 조금씩 일상이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당에 나왔다.

하늘을 봤다.

낮에는 저잣거리에 나갔다.

심부름을 했다.

고양이를 봤다.

저녁에는 어머니와 밥을 먹었다.

밤에는 별을 찾았다.

기수를 찾고.

익수를 찾고.

진수를 찾고.

자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쌓였다.

어느 가을 저녁이었다.

서아는 마당에 앉아 있었다.

하늘이 주황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저녁노을이었다.

서아는 그걸 보고 있었다.

골목 어귀에서 소리가 들렸다.

"서아야."

서아는 그 목소리를 알았다.

돌아봤다.

채린이가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채린아?"

채린이가 들어왔다.

손에 보따리가 있었다.

"나왔어."

서아는 일어났다.

"궁에서?"

"응. 수습 기간 끝났어."

"언제?"

"오늘."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정식 배치는?"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안 받았어."

"왜?"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냥."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서아 없는 궁이 재미없더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서아 없는 궁이 재미없다고.

채린이가.

그 말을 했다.

"채린아."

"됐어."

"채린아."

"됐다고."

서아는 웃었다.

눈이 시려졌지만.

웃었다.

"들어와."

채린이가 들어왔다.

어머니가 채린이한테 밥을 주셨다.

채린이는 잘 먹었다.

서아는 채린이가 밥 먹는 걸 봤다.

반듯하게.

소리 없이.

평소랑 같았다.

"맛있어?"

"응."

"다행이다."

어머니가 채린이를 봤다.

"서아 친구야?"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궁에서 만났어?"

"예."

"잘 있어줬어?"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제가 받은 게 더 많아요."

어머니가 웃으셨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두 사람은 마당에 앉았다.

나란히.

하늘이 어두워졌다.

별이 나오기 시작했다.

채린이가 하늘을 봤다.

"기수 어딨어?"

서아는 눈을 좁혔다.

"저기."

"어디?"

"저 오른쪽으로."

채린이가 봤다.

"저거?"

"응."

채린이가 기수를 봤다.

"기울어져 있네."

"응."

두 사람이 기수를 봤다.

말이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가을 바람이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어때."

서아는 생각했다.

어때.

"괜찮아."

"진짜로?"

"진짜로."

채린이가 기수를 봤다.

"많이 울었어?"

"좀."

"언제."

"처음 며칠."

"그리고."

"그다음엔 좀 나아졌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두 사람이 별을 봤다.

한참이 지나서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물어봐도 돼?"

"응."

채린이가 하늘을 봤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어떻게 할 거야."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뭘."

"궁에 간 것. 왕자님을 만난 것. 살구나무 마당에 간 것."

서아는 기수를 봤다.

"다 포함해서."

채린이가 말했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궁에 가지 않을 것인가.

왕자님을 만나지 않을 것인가.

살구나무 마당에 가지 않을 것인가.

서아는 기수를 봤다.

바람을 맞는 키.

기울어진 채로 반짝이는.

"채린아."

"응."

"다시 선택할 수 있으면."

서아가 말했다.

"똑같이 할 것 같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왜."

서아는 기수를 봤다.

"좋았으니까요."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아팠는데."

"응."

"그래도?"

"응."

서아가 말했다.

"좋았던 것이 있었으니까."

채린이가 기수를 봤다.

"채린이도 만났고."

서아가 말했다.

"정이도 만났고."

채린이가 앞을 봤다.

"별자리도 배웠고."

"응."

"살구나무도 봤고."

"응."

"왕자님도 만났고."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기수를 봤다.

"그게 다 있었으니까."

서아가 말했다.

"다시 해도 똑같이 할 것 같아."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나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나도 똑같이 할 것 같아."

채린이가 기수를 봤다.

"서아 없는 궁이 재미없어서."

서아는 웃었다.

눈이 시린 채로.

채린이가 앞을 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별을 봤다.

한참이 지나서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정이가 안부 전해달래."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정이가?"

"응. 나 나온다고 하니까. 서아한테 꼭 전해달라고."

"뭐라고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밥 먹자고."

서아는 웃었다.

"역시 정이다."

"응."

"언제?"

"모르겠어. 연락할게."

"응."

두 사람이 웃었다.

소리 없이.

나란히.

밤이 깊어졌다.

채린이가 오늘 자고 가기로 했다.

서아 이불 옆에 이불을 폈다.

나란히 누웠다.

궁에서처럼.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서아도 천장을 봤다.

"채린아."

"응."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뭐가."

"궁 안 나가도 되잖아. 이제."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뭐 하고 싶어."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일단 좀 쉬고."

"응."

"생각해봐야지."

"응."

서아가 말했다.

"같이 저잣거리 나가자."

"언제."

"내일."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고양이 있어?"

서아는 웃었다.

"응. 얼룩 고양이."

"보러 가자."

"응."

두 사람이 웃었다.

소리 없이.

나란히.

채린이가 먼저 눈을 감았다.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서아는 천장을 봤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채린이 질문이 귓속에 있었다.

똑같이 할 것 같아.

서아가 한 대답이.

그게 진심이었다.

아팠어도.

아프기만 한 게 아니었으니까.

좋았던 것들이 있었으니까.

기수가.

살구나무 마당이.

폐하가.

채린이가.

정이가.

다 좋았으니까.

서아는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어딘가에.

어디서든.

폐하도 지금 별을 보고 계실까.

기수를.

보고 계실까.

그 생각이 들었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아마도.

보고 계실 것이다.

같은 하늘에서.

같은 별을.

그게.

우리만 아는 것이었다.

서아는 그 사실이 따뜻했다.

눈을 감은 채로.

새벽이 됐다.

눈이 떠졌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서아는 조용히 일어났다.

마당으로 나왔다.

하늘이 아직 어두웠다.

별이 가득했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다."

혼자 말했다.

오늘도.

서아는 기수를 봤다.

바람이 불었다.

가을 바람이었다.

서늘했다.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별빛에 반짝였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채린이가 왔어요."

기수가 반짝였다.

"궁 나왔대요."

반짝였다.

"내일 같이 고양이 보러 가요."

반짝였다.

"잘 지내고 있어요."

기수가 반짝였다.

"왕자님도요?"

반짝였다.

서아는 그걸 그렇다는 말로 들었다.

"다행이에요."

서아는 옥을 주머니에 넣었다.

하늘을 한 번 더 봤다.

기수가 있었다.

익수가 있었다.

진수가 있었다.

우리만 아는 별들이.

다 있었다.

서아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멈췄다.

한 번 더 하늘을 봤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저 다시 선택할 수 있어도."

별이 반짝였다.

"똑같이 할 것 같아요."

기수가 반짝였다.

"그때 만나서 좋았어요."

서아는 그 말을 하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채린이가 자고 있었다.

서아는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가을 새벽이었다.

아침이 됐다.

채린이가 먼저 일어났다.

서아도 일어났다.

두 사람이 세수를 했다.

어머니가 밥을 주셨다.

먹었다.

"오늘 어디 가?"

어머니가 물으셨다.

"저잣거리요."

"채린이랑?"

"예."

"고양이 보러?"

서아가 웃었다.

"예."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갔다 와. 점심 해둘게."

"감사합니다."

채린이가 어머니한테 말했다.

어머니가 웃으셨다.

두 사람이 나갔다.

저잣거리를 걸었다.

채린이가 처음이었다.

이 저잣거리가.

"여기가 서아 동네야?"

"응."

"생선 냄새 나."

"응. 장터 근처라서."

채린이가 주변을 봤다.

"사람이 많네."

"궁보다는 시끄럽지?"

"응."

채린이가 사람들을 봤다.

"근데 좋다."

서아가 채린이를 봤다.

"좋아?"

"응. 사람 냄새 난다."

서아는 웃었다.

"맞아. 사람 냄새 나."

두 사람이 걸었다.

뒷골목으로.

고양이가 있는.

골목에 들어서니 고양이가 있었다.

얼룩 고양이였다.

오늘도 밥을 얻어먹으러 나온 것 같았다.

채린이를 보더니 멈칫했다.

"야, 안 무서워."

서아가 고양이한테 말했다.

"내 친구야."

고양이가 서아를 봤다.

채린이를 봤다.

그러더니 다가왔다.

채린이 발 앞까지.

채린이가 손을 내밀었다.

고양이가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손에 얼굴을 비볐다.

채린이가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를 봤다.

"귀엽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고양이가 가르릉거렸다.

채린이가 웃었다.

소리 없이.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채린이가 웃는 것을.

오래간만에 봤다.

아니.

자주 봤었나.

서아는 생각했다.

채린이가 잘 안 웃는 것 같았는데.

지금은 웃고 있었다.

고양이 때문에.

"채린아."

"응."

"웃는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가."

"지금 웃었잖아."

채린이가 앞을 봤다.

"고양이가 귀여우니까."

"그래."

서아가 말했다.

"웃어."

채린이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게.

좋았다.

골목에서 오래 있었다.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고 물었잖아."

"응."

"나도 생각해봤어."

"어떻게?"

채린이가 고양이를 봤다.

"나도 똑같이 할 것 같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고양이를 봤다.

"서아 만났으니까."

그 말이 나왔다.

조용하고 낮게.

서아 만났으니까.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됐어."

"됐어가 아니야."

"됐어."

서아는 웃었다.

눈이 시린 채로.

채린이는 언제나 이랬다.

좋은 말을 하고.

됐어, 하고 마무리했다.

고양이가 가르릉거렸다.

세 사람이.

아니 두 사람과 고양이 하나가.

골목에 있었다.

좋은 시간이었다.

저녁이 됐다.

채린이는 자기 집으로 갔다.

개경 북쪽이었다.

헤어지면서 채린이가 말했다.

"정이한테 연락할게."

"응."

"셋이 밥 먹자."

"응."

"꼭이야."

"꼭."

채린이가 걸었다.

뒷모습이 골목을 돌아 사라졌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나왔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별이 하나씩 나왔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었다.

서아는 옥을 꺼냈다.

초록빛.

별빛에 반짝였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채린이가 서아 만나서 좋았다고 했어요."

기수가 반짝였다.

"저도요."

반짝였다.

"다시 선택할 수 있어도 똑같이 할 것 같아요."

반짝였다.

"채린이도 그래요."

반짝였다.

서아는 기수를 봤다.

오래.

"왕자님은요?"

기수가 반짝였다.

서아는 그걸 그렇다는 말로 들었다.

"그렇구나."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자주 하셨던 말처럼.

그렇구나.

서아는 옥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폈다.

누웠다.

눈을 감았다.

잠들기 전에 서아는 생각했다.

다시 선택할 수 있다면.

똑같이 할 것 같다.

그게 답이었다.

아팠어도.

아프기만 한 게 아니었으니까.

좋았던 것들이 있었으니까.

기수가.

살구나무 마당이.

폐하가.

채린이가.

정이가.

다 있었으니까.

그것들이 다 있었으니까.

다시 해도 똑같이 할 것이다.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어디서든 있는.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가을밤이었다.

별이 가득한.

39회 예고.

"폐하 말고, 그냥 방과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가을이 깊어졌다. 어느 날 이방원 왕자님이 또 찾아오셨다. 이번엔 다른 말씀을 하셨다. 형님이 서아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하신다고. 그리고 하신 말씀이——형님이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나는 갔다. 그리고 폐하가 말씀하셨다.

작가 한마디

다시 선택할 수 있어도 똑같이 할 것 같아요, 두 사람이 같은 대답을 했어요.

채린이가 서아 만나서 좋았다고 한 것도요.

39회에서 드디어 마지막 만남이 옵니다.

폐하가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함께 봐요.

39회 — "폐하 말고, 그냥 방과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가을이 깊어졌다.

나뭇잎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초록이었던 것이.

조금씩 노랗고 붉어졌다.

저잣거리에도 가을이 왔다.

밤이 빨리 왔다.

아침이 서늘했다.

서아는 그 변화를 느끼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채린이와 정이를 만났다.

셋이 같이 밥을 먹었다.

정이가 고른 밥집이었다.

국이 뜨거웠다.

정이 말대로.

"야, 어때?"

정이가 물었다.

"맛있어."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는?"

채린이가 밥을 먹었다.

"맛있어."

정이가 웃었다.

"잘 됐다."

셋이 밥을 먹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먹었다.

그래도 좋았다.

밥을 다 먹고 나서 정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얼굴이 좋아졌다."

서아는 정이를 봤다.

"그래?"

"응. 처음 나갔을 때 좀 가라앉아 있었는데."

서아는 몰랐다.

가라앉아 있었나.

"지금은 괜찮아 보여."

"고마워."

정이가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도."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뭐가."

"좋아 보여."

채린이가 앞을 봤다.

"됐어."

정이가 웃었다.

서아도 웃었다.

채린이는 언제나 이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저잣거리를 걷는데.

골목 어귀에서 내관이 보였다.

서아는 걸음을 늦췄다.

내관이 서아를 봤다.

"윤서아냐."

"예."

"따라오너라."

서아는 멈췄다.

또.

"어디로요?"

"정안군 나리께서 부르신다."

이방원 왕자님이.

저잣거리 한켠.

사람이 없는 골목이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 계셨다.

오늘도 혼자였다.

수행이 멀찍이 있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고개 들어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오늘 눈빛은.

저번보다 달랐다.

뭔가 결정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잘 지내고 있느냐."

"예. 왕자님은요?"

"그런대로."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기다렸다.

"형님이."

그 말이 나왔다.

서아는 들었다.

"형님이 한 번 더 보고 싶어 하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한 번 더.

"예?"

"서아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서아를.

한 번 더 보고 싶어 하신다.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갈 수 있는 건지.

가야 하는 건지.

나라를 위해서 물러나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지금.

갈 수 있다고 하시는 건지.

"왕자님."

"응."

"가도 되는 건가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이 원하신다."

"그게 다 되는 이유가 되는 건가요."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이번 한 번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번 한 번.

"예."

"그리고."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형님이 직접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 했다."

"어떤 말이요?"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침묵하셨다.

"모른다."

"모르세요?"

"형님이 말씀 안 하셨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직접 전하고 싶으신 말.

이방원 왕자님도 모르는.

"가겠습니다."

서아가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모레."

"예."

"서쪽 마당으로."

"예."

이방원 왕자님이 돌아서셨다.

"왕자님."

이방원 왕자님이 돌아봤다.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뭐가."

"전해주셔서요."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형님이 잘 계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형님이 잘 계신다.

저번에도 하셨던 말이었다.

"웃으신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가끔이 아니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다행이에요."

이방원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가셨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생각했다.

폐하가 자주 웃으신다.

가끔이 아니라.

자주.

그게 좋았다.

서아가 없어도.

웃음이 있다는 것이.

그게 더 좋았다.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걸으면서.

초록빛.

낮이라서 햇살에 반짝였다.

"왕자님."

혼자 말했다.

저잣거리에서.

"모레 뵈요."

옥이 반짝였다.

서아는 옥을 주머니에 넣었다.

걸었다.

모레가 됐다.

서아는 아침 일찍 일어났다.

단정하게 차려입었다.

어머니가 보셨다.

"어디 가?"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요."

어머니가 서아를 봤다.

"밥 먹고 가."

"예."

밥을 먹었다.

어머니가 아무것도 묻지 않으셨다.

그냥 밥을 주셨다.

서아는 어머니가 고마웠다.

궁 쪽으로 걸었다.

내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를 데리고 들어갔다.

궁 안이었다.

한 달 만이었다.

익숙한 냄새가 났다.

돌바닥 냄새.

나무 냄새.

서아는 걸으면서 주변을 봤다.

달라지지 않았다.

궁은 그대로였다.

서아가 없는 동안에도.

그대로였다.

서쪽 마당으로 갔다.

마당 안에 폐하가 계셨다.

혼자였다.

나무 아래에 서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봤다.

"왔느냐."

"예."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폐하."

"고개 들어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달라지셨다.

아니.

달라지지 않으셨다.

그런데 달랐다.

어떻게 다른 건지.

서아는 알았다.

더 밝으셨다.

눈빛이.

웃음이 자주 있으신다더니.

그게 눈빛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잘 지내고 있느냐."

"예. 왕자님은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왕자님이라고 부르는구나."

"여기선 괜찮다고 하셨잖아요."

폐하가 소리 없이 웃으셨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한 달 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좋았다.

"잘 지내고 있다."

"다행이에요."

"이방원이 말했느냐."

"예. 자주 웃으신다고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그렇구나."

"정말이에요?"

"정말이다."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다행이에요. 진짜로."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도 잘 지내고 있느냐."

"예. 저도 잘 지내고 있어요."

"고양이는."

서아는 그 말이 뜻밖이었다.

"예?"

"뒷골목 고양이."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아셨어요?"

"이방원이 말했다."

서아는 웃었다.

"잘 있어요. 오늘도 봤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채린이는."

"나왔어요. 궁에서."

"그렇구나."

"정이랑 셋이 밥도 먹었어요."

폐하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잘 됐구나."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가을이었다.

나뭇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한참이 지나서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오늘 부른 이유가 있다."

서아는 기다렸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노란 잎 한 장이 떨어졌다.

폐하가 그 잎을 봤다.

그리고 서아를 봤다.

"서아야."

"예."

폐하가 잠깐 말씀을 고르시는 것 같았다.

서아는 기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앞으로."

"예."

"살면서."

서아는 들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라.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았다.

서아가 행복하기를 바라신다는 말이었다.

서아한테 좋은 사람이 생기기를.

폐하 이후에.

바라신다는 말이었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으려고 했다.

"예."

그것만 말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울지 마라."

"예."

"서아가 잘 지내면 된다."

"예."

폐하가 나무를 봤다.

"서아가 웃으면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눈물이 났다.

한 방울.

닦았다.

"예."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응."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이 아니면.

못 할 것 같았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해봐라."

서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폐하 말고."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냥 방과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되겠습니까."

그 말이 나왔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계속했다.

"왕자님이라고 불렀잖아요. 여기선."

"그렇다."

"그런데 이제 여기가 아니잖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궁 밖에서도."

서아가 말했다.

"그렇게 부를 수 있으면."

서아는 폐하를 봤다.

"덜 멀어진 것 같을 것 같아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달랐다.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었는데.

지금은.

흔들렸다.

아주 조금.

서아는 그 흔들림을 봤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노란 잎들이 있는 나무를.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방과 오라버니."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직접.

그 이름을.

말씀하셨다.

"그렇게 불러라."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지 않았다.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뺨을 타고.

"예."

서아가 말했다.

"방과 오라버니."

그 이름이 나왔다.

처음으로.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지금까지와 달랐다.

무거우면서도 따뜻한.

멀면서도 가까운.

그런 눈빛이었다.

"그렇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방과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방과.

이방과.

왕자님이셨던.

폐하가 되신.

이방과.

서아가 알고 있는 그분의 이름이.

지금 이 자리에 있었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노란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기수."

"예."

"어디서든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어디서든 있다.

"예."

"잊지 마라."

"예."

서아가 말했다.

"잊지 않을게요."

"오라버니."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잊지 않을게요. 오라버니.

폐하가 말씀하셨다.

방과 오라버니.

서아의 말이 맞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예."

잎 한 장이 또 떨어졌다.

폐하가 그 잎을 봤다.

서아도 봤다.

노란 잎이었다.

돌바닥에 내려앉았다.

폐하가 그 잎을 집으셨다.

서아한테 내미셨다.

서아는 손을 내밀었다.

폐하가 서아 손 위에 잎을 올려놓으셨다.

노란 잎.

가을 잎.

서아는 그 잎을 봤다.

"살구꽃잎처럼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봄엔 살구꽃이었는데."

서아가 말했다.

"가을엔 이 잎이네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따뜻했다.

"그렇구나."

얼마나 있었을까.

폐하가 말씀하셨다.

"가거라."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일어섰다.

마당을 걸었다.

나가려다 멈췄다.

돌아봤다.

폐하가 서아를 보고 계셨다.

서아는 폐하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냥 봤다.

한참.

서아가 말했다.

"방과 오라버니."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잘 지내세요."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도."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돌아섰다.

걸었다.

이번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뒤를 돌아보면.

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냥 걸었다.

궁 밖으로 나왔다.

개경 거리였다.

서아는 멈췄다.

손을 폈다.

노란 잎이 있었다.

살구꽃잎이 아니라.

가을 잎.

그래도.

잎이었다.

나무에서 온.

서아는 그 잎을 봤다.

눈물이 났다.

이번엔 소리가 났다.

작게.

혼자.

거리에서.

그래도 걸었다.

눈물을 닦으면서.

걸었다.

집으로 돌아왔다.

마당에 나왔다.

하늘이 가을 색이었다.

높고 맑은 하늘이었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낮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기수가.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그리고 손에 노란 잎을 봤다.

초록빛 옥.

노란 잎.

봄에는 살구꽃잎이었다.

여름에는 옥을 받았다.

가을에는 이 잎이.

서아는 두 개를 같이 봤다.

"방과 오라버니."

혼자 말했다.

처음으로.

그 이름을.

"오늘 뵈었어요."

하늘이 맑았다.

"오라버니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어요."

바람이 불었다.

"좋은 사람 만나라고 하셨어요."

서아는 하늘을 봤다.

"잘 지내실게요. 알죠?"

바람이 불었다.

나뭇잎이 흔들렸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실 거 알아요."

서아는 옥과 잎을 손에 쥐었다.

꽉.

그리고 말했다.

"저도 잘 지낼게요."

저녁이 됐다.

어머니가 밥을 주셨다.

서아는 밥을 먹었다.

잘 먹었다.

어머니가 서아를 봤다.

"오늘 좋은 일 있었어?"

"예."

"어떤."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오라버니가 생겼어요."

어머니가 서아를 봤다.

"오라버니?"

"예."

"어디서."

"좋은 분이에요."

어머니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밥을 드셨다.

"그렇구나."

더 묻지 않으셨다.

서아는 그게 고마웠다.

밤이 됐다.

마당에 나왔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었다.

"방과 오라버니."

혼자 말했다.

이제는 그 이름으로.

"기수 보세요?"

기수가 반짝였다.

"저도 보고 있어요."

반짝였다.

"오라버니라고 불렀어요."

반짝였다.

"처음으로."

반짝였다.

"덜 멀어진 것 같아요."

기수가 반짝였다.

서아는 옥을 꺼냈다.

초록빛.

별빛에 반짝였다.

노란 잎도 꺼냈다.

두 개를 같이 봤다.

"잊지 않을게요."

기수가 반짝였다.

"기수도."

반짝였다.

"오라버니도."

반짝였다.

"살구나무 마당도."

반짝였다.

"다 잊지 않을게요."

서아는 기수를 봤다.

오래.

들어가려다 서아는 멈췄다.

하늘을 한 번 더 봤다.

기수 옆에.

익수가 있었다.

날개.

그리고.

진수가 있었다.

하늘의 수레.

우리만 아는 별들이.

다 있었다.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바람을 맞으면서 날개가 있으면.

날 수 있겠지.

폐하가 하셨던 말이었다.

서아는 그 말을 생각했다.

기수가 있었다.

익수가 있었다.

바람을 맞는 키와 날개가.

같은 하늘에 있었다.

날 수 있겠지.

서아는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폈다.

누웠다.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그리고.

방과 오라버니.

그 이름이.

귓속에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서아는 그 이름을 들으면서.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가을밤이었다.

별이 가득한.

40회 (최종화) 예고

"왕자님은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다 "

계절이 바뀌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어느 날 서아는 깨달았다.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왕자님도 알고 계셨다. 처음부터.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다.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던 거였다. 그게 우리만 아는 것들 중에 제일 큰 것이었다.

작가 한마디

방과 오라버니라고 불렀어요.

덜 멀어진 것 같다는 서아 말에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하신 폐하. 노란 잎을 서아 손에 올려주신 것도.

봄엔 살구꽃, 가을엔 이 잎이라는 서아 말도. 드디어 다음 주가 최종화예요. 함께 마무리해요.

40회 (최종화) — 왕자님은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더니.

어느새 바람이 달라졌다.

서늘하던 바람이.

차가워졌다.

나뭇잎이 다 졌다.

나무들이 앙상해졌다.

저잣거리 사람들이 옷을 두껍게 입었다.

서아도 그랬다.

겨울이 오면서 서아는 생각이 많아졌다.

아침마다 마당에 나왔다.

차가운 공기를 맡았다.

하늘을 봤다.

낮이라 별이 없었다.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기수가.

서아는 그 생각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이었다.

서아는 마당에 나왔다.

하늘이 맑았다.

겨울 하늘이었다.

높고 차가운 하늘이었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그 말을.

처음에 생각했었다.

왕자님이 자기 마음을 모르신다고.

왕자님한테는 그냥 수습 궁녀일 뿐이라고.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그게 아니었다.

왕자님도 알고 계셨다.

처음부터.

서아는 기억했다.

낮고 넓적한 돌.

거기 앉으면 덜 춥다. 바람을 막아줘서.

그 말씀을 하셨을 때.

서아가 오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살구나무 마당.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이라고 하셨을 때.

서아가 거기 오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여기선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을 때.

서아가 가까이 있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있어야 한다고 하셨을 때.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고 계셨을 것이다.

네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고 하셨을 때.

그게 고백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을 것이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차가운 겨울 하늘이었다.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왕자님은 알고 계셨다.

서아 마음도.

자기 마음도.

다.

그리고.

서아도 알고 있었다.

왕자님 마음이.

자기 마음이.

다.

둘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우리만 아는 것들 중에.

제일 큰 것이었다.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겨울 햇살에 반짝였다.

그리고 노란 잎도 꺼냈다.

다 말라서 더 얇아진 잎이었다.

그래도 형태가 남아 있었다.

서아는 두 개를 손에 올려놓고 봤다.

옥.

잎.

방과 오라버니가 주신 것들이.

손 위에 있었다.

서아는 그것들을 봤다.

오래.

"방과 오라버니."

혼자 말했다.

차가운 마당에서.

"왕자님은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어요."

바람이 불었다.

차가운 바람이었다.

"왕자님도 아셨죠."

바람이 지나갔다.

"저도 알고 있었어요."

서아는 하늘을 봤다.

"둘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하늘이 맑았다.

"그게."

서아가 말했다.

"우리만 아는 것 중에 제일 큰 것이에요."

어머니가 마당으로 나오셨다.

"서아야. 추운데 뭐 해."

"하늘 봐요."

어머니가 하늘을 봤다.

"맑네."

"예."

"들어와. 차 줄게."

"예."

서아는 옥과 잎을 주머니에 넣었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차를 끓이셨다.

따뜻한 차였다.

서아는 그걸 받아 들었다.

손이 따뜻해졌다.

차를 마시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이제 어떻게 살면 좋을까.

방과 오라버니가 하셨던 말이 떠올랐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라.

서아가 웃으면 된다.

서아는 그 말을 생각했다.

좋은 사람을 만나거라.

언젠가는.

그럴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언젠가는.

그리고.

서아가 웃으면 된다.

그것도 할 수 있었다.

이미 하고 있었다.

채린이 옆에서.

정이 옆에서.

어머니 옆에서.

고양이 옆에서.

웃고 있었다.

그게 충분했다.

지금은.

점심이 됐다.

서아는 어머니와 밥을 먹었다.

따뜻한 밥이었다.

국이 뜨거웠다.

"맛있어?"

어머니가 물으셨다.

"예. 맛있어요."

"많이 먹어."

"예."

서아는 밥을 먹었다.

잘 먹었다.

어머니가 서아를 보셨다.

"요즘 잘 먹네."

"그래요?"

"응. 처음 왔을 때는 좀 안 먹더니."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처음 왔을 때.

"이제 괜찮아요."

서아가 말했다.

어머니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구나."

두 사람이 밥을 먹었다.

집 안이 따뜻했다.

오후에 채린이가 왔다.

"오늘 어때."

"괜찮아."

"저잣거리 갈래."

"응."

두 사람이 나갔다.

저잣거리를 걸었다.

겨울 저잣거리였다.

사람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오갔다.

생선 굽는 냄새.

된장 끓이는 냄새.

그래도 같은 냄새였다.

뒷골목으로 갔다.

고양이가 있었다.

얼룩 고양이.

채린이를 봐도 이제 도망가지 않았다.

발 앞에 와서 야옹 했다.

채린이가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잘 지냈어?"

고양이한테 말했다.

고양이가 가르릉거렸다.

서아는 채린이 옆에 쪼그려 앉았다.

고양이를 봤다.

"채린아."

"응."

"나 깨달은 게 있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가."

서아는 고양이를 봤다.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응."

"왕자님도 알고 계셨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서아가 말했다.

"그리고 나도 알고 있었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둘 다 알고 있었던 거야."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고 있었어."

서아가 채린이를 봤다.

"뭘."

"그거."

채린이가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는 거."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나도 알고 있었어. 서아가 모른 척하는 거."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도 모른 척하셨던 거고."

채린이가 말했다.

"그러니까 제목이 그거잖아."

"제목이요?"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게."

채린이가 고양이를 봤다.

"왕자님은 서아만 모른다는 게 아니라."

"응."

"왕자님이 모른다는 걸. 나만 안다는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이 모른다는 걸.

나만 안다는 것.

그런데 왕자님도 알고 계셨다.

"그러면."

서아가 말했다.

"제목이 틀린 거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소리 없이 웃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웃음으로.

"그렇네."

서아도 웃었다.

고양이가 야옹 했다.

세 사람이.

아니 두 사람과 고양이 하나가.

골목에서 웃었다.

저잣거리를 걷다가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잘 살 것 같아?"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잘 살 것 같냐고.

"응."

서아가 말했다.

"잘 살 것 같아."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두 사람이 걸었다.

겨울 바람이 불었다.

차가웠다.

그런데.

걷는 게 나쁘지 않았다.

채린이가 옆에 있어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잘 살 것 같다.

그 말이 진심이었다.

방과 오라버니가 어딘가에 계셨다.

기수가 하늘에 있었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정이가 밥 먹자고 했다.

어머니가 차를 끓여주셨다.

고양이가 가르릉거렸다.

이 모든 것들이.

다 있었다.

밤이 됐다.

마당에 나왔다.

차가웠다.

겨울밤이었다.

그래도 나왔다.

하늘을 봐야 했다.

별이 가득했다.

겨울 하늘은 별이 더 많았다.

공기가 맑아서.

서아는 하늘을 봤다.

기수를 찾았다.

찾았다.

있었다.

오늘도.

"방과 오라버니."

혼자 말했다.

차가운 마당에서.

"별 보세요?"

기수가 반짝였다.

"저도 보고 있어요."

반짝였다.

"오늘 채린이랑 깨달은 게 있어요."

반짝였다.

"왕자님은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다는 거요."

기수가 반짝였다.

"왕자님도 아셨잖아요."

반짝였다.

"저도 알고 있었고요."

반짝였다.

"둘 다 알고 있었던 거잖아요."

기수가 반짝였다.

"그게."

서아가 말했다.

"우리만 아는 것들 중에 제일 큰 거예요."

기수가 반짝였다.

서아는 그걸 그렇다는 말로 들었다.

"그렇죠?"

반짝였다.

"알고 있었죠?"

반짝였다.

서아는 웃었다.

"그럼 그렇지."

서아는 주머니에서 옥을 꺼냈다.

초록빛.

별빛에 반짝였다.

노란 잎도 꺼냈다.

두 개를 같이 봤다.

봄에는 살구꽃잎이었다.

여름에는 옥을 받았다.

가을에는 이 잎이 왔다.

겨울에는.

이것들이 남았다.

서아는 두 개를 손에 쥐었다.

꽉.

"방과 오라버니."

서아가 말했다.

"저 잘 지낼게요."

기수가 반짝였다.

"오라버니도요."

반짝였다.

"웃음 잃지 마세요."

반짝였다.

"가끔 살구나무 마당에 가세요."

반짝였다.

"별도 보세요."

반짝였다.

"기수도요."

기수가 반짝였다.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오래.

아주 오래.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서아는 그 바람을 맞았다.

기수처럼.

바람을 맞으면서.

있는 것처럼.

기울어진 채로.

그래도 쓸모 있는 것처럼.

서아는 하늘을 봤다.

기수가 있었다.

익수가 있었다.

진수가 있었다.

우리만 아는 별들이.

다 있었다.

겨울 하늘에.

서아는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

한 번 더 하늘을 봤다.

기수를.

"잊지 않을게요."

혼자 말했다.

"왕자님."

기수가 반짝였다.

"방과 오라버니."

반짝였다.

"지금이 좋았어요."

반짝였다.

"살구꽃 피던 것도."

반짝였다.

"잎이 나던 것도."

반짝였다.

"다 좋았어요."

기수가 반짝였다.

"기수도."

반짝였다.

"살구나무 마당도."

반짝였다.

"오라버니도."

기수가 반짝였다.

서아는 그 별을 봤다.

눈이 시려졌다.

차가운 바람 때문인지.

다른 이유인지.

몰랐다.

그냥 시려웠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지내세요."

기수가 반짝였다.

마지막으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폈다.

누웠다.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 앞에 있었다.

반짝이는.

방과 오라버니.

그 이름이 귓속에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잠들기 전에 서아는 생각했다.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그 말이 틀렸다.

왕자님도 알고 계셨다.

서아도 알고 있었다.

둘 다 알고 있었다.

그게.

우리만 아는 것들 중에.

제일 큰 것이었다.

기수.

살구나무 마당.

살구꽃잎.

노란 잎.

초록빛 옥.

빗소리.

달빛.

버드나무 그늘.

낮고 넓적한 돌.

그리고.

왕의 눈물.

둘 다 알고 있었다는 것.

이것들이 다.

우리만 아는 것들이었다.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서아가 어디 있든.

방과 오라버니가 어디 계시든.

이것들은 있을 것이다.

어딘가에.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마음속으로 말했다.

방과 오라버니.

잘 지내세요.

저도 잘 지낼게요.

기수는 어디서든 있으니까.

같은 하늘에서.

같은 별을 보는 거니까.

그게.

지금 우리 사이에 있는 것이니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

서아는 눈을 감았다.

기수가 있었다.

반짝이는.

어디서든.

같은 하늘에.

잠이 왔다.

천천히.

따뜻하게.

겨울밤이었다.

별이 가득한.

작가의 말

윤서아와 이방과 왕자님의 이야기가 끝났어요.

처음에 서아는 생각했어요.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고.

그런데 마지막에 알았어요.

왕자님도 알고 계셨다는 것을.

서아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둘 다 알고 있었던 거라는 것을.

이루어지지 않은 이야기예요.

그런데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없던 것이 아니에요.

기수가 어딘가에 있듯이.

살구나무 마당이 있듯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던 것들이.

다 있어요.

어딘가에.

항상.

서아가 어디 있든.

방과 오라버니가 어디 계시든.

같은 하늘에서.

같은 별을 보는 거니까요.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작가 한마디

40회 동안 함께해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왕자님은 나만 몰랐던 게 아니었다는 것. 둘 다 알고 있었던 것. 그게 이 이야기에서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이에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졌던 것들이 있었던 두 사람. 서아야, 방과 오라버니, 잘 지내요.

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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