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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담장 너머의 우리 : 하이틴로멘스 03

17회 - 술심부름 시키는 건 잘못된 거야

그 아이를 다시 본 건 금요일 저녁이었다.

지난번에 술 심부름을 하던 그 초등학생이었다. 이름은 나중에 알았다. 박지후. 골목 안쪽 반지하에 사는 아이였다. 아버지는 없고 어머니가 공장 일을 나갔다. 그러니까 저녁 시간에 아이 혼자 골목을 돌아다니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아이의 손에 또 소주병이 들려 있었다는 거였다.

서진이 편의점에서 나오다가 딱 마주쳤다.

지후가 서진을 알아봤다. 지난번에 민준이 집에 보내준 날 이후로 골목에서 몇 번 마주쳤다. 아이는 서진을 보면 피하는 것도 아니고 다가오는 것도 아닌, 그냥 옆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지후야."

서진이 불렀다.

아이가 멈췄다.

"그거 누가 시켰어."

"아저씨들이요."

"아저씨들이 돈 줘?"

지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오백 원이요."

오백 원. 서진은 잠깐 눈을 감았다. 소주 두 병 값의 몇 분의 일도 안 되는 돈. 그 돈에 아이를 부리는 어른들.

"지후야, 그거 잘못된 거야."

지후가 서진을 올려다봤다.

"어른들이 시키는 건 잘못된 거 아니잖아요."

그 말이 서진의 가슴을 눌렀다. 이 아이는 배운 거였다. 어른이 시키면 하는 것, 그게 맞는 것이라고. 그게 잘못됐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었다.

"어른이 시켜도 잘못된 게 있어."

"어떤 게요?"

서진이 쪼그려 앉아 지후와 눈을 맞췄다.

"술 사오는 거, 담배 사오는 거, 어른들 싸움에 끼는 거. 이런 건 어른이 시켜도 네가 안 해도 돼. 아니, 안 하는 게 맞아."

지후가 손에 든 소주병을 내려다봤다.

"근데 돈이 없어요."

"알아. 그래도."

"오백 원이면 과자 사 먹을 수 있는데."

서진이 일어섰다. 그리고 지갑에서 천 원을 꺼냈다.

"이거 줄게. 대신 오늘 그 아저씨들한테 가지 마."

지후가 천 원을 봤다가 서진을 봤다.

"왜 줘요?"

"그냥."

"아무 이유 없이 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래요. 엄마가."

서진은 잠깐 멈췄다.

그 말도 맞았다. 이 동네에서 아무 이유 없이 뭔가를 주는 어른들이 진짜 아무 이유 없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니 아이 엄마가 그렇게 가르친 것이었다. 틀린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러면 이유 있어. 네가 그 아저씨들한테 이용당하는 게 싫어서."

지후가 서진을 한참 봤다.

그리고 소주병을 서진한테 내밀었다.

"이거 돌려줘요?"

"내가 돌려줄게."

서진이 소주병을 받아 들었다. 무겁지 않은데 무겁게 느껴졌다.

지후는 천 원을 쥐고 편의점 쪽으로 달려갔다. 뒤에서 민준이 다가왔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몰랐다.

"다 들었어요."

"그래."

"소주병 어떻게 할 거예요."

서진이 소주병을 봤다.

"돌려줘야지."

"같이 가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왜."

"혼자보단 둘이 낫잖아요."

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뗐다. 민준이 옆에 붙었다.

이 골목에서 어른한테 맞서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그 이유였는지, 아니면 지후의 눈빛이 이유였는지는 몰랐다.

그냥 가야 했다. 그게 맞으니까.

18회 - 아무도 신고하지 않는 이유

소주병을 돌려주고 돌아오는 길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아저씨들은 웃으면서 받았다. 어이없다는 웃음이었다.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서진이 아이한테 술 심부름 시키는 건 잘못됐다고 말하자 아저씨 중 한 명이 말했다.

"요즘 애들은 어른 말을 이렇게 들어."

다른 한 명이 받았다.

"세상이 어떻게 된 거야, 진짜."

마치 자기들이 피해자인 것처럼 말했다. 서진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골목을 나오며 민준이 물었다.

"왜 신고 안 해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뭘."

"아동 학대잖아요. 엄밀히 말하면. 미성년자한테 술 심부름 시키는 거."

"신고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민준이 잠깐 생각했다.

"경찰이 오고, 조사하고."

"그 다음은."

"그 다음은."

민준이 말을 잇지 못했다.

서진이 말했다.

"그 다음에 경찰이 가면 아저씨들은 어떻게 될까. 아마 별 일 없을 거야. 경고 한 번 받고 끝이거나, 아니면 그냥 넘어가거나. 근데 신고한 사람은 어떻게 될까."

민준이 서진을 봤다.

"이 골목에서 신고한 사람으로 남는 거야. 그게 뭘 의미하는지 알아? 뒷담화, 따돌림, 애 엄마들 단톡방에서 이름 오르내리는 거. 지후 엄마도 일자리 잃을 수 있어. 같은 동네 사람 신고했다고."

민준이 조용했다.

"그러니까 아무도 안 해."

"맞아. 다 알면서 아무도 안 해. 알면서 못 하는 거랑, 몰라서 안 하는 거랑 달라. 여기 사람들은 알면서 못 하는 거야."

"그게 더 힘들겠다."

"힘들지. 근데 더 힘든 건."

서진이 골목 안쪽을 봤다.

"지후 같은 애들이 그게 당연한 줄 알고 자라는 거야."

민준이 오래 골목을 봤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 서진도 몰랐다. 어릴 때부터 이 골목에서 살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건 알았는데,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는 몰랐다. 너무 크고 오래된 문제였다. 중학생 둘이 편의점 앞에서 고민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 '모른다'가 예전만큼 무겁지 않았다.

옆에 같이 모르는 사람이 있어서인지도 몰랐다.

19회 - 나 혼자라도 막아설게

그 일이 다시 생긴 건 일주일 뒤였다.

이번엔 지후 혼자가 아니었다.

골목 안쪽에서 아이들 서넛이 어른들 사이를 오가고 있었다. 지후도 있었고, 처음 보는 아이들도 있었다. 어른들이 돈을 흔들며 아이들을 심부름 보내는 것 같았다. 저녁 해가 넘어가는 시간이었다.

서진이 그 광경을 보고 발걸음이 멈췄다.

이번엔 민준도 유나도 없었다. 혼자였다.

서진은 잠깐 그냥 지나갈까 생각했다. 저번에 이미 한번 말했다. 효과가 없었다. 또 말한다고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지후가 서진을 봤다.

아이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서진을 알아보는 눈이었다. 그리고 손에 든 돈을 보는 눈이었다. 무언가를 저울질하는 것 같았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진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지후야, 이리 와."

어른들이 서진을 봤다. 저번에 봤던 얼굴들이었다.

"또 왔네, 이 아이."

"아이들 심부름 시키지 마세요."

"얘 진짜. 너 부모가 누구야."

서진이 똑바로 서서 말했다.

"제 부모가 누구든 상관없어요. 미성년자한테 술 심부름 시키는 건 불법이에요."

어른 중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키가 컸다. 술을 마신 상태였다.

"불법? 야, 그냥 편의점 가는 건데 무슨 불법이야."

"아이한테 주류 구매를 시키는 건 불법 맞아요."

"야, 중딩이 어디서 이런 소리야."

남자가 가까이 왔다. 서진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지만 발은 제자리였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민준이었다.

숨이 조금 가빠 있었다. 뛰어온 것 같았다.

민준이 서진 옆에 섰다.

"저도 있어요."

어른이 민준을 봤다. 그리고 서진을 봤다. 아이 둘이 자기 앞에 서 있었다. 물러서지 않는 아이 둘이.

어른이 피식 웃었다.

"얘들이 오늘 단단히 작정했네."

그러고는 자리에 앉았다. 완전히 물러난 건 아니었지만 그 이상 다가오지도 않았다.

서진이 지후한테 말했다.

"집에 가."

이번엔 지후가 바로 움직였다. 다른 아이들도 슬슬 자리를 피했다. 어른들이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골목 밖으로 나오자 서진의 다리가 약간 떨렸다.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혼자 들어가지 말아요, 다음엔."

"네가 어떻게 알고 왔어."

"지후가 뛰어오면서 서진 씨가 거기 있다고 했어요."

서진이 지후 쪽을 봤다. 아이는 이미 골목 끝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그 아이가."

"서진 씨 걱정하는 것 같던데요."

서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혼자라도 막아서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옆에 누가 와줬을 때의 그 기분을 서진은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몰랐다.

든든하다는 말이 너무 쉬운 것 같았다.

20회 - 경찰차가 왜 착한 사람 집 앞에 서 있어

경찰차가 건물 앞에 선 건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서진이 학교를 마치고 골목에 들어서는데 낯선 차가 보였다. 처음엔 다른 일인 줄 알았다. 이 골목에서 경찰차가 오는 일이 없는 건 아니었다. 술 먹고 싸움이 나거나, 도둑 신고가 들어오거나.

그런데 차가 서 있는 곳이 이상했다.

서진네 건물 앞이었다.

서진이 빠르게 걸어갔다. 건물 앞에 경찰관 둘이 서 있었고, 그 앞에 1층에 사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말을 하고 있었다. 손짓이 컸다.

서진이 가까이 가서 들었다.

"이 건물 아이들이요. 골목 어른들한테 행패를 부렸다고요. 어른한테 대들고."

서진이 굳었다.

경찰관이 아주머니 말을 받아 적고 있었다.

서진이 나섰다.

"저 그 아이들 중 하나예요."

경찰관이 서진을 봤다.

"행패를 부린 게 아니에요. 아이들한테 술 심부름을 시키는 어른들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 한 거예요."

아주머니가 서진을 봤다.

"야, 서진아. 넌 왜 끼어들어."

"저한테도 해당되는 얘기니까요."

경찰관이 서진과 아주머니를 번갈아 봤다.

"학생, 이름이?"

"한서진이요. 청운중학교 2학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어요?"

서진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후 이야기, 술 심부름, 두 번 말렸던 일. 순서대로 이야기했다. 감정을 빼고 사실만 말했다. 이 골목에서 자라며 배운 것 중 하나였다. 감정을 넣으면 지는 싸움이 됐다.

아주머니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어른들이 그냥 부탁한 건데 애들이 말을 안 들어서 소란이 난 거예요."

경찰관이 아주머니를 봤다.

"잠깐만요. 학생 말 먼저 들을게요."

그 말에 아주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서진이 이야기를 마쳤다. 경찰관이 수첩을 닫으며 말했다.

"신고 내용하고 학생 말이 다르네요. 확인이 필요할 것 같아요. 혹시 목격자가 있어요?"

"네. 같은 건물 민준이. 강민준이요."

"연락 가능해요?"

"저 위층에 살아요."

서진이 건물 쪽을 가리켰다.

경찰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머니가 서진을 봤다. 눈빛이 복잡했다. 화가 난 것도 같고, 당황한 것도 같고. 서진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이 동네에서 착한 척하다가 경찰 앞에 세워지는 게 어떤 기분인지 서진은 알았다. 억울하고 화가 났다. 그런데 그 억울함을 제대로 풀 방법이 여기서는 거의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조금 달랐다.

경찰이 서진 말을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오늘은 달랐다.

21회 - 돈으로 막을 수 없는 것들

경찰이 돌아간 뒤 아주머니가 서진을 불러 세웠다.

"서진아, 잠깐."

서진이 멈췄다.

아주머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네가 오해한 거야. 나 너 고생시키려고 신고한 거 아니야."

"그러면 왜 하셨어요."

"그 어른들이 아, 그냥. 아무튼 오해야."

아주머니가 지갑을 꺼냈다. 만 원짜리를 꺼내 서진한테 내밀었다.

"이거, 괜히 번거롭게 해서."

서진이 그 돈을 내려다봤다.

만 원. 이 동네에서 만 원은 작지 않은 돈이었다. 편의점 자판기 커피 서른세 잔을 살 수 있는 돈. 지후한테 오백 원씩 스무 번 줄 수 있는 돈.

서진이 고개를 들었다.

"안 받을게요."

아주머니가 당황했다.

"왜."

"이게 제가 한 말을 취소해달라는 거잖아요. 저 취소 안 할 거예요."

"그런 게 아니라."

"아주머니, 저 경찰한테 거짓말 안 했어요. 사실만 말했어요. 그게 잘못된 거예요?"

아주머니가 입을 다물었다.

서진이 계단을 올라가려는데 아주머니가 뒤에서 말했다.

"너 나중에 이 동네에서 살기 힘들어질 거야."

서진이 멈췄다.

그 말이 협박인지 걱정인지 알 수 없었다. 이 동네에서 그 둘은 가끔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알아요."

서진이 계단을 올라갔다.

방에 들어와 가방을 내려놓는데 창문 너머로 민준 방 불빛이 보였다. 서진이 창문을 열었다.

"민준아."

잠시 후 민준의 창문이 열렸다.

"경찰관 만났어요?"

"응."

"어떻게 됐어요?"

"일단은 내 말 들어줬어. 네가 목격자로 필요할 수 있어."

"할게요."

망설임이 없었다. 서진은 그 대답이 고마웠다.

"아주머니가 돈 줬어."

"받았어요?"

"안 받았어."

민준이 잠깐 있다가 말했다.

"잘 했어요."

"근데 있잖아."

서진이 창문 틀에 팔을 올렸다.

"이 동네에서 돈으로 안 되는 게 있다는 걸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어. 돈 주면 됐다, 이게 당연한 게 되면 안 되잖아."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그게 당연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 거잖아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네가 먼저 그렇게 말하는 것 같던데."

서진은 창문을 닫으려다가 멈췄다.

"민준아. 고마워."

"뭐가요."

"옆에 있어줘서."

창문을 닫았다. 귀가 뜨거웠다.

창 너머로 민준의 불빛이 한동안 켜져 있었다.

22회 - 다친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날 밤 유나한테서 문자가 왔다.

'서진아 괜찮아? 경찰 왔다는 말 들었어.'

서진이 답했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유나: '별거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서진: '진짜 괜찮아.'

유나: '내일 학교에서 봐. 얼굴 보고 판단할게.'

서진은 휴대폰을 내려놓고 천장을 봤다.

괜찮다고 했는데, 진짜로 괜찮은 건지 몰랐다. 몸은 괜찮았다. 어디 다친 데도 없었다. 그런데 마음 어딘가가 이상했다. 무겁고 먹먹하고 뭔가 꽉 막힌 것 같은 느낌.

엄마가 퇴근해서 들어왔다.

서진이 경찰 일을 말했다. 다 말했다. 숨기는 게 없었다. 엄마는 서진 말을 끝까지 들었다. 중간에 끊지 않았다.

다 듣고 나서 엄마가 말했다.

"서진아, 잘 했어."

"혼내지 않아?"

"왜 혼내."

"어른한테 대들었잖아."

"대든 게 아니잖아. 잘못된 거라고 말한 거잖아."

엄마가 서진 머리를 쓸어내렸다.

"엄마는 서진이가 그냥 지나치는 애가 됐으면 어떡하나 걱정했어. 근데 그러지 않았네."

서진이 엄마를 봤다.

"근데 무서웠어."

"알아."

"무서운데 뒤로 물러서지 않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엄마가 서진을 안았다.

"맞아. 무서워도 하는 거야. 그게 용기야. 안 무서운 건 용기가 아니거든."

서진은 엄마 품에서 눈을 감았다.

다음 날 학교에서 유나가 서진 얼굴을 보더니 대뜸 말했다.

"너 울었어?"

"안 울었어."

"울기 직전 얼굴이잖아."

"그런 얼굴이 아니야."

유나가 서진 팔에 자기 팔을 꼈다.

"뭐가 힘들어?"

서진이 잠깐 멈췄다.

"몸은 안 다쳤어. 근데 마음이 좀."

"어디가."

"정확히 어디라고 하기 힘든데. 그냥 이 동네가 이래야 하는 건가 싶은 데서부터 시작해서. 내가 뭘 바꿀 수 있는 건지 모르겠고. 바꾸려다가 더 힘들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유나가 서진 팔을 꽉 쥐었다.

"그래도 네가 한 거 맞잖아. 지후 집에 보내고, 어른한테 말하고, 경찰한테 사실 말하고."

"그게 뭐가 달라지긴 했어?"

"달라졌어."

유나가 단호하게 말했다.

"지후가 달라졌잖아. 그 아이 눈빛 봤어? 서진이 네 말 듣고 있어. 그게 달라진 거야."

서진이 유나를 봤다.

유나는 가끔 이런 말을 했다. 흐름에 쓸려다니는 것 같은데, 정작 중요한 순간에 정확한 말을 했다. 서진이 유나를 놓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고마워."

"밥이나 같이 먹자."

유나가 교실 쪽으로 끌고 갔다.

마음 어딘가가 조금, 아주 조금 가벼워졌다.

23회 - 그날 밤 골목에서 네가 잡아준 손

그날 밤이 문제였다.

경찰이 다녀간 뒤 골목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른들이 수군거렸다. 누가 신고를 한 건지, 그게 정말 아이들 때문인지. 서진 이름이 돌아다닌다는 건 유나한테서 들었다. 직접적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가 서진한테 좋지 않았다.

서진이 저녁에 편의점을 다녀오는 길이었다.

골목 어귀에서 아까 경찰 앞에서 봤던 아저씨들 중 한 명이 서 있었다. 낮에 서 있는 게 아니라 어두워진 시간에, 골목 입구에. 서진이 들어가려는데 아저씨가 길을 막았다.

막은 건 아니었다. 그냥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위치가 딱 서진이 지나가야 하는 곳이었다.

"서진이구나."

아저씨가 말했다.

낮에 경찰한테 말한 거 때문이라는 게 바로 느껴졌다. 술 냄새가 났다.

"지나가도 될까요."

"아, 지나가야지. 근데 말이야."

아저씨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이 동네에서 오래 살려면 이 동네 방식을 알아야 해. 어?"

서진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런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낮과 달랐다. 낮엔 민준이 있었다. 지금은 어두운 골목에 혼자였다.

"저는 이 동네 방식이 틀렸다고 생각해요."

"야, 이 아이가."

아저씨가 팔을 들었다.

위협이었다. 실제로 치려는 건지 겁만 주려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서진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때 골목 안쪽에서 발소리가 났다.

빠른 발소리였다.

민준이었다.

민준이 서진 옆으로 달려오며 서진의 손을 잡았다. 그냥 잡은 게 아니라, 꽉 잡았다. 아저씨와 서진 사이에 서는 것처럼.

아저씨가 민준을 봤다.

"이 녀석도."

민준이 아저씨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냥 서 있었다. 물러서지 않는 눈으로.

아저씨가 피식 웃었다.

"뭐야, 남친이야."

그러고는 옆으로 비켜섰다. 완전히 가버리는 건 아니었지만, 길이 열렸다.

민준이 서진을 끌듯이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아무 말도 못 했다.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 민준이 손을 놓았다. 서진의 손이 아직도 따뜻했다. 잡혀 있던 온도가 남아 있었다.

"괜찮아요?"

민준이 물었다.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어떻게 알고 왔어."

"창문으로 봤어요. 골목 어귀에 아저씨가 서 있는데 서진 씨가 들어가는 게 보여서."

서진이 민준을 봤다.

"고마워."

"오늘 두 번째예요."

"뭐가."

"고맙다는 말. 서진 씨가 저한테 고맙다는 말 잘 안 하잖아요."

서진이 시선을 피했다.

"그냥 나온 말이야."

"알아요. 그래도 고마워요, 저도."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민준이 잡아줬던 손을 자기 손가락으로 살짝 쥐었다 폈다.

여전히 따뜻했다.

24회 - 우리가 증인이 되어줄게

경찰관이 다시 건물을 찾아온 건 그로부터 이틀 뒤였다.

이번엔 서진만 부른 게 아니었다. 목격자 진술을 받겠다고 했다. 서진이 말한 강민준, 그리고 지후도 포함이었다.

지후 엄마가 문제였다.

서진이 지후 집을 찾아가 이야기했다. 지후 엄마는 처음에 거절했다.

"우리 애를 왜 끌어들여요."

"끌어들이는 게 아니에요. 지후가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지후뿐이에요."

"그러다가 이 동네에서 못 살게 되면요."

서진이 지후 엄마를 봤다.

"아주머니, 지후가 계속 그 심부름 하면 지후한테 더 나쁜 거예요."

지후 엄마가 입을 다물었다.

"지후한테 어른이 시켜도 잘못된 건 안 해도 된다는 걸 알려줘야 해요. 그게 지후를 지키는 거예요."

오래 침묵이 흘렀다.

그때 지후가 방에서 나왔다. 엄마를 봤다.

"엄마, 나 말할게."

지후 엄마가 아이를 봤다.

"지후야."

"서진 누나 말이 맞아. 그 아저씨들 잘못된 거야. 나 알아."

지후 엄마의 눈이 빨개졌다.

아이가 먼저 알고 있었다. 엄마가 걱정하는 것도 알면서, 그래도 말하겠다는 것이었다.

진술은 경찰서가 아니라 학교 상담실에서 이루어졌다. 서진, 민준, 지후 셋이 각각 따로 진술했다. 서진은 자기가 봤던 것들을 차분하게 말했다. 민준도 같았다. 지후는 처음엔 떨었지만 진술을 마치고 나오면서 표정이 달랐다.

뭔가 벗어난 것 같은 얼굴이었다.

셋이 복도에서 마주쳤다.

유나가 복도 끝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셋을 보자마자 걸어왔다.

"다들 괜찮아?"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준이 지후를 봤다.

"잘 했어, 지후야."

지후가 민준을 봤다.

"무서웠어요."

"알아. 근데 했잖아."

지후가 작게 웃었다. 처음 보는 웃음이었다. 소주병 들고 골목을 다닐 때의 그 얼굴이 아니었다.

넷이 복도를 나란히 걸었다. 아무도 특별한 말을 하지 않았다.

서진은 걸으면서 생각했다.

소문은 빠르게 퍼진다. 거짓말은 담장을 쉽게 넘는다. 나쁜 것들은 이 골목 구석구석에 박혀 있다. 혼자서는 바꾸기 힘들다. 어른들이 시스템이고 어른들이 권력이다.

그래도.

지금 이 복도를 걷는 넷이 있었다.

셋이 각자 사실을 말했다. 거짓이 아닌 것을 거짓이라고 하지 않았다. 무서워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뭔가가 달라질 거라고 서진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번엔 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근거 없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틀린 것 같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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