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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담장 너머의 우리 : 하이틴로멘스 02


9회 - 이간질은 골목보다 빠르게 퍼진다
소문은 발이 없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이 골목에서 소문은 발이 열두 개쯤 달려 있었다. 아침에 한 집에서 생긴 일이 저녁이 되면 골목 끝 집까지 가 있었다. 그것도 원래 이야기보다 두세 배쯤 부풀려져서.
서진은 그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 골목에서는 말을 아꼈다. 웃어도 조심히 웃고, 울어도 조심히 울었다. 감정이 소문이 되는 동네였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다더라, 누가 누구네 집에 들어갔다더라, 누가 요즘 돈이 생겼다더라. 그런 말들이 담장을 넘어 퍼져나갔다.
문제가 시작된 건 민준이 온 지 세 주쯤 지났을 때였다.
학교에서 서진이 복도를 지나는데 같은 반 정다혜가 다가왔다. 다혜는 이 학교에서 정보 유통이 가장 빠른 아이였다.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그냥 말이 많았고, 말하는 걸 즐겼고, 자신이 말을 옮긴다는 자각이 부족할 뿐이었다.
"서진아, 너 민준이랑 같은 건물 살아?"
"응."
"맨날 같이 다닌다며?"
"같은 방향이라서."
다혜가 목소리를 낮췄다.
"근데 있잖아, 민준이 원래 서울에서 왜 왔는지 알아? 그쪽 동네에서 문제가 있었대. 사고를 쳤다나."
서진이 걸음을 멈췄다.
"누가 그래."
"우리 엄마가 그쪽 동네 아는 사람한테 들었대. 학교에서 싸움을 해서 전학 온 거라고."
서진은 다혜를 봤다.
"그거 확인된 거야?"
"엄마가 들은 거니까."
"엄마가 들은 게 다 맞아?"
다혜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서진은 더 말하지 않고 걸어갔다.
복도 창가에서 민준이 책을 읽고 있는 게 보였다. 혼자였다. 이 소문이 반에 퍼지면 저 아이는 더 혼자가 될 것이었다.
서진은 민준 옆자리에 앉았다.
"민준아."
민준이 책에서 눈을 들었다.
"너 서울에서 싸움해서 전학 온 거야?"
민준의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리고 천천히 책을 덮었다.
"그런 말 돌아?"
"막 돌기 전에 물어보는 거야."
민준이 창밖을 봤다.
"싸운 건 맞아요. 근데 제가 먼저 건 아니었어요. 우리 반 애가 돈을 잃어버렸는데 제가 훔쳤다고 소문이 났고, 그걸 퍼뜨린 애랑 싸웠어요. 전학은 그것 때문이 아니라 아빠 사업 때문이고."
"증거가 있어? 네가 훔치지 않았다는."
"없어요. 그냥 내가 안 했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서진은 잠깐 민준을 봤다.
"이 동네에선 그걸로 안 돼. 여기선 소문이 증거가 되거든."
민준이 서진을 봤다.
"그럼 어떻게 해요?"
"내가 같이 생각해볼게."
민준이 잠깐 말이 없었다.
"왜요?"
서진은 잠깐 머뭇거렸다.
"너 진짜인 것 같아서."
그 말을 하고 나서 서진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귀가 뜨거웠다. 괜히 말했나 싶었는데, 뒤에서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미 소문은 골목에서 교실로 넘어오고 있었다.
10회 - 누가 우리 반을 갈라놓으려 해
사흘이 지나자 반이 이상해졌다.
처음엔 미묘했다. 민준과 이야기하던 아이들이 하나둘 거리를 뒀다. 급식 시간에 민준 옆에 앉던 남자애들이 다른 자리로 옮겼다. 대놓고 뭐라 하는 건 아니었다. 그냥 슬금슬금 멀어졌다.
서진은 그 변화를 정확히 읽었다.
소문이 퍼지는 방식이 있었다. 처음에 한 명이 귀띔을 하면, 그게 확인 없이 다음 사람한테 가고, 세 명쯤 지나면 사실이 되어버렸다. 아무도 진짜냐고 묻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짜 소문에 반박했다가 나도 같이 묶이면 어떡하지, 하는 두려움.
유나가 서진한테 와서 조용히 말했다.
"서진아, 너도 좀 거리 둬."
"왜."
"괜히 민준이랑 엮이면 너도 이상하게 보여."
서진이 유나를 봤다.
"유나야, 너 그 소문 직접 확인했어?"
유나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확인은 못 했지만."
"확인 못 한 말을 사실처럼 대하면 안 되는 거잖아."
"나도 알아. 근데 분위기가."
"분위기가 다 맞는 건 아니야."
유나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서진은 유나를 오래 알았다. 나쁜 아이가 아니었다. 그냥 흐름에 쓸려가는 아이였다. 이 동네에는 그런 사람이 많았다. 나쁜 걸 모르는 게 아니라, 나쁜 걸 알면서도 흐름을 거스르기가 힘든 사람들. 서진은 그게 더 무서웠다.
점심시간이었다.
민준은 혼자 창가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서진이 밥을 들고 그쪽으로 갔다.
"같이 먹어."
민준이 서진을 올려다봤다.
"나 때문에 이상하게 보일 수 있어요."
"알아."
"그래도 와요?"
"내가 이상하게 볼 게 아니면 이상한 거 아니야."
민준이 잠깐 뭔가를 참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자리를 조금 비켜줬다.
서진이 앉자마자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유나였다.
유나도 밥을 들고 와서 맞은편에 앉았다.
"나도 확인 안 된 소문은 안 믿어."
서진이 유나를 봤다. 유나는 못 이기는 척 앉았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고마워요, 둘 다."
"고마운 거 나중에 해. 밥 다 식는다."
서진이 국을 떠먹으며 말했다.
그날 오후 수업 시간에 서진은 반을 천천히 둘러봤다. 누가 소문을 퍼뜨리고 있는 건지, 누가 그걸 믿고 있는 건지, 누가 흔들리고 있는 건지.
이 반을 갈라놓으려는 누군가가 있었다.
서진은 그걸 찾아야 했다.
11회 - 도와줬더니 돌아온 건 상처였다
서진은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게 이 동네에서 자라며 생긴 습관이었다. 도와줬다가 배신당하는 걸 너무 많이 봤다. 엄마도 그런 적이 있었다. 같은 건물 2층 아주머니가 아프다고 해서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약값도 빌려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돈으로 자기 집 물건을 산 거였다. 엄마는 그 이후로 한동안 아무것도 하기 싫다고 했다.
서진은 그 아주머니보다 엄마의 그 표정이 더 기억에 남았다.
'도와줬더니 이런 게 돌아오네.'
그 표정.
그런데 그날 서진이 그 표정을 짓게 될 줄은 몰랐다.
체육 수업 전날이었다.
반에 고태양이라는 아이가 체육복을 깜빡했다며 서진한테 빌릴 수 있냐고 했다. 태양은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딱히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서진은 여벌 체육복이 있어서 빌려줬다.
문제는 다음 날이었다.
태양이 체육복을 돌려주지 않았다. 체육 수업이 끝나도, 하교 시간이 돼도. 서진이 직접 찾아가서 물었다.
"체육복."
태양이 당황한 것 같았다.
"아, 맞다. 근데 있잖아, 서진아."
태양이 목소리를 낮췄다.
"나 집에 가져갔는데, 엄마가 세탁하다가 좀 상했어. 미안."
서진이 태양을 봤다.
"얼마나 상했어."
"구멍이 좀 났어. 작은 구멍."
나중에 돌려받은 체육복의 구멍은 작지 않았다. 주머니 쪽이 거의 뜯겨 있었다. 빨다가 생길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서진은 그걸 보고 기분이 이상해졌다. 화가 나는 건데 화를 어디에 내야 할지 모르는 기분.
태양은 미안하다고 했다. 하지만 변상하겠다는 말은 없었다.
서진은 그냥 가져왔다.
복도에서 민준과 마주쳤다. 민준이 서진의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무슨 일 있어요?"
"아니."
"표정이."
"표정이 뭐."
"화난 것 같은데 화 안 낸다는 표정이요."
서진은 손에 든 체육복을 가방에 쑤셔 넣었다.
"빌려줬다가 망가진 거야."
민준이 체육복을 봤다.
"많이 망가졌네요."
"뭐 이런 거야, 이 동네."
말하고 나서 서진은 자기가 왜 이 말을 민준한테 하고 있는지 몰랐다. 그냥 나왔다.
"이 동네만 그런 건 아니에요."
민준이 조용히 말했다.
"알아. 근데 이 동네는 특히 많아."
"도와준 사람한테 피해 주는 거요?"
"응."
민준이 잠깐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래도 서진 씨가 도와준 건 맞잖아요. 그건 달라지지 않아요."
서진은 그 말을 듣고 잠깐 멈췄다.
"도와준 결과가 이거잖아."
"결과가 나빠졌다고 행동이 틀린 게 되는 건 아니에요."
서진은 민준을 봤다.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았기 때문이었다.
12회 - 그래도 네 편이야
민준한테 소문이 직접 들어온 건 그날 오후였다.
쉬는 시간에 남자애 둘이 민준 주변을 지나치며 일부러 들으라는 듯 말했다.
"서울서 싸움하고 쫓겨난 애 맞지?"
"그렇다더라. 돈도 훔쳤다고."
민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책상을 보고 있었다. 그 자세가 너무 조용해서 오히려 더 눈에 띄었다. 참고 있는 게 보였다.
서진은 그 두 아이를 봤다.
"너희 그거 어디서 들었어?"
두 아이가 서진을 봤다.
"그냥 들었는데."
"그냥이 어디야. 누가 말해줬어?"
"서진이 너 왜 그래. 민준이 편이야?"
"사실 확인하는 거야."
아이 중 하나가 피식 웃었다.
"확인하고 싶으면 서울 가서 해."
그러고는 자리를 떴다. 서진은 그 뒷모습을 봤다. 저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소문은 아니었다. 누군가한테서 들은 거였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이 반에 있거나, 이 반 부모 중 한 명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민준이 먼저 교실을 나갔다.
서진이 뒤따라갔다. 복도 끝 계단 난간에 민준이 기대어 서 있었다. 멀리 운동장을 내다보는 것 같았는데 실제로는 아무것도 보지 않는 눈이었다.
"괜찮아?"
서진이 옆에 서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닌 것 같은데."
민준이 잠깐 조용했다.
"서울에서도 그랬어요. 내가 안 한 일인데 했다고 되고, 해명해도 소용없고. 그냥 그러려니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그러려니 하면 안 돼."
서진이 말했다.
"왜요."
"그러려니 하면 계속 그래도 된다고 생각하거든. 사람들이."
민준이 서진을 봤다.
"서진 씨는 그런 일 당하면 어떻게 해요?"
"나? 나는."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증거를 만들어. 소문은 소문으로 못 이겨. 사실로 이겨야 해."
"사실을 아무도 안 들어주면요."
"한 명만 들어줘도 돼. 그 한 명이 또 한 명한테 말하고. 그게 진짜 소문이거든."
민준이 서진을 오래 봤다.
"서진 씨는 그 한 명이에요?"
서진은 대답하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내려가면서 작게 말했다.
"그래도 네 편이야."
민준이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소리.
들었던 것 같았다.
13회 - 소문의 진원지를 찾아라
서진은 조용히 역추적을 시작했다.
소문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알아야 했다. 이 동네에서 소문을 추적하는 방법은 하나였다.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을 찾고, 그 사람이 누구한테 들었는지 찾고, 그 사람의 출처를 찾으면 됐다.
첫 번째는 다혜였다.
다혜한테 물었다.
"다혜야, 민준이 소문 엄마한테 들었다고 했잖아. 엄마가 어디서 들었대?"
다혜가 기억을 더듬었다.
"우리 엄마 친구 중에 저쪽 동네 아는 분이 있는데, 그분이 말해줬다고 했어."
"그분 이름이?"
"왜?"
"확인하고 싶어서."
다혜가 머뭇거렸다.
"김 아줌마? 우리 골목 끝에 살아. 근데 서진아, 너 왜 이렇게 파고들어. 민준이가 부탁한 거야?"
"아니. 내가 하고 싶어서."
그날 방과 후 서진은 골목 끝 집을 찾아갔다.
김 아줌마는 마흔 중반쯤 돼 보이는 여자였다. 서진 얼굴을 알아봤다.
"서진이 아니야. 무슨 일이야?"
"아줌마, 전학생 민준이 소문 아줌마가 퍼뜨렸어요?"
아줌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소문은 무슨. 내가 아는 사실을 말한 거지."
"그 사실 어디서 알았어요?"
"서울에 아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이 직접 봤어요?"
아줌마가 팔짱을 꼈다.
"야, 서진아. 너 나한테 따지는 거야?"
서진이 아줌마를 똑바로 봤다.
"따지는 게 아니라 확인하는 거예요. 민준이 억울하게 소문났을 수 있어서요."
아줌마가 잠깐 서진을 봤다.
그리고 뭔가 표정이 살짝 흔들렸다.
"그거... 카카오톡으로 받은 건데. 누군가가 올린 글이었어."
"직접 아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공유된 거라."
서진은 숨을 한번 쉬었다.
카카오톡 공유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쓴 글이 이 골목 담장을 넘어서 반에까지 들어온 거였다. 출처도 없고 사실 확인도 없는 글 하나가 한 아이의 학교생활을 흔들고 있었다.
"아줌마, 그거 민준이 얘기가 맞는지 확인됐어요?"
아줌마가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은 고개를 숙였다.
"나중에 아니면 어떡해요."
그 말을 하고 돌아섰다. 등 뒤에서 아줌마가 뭔가 말하려는 것 같았는데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골목을 걸어오면서 서진은 생각했다.
출처가 없는 글 하나. 그게 담장을 넘고 건물을 넘고 교실까지 들어왔다.
그걸 막으려면 진짜 이야기가 필요했다.
14회 - 담장을 넘어온 거짓말 한 마디
민준한테 다 말했다.
옥상이었다. 저녁 해가 기울어지는 시간. 서진이 조사한 것들을 순서대로 말했다. 민준은 끝까지 듣고 나서 한참 아무 말이 없었다.
"카카오톡 글이요."
"응."
"누가 올린 건지는."
"모르지. 아줌마도 어디서 공유된 건지 모른대."
민준이 난간에 팔을 올리고 골목을 내려다봤다.
"서울에서도 그랬어요. 누군가 단톡방에 글 올린 거였는데, 그게 반 전체에 퍼지고. 누가 올렸는지 결국 못 찾았어요."
"이번엔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찾아서 어떻게 해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사실이 아니라는 걸 말해야지."
"말하면 들어줘요?"
그 말에 서진이 대답을 못 했다.
들어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이미 소문을 믿어버린 사람들은 반박을 들어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경향이 있었다. 그게 이 골목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씁쓸한 것이었다.
"그래도 해야 해."
"왜요."
"안 하면 사실이 되거든. 아무도 반박하지 않으면 그게 사실이야."
민준이 서진을 오래 봤다.
"서진 씨는 왜 이렇게 잘 알아요."
"이 동네에서 자라면 알게 돼."
"힘들었겠다."
서진이 잠깐 민준을 봤다.
"힘든 줄 몰랐어. 그냥 이런 거구나 했어."
"이런 게 아닌데."
"알아. 나중에 알았어."
둘은 잠깐 골목을 내려다봤다. 아래에서 누군가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소리가 올라왔다. 이 골목 어른들이 모여서 떠드는 소리였다. 그 소리 속에 분명히 누군가의 이름이 들렸다. 서진네 건물 1층 아저씨 이름이었다.
또 소문이었다.
"거짓말 한 마디가 담장 넘어가는 데 얼마나 걸릴까요?"
민준이 물었다.
서진이 아래를 내려다봤다.
"한 시간이면 충분해."
"진실은요?"
"진실은." 서진이 잠깐 멈췄다. "오래 걸려. 근데 더 오래 남아."
민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믿을게요, 그 말."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믿어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게 왜 다행인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15회 - 믿었던 어른이 배신한 날
그 일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왔다.
서진의 엄마가 일하는 식당 사장님은 이 동네에서 꽤 오래된 사람이었다. 엄마가 몇 년 동안 일한 곳이었고, 서진도 가끔 가서 설거지를 돕거나 했다. 서진은 그 사장님을 믿었다. 정확히는, 엄마가 믿는 사람이라서 서진도 믿었다.
그런데 그날 엄마가 일찍 집에 왔다.
얼굴이 이상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오면서도 아무 말이 없었다. 서진이 엄마 옆에 앉았다.
"무슨 일이야."
엄마가 잠깐 아무 말 없다가 말했다.
"사장님이 옆 건물 아주머니한테 말했대. 우리 서진이가 남자애랑 맨날 옥상에 올라간다고."
서진이 굳었다.
"그게 왜."
"근데 그 말이 좀 이상하게 퍼졌어. 서진이가 불량스럽다고. 이 동네 애들이랑 어울리면서 나쁜 짓 한다고."
서진은 잠깐 숨을 멈췄다.
민준과 옥상에 올라간 건 맞았다. 하지만 거기서 한 건 그냥 골목을 내려다보고 이야기한 것뿐이었다. 그게 어떻게 나쁜 짓이 되는지 서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건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이 왜 그런 말을."
"나도 몰라. 아마 그냥 한 말인데 퍼진 것 같기도 하고."
"그냥 한 말이 이렇게 돼도 그냥이야?"
엄마가 서진을 봤다.
"서진아."
"나 억울해, 엄마."
서진은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말했다. 억울하다고. 잘못한 게 없는데 잘못한 것처럼 됐다고.
엄마가 서진을 안았다.
말은 없었다. 그냥 꼭 안았다. 거칠고 뜨거운 손이 서진의 등을 두드렸다.
서진은 울지 않았다. 울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걸로 울면 지는 것 같았다. 무엇에 지는 건지 몰랐지만.
다음 날 학교에서 민준이 서진 얼굴을 보더니 먼저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있었어."
"말해줄 수 있어요?"
서진이 민준을 봤다.
"우리 옥상에서 이야기한 거, 소문 났어. 나쁜 방향으로."
민준의 표정이 굳었다.
"나 때문에."
"아니. 말 옮긴 사람 때문에."
"그래도."
"그래도 뭐."
민준이 입을 다물었다.
서진이 말했다.
"네가 잘못한 거 없어. 믿었던 어른이 잘못한 거야. 그게 더 슬픈 거야."
민준이 서진을 봤다.
그 눈빛이 어떤 건지 서진은 바로 말할 수 없었다. 미안함인지, 고마움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16회 - 우리끼리는 다르게 살 수 있어
토요일 오전이었다.
서진, 민준, 유나 셋이 편의점 앞 파라솔 밑에 앉아 있었다. 유나가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고, 민준은 따뜻한 캔 음료를 손에 들고 있었고, 서진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냥 앉아 있었다.
한 주가 길었다.
소문, 오해, 배신, 억울함. 그런 것들이 쌓인 한 주였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유나가 먼저 말했다.
"있잖아, 나 솔직히 말하면."
서진이 유나를 봤다.
"처음에 나도 민준이 소문 반쯤 믿었어. 미안."
민준이 유나를 봤다.
"괜찮아요."
"아니, 안 괜찮아. 확인도 안 하고 믿은 건 잘못한 거야."
유나가 삼각김밥을 내려놓고 진지하게 말했다. 서진은 유나가 이런 아이라는 걸 알았다. 흔들리긴 해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는 아이.
"우리 어른들이 하는 거 보면서 자랐잖아."
유나가 말을 이었다.
"소문 퍼뜨리고, 이간질하고, 도와줬다가 뒤통수 치고. 근데 있잖아.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우리는 그러지 말자."
서진이 유나를 봤다.
"우리끼리는."
"응. 우리끼리는 다르게 살자. 확인 안 된 말은 안 믿고, 친구 뒤에서 말 안 하고, 도와줬으면 그냥 도와준 거로 끝내고."
민준이 조용히 웃었다.
"유나 씨 멋있다."
"알아."
유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셋이 다 웃었다.
서진은 웃으면서 골목 쪽을 봤다. 여전히 낡은 골목이었다. 어른들이 오가고, 소주병이 굴러다니고, 거짓말이 담장을 넘어다니는 곳. 그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은 그게 덜 무겁게 느껴졌다.
"민준아."
서진이 말했다.
"응."
"네 지도에 우리 편의점 파라솔 자리도 넣어."
민준이 잠깐 서진을 봤다.
"뭐라고 써요?"
서진이 잠깐 생각했다.
"진짜 있는 곳."
민준이 노트를 꺼내 뭔가를 적었다. 서진은 보지 않았다. 봐도 될 것 같았는데 왠지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유나가 삼각김밥을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뭐라도 하나 같이 하자. 이 동네에서."
"뭘."
"몰라. 아직. 근데 셋이 같이 하면 뭔가 될 것 같아."
민준이 캔 음료를 홀짝이며 말했다.
"저는 찬성이에요."
서진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런데 싫지 않았다.
이 골목 파라솔 아래에서, 자판기 커피 냄새가 나는 공기 속에서, 셋이 아무 계획 없이 뭔가를 하기로 한 이 순간이.
진짜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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