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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담장 너머의 우리 : 하이틴로멘스 05


33회 - 이간질꾼의 마지막 수
조용한 줄 알았다.
최 아주머니 사건도 어느 정도 마무리됐고, 강 씨가 경찰에 연락처를 넘기면서 민준 아버지 사기 건도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다. 지후는 더 이상 술 심부름을 하지 않았고, 1층 아저씨는 면접을 보러 다녔다. 골목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서진은 그게 너무 순조롭다고 생각했다.
이 동네에서 순조로운 건 경계해야 했다.
그 예감이 맞았다.
월요일 아침 학교에 갔더니 반 분위기가 이상했다. 서진이 교실에 들어서자 몇몇 아이들이 시선을 피했다. 유나가 서진을 잡아끌었다. 복도 구석이었다.
"있잖아, 서진아."
유나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뭔데."
"주말에 단톡방에 글이 올라왔어. 서진이 너 욕하는 글."
서진이 유나를 봤다.
"어떤 글."
"서진이가 원래 이 동네에서 이간질을 해왔다는 거야. 동네 어른들이랑 싸우게 만들고, 경찰 부르고, 자기가 잘난 척하려고 그랬다는 거."
서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가 올렸어."
"모르는 계정이야. 근데 내용이 꽤 자세해. 이 동네 사정을 아는 사람인 것 같아."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내용이 자세하다는 건, 이 동네를 아는 사람이 만든 글이라는 뜻이었다. 서진이 한 일들, 경찰 진술, 아주머니 일, 강 씨 집에 찾아간 것까지 언급이 됐다고 했다.
"민준이는?"
"민준이도 같이 욕 먹었어. 외지에서 와서 이 동네 흔들어놓는다고."
서진이 교실로 들어갔다.
민준이 자리에 있었다. 표정이 차분했다. 그런데 그 차분함이 억누르는 것 같은 차분함이었다.
서진이 민준 옆에 앉았다.
"봤어?"
"봤어요."
"어떻게 생각해."
"이간질꾼이 있어요. 우리가 뭔가를 바꾸려 할 때마다 흔들어놓는 사람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골목에서 이간질로 먹고사는 사람이 있다는 걸 서진은 알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서로 의심하게 만들고, 그 혼란 속에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사람. 그 사람이 지금까지는 어른들 사이에서만 움직였는데, 이제 학교까지 들어온 것이었다.
"찾아야 해."
서진이 말했다.
"어떻게요."
"그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해봐. 이 동네 사정을 알고, 학교 단톡방에 접근할 수 있고, 우리가 한 일들을 다 알고 있는 사람."
민준이 잠깐 생각했다.
"많지 않겠네요."
"응. 많지 않아."
그날 하루가 길었다.
수업 시간에도 서진은 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이 동네 사정을 아는 사람, 학교 단톡방에 있는 사람, 그리고 서진이 한 일들을 처음부터 가까이서 봐온 사람.
가능성 있는 이름이 하나 떠올랐다.
서진은 그 이름을 쉽게 입 밖에 내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이름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34회 - 배신과 화해 사이
그 이름은 정다혜였다.
서진이 처음 민준 소문을 전달해줬던 아이. 반에서 정보가 제일 빠른 아이. 이 동네 사정도 알고, 단톡방에도 있고, 서진이 한 일들을 처음부터 옆에서 지켜봐온 아이.
서진은 확신하지 않았다.
다혜가 나쁜 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말이 많은 아이였다. 그런데 말이 많은 것과 일부러 이간질하는 것은 달랐다.
직접 물어봐야 했다.
방과 후였다. 서진이 다혜를 불러 세웠다. 유나는 옆에서 지켜봤고, 민준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다혜야, 그 단톡방 글."
다혜가 서진을 봤다.
"뭐."
"네가 올린 거야?"
다혜의 얼굴이 굳었다. 그리고 잠깐 눈을 피했다.
서진은 그 눈빛을 봤다. 피한다는 건 아니라는 뜻이 아니었다.
"다혜야."
"아니야."
"눈을 봐."
다혜가 서진을 봤다. 그 눈에 복잡한 게 가득했다. 미안함과 방어심이 뒤섞인 눈이었다.
"내가 올린 게 아니야."
"근데 알고 있었어?"
다혜가 입술을 깨물었다.
서진이 기다렸다.
오래 기다렸다. 복도에 아이들이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유나가 숨을 참는 것 같았다.
다혜가 작게 말했다.
"우리 엄마가 올렸어."
서진이 굳었다.
"엄마가."
"엄마가 그 글 쓰는 거 봤어. 근데 말리지 못했어. 엄마가 서진이 네가 동네를 시끄럽게 만든다고. 애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했어."
서진은 잠깐 말이 없었다.
다혜 엄마였다. 처음에 민준 소문을 퍼뜨린 것도 다혜 엄마였다. 이 골목 정보망의 중심에 다혜 엄마가 있었다.
"다혜야, 왜 말 안 했어."
"무서웠어. 엄마가 화낼 것 같아서."
"나한테 미리 말해줬으면 됐잖아."
다혜가 눈이 빨개졌다.
"서진아, 미안해. 진짜 미안해. 근데 엄마 말을 어떻게 막아."
서진이 다혜를 봤다.
화가 났다. 다혜가 알면서 말 안 한 것이 화가 났다. 그런데 동시에 다혜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엄마가 잘못된 일을 하는데 아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는 것. 그게 다혜의 잘못만은 아니었다.
서진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혜야, 지금이라도 말해줘서 고마워."
다혜가 서진을 봤다.
"화 안 나?"
"나지. 근데 네 잘못만은 아닌 것 같아서."
다혜가 눈물을 닦았다.
유나가 다혜 등을 두드렸다.
민준이 가까이 왔다.
"다혜 씨, 엄마한테 저희가 잘못됐다고 생각해요?"
다혜가 민준을 봤다.
"아니. 엄마가 이 동네 방식을 흔들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 오래된 어른들은 그런 거 싫어해."
"왜요."
"자기들이 익숙한 대로 있는 게 편하니까."
서진이 그 말을 들었다.
익숙한 대로. 그게 나쁜 거라도, 익숙하면 바꾸기 싫은 것. 그게 어른들의 이간질이 계속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변화가 두려운 사람들이 변화를 막으려 하는 것이었다.
배신과 화해 사이.
서진은 다혜를 완전히 용서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완전히 등진 것도 아니었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다음 걸음을 생각했다.
35회 - 가난해도 품위는 지킬 수 있어
다혜 엄마를 만난 건 서진의 선택이었다.
엄마한테 말하지 않았다. 엄마가 말리거나, 걱정하거나, 아니면 대신 나서려 할 것 같았다. 서진이 직접 해야 하는 일이었다.
다혜한테 부탁해서 방과 후에 시간을 잡았다.
다혜 집 거실이었다. 다혜 엄마, 박 씨가 소파에 앉아 있었다. 서진이 들어서자 눈을 가늘게 떴다.
"서진이 네가 왔구나."
"안녕하세요."
서진이 맞은편에 앉았다.
박 씨가 말했다.
"할 말이 있다고."
"네. 아주머니가 그 글 올리신 거 알아요."
박 씨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어쩔 건데."
"어쩌겠다는 게 아니에요."
서진이 박 씨를 봤다.
"아주머니, 제가 한 일 중에 잘못된 게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제가 고칠게요."
박 씨가 살짝 당황한 것 같았다. 대들러 온 게 아니어서인지.
"잘못은 아니야. 근데 애가 나설 자리가 있고 아닌 데가 있어."
"어디가 제 자리예요?"
"공부나 하고, 학교 일에만 신경 쓰고."
"지후한테 술 심부름 시키는 게 잘못됐다는 말을 하는 건 어른 자리예요?"
박 씨가 눈썹을 올렸다.
"어른들 일에 끼어드는 거잖아."
"지후는 초등학생이에요. 저보다 어려요. 그 아이 일인데 제가 나서면 안 되는 거예요?"
박 씨가 말이 없었다.
서진이 말을 이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차분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혼자 오래 생각했다.
"아주머니, 저 이 동네에서 자랐어요. 가난한 게 뭔지 알아요. 어려운 게 뭔지 알아요. 근데 가난하다고 품위까지 없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지후한테 술 심부름 시키는 게 이 동네 품위예요? 어려운 사람한테 거짓말로 돈 받는 게 이 동네 방식이에요?"
박 씨가 입을 다물었다.
"저는 이 동네가 싫지 않아요. 근데 이 동네에서 나쁜 것들은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게 애가 나설 자리가 아니면, 그러면 어른들이 하셨어야죠."
긴 침묵이었다.
다혜가 구석에서 손을 꽉 쥐고 있었다.
박 씨가 천천히 말했다.
"너 엄마가 잘 키웠네."
서진이 박 씨를 봤다.
그게 칭찬인지 비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박 씨의 표정이 전보다 부드러웠다.
"그 글, 내가 지울게."
서진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해요."
나오면서 다혜가 서진 손을 잡았다.
"서진아, 용감하다."
서진이 다혜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아니야. 그냥 맞는 말을 한 거야."
골목으로 나왔다.
봄바람이 불었다. 담벼락 사이에서 풀이 흔들렸다.
가난해도 품위는 지킬 수 있다.
그 말이 서진 안에서 오래 울렸다.
36회 - 골목이 달라 보이기 시작했다
그 주 주말, 민준이 노트를 들고 옥상에 올라왔다.
서진이 먼저 와 있었다. 민준이 노트를 펼쳤다. 골목 지도였다. 처음에 봤을 때보다 훨씬 빼곡해져 있었다. 골목마다 특징이 적혀 있었고, 새로운 메모들이 가득했다.
서진이 노트를 들여다봤다.
편의점 할머니 칸에는 '외상도 해줌, 진짜 마음 있는 분'이라고 적혀 있었다. 1층 아저씨 집 앞에는 '변하는 중'이라고. 지후네 반지하 앞에는 '강한 아이'라고.
서진네 건물 칸에는 뭐라고 적혀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민준이 손으로 가렸다.
"그건 왜 가려."
"나중에요."
서진이 더 보려다가 참았다.
"지도 언제 다 그려."
"이 동네 다 알면 완성이에요."
"언제 다 알겠어."
"오래 걸리겠죠. 근데 그러면 오래 있어야 하는 거니까."
서진이 민준을 봤다.
"이 동네에 오래 있을 거야?"
민준이 골목을 내려다봤다.
"있고 싶어요."
서진이 앞을 봤다.
아래 골목이 내려다보였다. 예전에 보던 것과 같은 골목이었다. 낡은 담벼락, 금 간 바닥, 빨랫줄, 좁은 하늘. 달라진 게 없었다.
그런데 달라 보였다.
서진이 오래 그 이유를 생각했다.
골목이 달라진 게 아니었다. 서진이 달라진 거였다. 이 골목을 어서 벗어나야 할 곳으로만 봤는데, 지금은 달랐다. 여기에 지후가 있었다. 편의점 할머니가 있었다. 변하려는 아저씨가 있었다. 그리고 옆에 노트를 들고 지도를 그리는 사람이 있었다.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살아가는 곳.
그게 달라진 거였다.
민준이 노트에 뭔가를 추가로 적었다.
서진이 슬쩍 봤다.
옥상 칸이었다. 처음엔 '하늘 넓은 곳'이라고만 적혀 있었는데, 그 아래에 새로운 메모가 추가됐다.
'서진 씨랑 처음 이야기한 곳.'
서진이 보지 못한 척했다.
아니, 사실 봤다. 봤는데 모른 척했다.
귀가 뜨거웠다.
민준이 노트를 덮었다.
"서진 씨."
"응."
"이 동네 좋아하게 됐어요. 서진 씨 덕분에."
서진이 앞을 봤다.
"그거 나 덕분이 아니야. 네가 봤기 때문이야. 다른 사람들은 이 골목을 그냥 지나치는데 너는 지도까지 그렸잖아. 그 눈으로 봤으니까 좋아진 거야."
민준이 잠깐 말이 없었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사실이 그러니까."
바람이 불었다.
이 골목이 달라 보이는 건 빛 때문이 아니었다. 사람 때문이었다.
37회 -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게 아니잖아
지후가 서진을 찾아온 건 화요일 저녁이었다.
집 앞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서진이 학교를 마치고 오자마자 달려왔다.
"누나."
서진이 쪼그려 앉았다.
"무슨 일이야."
지후의 얼굴이 좋지 않았다. 우는 건 아닌데 울기 직전 같은 얼굴이었다.
"오늘 학교에서요."
"응."
"선생님이 집에 연락했대요. 제가 학교에서 문제가 있다고."
서진이 지후를 봤다.
"무슨 문제."
"친구랑 싸웠는데, 선생님이 제가 먼저 잘못했다고 해요. 근데 저는 아니에요. 그 애가 저한테 집이 가난하다고 했거든요. 그래서 화가 났는데."
서진이 눈을 감았다 떴다.
지후네 집이 어렵다는 건 이 동네에서 다 알았다. 그걸 아이들이 놀리는 것은 이 학교에서도 있는 일이었다. 서진도 어릴 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지후야, 그 애 말이 잘못된 거야."
"알아요. 그래서 화가 났는데."
"화난 거 맞아. 근데 싸운 건 또 다른 문제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했어요?"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 서진도 어릴 때 그 말을 들었을 때 어떻게 했는지 생각해봤다. 울었다. 그냥 울면서 집에 왔다.
"선생님한테 정확히 말해야 해. 네가 왜 화가 났는지. 그 애가 뭐라고 했는지."
"선생님이 들어줄까요?"
"들어줘야 하는 게 선생님이야."
지후가 서진을 봤다.
"누나는 어릴 때 그런 말 들으면 어떻게 했어요?"
서진이 잠깐 골목을 봤다.
"나는 그냥 울었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누나도 그랬어요?"
"응. 근데 지금은 알아. 그 말이 잘못됐다고 말하는 거야. 조용히 있으면 계속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민준이 건물에서 나왔다. 지후를 보더니 가까이 왔다.
"지후야, 무슨 일이에요?"
서진이 간단히 말해줬다. 민준이 지후를 봤다.
"가난하다고 놀리는 거 잘못된 거야. 그 애가 잘못한 거야."
"근데 선생님이 저한테 그랬어요."
"선생님한테 다시 말해. 왜 화가 났는지."
"무서워요."
민준이 지후 앞에 쪼그려 앉았다.
"나도 서울에서 비슷한 일 있었어. 아빠 사업 망하고 나서 친구들이 달라졌거든. 그때 아무 말 못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말했어야 했어."
지후가 민준을 봤다.
"형도 그런 일 있었어요?"
"있었어. 어른이 된다는 게 그런 걸 참는 게 아니야. 어른이 된다는 건 그게 왜 잘못됐는지 말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서진이 민준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이런 게 아니잖아. 이 골목 어른들처럼 거짓말하고, 이간질하고, 아이들을 이용하는 게 어른이 되는 게 아니었다.
바르게 말하는 것. 잘못된 걸 잘못됐다고 하는 것.
그게 진짜 어른이 되는 거였다.
지후가 일어섰다.
"내일 선생님한테 말할게요."
서진이 지후를 봤다.
"무서우면 나한테 와. 같이 생각해줄게."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반지하 계단으로 내려갔다.
민준이 일어서며 서진한테 말했다.
"서진 씨가 저 아이한테 누나가 됐네요."
"그런 거 아니야."
"누나 맞잖아요. 역할로."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누나라는 말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누군가한테 그런 존재가 된 게.
38회 - 담장 너머로 처음 손을 내밀었다
그날 오후 늦게 골목에서 낯선 일이 있었다.
서진이 옥상에서 내려오다가 건물 앞에서 봤다. 1층 아저씨가 반지하 계단 앞에 서 있었다. 지후 집 앞이었다. 손에 뭔가를 들고 있었다. 봉지였다.
서진이 멈춰서 봤다.
아저씨가 망설이고 있었다. 벨을 누를까 말까 하는 것 같았다. 한 발 앞으로 갔다가 물러서고, 다시 갔다가 물러섰다.
서진이 아저씨 쪽으로 걸어갔다.
"아저씨."
아저씨가 서진을 봤다. 그 손에 들린 봉지를 봤다.
편의점 봉지였다. 과자 몇 개와 음료가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지후한테요?"
아저씨가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있다가 말했다.
"아, 뭐. 그냥."
"주러 가세요."
"이상하게 볼 것 같아서."
서진이 아저씨를 봤다.
이 아저씨가 전에 지후한테 미안하다고 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지후한테 직접 말하라고 서진이 했던 것도. 그게 이렇게 나타난 거였다.
"이상하게 안 봐요."
"어른이 애한테 이러는 게."
"진심이면 괜찮아요."
아저씨가 서진을 봤다.
"너 어릴 때부터 이런 말 했어?"
"아니요. 최근에 배웠어요."
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반지하 계단을 내려갔다. 서진은 보지 않았다. 보면 아저씨가 더 어색할 것 같았다.
잠시 후 지후 목소리가 들렸다.
"와, 과자다."
그 소리에 서진이 웃음이 나왔다.
민준이 옆에 와 있었다. 언제 왔는지 몰랐다.
"봤어요?"
"응."
"좋다."
두 글자였다. 그런데 그 두 글자가 서진한테는 길게 울렸다.
서진이 민준을 봤다.
민준이 서진을 봤다.
서로 말이 없었는데 불편하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순간이 있었다. 말이 없어도 같은 걸 보고, 같은 걸 느끼는 순간.
서진이 먼저 시선을 피했다.
"민준아."
"응."
"고마워."
"뭐가요."
"이 동네 와줘서."
민준이 잠깐 말이 없었다.
"서진 씨."
"왜."
민준이 뭔가 말하려다가 멈췄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이 동네에 오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어쩔 수 없이 왔는데."
"알아."
"근데 지금은 다행이에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다행이야?"
"여기 왔으니까 서진 씨를 만났잖아요."
서진이 앞을 봤다.
담벼락이 보였다. 이 골목 오래된 담벼락. 낡고 이끼 낀 담벼락. 그 담벼락 너머로 이웃집 불빛이 보였다.
담장 너머로 처음 손을 내미는 것들이 있었다. 아저씨가 지후한테, 민준이 서진한테, 그리고 이 골목 사람들이 서로한테.
그 손들이 작고 어설펐지만, 진짜였다.
39회 - 우리 동네, 우리가 바꾸는 거야
유나가 아이디어를 냈다.
"있잖아, 우리 뭔가 하나 하자고 했잖아. 셋이."
방과 후 편의점 파라솔 밑이었다. 자판기 커피를 하나씩 들고.
"뭐."
"골목 청소."
서진이 유나를 봤다.
"청소?"
"그냥 청소가 아니라. 이 골목 담벼락 낙서도 지우고, 쓰레기도 치우고. 같이 하는 거야. 어른들도 같이."
민준이 캔 음료를 홀짝이며 말했다.
"어른들이 참여해요?"
"물어봐야 알지. 근데 요즘 분위기 달라졌잖아. 해볼 만하지 않아?"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골목 청소. 거창한 건 아니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이 골목을 좀 더 깨끗하게, 좀 더 살 만하게 만드는 것. 그런데 그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일 수도 있었다.
"해보자."
서진이 말했다.
준비하는 데 일주일이 걸렸다.
서진이 건물 사람들한테 말했다. 1층 아저씨가 의외로 바로 동의했다.
"나도 낑길게."
편의점 할머니가 음료를 지원해주겠다고 했다.
다혜 엄마 박 씨는 처음에 뜸을 들이다가 다혜가 간다고 하자 따라오겠다고 했다.
지후가 서진한테 달려왔다.
"나도 해요. 나도."
서진이 지후 머리를 쓸어줬다.
"당연히 해야지."
주말 오전이었다. 골목에 사람들이 모였다. 어른 열 명 남짓, 아이들 서넛. 빗자루와 쓰레기봉투와 담벼락 낙서를 지울 용품들.
처음엔 어색했다.
서로 잘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렇게 같은 목적으로 모인 건 처음이었다. 다들 어디서 시작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했다.
서진이 빗자루를 들었다.
"시작하자."
그러자 하나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민준이 담벼락 낙서를 지웠다. 유나가 쓰레기를 주웠다. 지후가 작은 손으로 열심히 빗자루질을 했다.
두 시간이 지났다.
골목이 달라졌다.
극적으로 달라진 건 아니었다. 낡은 건 여전히 낡았고, 금 간 건 여전히 금이 가 있었다. 그런데 깨끗해졌다. 낙서가 지워진 담벼락이 생각보다 좋은 색이었다. 붉은 벽돌 색이, 이 빛 아래에서 따뜻했다.
편의점 할머니가 음료를 나눠줬다.
다들 골목 바닥에 앉거나 담벼락에 기대어 음료를 마셨다.
1층 아저씨가 서진 옆에 앉았다.
"야, 서진아."
"왜요."
"이런 거 진작 할 걸 그랬다."
서진이 아저씨를 봤다.
"늦지 않았어요."
"그렇지."
민준이 서진 옆에 와서 앉았다. 지후가 민준 옆에 바짝 붙었다.
골목에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이 골목에서 오래 산 사람들과, 새로 온 사람들과, 아직 작은 사람들이 나란히.
서진은 그 풍경을 봤다.
우리 동네.
그 말이 처음으로 진심으로 느껴졌다. 떠나야 할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곳. 우리가 만들어가는 곳.
"서진 씨."
민준이 작게 불렀다.
"응."
"기분 어때요."
서진이 골목을 봤다.
"좋아."
두 글자였다.
그런데 그 두 글자 안에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40회 - 봄이 오면 이 골목도 환해질 거야 (完)
봄이 깊어졌다.
담벼락 사이 잡초가 더 짙어졌다. 살려고 나온 거니까. 서진이 이제는 그 풀이 좋았다.
강민준이 이 동네에 온 지 두 달이 넘었다.
두 달 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소문, 오해, 경찰, 거짓, 이간질. 그 사이에 진심, 믿음, 변화, 웃음도 있었다. 서진은 그 모든 게 이 골목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게 신기했다. 이 낡고 좁은 골목에서.
학교 마치는 날 오후였다.
서진이 교문을 나오는데 민준이 기다리고 있었다. 손에 노트를 들고 있었다. 골목 지도.
"다 됐어요."
서진이 노트를 봤다.
"지도?"
"이 동네 다 그렸어요. 일단은."
서진이 노트를 받아 펼쳤다.
골목마다 이름이 붙어 있었다. 민준이 붙인 이름들이었다. '할머니 편의점 골목', '지후네 골목', '고양이 두 마리 골목', '빨간 대문 골목'.
서진네 건물 칸을 찾았다.
이번엔 민준이 가리지 않았다.
적혀 있었다.
'서진 씨네 건물. 이 골목에서 제일 중요한 곳.'
서진이 노트에서 눈을 들었다.
민준이 서진을 보고 있었다.
서진이 노트를 돌려주며 말했다.
"왜 제일 중요해."
"서진 씨 있어서요."
서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게 이유야?"
"충분한 이유 아니에요?"
골목 쪽으로 걸었다. 민준이 옆에서 같이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걷는 게 됐다.
유나가 뒤에서 뛰어왔다.
"야, 나 놔두고 어딜 가."
지후가 골목 어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을 보자마자 손을 흔들었다. 크게, 온 힘을 다해서.
넷이 골목을 걸었다.
서진이 걸으면서 이 두 달을 생각했다.
처음에 민준의 흰 운동화를 봤을 때. 커피 자판기 앞에서 동전이 없다던 민준. 옥상에서 처음 나란히 하늘을 봤을 때. 소문, 경찰, 거짓, 이간질을 지나온 것들. 그리고 담장 너머로 처음 손을 내밀기 시작한 이 골목 사람들.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골목은 여전히 낡았다. 어른들의 세계는 여전히 복잡했다. 거짓과 진심이 뒤섞인 채 돌아가는 이 동네는 하루아침에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지후가 더 이상 술 심부름을 하지 않았다. 1층 아저씨가 면접을 보러 다녔다. 편의점 할머니가 손님들 눈을 더 잘 봤다. 다혜 엄마가 서진이 지나가면 고개를 끄덕였다. 강 씨가 경찰에 정보를 넘겼다.
작은 것들이었다.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그런데 없던 것들이었다.
골목 끝에서 유나가 먼저 달려가며 소리쳤다.
"오늘 편의점 앞에서 논다. 할머니한테 과자 얻어내자."
지후가 웃으며 따라 뛰었다.
민준이 서진 옆에서 걸음을 늦췄다.
둘이 천천히 걸었다.
민준이 말했다.
"서진 씨."
"응."
"이 동네 좋아해요. 이제 진짜로."
서진이 앞을 봤다.
골목 끝으로 햇빛이 들어왔다. 오후 빛이었다. 낡은 담벼락이 그 빛에 따뜻하게 물들었다. 금 간 바닥 위로 빛이 고였다. 서진이 오래 이 골목을 살면서 이렇게 보인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환했다.
"나도."
서진이 말했다.
"처음으로?"
"아니. 이제는."
처음이 아니라 이제는. 그 차이를 민준이 알아들을 것 같았다. 체념이 아니라 진심으로. 떠나고 싶어서가 아니라 있고 싶어서.
민준이 옆에서 작게 웃었다.
서진도 웃었다.
골목 끝에서 유나가 소리쳤다.
"야, 둘이 뭐 해. 빨리 와."
지후도 따라 소리쳤다.
"누나, 빨리요."
서진과 민준이 걸음을 빠르게 했다.
골목을 달리지 않았다. 그냥 조금 빠르게 걸었다. 어깨가 가끔 닿을 만큼 가까이.
봄이었다.
이 골목에도 봄이 왔다.
담벼락 사이 잡초가 햇빛에 반짝였다. 살려고 나온 것들이 이 골목에 가득했다. 사람도, 풀도, 이야기도.
서진은 생각했다.
봄이 오면 이 골목도 환해질 거야.
예전에는 그게 막연한 바람이었다.
지금은 달랐다.
봄이 왔고, 골목이 환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에필로그

그 골목은 지금도 거기 있다
여름이 됐다.
교복 셔츠가 얇아졌고, 골목 잡초는 허리 높이까지 올라왔고, 편의점 자판기 옆에 아이스크림 냉동고가 추가됐다. 할머니가 여름마다 꺼내두는 것이었다. 서진은 그게 어릴 때부터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어떤 것들은 변했고, 어떤 것들은 변하지 않았다.
1층 아저씨는 일자리를 구했다.
공사 현장 일이었다. 새벽에 나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피곤해 보였지만 얼굴이 전과 달랐다. 소주 캔 대신 생수통을 들고 다녔다. 매일은 아니었다. 가끔은 여전히 캔을 들고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예전처럼 아침부터는 아니었다.
서진이 계단을 오르내리다 마주치면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도 끄덕였다.
말이 없어도 되는 사이가 됐다.
지후는 2학기부터 학교 어린이 환경 지킴이 활동에 들어갔다.
담당 선생님이 지후를 눈여겨봤다고 했다. 골목 청소 때 사진을 찍어서 학교에 가져갔던 것이 계기가 됐다. 지후는 그 사진을 누가 찍어줬는지 서진한테 말했다.
민준이 찍어줬다고 했다.
서진이 민준한테 그 말을 전했더니 민준이 씩 웃었다.
"지후 열심히 하는 게 보여서요."
지후 엄마가 어느 날 서진네 문을 두드렸다. 손에 반찬 통을 들고 있었다.
"별거 아닌데."
그 말이 전부였다.
서진 엄마가 그걸 받으면서 서진한테 나중에 말했다.
"이 동네 사람들이 달라지고 있어."
서진이 그 말을 들으면서 생각했다.
달라지고 있다는 게 다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었다. 여전히 거짓이 있고, 이간질이 있고, 담장을 넘는 소문이 있었다. 그게 하루아침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걸 서진은 알았다.
그래도 달라지고 있었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다혜가 서진한테 먼저 말을 걸기 시작했다.
전엔 정보를 전달하는 식의 대화였다면, 이제는 그냥 이야기를 나눴다. 점심시간에 같이 밥을 먹었고, 하교 길에 같이 걸었다.
어느 날 다혜가 말했다.
"서진아, 우리 원래부터 친했던 것 같아."
"그래?"
"응. 근데 내가 모른 척했던 것 같아."
서진이 다혜를 봤다.
"왜."
"우리 엄마가 좀 이상한 어른이잖아. 그게 부끄러워서."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내 엄마도 완벽하지 않아. 이 동네 엄마들 중에 완벽한 사람 있어?"
다혜가 픽 웃었다.
"없지."
"그러면 됐잖아."
다혜가 서진 팔에 자기 팔을 꼈다.
서진은 빼지 않았다.
민준 아버지 사기 사건은 천천히 진행됐다.
강 씨가 넘긴 정보로 경찰이 그 사람을 찾는 중이라고 했다. 민준이 그 이야기를 담담하게 했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아버지가 다시 일어서려고 한다는 게 중요하다고.
민준 아버지가 새 일을 시작했다.
작은 배달 일이었다. 새벽에 나가서 오전에 들어오고, 오후에 다시 나가는 스케줄이었다. 무릎이 안 좋다고 했는데 쉬지 않았다. 민준이 가끔 아버지 무릎에 파스를 붙여드린다고 했다.
서진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말했다.
"아버지 힘드시겠다."
"그래도 눈빛이 달라요. 일 시작하고 나서."
"어떻게 달라."
"살아있는 것 같아요. 이전엔 너무 꺼져 있었는데."
서진은 그 말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살아있는 눈빛. 이 골목에서 그게 생겨나고 있었다.
어느 저녁이었다.
서진이 옥상에 올라갔다.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주황빛 하늘이 이 낡은 골목 위에 펼쳐져 있었다.
민준이 올라왔다.
노트를 들고 있었다. 지도 노트였다.
"또 뭐 추가해?"
"응."
민준이 노트를 펼치고 뭔가를 적었다. 서진이 슬쩍 봤다.
옥상 칸이었다.
'서진 씨랑 처음 이야기한 곳. 지금도 같이 오는 곳. 앞으로도.'
서진이 그 글씨를 봤다.
앞으로도.
"민준아."
"응."
"이 지도, 계속 그릴 거야?"
"계속요."
"이 동네 다 그렸다고 했잖아."
"다 그렸는데 계속 달라지잖아요. 달라질 때마다 업데이트해야죠."
서진이 골목을 내려다봤다.
저 아래로 지후가 골목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같은 또래 아이들과 함께였다. 웃음소리가 올라왔다.
편의점에서 할머니가 나와서 아이들한테 뭔가를 건네주는 게 보였다. 아이스크림인 것 같았다. 지후가 두 손으로 받았다.
1층 아저씨가 퇴근하며 골목에 들어서는 게 보였다. 피곤한 걸음이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엄마가 식당에서 돌아오는 시간이 됐다. 서진은 이제 내려가서 엄마 신발을 벗겨드려야 했다.
그런데 조금 더 있었다.
민준이 옆에 있었고, 하늘이 주황빛이었고, 골목이 그 빛에 물들어 있었다.
"서진 씨."
"응."
"나 이 동네 오길 잘 했어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처음에 이 골목을 두리번거리며 걷던 흰 운동화. 동전이 없어서 자판기 앞에 서 있던 민준. 옥상에서 처음 나란히 하늘을 봤을 때. 손을 잡아줬던 그날 밤. 지도를 그리고, 노트에 적고, 그 안에 서진의 이름을 써온 모든 날들.
"나도."
서진이 말했다.
"뭐가요."
"네가 이 동네 와서. 나도 잘 됐어."
민준이 서진을 봤다.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웃었다. 조용하고 따뜻하고 진짜인 웃음.
서진이 앞을 봤다.
하늘이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주황이 붉어지고, 붉음이 남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이 골목 위에 펼쳐진 하늘이 이렇게 넓었는데 서진은 왜 여태 몰랐을까.
아니, 알고 있었다. 옥상에 오면 넓어진다는 것.
그런데 오늘은 더 넓었다.
이 골목은 지금도 거기 있다.
낡은 담벼락과 금 간 돌바닥과 빨랫줄과 좁은 하늘을 가진 그 골목이.
아직도 거짓말이 담장을 넘고, 소문이 발 열두 개로 달리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서로를 속이기도 한다.
그런데 그 사이에,
술 심부름을 거절하는 아이가 생겼고,
낙서를 함께 지운 어른들이 생겼고,
지도를 그리는 소년이 생겼고,
그 소년 옆에 서 있는 소녀가 생겼다.
아주 작은 것들이었다.
그래도 없던 것들이었다.
봄이 오면 이 골목도 환해질 거야.
그 말은 바람이 아니라 약속이었다.
봄은 왔다.
그리고 올 것이다.
해마다, 이 골목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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