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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를 앞선 자들의 노래

목차

🔷 1부: 흙에서 태어난 별 (1~10회)

— 장영실 시대 / 조선 세종 연간 —

1회 - 노비의 아들, 하늘을 보다

2회 - 손이 만드는 기적

3회 - 소문은 궁궐까지 흐른다

4회 - 세종의 눈에 띈 아이

5회 - 양천의 벽, 첫 번째 균열

6회 - 해시계가 완성되던 날

7회 - 질투는 소리 없이 자란다

8회 - 귀족들의 모함, 시작되다

9회 - 가마 사고, 덫인가 실수인가

10회 - 역사는 그를 지웠다

🔷 2부: 유배지에서 피어난 꽃 (11~22회)

— 정약용·정약전 시대 / 조선 정조·순조 연간 —

11회 - 다산의 소년 시절, 세상이 궁금하다

12회 - 형제가 함께 꿈을 꾸다

13회 - 새로운 학문, 서학이 불러온 폭풍

14회 - 정적들의 눈, 붉게 타오르다

15회 - 유배령, 하룻밤에 무너진 인생

16회 - 흑산도 바다 위의 정약전

17회 - 자산어보, 물고기에게 배우다

18회 - 강진 유배지, 다산초당의 탄생

19회 - 목민심서는 왜 쓰였는가

20회 - 시기하는 자들은 왜 두려워했나

21회 - 편지 한 통, 형제의 마지막 안부

22회 - 역사는 그들을 다시 불렀다

🔷 3부: 현재, 우리들의 이야기 (23~35회)

— 현시대 / 중학생 주인공들의 현실 —

23회 - 반에서 제일 잘하면 왜 왕따가 될까

24회 - 조별 과제의 진실, 품앗이를 훔치다

25회 - SNS 시기, 좋아요가 칼이 되다

26회 - 선생님도 모르는 교실 권력

27회 - 나만 이상한 건가요

28회 - 역사 수행평가, 장영실을 만나다

29회 - 도서관에서 발견한 낡은 노트

30회 - 그 노트의 주인을 찾아서

31회 - 품앗이 착복, 어른들도 다를 바 없다

32회 - 공정함이란 게 진짜 존재할까

33회 - 자유와 평등, 말뿐이었나

34회 - 우리가 먼저 바꿀 수 있을까

35회 - 작은 용기, 교실에서 시작되다

🔷 4부: 시대를 잇는 자들 (36~40회)

— 과거와 현재의 연결, 마무리 —

36회 - 세 시대의 공통점을 발견하다

37회 - 진짜 평등은 어디서 오는가

38회 - 장영실·정약용이 지금 여기 있다면

39회 - 나는 어떤 시대를 살고 싶은가

40회 - 시대를 앞선 자들의 노래는 끝나지 않는다

📝 기획 포인트

주인공 구성 — 현대 중학생 3인방(공부 잘하지만 무시당하는 아이 / 억울하게 공 뺏기는 아이 / 방관자였다가 각성하는 아이)이 역사 수행평가를 계기로 장영실·정약용의 삶과 자신들의 현실이 닮아있음을 깨달아가는 구조입니다.

핵심 메시지 — "시기와 질투로 인재를 짓밟는 건 조선시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교실도, 직장도, 사회도 같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진짜를 기억한다."

톤 — 무겁지 않게, 중학생이 읽기 쉬운 대화 중심 문체. 역사 파트는 드라마틱하게, 현대 파트는 공감 가득하게.

1부: 흙에서 태어난 별

1회 — 노비의 아들, 하늘을 보다

밤하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동래현 관아 한쪽에 딸린 허름한 헛간, 그 처마 끝에 걸린 하늘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빛을 뿜고 있었다. 누가 양반이든 노비든, 누가 배가 부르든 굶주리든, 별은 아무 상관 없이 제 자리에서 빛났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년 실이는 숨을 쉴 수 있었다.

"실아, 실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헛간 안쪽에서 들려왔다. 거칠게 튼 손으로 새끼를 꼬던 어머니는 아들이 또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별 봐서 밥이 나오냐. 어서 들어와 자거라. 내일 새벽 물 길어야 한다."

"어머니, 저 별 있잖아요. 저기 북쪽에 있는 저 별은 절대 움직이지 않아요. 다른 별들은 다 돌아가는데 저 별만 혼자 가만히 있어요."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는 별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녀는 오히려 더 슬퍼졌다. 움직이지 않는 건 저 별만이 아니었다. 노비는 노비로 태어나 노비로 죽었다. 아들도, 손자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이 나라의 법이었고, 하늘이 정한 이치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하지만 소년은 몰랐다. 아직 몰라도 되는 나이였다.

실이의 본명은 영실(英實)이었다. 장(蔣)씨 성을 가진 노비 집안의 아들. 아버지는 관아에서 잡역을 맡은 관노였고 어머니는 기생 출신의 관비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영실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신분이 정해져 있었다. 조선의 법,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어머니가 노비면 자식도 노비였다.

하지만 영실의 손은 달랐다.

여섯 살 때부터 망가진 물레를 고쳤다. 여덟 살 때는 관아 창고의 부서진 수레바퀴를 새것처럼 만들어냈다. 열 살이 되던 해에는 물이 새는 항아리를 금이 간 자리를 계산해서 막아냈는데, 그걸 본 관아의 장인 어른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아이가 어디서 배웠느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냥 보면 알았다. 왜 부러졌는지, 어디가 약한지, 어떻게 하면 더 오래 버티는지. 손이 먼저 움직였고 머리가 나중에 이유를 찾았다.

그날 밤도 영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북극성. 움직이지 않는 별. 수천 년 전부터 뱃사람들이 방향을 찾을 때 기준으로 삼은 별. 영실은 그 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별은 왜 저 자리에 있을까. 다른 별들은 왜 저 별을 중심으로 도는 걸까. 하늘에도 중심이 있다면, 땅에도 중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은 꼬리를 물었다.

영실은 아직 열두 살이었다.

동래현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은 현감 나으리도, 아전들도 아니었다. 같은 노비들 사이에서 가장 무서운 건 '눈치'였다.

분수를 알아야 했다. 잘나 보이면 안 됐다. 관아 양반들 눈에 띄면 부려먹히고, 같은 노비들 눈에 띄면 시기를 받았다. 영실은 어릴 때부터 그 규칙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고칠 수 있는 물건이 있어도 모른 척했고, 좋은 방법이 생각나도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손은 말을 듣지 않았다.

어느 날 관아에서 쓰는 물시계가 고장났다. 물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아 시간을 잴 수가 없었다. 장인을 불렀지만 장인도 고개를 저었다. 어디가 막혔는지 알 수가 없다고 했다.

영실은 멀리서 그걸 보고 있었다.

손가락이 근질거렸다. 눈에 보였다. 물이 떨어지는 관의 각도가 조금 틀어져 있었다. 아주 조금, 어른 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만큼. 하지만 그 작은 차이가 물의 흐름을 바꿔놓고 있었다.

"저기요."

말이 먼저 나왔다. 생각보다 빠르게. 어머니가 그렇게 조심하라 했는데.

아전이 눈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노비 아이가 감히 끼어드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 얼굴이었다.

"뭐냐, 이놈."

"저 관 있잖아요. 각도가 조금 틀어졌어요. 저기 연결 부분을 보시면…"

"닥쳐라. 네깟 놈이 뭘 안다고."

영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날 저녁, 아무도 없는 틈을 타 혼자 물시계 앞에 섰다. 가만히 살폈다. 손으로 관의 방향을 조금 조정했다. 고정 핀을 두드려 제자리에 박았다.

다음 날 아침, 물시계가 정확하게 작동했다.

장인이 의아해했다. 아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도 몰랐다. 밤새 누가 고쳐놨는지.

어머니만 알았다. 아들의 손에 묻은 쇠 냄새를 맡았으니까.

"이 미련한 것."

어머니는 영실의 손을 꼭 쥐었다. 야단치려 했는데 눈물이 나왔다. 이 손이 문제였다. 이 손 때문에 아들이 언젠가 크게 다칠 것 같았다. 너무 잘나서 다치는 사람을 어머니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의 삶에서 여러 번 봤다.

"영실아. 잘하는 척하지 마라. 네가 아무리 잘해도 넌 노비야. 잘하면 더 부려먹히고, 더 잘하면 미움받는다. 이 나라에서 노비가 빛나면 안 돼. 알겠냐."

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날 밤 또 하늘을 봤다.

북극성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리 숨으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별처럼, 영실의 손도 숨겨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게 두려웠다. 동시에, 이상하게, 조금 설레기도 했다.

2회 — 손이 만드는 기적

영실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봄, 동래현에 가뭄이 들었다.

논바닥이 갈라졌다. 우물이 말랐다. 농민들은 더 깊이 땅을 팠지만 물은 나오지 않았다. 관아에서는 기우제를 지냈다. 아전들은 형식적으로 분주했고, 현감은 답답한 얼굴로 장계를 써 올렸다. 하지만 하늘은 맑기만 했다.

문제는 물을 어떻게 끌어오느냐였다.

마을에서 두 마장(약 800미터) 떨어진 개울에는 아직 물이 흘렀다. 그 물을 논까지 끌어오면 됐다. 하지만 물을 끌어올 도구가 없었다. 두레박으로 퍼 나르기엔 거리가 너무 멀었다.

관아 장인들이 며칠을 머리를 맞댔지만 뾰족한 수가 없었다. 사람 손으로 퍼 나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수십 명의 노비들이 하루 종일 두레박을 들고 왔다 갔다 해야 했다. 물론 그 노비들 중에 영실도 있었다.

첫날 영실은 시키는 대로 두레박을 들었다. 둘째 날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날, 영실은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물이 흐르는 방향을 한참 바라봤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당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흐름을 이용하면? 개울에서 논까지, 중간에 완만하게 경사진 땅이 있었다. 홈통을 연결하면 물이 스스로 흘러올 수 있었다. 문제는 홈통을 만들 재료였다.

영실은 주변을 둘러봤다. 대나무 숲이 있었다. 대나무 안을 파내면 홈통이 됐다. 연결 부분은 진흙으로 막으면 됐다. 경사가 꺾이는 곳은 나무를 깎아 각도를 조절하면 됐다.

머릿속에서 설계가 완성됐다.

영실은 도끼를 빌렸다. 아무도 이유를 묻지 않았다. 노비가 도끼를 드는 건 흔한 일이었다. 밤새 대나무를 잘랐다. 속을 파냈다. 손이 까졌고 등이 쑤셨지만 멈추지 않았다. 설계가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는다.

나흘째 새벽, 영실은 혼자 홈통을 연결하기 시작했다.

해가 중천에 떴을 때, 개울물이 홈통을 타고 논 입구까지 흘러들었다.

처음에는 아무도 몰랐다. 그런데 논 옆을 지나가던 늙은 농민이 발을 멈췄다. 눈을 비볐다. 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레박 없이, 사람 없이, 물이 스스로 흘러오고 있었다.

"이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소문은 빠르게 퍼졌다.

관아 아전이 달려왔다. 장인들이 왔다. 현감도 나와 봤다. 대나무를 이어 만든 소박한 수로였다. 그런데 그 소박한 것이 수십 명이 며칠 동안 할 일을 혼자서 해결해버렸다.

"누가 만들었느냐?"

아무도 처음엔 말하지 않았다. 영실은 군중 속에 섞여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있던 어린 노비 아이가 손가락을 들었다.

"저기 있는 영실이가 만들었어요."

순간 모든 시선이 영실에게 쏠렸다.

영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도망칠 곳이 없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잘하는 척하지 말라고 했던 말이 귓가에 울렸다.

현감이 영실 앞으로 걸어왔다. 키가 작고 배가 나온 중년 관리였다. 한참 영실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네가 만들었느냐?"

"예."

"어디서 배웠느냐?"

"배운 게 아닙니다. 그냥… 물이 흐르는 걸 봤습니다."

현감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이름이 뭐냐."

"장영실이옵니다."

현감은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게 전부였다. 칭찬도, 상도 없었다. 노비에게 그런 걸 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현감은 영실의 이름을 기억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영실은 몰랐다. 기억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하고, 동시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3회 — 소문은 궁궐까지 흐른다

소문이란 물과 같다.

막을수록 다른 곳으로 새고, 낮은 곳을 향해 흘러 결국 가장 넓은 곳에 고인다. 동래현의 노비 소년이 물을 끌어왔다는 이야기는 처음엔 마을 안에서만 돌았다. 그러다 장이 서는 날 인근 고을 상인들의 입에 올랐고, 보부상들의 발걸음을 따라 경상도 곳곳으로 퍼졌다.

영실은 그 사이 멈추지 않았다.

수로를 만든 이후 관아에서 그를 부르는 일이 잦아졌다. 부서진 농기구를 고쳐라. 물레방아가 삐걱거린다. 창고 문짝이 떨어졌다. 하나하나 다 손봤다. 어떤 건 고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좋게 만들었다. 물레방아는 같은 물의 힘으로 두 배 더 빨리 돌게 고쳤다. 창고 문은 한 손으로도 열리게 경첩 구조를 바꿨다.

장인들이 불편해하기 시작했다.

관아 소속 장인 중 가장 연배가 높은 오 서방이라는 자가 있었다. 삼십 년 경력의 목수였다. 그는 영실이 자신의 일을 해치운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직 어리지만, 저 아이는 분명 자신의 밥그릇을 위협할 것이었다.

"저놈이 무슨 기술을 안다고. 운이 좋았던 거지."

오 서방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영실의 작업을 깎아내렸다. 관아 어른들에게 귀띔했다. 노비 주제에 나대는 것은 위험하다고. 분수를 알게 해야 한다고.

덕분에 영실에게 주어지는 일이 갑자기 줄었다. 대신 물 긷기, 땔나무 패기, 뒷간 청소 같은 가장 고된 잡역이 몰렸다.

영실은 묵묵히 했다.

어머니는 그걸 보며 가슴이 아팠고, 동시에 한편으론 다행이다 싶었다. 잠잠해지면 오래 산다. 그게 노비의 지혜였다.

그런데 세상은 영실을 그냥 두지 않았다.

그해 겨울, 경상도 관찰사가 동래현을 순시했다. 관찰사는 각 고을의 살림을 점검하는 높은 관리였다. 현감은 관찰사를 극진히 대접하면서 관아 곳곳을 안내했다.

그때 관찰사의 눈에 들어온 것이 있었다. 창고 옆에 세워진 작은 기구였다. 나무와 대나무로 만든 것인데, 생김새가 특이했다. 레버를 당기면 무거운 짐이 올라가는 구조였다.

"이건 뭐냐?"

현감도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아전을 시켜 알아봤더니 영실이 틈틈이 만들어둔 것이었다. 무거운 곡식 포대를 창고에 쌓을 때 쓰면 사람 서넛이 할 일을 혼자 할 수 있는 기구였다.

관찰사는 한참 그 기구를 살펴봤다. 직접 레버를 당겨봤다. 묵직한 나무 상자가 스르르 올라갔다.

"만든 자를 데려오너라."

영실이 불려왔다. 진흙이 묻은 옷에 손은 거칠었다. 관찰사 앞에 엎드리자 관찰사가 말했다.

"네가 만들었느냐?"

"예."

"이런 건 어디서 배웠느냐?"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무거운 것을 들 때 기다란 막대 끝을 누르면 반대편이 올라오는 것을 보고, 그 원리를 이용했습니다."

관찰사는 눈을 가늘게 떴다.

"지렛대의 원리를 알고 있느냐?"

"그런 이름인 줄은 몰랐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는 건 알았습니다."

조용한 순간이 흘렀다.

관찰사는 현감에게 돌아서며 말했다.

"이 아이에 대해 보고서를 올려라. 이름, 나이, 신분, 할 수 있는 것들. 빠짐없이."

현감은 허리를 굽혔다.

그날 밤 영실은 어머니 옆에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무서웠다. 관찰사의 눈빛이 자꾸 생각났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잠들지 못했다.

두 사람은 같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다른 감정으로.

어머니는 두려웠고, 영실은 두렵지만 조금, 아주 조금 기대가 됐다.

소문은 그렇게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서에 실려 한양을 향해 흘러갔다.

4회 — 세종의 눈에 띈 아이

한양의 봄은 경복궁 안쪽에서부터 시작됐다.

근정전 뒤편 후원의 매화가 가장 먼저 피었다. 그 꽃을 보는 사람은 궁궐 안의 사람들뿐이었다. 담장 밖 백성들은 궁궐 안에 꽃이 피는지 눈이 오는지 알 수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두 세계는 높은 담으로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정보는 담을 넘었다.

세종은 그날 경연이 끝난 뒤 편전에서 신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스물여섯 살의 왕은 즉위한 지 이미 십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하루에 경서를 몇 편씩 읽었고, 천문학, 의학, 음악, 농학을 가리지 않고 파고들었다.

이날 경연 중에 나온 이야기 중 하나가 경상도 관찰사의 보고서였다.

"동래현의 관비 소생 아이인데, 스스로 물을 끌어오는 수로를 만들고 짐을 올리는 기구를 고안했다 하옵니다. 나이는 열다섯. 글은 모르나 손재주와 이치를 꿰뚫는 눈이 비범하다 하옵니다."

세종은 보고서를 집어 들었다. 천천히 읽었다. 그러다 멈췄다.

"지렛대의 원리를 배우지 않고 터득했다?"

"그러하옵니다."

세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당시 조선은 기술 인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중국에서 들여오는 역법은 조선의 하늘과 맞지 않았다. 농사를 위한 정확한 시간 측정이 필요했고, 군사를 위한 정밀한 무기가 필요했다. 왕실 의례를 위한 악기 제작도 시급했다. 뛰어난 기술자가 있다면 어디서든 데려와야 했다.

"그 아이를 올려 보내라."

신하들이 술렁였다.

"전하, 신분이 노비옵니다. 관아 잡역을 하는 천민이…"

"알고 있다. 그래서 묻는 게 아니라 올려 보내라 명하는 것이다."

세종의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결정은 단호했다.

소환 명령이 동래현에 닿은 건 보름 후였다.

아전이 영실을 불렀다. 한양으로 올라가라는 명이 내려왔다고 했다. 말투는 사무적이었지만 눈빛에는 묘한 감정이 섞여 있었다. 부러움인지 불쾌함인지 알 수 없는.

영실은 그 자리에서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했다.

한양. 경복궁. 임금.

노비 아이가 평생 상상도 해보지 못할 단어들이었다. 하늘에 있는 것들을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것처럼, 그런 세계는 자신과 아무 관련이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어머니는 아들의 보따리를 싸며 울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다. 불려가는 게 좋은 일일 수도 있고, 나중에 어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니 거기서도 나대지 마라. 시키는 것만 해. 잘하면 잘할수록 미움받는다는 거 잊지 마라."

"알겠습니다, 어머니."

"그리고…"

어머니는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었다.

"그래도, 손은 숨기지 마라. 그 손은 하늘이 준 거다. 어미가 무서워서 그런 말 했지만, 그 손을 죽이면 안 된다. 알겠냐."

영실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대신 가슴 안에서 무언가 단단한 것이 자리를 잡는 느낌이 들었다.

한양으로 가는 길은 멀었다. 보름이 넘게 걷고 또 걸었다. 함께 가는 관리는 말을 탔고 영실은 걸었다. 신분의 차이는 이동 수단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래도 영실은 걸으면서 주변을 봤다. 강이 흐르는 방향, 산이 기울어진 각도, 다리를 놓은 방식. 눈이 쉬지 않았다. 머리가 쉬지 않았다.

경복궁의 남쪽 문인 광화문이 보이던 날 저녁, 영실은 그 웅장한 문을 올려다봤다.

담은 높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5회 — 양천의 벽, 첫 번째 균열

경복궁 안은 다른 세상이었다.

기와지붕이 겹겹이 이어지고 넓은 마당이 끝없이 펼쳐졌다. 햇빛이 반사되는 청기와는 영실이 지금껏 본 어떤 것보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움을 감상할 틈은 없었다. 영실은 고개를 들면 안 됐다. 시선을 낮추고 발끝만 보며 걸어야 했다. 노비가 궁궐 안에서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건 금지였다.

그를 맞이한 사람은 공조의 관리 한 명이었다.

"네가 동래에서 올라온 영실이냐."

"예."

"전하께서 친히 만나보겠다 하셨다. 그러나 그 전에 규칙을 알아야 한다."

관리는 엄격한 얼굴로 말했다. 궁궐 안에서의 언행, 위치, 시선 처리. 하나하나 일러줬다.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네 신분은 노비다. 그 사실은 여기서도 변하지 않는다. 이해하느냐."

"예."

"재주가 있다 해서 분수를 넘어서는 안 된다. 시키는 일만 하라."

또 그 말이었다. 동래에서도, 한양으로 오는 길에서도, 이제 궁궐에서도.

영실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세종을 처음 만난 건 그로부터 사흘 후였다.

편전이라는 곳이었다. 왕이 신하들과 일을 보는 공간. 영실은 그 방 입구에서부터 엎드렸다. 바닥의 나무결이 눈에 들어왔다. 박달나무였다. 이음새가 정교했다. 누가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고개를 들어라."

음성은 생각보다 온화했다.

영실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왕은 생각보다 젊었다. 몸은 다소 비만한 편이었고 눈 밑에는 피로가 보였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무언가를 끝없이 파고드는 눈이었다.

"네가 지렛대를 혼자 터득했다고 들었다."

"예."

"어떻게 알았느냐."

영실은 잠깐 망설였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무거운 돌 위에 긴 막대를 올려놓고 한쪽을 누르면 반대편이 올라오는 걸 보았습니다. 그게 왜 되는지 생각했습니다. 누르는 힘이 돌을 기준으로 반대편으로 전달된다면, 누르는 쪽이 길수록 더 작은 힘으로 더 무거운 걸 올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종은 잠시 침묵했다.

"그게 맞다. 아르키메데스라는 고대 학자도 같은 원리를 발견하고 기록했다. 하지만 그는 수십 년을 공부한 끝에 깨달았다. 너는 몇 살에 알았느냐."

"열세 살쯤이었습니다."

또 침묵이 흘렀다.

세종이 신하들을 돌아봤다. 신하들의 표정은 제각각이었다. 놀라움, 불편함, 의심, 시기심. 그 복잡한 감정들이 한 방 안에 섞여 있었다.

"이 아이를 공조 소속으로 두어라. 장인들 아래서 일을 익히게 하라."

"전하, 신분이…"

"알고 있다."

세종의 대답은 짧고 분명했다.

그것이 첫 번째 균열이었다. 수백 년을 이어온 신분의 벽에 생긴, 아주 작고 가는 금 하나.

영실은 그 균열의 의미를 아직 몰랐다. 하지만 공조의 관리들은 알았다. 장인들은 알았다. 양반 신하들은 누구보다 먼저 알았다.

이 노비 아이가 언젠가 자신들의 세계를 흔들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날부터, 보이지 않는 싸움이 시작됐다.

6회 — 질투는 소리 없이 자란다

공조(工曹)의 작업장은 경복궁 서쪽 담장 안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목공, 석공, 금속 세공, 도자기 제작까지 온갖 장인들이 한데 모여 일하는 곳이었다. 냄새가 달랐다. 나무 타는 냄새, 쇠 달구는 냄새, 흙 이기는 냄새가 뒤섞여 영실의 코를 간질였다. 처음 그 냄새를 맡던 날 영실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두려움보다 설렘이 앞섰다.

하지만 그 설렘은 오래가지 않았다.

공조에는 이미 서열이 있었다. 오랜 장인들이 있었고, 그 아래 젊은 기술자들이 있었고, 맨 아래 허드렛일을 하는 잡역부들이 있었다. 영실은 그 잡역부보다도 아래였다. 노비 출신이었으니까.

첫날, 영실에게 주어진 일은 작업장 청소였다.

쇠 부스러기를 쓸고, 나무 톱밥을 치우고, 장인들이 쓰다 버린 재료 조각들을 분류해 쌓는 일이었다. 영실은 군말 없이 했다. 하면서 눈으로는 장인들의 손을 봤다. 망치를 두드리는 방식, 끌을 쓰는 각도, 불의 세기를 조절하는 방법. 청소하면서도 눈은 쉬지 않았다.

사흘째 되던 날, 영실은 작업장 한쪽에 버려진 쇠붙이 조각들을 보았다.

모양이 어중간해서 버린 것들이었다. 하지만 영실 눈에는 다르게 보였다. 저것들을 조합하면 작업장에서 쓰는 집게 도구보다 더 안정적인 고정 장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장인들이 작업할 때 재료가 미끄러지는 걸 자주 봤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였다.

밤에 혼자 만들었다. 버려진 조각들을 모아 용광로 불씨가 남아 있을 때 두드리고 구부렸다. 두 시간이 걸렸다.

다음 날 아침, 가장 나이 많은 장인인 박 도장(都匠) 앞에 가져갔다.

"이게 뭐냐."

"작업할 때 재료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는 도구입니다. 써보시면…"

박 도장은 그것을 한참 살폈다. 집어 들었다가 내려놨다.

"쓸 데 없다."

그리고 돌아섰다.

영실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물건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분명히 유용한 도구였다. 써보지도 않고 쓸 데 없다는 건 이유가 아니었다.

하지만 뭐라 말할 수 없었다. 노비가 장인에게 반박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날 오후, 박 도장의 제자 중 한 명인 이십 대 초반의 기술자 최 서방이 영실에게 다가왔다.

"야, 신참."

영실이 돌아봤다.

"도장님 앞에서 그런 거 내밀면 어떻게 해. 건방지게."

"건방진 게 아니라 유용하다 생각해서…"

"네가 유용한지 아닌지를 판단해? 노비 주제에?"

최 서방의 눈에 불쾌함이 가득했다. 영실보다 어려 보였지만 신분은 달랐다. 양인 출신 기술자였다.

"나 여기 삼 년 됐어. 근데 아직 도장님 앞에서 내 물건 내밀어본 적 없다. 너 온 지 나흘밖에 안 됐잖아. 분수를 알아야지."

영실은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최 서방은 혀를 찼다.

그날 밤 영실은 자신이 만든 고정 장치를 손에 들고 오래 들여다봤다. 버릴까 생각했다. 하지만 버리지 않았다. 대신 작업장 구석,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 놓아뒀다.

일주일 후, 박 도장이 정교한 작업을 하다가 재료가 자꾸 미끄러지자 욕을 내뱉었다.

영실이 조용히 구석에서 고정 장치를 가져왔다. 아무 말 없이 재료 옆에 놓고 작동 방법을 보여줬다.

박 도장은 써봤다. 재료가 움직이지 않았다. 작업이 훨씬 수월해졌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다음 날부터 그 고정 장치는 박 도장의 작업대 위에 올라와 있었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언급되지 않았다. 영실도 말하지 않았다.

최 서방은 그걸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라는 건 그렇게 소리 없이 자라기 시작한다. 처음엔 작은 불편함이다. 그다음엔 경계심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적의가 된다. 영실은 그 과정을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손이 말을 듣지 않으니까. 눈이 문제를 발견하면 머리가 해결책을 만들고 손이 움직이는 이 순환을, 죽지 않는 한 멈출 수 없었다.

한 달이 지났을 때, 세종이 공조 작업장을 방문했다.

왕이 직접 작업장에 내려오는 건 드문 일이었다. 장인들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세종은 천천히 작업장을 돌아봤다. 이것저것 물어봤다. 장인들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작업을 설명했다.

세종의 시선이 구석에서 조용히 일하고 있는 영실에게 닿았다.

"저 아이는?"

"동래에서 올라온 영실이옵니다."

"무슨 일을 시키고 있느냐."

"처음이라 청소와 잡역을 시키고 있사옵니다."

세종은 잠시 영실을 바라봤다. 영실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세종이 보고 있다는 걸 느꼈다.

"영실아."

"예, 전하."

"요즘 무엇을 보고 있느냐."

"장인 어른들이 일하시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보면서 무엇이 생각나느냐."

영실은 잠깐 망설였다. 그러다 말했다.

"저기 저 풀무가 있사온데, 바람을 넣는 방향을 바꾸면 불의 세기를 더 일정하게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은 한 방향으로만 바람이 들어가 불이 들쑥날쑥합니다."

장인들의 표정이 굳었다.

세종은 풀무를 바라봤다.

"어떻게 바꿀 것이냐."

"양쪽에서 번갈아 바람이 들어오게 하면 됩니다. 밀었다 당겼다 하는 운동을 양방향으로 연결하면 되는데, 원리는 제가 그림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세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려보아라."

영실은 땅바닥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그렸다. 구조를 설명했다. 세종은 쪼그려 앉아 그 그림을 들여다봤다. 신하들이 왕이 쪼그려 앉는 모습에 당황해 어쩔 줄 몰랐다.

"만들어볼 수 있겠느냐."

"해보겠습니다."

세종이 일어서며 박 도장에게 말했다.

"이 아이에게 재료를 줘라. 만들어보게 하라."

박 도장은 허리를 굽혔다. 하지만 눈빛은 달랐다.

세종이 떠난 후 작업장 안의 공기가 달라졌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가 느꼈다. 저 노비 아이가 왕의 눈에 들었다. 이제 이야기가 달라진다.

최 서방은 연장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저게 어디서 굴러온 거라고."

아무도 듣지 못한 줄 알았지만, 영실은 들었다.

들으면서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잘할수록 미움받는다는 걸. 어머니가 말해줬고, 동래에서 이미 겪었고, 이제 궁궐에서 또 시작됐다.

하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7회 — 해시계가 완성되던 날

영실이 공조에 온 지 두 해가 지났다.

처음엔 청소를 했다. 그다음엔 재료 분류를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장인들 옆에서 보조를 맡았다. 세종이 방문한 이후 박 도장도 영실을 노골적으로 내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칭찬은 없었다. 기회는 최소한으로 줬다.

영실은 그 최소한의 기회 안에서 최대한을 했다.

풀무는 성공적으로 개조됐다. 양방향 바람 공급 구조로 바꾸자 불의 세기가 일정해졌고, 금속 가공의 정밀도가 높아졌다. 장인들은 결과를 좋아하면서도 영실에 대한 공을 인정하지 않았다.

"원래 좀 더 나아질 때가 됐던 거야."

"운이 맞았던 것뿐이고."

그런 말들이 떠돌았다. 영실은 그 말들을 들어도 고개를 숙였다. 항의하지 않았다. 억울했지만, 증명하는 방법은 말이 아니라 다음 작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봄날 세종이 영실을 편전으로 불렀다.

"해시계를 만들어보겠느냐."

당시 조선에는 물시계가 있었다. 하지만 물시계는 관리가 어려웠다. 물이 증발하거나 넘치면 오차가 생겼다. 그리고 흐린 날에는 해를 볼 수 없어 시간을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백성들이 농사를 짓고 생활하는 데 정확한 시간이 필요했다.

중국의 해시계 도안이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위도에 맞지 않았다. 중국과 조선은 해가 뜨고 지는 각도가 달랐다. 중국 도안을 그대로 쓰면 오차가 생겼다.

"중국 도안을 보아라. 그리고 조선 하늘에 맞게 고쳐보아라."

영실은 도안을 받아 들었다.

한자는 완전히 다 읽지 못했다. 세종이 아는 관리를 붙여줬다. 도안의 내용을 설명해주는 역할이었다. 영실은 설명을 듣고, 직접 계산했다. 태양의 각도, 계절마다 달라지는 그림자의 길이, 조선의 위도에서 해가 움직이는 궤적.

수학을 배운 적 없었다. 하지만 계산하는 법은 알았다.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졌고 그 그림을 숫자로 옮겼다.

석 달이 걸렸다.

석 달 동안 영실은 자고 일어나는 시간 외에는 이 작업만 했다. 돌을 깎고 각도를 새기고 실제 태양 아래 놓아 그림자를 확인했다. 오차가 있으면 다시 계산했다. 다시 깎았다. 다시 확인했다.

주변에서 수군거렸다.

"저게 될 것 같냐."

"노비 주제에 천문을 논한다고."

"전하가 너무 무리한 일을 맡겼어."

박 도장은 겉으로 아무 말 없었지만, 영실에게 작업에 필요한 재료를 요청하면 꼭 하루씩 늦게 줬다. 의도된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결과는 같았다. 방해였다.

최 서방은 더 노골적이었다. 영실이 깎아둔 돌에 실수인 척 물을 엎었다. 측정해둔 각도 표시를 지웠다. 증거가 없었다. 영실은 알면서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세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영실은 완성된 해시계를 들고 마당에 섰다.

둥근 돌판 위에 기울어진 막대가 세워져 있었다. 막대의 각도는 조선의 위도에 맞게 정확히 계산됐다. 돌판 위에는 열두 시각의 눈금이 새겨져 있었다.

해가 떠오르며 막대의 그림자가 돌판 위에 드리웠다.

그림자 끝이 눈금 위에 정확히 놓였다.

세종이 물시계와 비교했다. 일치했다. 두 시간 후에 다시 확인했다. 또 일치했다. 저녁에 확인했다. 오차가 없었다.

"앙부일구(仰釜日晷)."

세종이 이름을 붙였다. 하늘을 향해 입을 벌린 가마솥 모양의 해시계라는 뜻이었다.

"이것을 전국 주요 고을에 설치하라. 백성들이 시간을 알 수 있게 하라."

신하들이 명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세종이 영실을 바라봤다.

"수고했다."

딱 세 글자였다.

하지만 영실은 그 세 글자를 들으며 눈이 뜨거워졌다. 열두 살부터 지금까지, 칭찬이라는 걸 받아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도 걱정이 앞서 칭찬을 아꼈다. 동래의 관리들은 결과만 가져갔고 이름은 부르지 않았다. 공조의 장인들은 인정을 거부했다.

세 글자였지만 그 안에 오랜 시간이 들어 있었다.

영실은 엎드렸다.

"황공하옵니다."

작업장으로 돌아오는 길에 최 서방이 영실을 막아섰다.

"좋겠다. 왕한테 칭찬받고."

비꼬는 말투였다.

"별거 아니야. 중국 도안 따라 만든 거잖아."

영실은 멈추지 않고 걸었다.

"야, 말하는데 멈춰봐."

영실이 걸음을 멈췄다. 돌아봤다.

"뭐가 하고 싶은 말씀이십니까."

"하고 싶은 말?" 최 서방은 낮게 웃었다. "별건 아니고. 너 잘나가도 결국 노비야. 내가 10년 여기서 일하면 관직도 받을 수 있어. 너는? 아무리 잘해도 노비 장인이야. 거기까지야."

영실은 그 말을 들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사실이니까.

이 나라의 법은 그랬다. 아무리 잘해도, 신분의 벽은 넘을 수 없었다. 세종이 칭찬해도, 해시계를 만들어도, 앙부일구가 전국에 깔려도,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기록에 남지 않을 수 있었다.

영실은 다시 걸었다.

하지만 그날 밤 혼자 앉아 생각했다. 오래, 아주 오래.

최 서방의 말이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틀렸다. 거기까지라는 말. 영실은 거기까지가 어딘지 아직 몰랐다. 아무도 몰랐다. 세종도, 최 서방도, 어머니도.

모르면 가봐야 했다.

8회 — 귀족들의 모함, 시작되다

앙부일구 이후 영실의 위치가 달라졌다.

공조에서의 직함이 생겼다. 관노 신분이었지만 기술직 직책을 부여받았다. 급료가 나왔다. 작업장에서 자신만의 작업 공간이 생겼다. 재료를 요청하면 다음 날 바로 나왔다.

박 도장은 표정 변화 없이 예전처럼 대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재료를 늦게 주지 않았다. 최 서방은 영실 앞에서 말수가 줄었다.

대신 더 위쪽에서 문제가 시작됐다.

조정의 예조(禮曹) 관리들, 사헌부(司憲府)의 감찰관들, 고위 신하들 사이에서 불만이 생겨났다. 이유는 하나였다. 노비 출신이 기술직 관직에 준하는 대우를 받는다는 것.

"이건 나라의 기강을 흔드는 일이오."

사헌부의 감찰 이영준이라는 자가 대표 격이었다. 그는 오랜 성리학자 가문 출신으로, 신분 질서를 하늘의 이치로 보는 사람이었다. 하늘이 사람을 나눈 데는 이유가 있다. 양반과 천민을 구별하는 건 차별이 아니라 질서다. 그 질서를 무너뜨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그의 논리는 정연했다. 그리고 많은 신하들이 동의했다.

"전하, 기술이 뛰어난 것과 신분이 높은 것은 별개이옵니다. 아무리 손재주가 좋아도 천민은 천민이옵니다. 이 아이에게 특별한 대우를 하는 것은 조선의 신분제 근간을 흔들 위험이 있사옵니다."

세종은 이 상소를 읽으며 한참 생각했다.

그는 영실의 재능을 알았다. 조선에 필요한 인물이라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조정의 신하들이 반대하면 일을 추진하기 어려웠다. 왕이라도 신하들의 집단적 저항을 무시하기는 힘들었다.

고심 끝에 세종은 절충안을 택했다.

영실을 공식적으로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양인(良人)으로 만드는 대신, 관직은 주지 않는 형태였다. 신분만 올리고 직책은 유지하지 않는 방식으로 반대를 무마하려 했다.

하지만 이영준은 그것도 반대했다.

"노비를 양인으로 만드는 것 자체가 선례가 됩니다. 이 아이 하나 때문에 이후 수많은 천민들이 재주를 내세워 신분 상승을 요구할 것이옵니다."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신하가 더 많았다.

세종은 표정이 굳었다.

영실은 이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아무것도 몰랐다.

작업장에서 다음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물시계의 개량이었다. 기존 물시계는 온도에 따라 물의 점성이 달라져 오차가 생겼다. 그것을 보정하는 구조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다 박 도장이 불렀다.

"영실아. 잠깐 와봐라."

박 도장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무언가 불편한 걸 말해야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조정에서 논쟁이 있다. 네 신분 문제로."

영실이 조용히 들었다.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다. 하지만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 나대지 마라. 무언가 새로 만들거나 전하 앞에 나서지 말고."

영실은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박 도장은 돌아서다가 멈췄다.

"……네 실력은 내가 본 것 중에 제일이다."

그 한마디를 남기고 걸어갔다.

영실은 그 자리에 서서 박 도장의 뒷모습을 봤다. 삼 년 만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아끼던 말을 하필 지금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영실은 어렴풋이 느꼈다.

혹시 마지막이 될 수도 있어서일까.

그날 밤 영실은 오랜만에 하늘을 봤다. 북극성이 거기 있었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저 별은 누가 못 나오게 막아도 저 자리에 있었다. 땅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영실은 별이 아니었다. 땅 위에서 살아야 했다. 땅 위의 규칙을 따라야 했다.

그 규칙이 때로는 하늘보다 더 높은 벽처럼 느껴졌다.

9회 — 가마 사고, 덫인가 실수인가

세종은 결국 영실의 손을 들어줬다.

논쟁이 계속되는 가운데 영실에게 새로운 과제를 맡겼다. 자격루(自擊漏), 스스로 치는 물시계였다. 사람이 항상 옆에 서서 시각을 알려줄 필요 없이, 정해진 시각이 되면 자동으로 소리를 내는 시계였다. 인형이 북을 치고 종을 울리는 구조였다.

이것이 완성되면 그 어떤 비판도 막을 수 있었다. 조선 역사에 없던 기계였다. 중국에도 완성된 형태는 없었다. 영실이 처음부터 설계해야 했다.

영실은 매달렸다.

이년이 걸렸다.

물의 흐름이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게 하는 복잡한 밸브 구조, 그 흐름이 특정 수위에 도달하면 지렛대를 건드려 인형을 작동시키는 연결 장치, 인형이 북채를 들어 올려 내리치는 정교한 관절 구조까지. 모든 것을 영실이 설계하고 만들었다.

완성된 날, 자격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시에 북을 쳤다.

세종은 그 소리를 듣고 한참 침묵했다. 그러다 말했다.

"이 나라가 얻은 보물이다."

그리고 마침내 명을 내렸다.

영실을 정5품 행사직(行司直)에 임명한다.

관직이었다. 무관직의 하나였지만, 엄연한 조정 관원의 직책이었다. 노비 출신이 관직을 받는 건 조선 역사에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영준을 비롯한 반대파 신하들이 강하게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세종은 물러서지 않았다.

"재주와 공로로 나라에 기여한 자를 신분으로만 막는 것은 과인이 용납할 수 없다."

결국 임명은 관철됐다.

영실은 관복을 입었다.

생전 처음으로 관복을 입는 날 아침, 손이 떨렸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동래의 헛간, 처마 끝의 하늘, 북극성. 열두 살의 자신이 상상도 못 할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적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관직 임명 후 일 년이 지났을 때, 사건이 벌어졌다.

세종이 온양 온천으로 행차하는 길이었다. 왕의 가마를 새로 제작했는데, 그 가마 제작에 영실이 관여했다. 보다 안정적이고 승차감이 좋은 가마를 만들기 위해 구조를 개선했다.

그런데 행차 도중 가마 기둥이 부러졌다.

세종은 다치지 않았다. 하지만 왕의 가마가 부러진 것은 중대한 사건이었다. 불경한 일이었다. 왕을 위험에 빠뜨린 책임을 물어야 했다.

사헌부가 즉각 움직였다.

"가마 제작에 관여한 영실을 조사하라."

수사가 시작됐다. 가마의 부러진 기둥을 분석했다. 결론은 제작상의 결함이었다. 기둥 연결 부분의 목재가 내부에서 이미 썩어 있었는데 그것을 확인하지 않고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영실은 억울했다.

목재는 자신이 고른 게 아니었다. 재료 선택은 목재 담당 장인의 몫이었다. 영실은 구조 설계에만 관여했다. 하지만 가장 최종적으로 가마를 완성한 책임자로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사헌부의 심문이 시작됐다.

"네가 가마 제작 책임자였느냐."

"구조 설계를 맡았습니다. 재료 선택은 담당 장인이 했습니다."

"하지만 최종 확인은 네가 했느냐."

"했습니다. 하지만 그 목재는 겉으로 봐서는 이상이 없었습니다. 내부에 썩은 부분이 있었다면 쪼개보지 않고서는…"

"변명은 필요 없다. 결과적으로 전하의 가마가 부러졌다. 책임자는 책임을 져야 한다."

영실은 그 자리에서 이게 단순한 실수인지, 아니면 누군가 만들어낸 덫인지 알 수 없었다. 목재를 고른 장인이 실수를 했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누군가 일부러 썩은 목재를 끼워 넣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심문하는 이영준의 눈빛에는 오래된 만족감이 있었다.

영실은 그 눈빛에서 답을 봤다.

덫이었다.

10회 — 역사는 그를 지웠다

처벌은 무거웠다.

관직 박탈. 곤장 팔십 대. 유배.

세종이 감형했다. 곤장을 줄이고 유배를 철회했다. 하지만 관직은 다시 줄 수 없었다. 그렇게 하면 반대파 신하들이 더 강하게 들고 일어날 것이었다. 왕도 정치를 해야 했다. 영실 한 명을 위해 조정 전체를 적으로 돌릴 수 없었다.

영실은 곤장을 맞았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관복을 입어본 지 일 년 만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 것보다 더 아래로 떨어졌다.

사람들은 그것을 끝이라 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 이후 영실의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서 사라진다. 처벌 기록까지는 남아 있다. 하지만 그다음, 영실이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죽었는지, 어디에 묻혔는지, 아무것도 없다.

이름이 지워졌다.

그가 만든 앙부일구는 전국에 설치됐다. 자격루는 오랫동안 조선의 표준 시계로 쓰였다. 그가 개발에 참여한 측우기, 혼천의, 수표 등이 조선의 과학을 수백 년 앞당겼다. 하지만 그것들을 만든 손의 주인 이름은 기록에서 희미해졌다.

누가 지웠을까.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가마 사고 이후 영실에 대한 기록이 의도적으로 정리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당시 반대파 신하들이 노비 출신 관직자의 존재를 기록에서 지우려 했을 것이라고.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수백 년 후 역사가 그를 다시 불렀다는 것이다.

조선의 가장 찬란한 과학적 유산들을 누가 만들었는지를 추적하던 학자들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는 기록들을 맞춰보다가 한 이름을 발견했다.

장영실.

동래 관비의 아들. 노비. 관직을 받았다 빼앗긴 장인.

그런데 그가 살던 세종 연간에 조선의 과학이 가장 눈부시게 발전했다.

우연이 아니었다.

수백 년 후, 현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서울의 한 중학교 교실. 역사 수행평가 주제가 칠판에 적혔다.

"조선시대 인재와 신분제 — 장영실의 삶을 통해 현대를 바라보다"

칠판 앞에 선 역사 선생님이 말했다.

"오늘부터 세 가지 시대의 이야기를 공부할 거예요. 장영실의 시대, 정약용의 시대, 그리고 여러분이 살고 있는 지금. 이 세 시대에 공통점이 있어요. 잘하면 잘할수록 미움받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교실 뒤편 창가에 앉은 남학생 하나가 창밖을 보며 피식 웃었다.

강준호. 열다섯 살. 전교 1등.

그리고 반에서 가장 왕따를 당하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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