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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담장 너머의 우리 : 하이틴로멘스 04


25회 - 가난하다고 속여도 되는 건 아니잖아
봄이 깊어지고 있었다.
골목 담벼락 사이로 잡초가 올라왔다. 누가 심은 것도 아닌데 해마다 같은 자리에 올라오는 풀이었다. 서진은 어릴 때 그 풀을 뽑으려 했다가 엄마한테 혼난 적이 있었다. 살려고 나온 거니까 내버려두라고. 서진은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살려고 나온 거니까.
이 골목 사람들도 다 살려고 여기 있었다.
그런데 살려고 하는 방식이 다 달랐다.
그 주에 골목에 새로운 일이 생겼다.
서진네 건물 맞은편 집에 아주머니 한 명이 이사를 왔다. 혼자였다. 짐이 많지 않았다. 이사 트럭도 없이 택시 두 대로 짐을 날랐다. 서진은 그걸 창문 너머로 봤다.
동네 어른들이 그 아주머니를 금방 알아봤다.
다음 날부터 아주머니가 골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차림새가 낡았다. 옷이 해어져 있었고, 신발 밑창이 들떠 있었다. 동네 가게 앞에서 구걸을 했다. 커피 한 잔 뽑아먹을 동전이 없다고. 버스비가 없다고. 약값이 없다고.
서진은 처음에 그냥 지나쳤다.
이 동네엔 그런 사람이 드물지 않았다. 진짜로 어려운 사람들이 있었다. 서진은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눈빛이 다르다고, 지난번에 민준한테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헷갈렸다.
아주머니의 눈빛이 진짜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민준이 먼저 이상하다고 했다.
방과 후 골목에서 서진을 만나자마자 말했다.
"서진 씨, 저쪽에 새로 온 아주머니 봤어요?"
"응."
"오늘 편의점 앞에서 동전 없다고 했는데, 제가 주려다가 좀 이상한 거 봤어요."
"뭐가."
"핸드폰이요. 아주머니 핸드폰이 잠깐 보였는데, 꽤 최신 기종이었어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최신 기종 핸드폰. 동전이 없다는 사람의 손에 들린.
"그것만으론 모르지. 중고일 수도 있고."
"맞아요. 그래서 말 안 하려다가."
"근데 말했잖아."
"서진 씨는 이런 거 잘 아니까요."
서진이 골목 쪽을 봤다.
아주머니가 지금도 저쪽 어딘가에 있었다. 서진은 잠깐 생각했다. 진짜로 어려운 사람일 수도 있었다. 핸드폰은 유일하게 남은 연락 수단일 수도 있었다.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됐다.
그런데.
"지켜보자."
서진이 말했다.
"어떻게요."
"말 걸어볼게. 직접."
민준이 서진을 봤다.
"괜찮겠어요?"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고 싶어. 가짜면 이 동네 사람들이 또 당하거든. 진짜면, 그러면 도울 방법을 찾아야 하고."
서진이 골목 쪽으로 걸음을 뗐다.
아주머니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골목 끝 담벼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서진이 가까이 가자 아주머니가 올려다봤다. 눈이 피곤해 보였다.
"아주머니, 오늘 이사 오셨어요?"
"어제."
"어디서 오셨어요?"
"저기, 좀 멀어."
서진이 쪼그려 앉았다.
"밥은 드셨어요?"
아주머니가 잠깐 서진을 봤다. 뭔가를 재는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서진한테는 느껴졌다. 진짜 굶은 사람은 밥 먹었냐는 말에 그렇게 눈을 굴리지 않았다.
"못 먹었어."
"편의점에서 간단한 거 사드릴게요."
아주머니가 일어섰다.
서진이 앞서 걸으며 생각했다.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직 몰랐다. 그런데 가난하다고 속이는 게, 만약 그렇다면, 그건 진짜로 어려운 사람들한테도 잘못된 일이었다. 진짜 어려운 사람들이 의심받게 만드는 거였다.
그게 서진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 이유였다.
26회 - 금은보화는 어디서 왔을까
아주머니 이름은 최 씨였다.
편의점에서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사줬다. 아주머니가 먹는 걸 서진은 가만히 봤다. 배가 고픈 사람처럼 먹었다. 젓가락질이 급했다.
그런데 먹으면서 핸드폰을 꺼내 확인했다.
민준이 말한 기종이 맞았다. 꽤 최근 모델이었다. 케이스도 새것이었다.
서진이 자연스럽게 물었다.
"핸드폰 좋은 거 쓰시네요."
아주머니가 잠깐 핸드폰을 봤다.
"딸이 사줬어."
"딸이 있으세요?"
"응. 딸이 있는데."
아주머니가 말을 흐렸다.
서진은 더 묻지 않았다. 딸이 있는데 왜 혼자인지, 딸이 핸드폰을 살 돈이 있는데 왜 엄마가 동전을 구걸하는지. 그 안에 어떤 사정이 있는지 서진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유나한테 했다.
유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딸이 있으면 딸한테 연락하면 되잖아."
"그러니까."
"근데 왜 동네 사람들한테."
"그게 이상한 거야."
유나가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있잖아, 우리 엄마 친구 중에 그런 분 있어. 자식들은 잘 사는데 본인이 동네 다니면서 어렵다고 하는 분. 근데 집에 가면 살림이 좀 있대."
서진이 유나를 봤다.
"어떻게 알았어."
"누가 집들이 갔다가 봤다고. 어렵다는 사람 집에 새 냉장고에 새 TV에 옷도 많더래."
서진은 잠깐 말이 없었다.
이 동네에서 그런 이야기는 처음이 아니었다. 바깥에서는 없는 척하고 집 안에는 금은보화를 쌓아두는 사람. 서진은 어릴 때 그 이야기를 어른들한테 들으면서 왜 그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조금 이해했다.
동정이 돈이 되는 사회였다. 어렵다고 하면 도와주는 사람이 생겼다. 도와주는 사람이 생기면 돈이 모였다. 그게 반복되면 어렵다는 게 수단이 됐다.
그 수단을 쓰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나쁜 마음을 먹은 건 아닐 수도 있었다. 처음엔 진짜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그러다가 그게 습관이 됐을 수도 있었다.
그래도.
"그래도 속이는 건 잘못됐어."
서진이 혼잣말처럼 말했다.
민준이 들었다.
"누가 속인다고 확인됐어요?"
"아직 아니야."
"그러면 좀 더 봐야죠."
서진이 민준을 봤다.
"너는 왜 이렇게 신중해."
"서진 씨가 성급하게 결론 내릴 것 같아서요."
서진이 잠깐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알았어. 더 봐볼게."
민준이 조용히 웃었다.
그 웃음이 뭔지 서진은 알았다. 네가 그래도 된다는 웃음이었다. 성급해도 되고, 틀려도 되고, 그러면서 고치면 되는 거라는.
그 웃음이 이상하게 든든했다.
27회 - 거짓이 들통나는 순간
들통이 난 건 생각보다 빨리였다.
토요일이었다.
서진이 엄마 심부름으로 시장에 갔다가 골목으로 돌아오는 길에 봤다.
최 아주머니가 골목 어귀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동네 사람한테 또 돈을 구하는 것 같았다. 낮은 목소리로 약값이 없다고, 병원을 가야 하는데 버스비가 없다고.
그런데 골목 반대편에서 택시 한 대가 들어왔다.
택시에서 내린 건 젊은 여자였다. 삼십 대쯤 돼 보이는, 옷차림이 단정한 여자. 손에 쇼핑백을 들고 있었다.
여자가 아주머니를 보더니 소리쳤다.
"엄마!"
아주머니가 굳었다.
서진도 굳었다.
딸이었다. 아주머니 딸이 여기 왔다는 건, 딸이 엄마가 이 동네에 있다는 걸 알고 찾아왔다는 거였다.
딸이 아주머니한테 빠르게 걸어오며 말했다.
"엄마, 여기서 또 이러고 있어? 내가 드린 돈은 어디 갔어."
아주머니가 주변을 봤다. 동네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서진도 보고 있었다.
"돈이 좀 부족해서."
"부족하긴 뭐가 부족해. 지난달에 얼마 드렸는데."
딸이 목소리를 낮췄지만 골목이 좁아서 다 들렸다.
"엄마, 병원비 없다고 사람들한테 돈 받는 거 그만해. 나한테 말하면 되잖아."
"딸한테 손 벌리기 싫어서."
"그러면서 남한테 손은 벌려?"
동네 사람 하나가 입을 열었다.
"저기, 그러면 저번에 아주머니가 약값 없다고 해서 제가 준 돈은요."
딸이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돌려드릴게요."
아주머니가 딸 손을 잡았다.
"얼마나 돌려줘."
"엄마."
"그 사람들이 준 거잖아."
딸이 눈을 감았다.
서진은 그 광경을 보면서 여러 감정이 섞이는 걸 느꼈다. 아주머니가 나쁜 사람이라는 생각과,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딸한테 손 벌리기 싫어서 남한테 손 벌린다는 게 이상한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그 마음이 이해됐다.
그런데 이해된다는 것과 옳다는 건 달랐다.
저녁에 민준한테 이야기했다.
옥상에서였다.
민준이 다 듣고 말했다.
"딸한테 손 벌리는 게 창피한 거잖아요."
"맞아. 근데 그렇다고 동네 사람들한테 속이는 건."
"잘못된 거죠."
"응."
"근데 서진 씨, 저도 솔직히 말하면."
민준이 하늘을 봤다.
"완전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기가 힘든 것도 있어요. 다들 뭔가 사정이 있는 거잖아요."
"사정이 있어도 거짓은 거짓이야."
"알아요. 그냥, 뭔가 슬프다는 거요. 이 동네 사람들이 다 어떻게든 살려고 하는데 그 방식이 서로를 속이는 게 되는 게."
서진이 민준을 봤다.
그 말이 맞았다. 서진도 그게 슬펐다.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픈 거였다. 어렵게 사는 게 거짓말의 이유가 되는 세상이.
"그래서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해."
서진이 말했다.
"응."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망설임 없이.
28회 - 이 동네 사람들이 하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최 아주머니 사건 이후 골목이 조금 달라졌다.
달라졌다는 건, 극적으로 뭔가 바뀐 게 아니었다. 그냥 사람들의 눈빛이 조금 달라진 것이었다. 누군가 어렵다고 하면 예전엔 그냥 믿었는데, 이제는 잠깐 멈추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편의점 할머니가 서진한테 말했다.
"서진아, 이 동네 좀 이상한 거 알고는 있었는데. 아이고, 이 나이 되도록 몰랐다, 그 사람이 그런 줄은."
서진이 할머니를 봤다.
"할머니, 속으셨어요?"
"밥값 좀 됐어. 두 번인가."
할머니가 손을 저었다.
"돈이 아깝다는 게 아니야. 그냥, 그 사람이 진짜 어려운 줄 알았거든. 그게 아니었던 거잖아. 그게 좀 씁쓸하다."
서진은 할머니를 봤다.
이 편의점 할머니는 이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사람 중 하나였다. 수십 년을 이 골목에서 장사했고, 수십 년 동안 이 동네 사람들을 봐왔다. 그런 사람도 몰랐다.
"할머니는 그 사람 불쌍해서 도운 거잖아요. 그게 할머니 잘못은 아니에요."
"그래도 어리석은 거지."
"어리석은 게 아니라 마음이 있는 거예요."
할머니가 서진을 봤다.
"서진이 너 언제 이런 말 하는 애가 됐어."
"원래 이랬어요."
할머니가 웃었다.
그 주에 골목에서 이상한 일이 또 있었다.
1층 아저씨, 맨날 소주를 마시던 그 아저씨가 서진을 불러 세웠다.
"서진아."
"왜요."
아저씨가 머뭇거렸다.
"저번에 지후한테 경찰서에서 진술 했다며."
"네."
"그게, 뭐가 달라졌어?"
서진이 아저씨를 봤다.
"경찰이 그 아저씨들한테 공식 경고를 했어요. 또 아이들 시키면 조치 들어간다고요."
아저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러고는 말이 없었다. 서진이 가려는데 아저씨가 말했다.
"나도 그러면 안 됐는데."
서진이 멈췄다.
"뭐가요."
"지후 그 심부름. 나도 시킨 적 있어. 몇 번."
서진은 아저씨를 봤다. 아저씨가 소주 캔을 손에 들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알아요."
"알았어?"
"봤으니까요."
아저씨가 캔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미안하다. 지후한테."
말하기 쉬운 말이 아니었다. 어른이 아이한테, 그것도 이 골목에서 미안하다는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서진은 그걸 알았다.
"아저씨가 지후한테 직접 말해주세요."
아저씨가 서진을 봤다.
"그게 더 좋은 거야?"
"네."
아저씨가 잠깐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이 걸음을 옮기면서 생각했다.
조금씩이었다. 아주 조금씩. 그런데 분명히 달라지고 있었다. 눈을 뜨는 사람들이 하나씩 생겨나고 있었다.
그게 진짜 변화인지, 그냥 잠깐의 반성인지는 몰랐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29회 - 진심은 결국 이긴다, 정말?
민준이 처음으로 흔들린 건 그즈음이었다.
아버지 때문이었다.
저녁에 서진이 창문을 여는데 옆 방에서 민준의 아버지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엔 조용한 분이었다. 일을 찾으러 다니고, 늦게 들어오고, 서진이 가끔 건물 복도에서 마주치면 고개를 끄덕이는 분. 말이 없었다.
그날은 달랐다.
목소리가 높지는 않았다. 그런데 단어들이 들렸다.
사기. 돈. 속았다.
서진이 창문을 닫았다. 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이 학교에 나왔다. 얼굴이 창백했다. 잠을 못 잔 것 같았다.
서진이 복도에서 민준을 붙잡았다.
"무슨 일이야."
"괜찮아요."
"아니잖아."
민준이 잠깐 서진을 봤다.
"아버지가 어제 사기를 당했어요. 일자리 소개해준다고 해서 돈을 냈는데, 가짜였어요."
서진이 굳었다.
"얼마나."
"많이요."
"경찰에."
"신고했어요. 근데 이미 도망간 것 같대요."
서진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민준네 아버지가 사업을 망하고 이 동네에 왔고, 다시 일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또 당한 것이었다. 진심으로 다시 시작하려는 사람을 이용한 거였다.
민준이 창밖을 봤다.
"서진 씨, 진심은 결국 이긴다는 말 있잖아요."
"응."
"그거 진짜예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진심은 결국 이긴다. 서진은 그 말을 믿고 싶었다. 믿으려고 했다. 그런데 이 골목에서 살면서 진심이 지는 걸 너무 많이 봤다. 도와줬다가 배신당하고, 열심히 살다가 사기당하고, 바르게 말했다가 이상한 사람이 되고.
그래도.
"몰라."
서진이 솔직하게 말했다.
민준이 서진을 봤다.
"몰라요?"
"확신은 못 하겠어. 근데 이기지 못하더라도, 진심이 거짓보다 나은 건 맞아. 졌을 때 남는 게 달라."
"어떻게 달라요."
"거짓으로 이기면 그게 다야. 근데 진심으로 지면, 그 진심은 어딘가에 남아. 사람 마음에."
민준이 한참 서진을 봤다.
"서진 씨는 어떻게 그렇게 생각해요."
"엄마가 그렇게 살아서."
서진이 말하고 나서 자기 말에 스스로 놀랐다. 엄마 이야기를 꺼낸 게 처음이었다.
민준은 더 묻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수업이 시작됐다. 서진은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생각했다. 진심은 결국 이긴다는 말이 맞는지 틀린지 아직 모르겠다.
그런데 민준이 그 진심을 갖고 있는 건 알았다. 서진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면 일단 충분한 것 같았다.
30회 - 너만 믿어, 그 말이 처음이었어
민준의 아버지가 사기당한 이야기가 골목에 퍼지는 데 하루가 걸렸다.
이번엔 소문이 나쁜 방향으로 퍼지지 않았다. 민준네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말이었다. 열심히 살려는 사람을 이용했다는 것에 동네 사람들이 화를 냈다. 저번 최 아주머니 사건 이후로 이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이었다.
편의점 할머니가 민준네 아버지한테 밥을 챙겨줬다.
1층 아저씨가 아는 일자리 정보를 알려줬다.
서진은 그걸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동네가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진짜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도왔다. 다만 그 도움이 이용당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점점 닫혀가는 거였다.
닫히기 전이 있었다는 뜻이었다.
그날 저녁 서진이 옥상에 올라갔다.
혼자 있고 싶었다. 최근에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경찰, 아주머니, 민준 아버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옥상 바람이 복잡한 것들을 조금 날려주는 것 같았다.
한참 있다가 발소리가 들렸다.
민준이었다.
서진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민준이 옆에 와서 앉았다.
둘이 말없이 골목을 내려다봤다. 저녁이 되면 이 골목은 좀 다른 모양이었다. 집집마다 불이 켜지고, 밥 냄새가 올라오고, 아이들 소리가 들렸다. 낮에 보이는 것들이 저녁에는 가려졌다. 이 골목도 그 시간만큼은 그냥 평범한 동네 같았다.
민준이 먼저 말했다.
"서진 씨."
"응."
"내가 이 동네 와서 처음으로 나를 믿어준 사람이 서진 씨예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소문 났을 때. 확인도 없이 내 편 들어준 거."
"그게 네 편 든 게 아니라."
"알아요. 사실 확인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근데 서진 씨 입장에서는 나를 믿은 거잖아요. 확인하기 전에 이미."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서진은 민준을 보면서 진짜라는 걸 느꼈고, 그래서 소문보다 민준을 먼저 택했다. 그게 믿음이 아니면 뭐였겠나.
"서진 씨는 뭘 보고 믿었어요? 저를."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눈빛."
"눈빛이요?"
"거짓말하는 사람이랑 진짜인 사람이랑 눈빛이 달라. 설명하기가 힘든데."
"저 눈빛이 진짜였어요?"
"응."
민준이 잠깐 아무 말이 없었다.
"서울에서요. 내가 안 했다고 말해도 아무도 안 믿었거든요. 선생님도, 친구들도. 심지어 가까웠던 애도. 근데 서진 씨는 만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여기선 눈빛으로 사람 보는 게 빨라져. 이 동네 살면."
민준이 서진을 봤다.
"너만 믿어."
목소리가 작았다. 바람 소리에 섞여서 잘 들리지 않을 것 같았는데 서진한테는 또렷하게 들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 동네에서, 학교에서, 뭔 일이 생겨도. 서진 씨만 믿어요."
서진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너만 믿어. 그 말이 처음이었다. 서진한테 그 말을 해준 사람이 처음이었다. 엄마 외에는. 아니, 엄마도 그런 식으로 말한 적은 없었다.
서진이 골목을 내려다봤다.
귀가 뜨겁고 심장이 이상하게 빠른 게 느껴졌다. 저녁 바람이 식혀주지 않았다.
"그러면 나도."
서진이 작게 말했다.
"뭐요?"
"나도 너 믿어. 처음부터."
민준이 대답하지 않았다.
한참 뒤에 민준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하고 따뜻한 소리였다.
서진은 보지 않았다.
안 봐도 어떤 웃음인지 알 것 같았다.
31회 - 어른들의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변화는 작은 것들부터 시작됐다.
1층 아저씨가 낮술을 줄였다. 완전히 끊은 건 아니었지만, 저번처럼 아침부터 소주를 들고 다니지는 않았다. 일자리 정보를 받아서 면접을 보러 다닌다고 했다.
최 아주머니의 딸이 이 동네에 와서 동네 사람들한테 직접 사과를 했다. 속인 돈을 일부 돌려줬다. 최 아주머니가 어떻게 됐는지는 서진도 몰랐다. 딸이 데려갔다는 말도 있었고, 혼자 다른 동네로 이사 갔다는 말도 있었다.
지후가 골목에서 달라졌다.
예전엔 어른들이 부르면 달려갔는데, 이제는 한번 생각하는 것 같았다. 서진을 보면 손을 흔들었다. 작은 손을 크게 흔들었다. 서진도 흔들어줬다.
그런 변화들이 쌓이는 걸 서진은 지켜봤다.
그런데 그즈음 어른들 사이에서 이상한 움직임이 있었다.
골목 어귀 집 아저씨가 갑자기 서진네 건물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동네 회의 같은 거라고 했다. 서진은 그 말을 엄마한테 들었다.
"엄마, 회의가 왜 갑자기."
"나도 모르겠어. 그냥 다들 모이라고 해서."
회의 날, 서진은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 밖에서 지후와 함께 있었다. 지후가 저쪽을 보며 말했다.
"저기서 뭐 해요?"
"어른들 회의."
"무슨 회의요?"
"아직 몰라."
나중에 엄마한테 들었다.
회의의 주제는 민준네 아버지가 사기당한 일과 관련이 있었다. 골목 어귀 아저씨가 자기가 직접 그 사기꾼을 알고 있다고 했다. 소개해줬다는 게 아니라, 그 사람한테서 자기도 뭔가를 받았다는 것이었다.
서진이 엄마를 봤다.
"그러면 그 아저씨도 연관이 있는 거잖아."
"그게 좀 복잡해."
"어떻게 복잡해."
엄마가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그 아저씨가 민준이 아버지를 소개해준 사람이었어. 고의는 아니었을 수도 있는데."
서진이 굳었다.
골목 어귀 아저씨가 민준 아버지를 그 사기꾼에게 소개했다. 고의가 아니었더라도 연결고리가 있었다. 그 아저씨가 그걸 숨기다가 지금에서야 말하는 건, 양심 때문인지 들킬 것 같아서인지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의 세계는 복잡했다.
서진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이 얽혀 있었다.
다음 날 서진이 민준한테 이 이야기를 했다.
민준이 한참 말이 없었다.
"그 아저씨가 알면서 소개한 건지, 몰랐던 건지가 중요하겠네요."
"알아야 해."
"어떻게요."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직접 물어봐야지."
민준이 서진을 봤다.
"같이 가요."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른들의 세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금 사이로 진실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32회 - 우리가 알아낸 진실
골목 어귀 아저씨 이름은 강 씨였다.
서진이 민준과 함께 그 집 앞에 섰다. 벨을 눌렀다. 한 번, 두 번. 한참 뒤에 문이 열렸다.
강 씨가 서진과 민준을 봤다.
"학생들이 왜."
서진이 먼저 말했다.
"아저씨, 민준이 아버지 소개해준 사람이 아저씨예요?"
강 씨의 표정이 굳었다.
"어디서 들었어."
"들었어요."
강 씨가 잠깐 서진과 민준을 번갈아 봤다.
"들어와."
집 안은 어두웠다. 좁은 거실에 테이블이 하나 있었다. 강 씨가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셋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강 씨가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소개한 건 맞아. 근데 나도 처음엔 믿었어."
"처음엔이요."
서진이 말을 잘랐다.
"나중엔 의심이 됐는데 말을 못 했어."
민준이 강 씨를 봤다.
"왜요."
"나도 그 사람한테 돈을 낸 상태였거든. 내가 말하면 내가 먼저 손해가 될 것 같아서."
서진이 강 씨를 봤다.
"그러면 알면서 우리 아버지를 소개한 거예요?"
민준의 목소리가 낮았다. 화가 나 있는 게 느껴졌는데 조용했다.
강 씨가 고개를 떨궜다.
"소개할 때는 진짜 모르는 것도 있었어. 반반이었어. 믿고 싶었고, 의심도 됐고. 그러다 소개를 해버린 거야."
민준이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서진이 말했다.
"아저씨, 그게 어떤 잘못인지 알아요?"
"알아."
"이제 와서 회의 자리에서 말한 건 왜예요."
강 씨가 테이블을 봤다.
"양심이 좀 남아서."
"많이 늦었어요."
"알아."
서진이 민준을 봤다. 민준이 서진을 봤다.
민준이 강 씨한테 말했다.
"그 사람 어디 있는지 알아요?"
강 씨가 고개를 들었다.
"연락처는 있어. 도망간 건지 모르겠는데 마지막 주소는 알고 있어."
"경찰한테 그거 줄 수 있어요?"
강 씨가 잠깐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셋이 그 집에서 나왔다.
골목 햇빛이 눈부셨다. 서진이 눈을 가늘게 떴다.
민준이 말했다.
"고마워요."
"나한테 왜."
"같이 와줘서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어떤 기분이야."
민준이 잠깐 생각했다.
"복잡해요. 그 아저씨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고."
"맞아."
"근데 진실을 알았으니까. 몰랐을 때보다는 나아요."
서진이 앞을 봤다.
이 골목 돌바닥이 햇빛에 반짝였다. 낡고 금이 가고 이끼가 낀 돌바닥이었는데, 이 각도에서 이 빛이 들어오면 반짝였다. 서진이 알고 있는 것이었는데, 오늘은 더 반짝이는 것 같았다.
진실을 알았으니까.
그게 다는 아니었지만, 시작이었다.
서진이 걸음을 뗐다. 민준이 옆에서 같이 걸었다.
이 골목이 싫지 않았다.
처음으로, 싫지 않다는 게 체념이 아니라 진짜 마음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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