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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21회 — 왕이 된 사람 옆에 내가 있어도 되나요
담당 구역이 바뀌었다.
다음 주가 됐다.
박 상궁이 아침 교육에서 새 배치를 알려주셨다.
서아는 북쪽 행각 구역을 맡게 됐다.
동쪽 내전은 다른 궁녀가 맡았다.
서아는 새 구역 배치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일이었다.
알고 있었던 일이었다.
그런데.
첫날은 이상했다.
청소를 하러 나갔다.
북쪽 행각은 동쪽 내전보다 넓었다.
복도가 길었다.
사람이 더 많이 다녔다.
서아는 빗자루를 들고 복도를 쓸었다.
쓸면서 자꾸 동쪽을 봤다.
동쪽 내전이 있는 방향.
이방과 왕자님이, 아니 이제 세자 저하가 계신 방향.
빗자루질을 하다가 멈추게 됐다.
그냥 멍하니 그쪽을 보게 됐다.
"윤서아."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동쪽 내전을 맡게 된 궁녀였다.
나이가 서아보다 조금 많아 보이는 궁녀였다.
"여기 구역이 넓어서 처음엔 헷갈릴 거야."
"아, 예."
"도움 필요하면 말해."
"감사합니다."
궁녀가 지나갔다.
서아는 다시 빗자루를 들었다.
동쪽을 보지 않으려고 했다.
그냥 앞만 봤다.
사흘이 지났다.
북쪽 행각 청소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복도가 길었지만 요령이 생겼다.
어느 구석에 먼지가 많이 쌓이는지.
어느 시간에 사람이 많이 다니는지.
서아는 열심히 했다.
박 상궁이 한 번 보시고 말씀하셨다.
"잘 하고 있다."
그 말이 위로가 됐다.
그런데 저녁이 되면.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 동쪽을 봤다.
기와 지붕들이 보였다.
그 너머 어딘가에 세자 저하 처소가 있을 것이다.
별자리를 가르쳐 주시던 분이.
살구꽃을 같이 보시던 분이.
안 괜찮아도 된다는 말을 들으시던 분이.
지금 거기 계실 것이다.
닷새째 됐을 때였다.
점심을 먹고 나서 서아는 혼자 복도를 걸었다.
채린이는 오후 교육 준비를 하러 먼저 갔다.
서아는 조금 늦게 나왔다.
복도를 걷는데.
앞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었다.
여럿이었다.
수행하는 내관들이 앞뒤로 있었다.
그 가운데——
이방과 왕자님이었다.
아니, 세자 저하였다.
서아는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숙였다.
옆으로 비켰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서아 앞에서 멈췄다.
서아는 굳었다.
"고개 들어라."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조용한.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보고 계셨다.
달라지신 것 같기도 하고.
같으신 것 같기도 했다.
옷이 달랐다.
전보다 격식 있는 옷이었다.
그런데 눈빛은 같았다.
서아를 보는 눈빛이.
예전과 같았다.
"윤서아."
"예, 저하."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구역이 바뀌었구나."
"예."
"잘 지내느냐."
서아는 그 질문이 뜨거웠다.
잘 지내느냐고.
이렇게 마주칠 줄 몰랐는데.
이렇게 물어보실 줄 몰랐는데.
"예. 잘 지내고 있습니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수행 내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그리고 걸으셨다.
서아 옆을 지나쳐.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세자 저하의 뒷모습이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수행 내관들이 따라갔다.
복도가 다시 조용해졌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잘 지내느냐고 하셨다.
예전과 같은 눈빛으로.
서아는 손을 가슴 쪽에 올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오후 교육이 끝나고 채린이랑 처소로 돌아왔다.
채린이가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뭔 일 있었어."
"세자 저하 마주쳤어."
채린이가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복도에서. 점심 먹고 오는 길에."
"뭐라고 하셨어?"
"잘 지내느냐고."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게 다야?"
"응."
"그런데 왜 얼굴이 그래."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눈빛이 같았어."
"뭐가."
"예전이랑. 세자가 되셨는데. 수행 내관들이 옆에 있었는데. 나 보시는 눈빛이 예전이랑 같았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앉았다.
서아도 앉았다.
"채린아."
"응."
"왕이 될 분 옆에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세자가 되셨잖아. 곧 왕이 되실 거잖아. 그런 분이랑 내가——"
"지금 옆에 있는 게 아니잖아."
채린이가 말했다.
"지금은 복도에서 마주친 거잖아."
"그래도."
"그래도가 뭐야."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지금 네가 뭘 걱정하는 거야."
서아는 생각했다.
뭘 걱정하는 걸까.
"왕이 될 분한테 마음을 두는 게. 그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맞는지 틀린지가 중요한 거야?"
"중요하지."
"왜."
"마음이 있어도 되는 상황이어야 마음이 있는 거 아닌가 해서."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마음이 상황을 보고 생기는 거야?"
서아는 그 말에 멈췄다.
"……아니지."
"그럼."
채린이가 앞을 봤다.
"마음은 그냥 생기는 거야. 상황이 맞아야 생기는 게 아니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근데 채린아."
"응."
"마음이 생겼다고 다 되는 게 아니잖아."
"알아."
"왕이 되실 분이랑 수습 궁녀잖아."
"알아."
"이루어질 수 없는 거잖아."
"알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런데 서아야."
"응."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마음이 없어지는 거야?"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없어지지 않았다.
알면서도.
없어지지 않았다.
"그러면."
채린이가 말했다.
"그냥 가지고 있어."
"가지고 있다가 어떻게 해."
"어떻게 할 필요 없어."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가지고 있다가. 언젠가 놓을 때가 오면 놓는 거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언젠가 놓을 때가 오면.
"올까? 그런 때가."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와야지."
그 말이 확신이 아니었다.
그래도 와야 한다는 말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날 밤.
서아는 창밖을 봤다.
별이 떠 있었다.
북쪽에서 조금 서쪽을 봤다.
실수가 보였다.
두 기둥처럼 마주 보는 두 별.
하늘의 집.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왕이 될 분 옆에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그 질문을 했다.
채린이는 마음은 상황을 보고 생기는 게 아니라고 했다.
그 말이 맞았다.
그런데.
있어도 되는 건지.
그 질문은 다른 거였다.
서아는 실수를 봤다.
두 별이 마주 보고 있었다.
하나만 있으면 집이 안 된다고 생각했었다.
두 기둥이 있어야 집이 된다고.
그런데.
지금 한 기둥이 아주 높아졌다.
세자가 되셨다.
곧 왕이 되실 것이다.
서아는 낮은 곳에 있다.
수습 궁녀.
두 기둥의 높이가 달라졌다.
그래도.
집이 될 수 있을까.
서아는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알 수 없는 것을 알려고 하면 안 됐다.
채린이 말대로.
그냥 가지고 있자.
언젠가 놓을 때가 오면 놓는 거다.
아직은 아니니까.
며칠이 지났다.
북쪽 행각 청소를 했다.
교육을 받았다.
밥을 먹었다.
그냥 하루하루를 보냈다.
세자 저하는 그 이후로 마주치지 않았다.
구역이 달랐다.
다니시는 길이 달랐다.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서아는 복도를 청소하다가 멈출 때가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저 멀리 동쪽 방향을 보다가.
다시 앞을 보고 청소를 했다.
채린이는 그런 서아를 볼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서 자기 일을 했다.
그게 고마웠다.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오전 교육이 끝나고 서아는 혼자 마당에 나왔다.
살구나무 마당.
꽃이 다 진 살구나무가 있는 곳.
지금은 잎이 무성했다.
초록빛 잎들이.
서아는 나무 앞에 섰다.
꽃이 없었다.
꽃이 있던 자리에 잎이 있었다.
그래도 나무는 나무였다.
같은 나무였다.
"살구나무를 보러 왔느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돌아봤다.
세자 저하였다.
혼자였다.
수행 내관들이 없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저하."
"혼자 있었느냐."
"예."
세자 저하가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살구나무 앞에 서셨다.
서아 옆에.
예전처럼.
적당한 거리를 두고.
"꽃이 다 졌구나."
"예. 대신 잎이 많이 났어요."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잎이 무성하다."
"예."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색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살구꽃 향기는 없었다.
대신 풀 냄새가 났다.
봄이 깊어진 냄새였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별자리."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예."
"아직 다 못 가르쳐 줬다."
"예."
세자 저하가 하늘을 봤다.
낮 하늘이었다.
"벽수(壁宿)다."
서아는 들었다.
"벽수요?"
"하늘의 담장이라고 불린다."
"담장이요?"
"두 개가 나란히 있다. 담장처럼."
서아는 하늘을 봤다.
낮 하늘이라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에 찾아볼게요."
"북동쪽에 있다."
"두 개가 나란히요."
"그렇다."
서아는 그 별을 생각했다.
하늘의 담장.
두 개가 나란히.
담장 안에는 뭐가 있을까.
"왕자님."
말이 나왔다.
왕자님이라고.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황급히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저하——"
"괜찮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여기선 괜찮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여기선.
살구나무 마당에서는.
둘만 있는 이곳에서는.
"왕자님."
서아가 다시 말했다.
이번엔 일부러.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예."
"하늘의 담장 안에는 뭐가 있어요?"
세자 저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담장이 있으면 안이 있겠지."
"안에 뭐가 있을 것 같으세요?"
세자 저하가 하늘을 봤다.
"조용한 것들."
"조용한 것들이요?"
"담장이 있으면 밖의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담장이 있으면 밖의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조용한 것들이 있다.
"왕자님은 그런 곳이 좋으세요?"
"그렇다."
"저도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이 그런 곳 같아요."
서아가 말했다.
"담장이 있고, 조용하고, 밖에서 잘 안 보이는."
세자 저하가 마당을 봤다.
세 면이 담벼락이었다.
한 면만 트여 있는.
"그렇구나."
"여기 오면 밖이 조용해지는 것 같아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나도 그렇다."
그 말이 짧게 나왔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나도 그렇다.
세자 저하도 이 마당이 조용하게 느껴지신다는 것.
그 이유가 나무 때문인지.
담장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서아는 묻지 않았다.
그냥 같이 나무를 봤다.
얼마나 있었을까.
세자 저하가 몸을 돌리셨다.
"들어가야겠다."
"예."
"오늘 밤에 벽수 찾아봐라."
"예. 찾으면 말씀드릴게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말할 수 있겠느냐."
서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구역이 달랐다.
마주칠 일이 없었다.
어디서 말씀드릴 수 있을까.
"우연히 마주치면요."
서아가 말했다.
"며칠 전처럼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며칠 전에도 우연이었느냐."
서아는 잠깐 멈췄다.
며칠 전 복도에서 마주친 것이.
세자 저하가 지나가시는 걸 알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진짜 우연이었다.
"예. 우연이었어요."
세자 저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이 있다."
서아는 그 말이 뭔지 알 것 같았다.
"어딘가요?"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살구나무 마당."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 마당.
세자 저하가 이 마당에 자주 오신다는 말이었다.
우연히 마주치고 싶으면.
여기 오면 된다는 말이었다.
"……예."
서아가 말했다.
세자 저하가 마당을 나가셨다.
서아는 그 뒷모습을 봤다.
담벼락 모퉁이를 돌아 사라지셨다.
서아는 살구나무를 봤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꽃이 졌다.
잎이 났다.
그래도 나무는 나무였다.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
살구나무 마당.
서아는 그 말을 마음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살구나무 마당."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세자 저하 뵈었어?"
"응."
"뭐라고 하셨어?"
"별자리 가르쳐 주셨어. 벽수."
"그게 다야?"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이 있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어디래."
"살구나무 마당."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오래.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왕이 될 분 옆에 있어도 되느냐고 물었잖아."
"응."
채린이가 앞을 봤다.
"왕이 될 분이 먼저 자리를 만드시면."
"응."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 아닌 것 같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세자 저하가 먼저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을 알려주셨다.
그건 세자 저하의 선택이었다.
서아가 있어도 된다고.
그분이 먼저 말씀하신 것이었다.
"채린아."
"응."
"그러면 나는."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 자리에 가도 되는 거야?"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조심하면서."
"조심하면서."
"응. 선 넘지 않으면서."
"응."
"그냥 있을 수 있는 만큼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있을 수 있는 만큼만.
"채린아."
"응."
"고마워."
"뭘."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누웠다.
창밖을 봤다.
북동쪽 하늘을 봤다.
별이 두 개 보였다.
나란히.
담장처럼.
"벽수다."
혼자 조용히 말했다.
하늘의 담장.
담장 안에는 조용한 것들이 있다.
밖의 소리가 들어오지 않는다.
살구나무 마당처럼.
서아는 그 두 별을 봤다.
나란히 있는 두 별.
담장처럼 서로를 지키고 있는.
왕이 될 분 옆에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그 질문의 답을.
오늘 세자 저하가 주셨다.
말씀으로는 하지 않으셨지만.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을 알려주시면서.
있어도 된다고.
서아는 눈을 감았다.
살구나무 마당.
내일 청소를 마치고.
거기 가볼 것이다.
우연히.
아니.
우연처럼.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눈을 감았다.
봄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22회 예고
"멀어지는 게 맞는 걸까"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세자 저하가 계셨다. 우리는 또 나란히 나무를 봤다. 그런데 그날 이방원 왕자님이 나를 불렀다. 이번엔 다른 말씀을 하셨다. 형님 곁을 떠나라고. 형님을 위해서.
작가 한마디: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이 살구나무 마당이라는 말, 세자 저하가 먼저 자리를 만들어 주신 거잖아요.
이 될 분 옆에 있어도 되냐고 물었던 서아한테 그분이 직접 답을 주셨어요. 22회에서 이방원 왕자님이 다시 등장합니다. 이번엔 더 직접적인 말씀을 하세요. 함께 봐요.
22회 — 멀어지는 게 맞는 걸까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다음 날 오전이었다.
청소를 마치고 혼자 걸었다.
담벼락 길을 지나서.
좁은 모퉁이를 돌아서.
마당 앞에 섰다.
세자 저하가 계셨다.
돌 의자에 앉아 계셨다.
잎이 무성해진 살구나무 아래에.
서아를 보셨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도 아무 말 없이 들어갔다.
나무 옆에 섰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벽수 찾았어요."
서아가 말했다.
"그렇구나."
"나란히 있는 게 맞죠?"
"그렇다."
"담장 같더라고요. 진짜로."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어떻게."
"두 별이 나란히 있는데, 그 사이가 막혀 있는 것 같았어요. 그 안이 조용한 것 같았어요."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잘 봤다."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잘 봤다고 하셨다.
두 사람이 나란히 있었다.
말이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꽃 향기는 없었다.
풀 냄새가 났다.
그래도 좋았다.
그날 오후였다.
박 상궁이 서아를 불렀다.
"윤서아."
"예."
"정안군 나리께서 부르신다."
서아는 굳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또.
"예."
이방원 왕자님 처소로 갔다.
문을 두드렸다.
"윤서아,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들어갔다.
이방원 왕자님이 앉아 계셨다.
지난번과 달리 표정이 더 무거웠다.
뭔가 결정한 사람의 표정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앉아라."
서아는 앉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바로 말씀하셨다.
"형님이 곧 왕이 되신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어도 말하는 것이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왕이 되시면."
"예."
"형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정해진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정해진 사람.
"왕비가 있을 것이다. 후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신하들이 있을 것이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수습 궁녀가 있을 자리는 없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수습 궁녀가 있을 자리는 없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 말이었다.
그런데 이방원 왕자님 입에서 나오니까.
더 단단하게 들렸다.
"알고 있습니다."
"안다고 해서 행동이 되는 게 아니더라."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
서아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아셨다.
"형님이 거기 자주 나오신다는 걸 알고 있다."
"……예."
"네가 거기 있었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창밖을 봤다.
"형님이 먼저 말씀하셨느냐."
"예."
"뭐라고."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이라고."
이방원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형님답구나."
그 말이 나왔다.
짧고 조용하게.
뭔가 복잡한 감정이 담긴 것 같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윤서아."
"예."
"형님을 위해서 묻는다."
서아는 그 말이 지난번과 달랐다는 걸 알았다.
지난번엔 선 넘지 말라고 하셨다.
이번엔.
형님을 위해서.
"형님 곁에서 멀어질 수 있겠느냐."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멀어질 수 있겠느냐.
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 아니었다.
의지가 있느냐는 말도 아니었다.
그냥.
할 수 있겠느냐.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이 왕이 되시면."
"예."
"형님 주변의 모든 것이 달라진다."
"예."
"수습 궁녀 하나가 형님 눈에 들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서아는 그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았다.
"형님이 다치신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왕의 사사로운 감정은 약점이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의 사사로운 감정은 약점이 된다.
이방과 왕자님이.
서아를 생각하시는 마음이.
왕이 되시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
서아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차가웠다.
"형님이 다치시는 게 싫으냐."
이방원 왕자님이 물으셨다.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싫겠지."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형님을 생각한다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형님을 생각한다면.
멀어져야 한다.
그게 이방원 왕자님이 하시는 말씀이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이 멀었다.
발이 무거웠다.
형님이 다치신다.
왕의 사사로운 감정은 약점이 된다.
서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알고 있었다.
왕자님이 왕이 되시면 달라진다는 것.
모든 것이 달라진다는 것.
그런데.
멀어질 수 있겠느냐고.
그 질문에 답을 못 했다.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멀어지지 않으면 왕자님이 다치신다.
채린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다칠 사람은 너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방원 왕자님은 형님이 다친다고 하셨다.
서아가 다치는 건 서아 일이었다.
왕자님이 다치시는 건.
달랐다.
처소에 들어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고 바로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응."
채린이가 서아 옆에 앉았다.
"뭐라고 하셨어."
서아는 들은 말을 전했다.
왕이 되시면 달라진다.
왕의 사사로운 감정은 약점이 된다.
형님을 위해서.
멀어질 수 있겠느냐.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말이 없었다.
한참.
"채린아."
"응."
"멀어지는 게 맞는 걸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맞아."
"알아."
"왕이 되시면 모든 게 달라져."
"알아."
"형님이 다치신다는 것도."
"알아."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런데 서아야."
"응."
"멀어지는 게 맞는 건지는 나도 모르겠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맞는데."
"응."
"그래도 모르겠어."
채린이가 앞을 봤다.
"왕자님이 먼저 자리를 만들어 주셨잖아."
"응."
"살구나무 마당."
"응."
"그건 왕자님 선택이잖아."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왕자님이 먼저 선택하신 거랑. 이방원 왕자님이 멀어지라고 하시는 거랑."
"응."
"두 개가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같은 건지 다른 건지.
이방과 왕자님이 먼저 살구나무 마당을 알려주셨다.
이방원 왕자님이 멀어지라고 하셨다.
두 사람이 다른 말을 하셨다.
형제인데.
"채린아,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서아야."
"응."
"왕자님한테 물어봐야 할 것 같아."
서아는 그 말이 뜻밖이었다.
"왕자님한테?"
"응."
"뭘."
"멀어지는 게 맞는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한테 물어보는 것.
멀어지는 게 맞는지.
"그걸 물어봐도 돼?"
"왕자님이 선택하셔야 하는 거잖아."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 네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왕자님 일이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 일이다.
왕자님이 다치실 수도 있다는 것.
그것도 왕자님이 아셔야 했다.
왕자님이 선택하셔야 하는 것이었다.
"……그렇네."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어봐."
"언제."
"살구나무 마당에서."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그곳에서 물어봐."
다음 날 오전이었다.
청소를 마쳤다.
서아는 살구나무 마당으로 갔다.
세자 저하가 계셨다.
오늘도 돌 의자에 앉아 계셨다.
나무를 보고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서아를 보셨다.
"왔느냐."
"예."
서아는 나무 앞에 섰다.
오늘은 앉지 않았다.
서 있었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왜 서 있느냐."
"드릴 말씀이 있어서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표정이 달라졌다.
뭔가 아는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방원이 불렀느냐."
"예."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뭐라고 하더냐."
"왕자님이 왕이 되시면 달라진다고요."
"그렇다."
"왕의 사사로운 감정은 약점이 된다고요."
세자 저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다."
서아는 세자 저하를 봤다.
"왕자님."
"응."
"물어봐도 될까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해봐라."
서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멀어지는 게 맞는 걸까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침묵이 흘렀다.
봄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그게 이방원이 한 말이냐."
"예."
"이방원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맞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맞다고 하셨다.
"그러면——"
"그런데."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다를 수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다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세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기다렸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살구꽃이 지면 잎이 난다."
서아는 그 말이 뜬금없으면서도 뜬금없지 않았다.
"예."
"잎이 나도 나무는 나무다."
"예."
"꽃이 있을 때도 나무였고. 잎이 있을 때도 나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서아야."
"예."
"내가 왕이 되어도."
서아는 숨을 참았다.
"나는 나다."
그 말이 나왔다.
조용하고 낮게.
나는 나다.
왕이 되어도.
그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네가 여기 있어도. 나무는 나무다."
서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았다.
네가 여기 있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이방원이 걱정하는 건 맞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약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맞다."
"예."
"그런데."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모든 것을 약점으로 보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모든 것을 약점으로 보면.
아무것도 가질 수 없다.
"왕자님."
서아의 목소리가 떨렸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저도 무서워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다치시는 게 무서워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그래서 이방원이 하는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구나."
"근데 멀어지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요."
서아는 솔직하게 말했다.
"멀어지고 싶지 않은 것도 맞고. 왕자님이 다치시면 안 된다는 것도 맞고. 두 개가 다 맞는데 같이 있을 수 없어서요."
세자 저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내가 결정하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내가 결정하겠다.
"네가 고민할 일이 아니다."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내 일이다."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내 일이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면."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결정하시면."
"응."
"저는 따르면 되는 거예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그래."
"멀어지라고 하시면 멀어질게요."
"……그렇구나."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한동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지금은."
"예."
"지금은 여기 있어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은.
여기 있어라.
살구나무 마당에.
"예."
서아가 말했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눈이 마주쳤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았다.
지금은 여기 있어라는 말이.
지금은 멀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언제까지인지 몰랐다.
지금이 언제까지인지.
그런데.
지금은.
여기 있어도 됐다.
"왕자님."
"응."
"별자리 계속 가르쳐 주세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소리 없이 웃으셨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그 한 글자가 따뜻하게 들렸다.
서아는 살구나무를 봤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꽃이 지고 잎이 났다.
그래도 나무는 나무였다.
지금은 여기 있어도 됐다.
그게 충분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하늘을 봤다.
맑았다.
봄 하늘이었다.
북동쪽을 봤다.
낮이라 벽수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두 별이 나란히.
담장처럼.
서아는 걸었다.
발이 가벼웠다.
멀어지는 게 맞는 걸까.
그 질문의 답을.
세자 저하가 주셨다.
지금은 여기 있어라고.
지금은.
그 두 글자가 전부였다.
지금은 충분했다.
처소에 들어오니 채린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땠어."
"물어봤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라고 하셨어."
"지금은 여기 있으라고."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게 다야?"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오래.
그러더니 말했다.
"지금은이 전부잖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지금이 있으면 다음이 있는 거잖아."
채린이가 말했다.
"지금이 없으면 다음도 없는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잘됐다."
그 두 글자가 조용하고 따뜻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든 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북동쪽 하늘을 봤다.
벽수가 보였다.
두 별이 나란히.
담장처럼.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지금은 여기 있어라.
그 말이 귓속에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서아는 그 말을 가슴 안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깨지지 않도록.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지금은 여기 있어라.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봄밤이었다.
23회 예고
"채린아,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세자 저하가 왕이 되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살구나무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점점 소중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밤, 나는 채린이한테 처음으로 진짜로 울었다. 채린아,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작가 한마디: 지금은 여기 있어라, 그 말 한마디에 다 담겨 있었어요.
이방원 왕자님이 맞다고 하시면서도, 자신의 마음을 선택하신 세자 저하. 나는 나다, 그 말이 제일 좋았어요. 23회에서 서아가 처음으로 채린이 앞에서 진짜로 웁니다. 함께 봐요.
23회 — 채린아,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여름이 오고 있었다.
봄이 깊어지더니 어느새 공기가 달라졌다.
아침에 일어나면 조금 더 따뜻했다.
낮에는 햇살이 강해졌다.
살구나무 잎이 더 짙은 초록이 됐다.
꽃이 지고 잎이 나고.
그 잎들이 더 짙어지고 있었다.
서아는 그 변화를 보면서 시간이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살구나무 마당에 가는 날이 늘었다.
매일 가진 않았다.
이틀에 한 번.
아니면 사흘에 한 번.
청소를 마치고 혼자 걸어갔다.
세자 저하가 계실 때도 있었다.
안 계실 때도 있었다.
계실 때는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안 계실 때는 혼자 나무를 봤다.
별자리를 하나씩 배웠다.
루수(婁宿). 위수(胃宿). 묘수(昴宿).
하늘의 창고. 하늘의 위장. 별들의 무리.
이름마다 이야기가 있었다.
서아는 밤마다 하늘에서 찾았다.
찾으면 혼자 조용히 말했다.
찾았다고.
그리고 내일 살구나무 마당에서 말씀드렸다.
세자 저하가 들으셨다.
그렇구나, 하셨다.
그 짧은 대화가.
서아한테는 하루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오전 교육이 끝나고 서아는 살구나무 마당으로 갔다.
세자 저하가 계셨다.
오늘은 돌 의자가 아니라 나무 옆에 서 계셨다.
잎을 보고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돌아보셨다.
"왔느냐."
"예."
서아는 세자 저하 옆에 섰다.
나무를 봤다.
잎이 더 짙어졌다.
"오늘은 뭐 하고 계셨어요?"
"잎을 보고 있었다."
"어떤 잎이요?"
"저 잎."
세자 저하가 나뭇가지 하나를 가리키셨다.
제일 높은 가지였다.
"저 잎은 다른 것보다 더 크구나."
서아는 눈을 좁혀 봤다.
"진짜네요. 왜 더 클까요?"
"햇살을 더 많이 받아서겠지."
"높이 있어서요?"
"그렇다."
서아는 그 잎을 봤다.
제일 높은 곳의 잎.
햇살을 더 많이 받는 잎.
"왕자님도 이제 높이 가시잖아요."
말이 나왔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세자가 되셨고. 곧 왕이 되실 거잖아요."
"그렇다."
"그러면 햇살을 더 많이 받으시는 건가요."
세자 저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햇살만 있는 게 아니다."
"뭐가 있어요?"
"바람도 있다. 높을수록 바람이 더 세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높을수록 바람이 더 세다.
"무서우세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무섭다기보다."
"응."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무거운 것 같다."
무겁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
"응."
"무거울 때 살구나무 마당에 오세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잠깐.
"그렇구나."
그 말이 부정이 아니었다.
무거울 때 여기 오신다고.
그리고 서아가 있으면.
조금 가벼워지신다고.
말씀은 안 하셨지만.
서아는 그걸 알 것 같았다.
"저도 무거울 때 와요."
서아가 말했다.
"그러면 나무가 있잖아요. 바람도 있고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그게 도움이 되느냐."
"예. 그리고."
서아는 나무를 봤다.
"왕자님이 계시면 더 도움이 돼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그 소리가 조용하게 마당에 울렸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나도."
서아는 그 두 글자를 들었다.
나도.
나도 네가 있으면 도움이 된다는 말이었다.
서아는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뺨이 뜨거워졌다.
나무를 봤다.
나무를 봐야 했다.
왕자님을 보면 더 빨개질 것 같아서.
그날 오후.
교육이 끝나고 채린이와 처소에 있었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서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채린아."
"응."
"왕자님이 나도, 라고 하셨어."
채린이가 바늘을 멈췄다.
"뭘 나도야."
"내가 왕자님이 계시면 도움이 된다고 했더니. 나도, 라고 하셨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게 다야?"
"응."
채린이가 다시 바느질을 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아, 왜 말 안 해."
"뭐라고 해야 해."
"뭔가 말해줘."
채린이가 바느질을 내려놨다.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지금 어때."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지금 어떠냐고.
"모르겠어."
"모른다고?"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좋은 건 왜야."
"왕자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
"무서운 건."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왕이 되실 날이 가까워지고 있으니까."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쯤이래."
"금방인 것 같아."
"그렇구나."
채린이가 바느질을 다시 들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살구나무 마당이 있는 방향이었다.
"채린아."
"응."
"왕이 되시면 살구나무 마당에 못 오게 되는 걸까."
"모르지."
"오실 것 같아?"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왕이 되셔도 그 마당은 있잖아."
"그렇지."
"근데 왕이 되시면 혼자 움직이시기 어려울 수도 있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혼자 움직이시기 어렵다.
항상 수행하는 사람들이 함께하신다.
그러면 살구나무 마당에서의 시간이.
없어질 수도 있었다.
"채린아."
"응."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그 말이 나왔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멈췄다.
서아를 봤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좋아한다는 거 알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도 알아. 멀어져야 할 수도 있다는 것도 알아."
서아는 말했다.
"근데 자꾸 살구나무 마당에 가게 되고. 자꾸 왕자님이 생각나고. 왕이 되신다는 말이 기쁘지 않고."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다 알면서.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울 것 같아?"
서아는 그 말에 눈이 시려졌다.
"……모르겠어."
"울어도 돼."
채린이가 말했다.
조용하고 낮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울어도 된다고.
채린이가 그렇게 말한 건 처음이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그냥.
뺨을 타고 내려왔다.
채린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있었다.
서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한 번.
또 한 번.
멈추지 않았다.
그냥 두었다.
채린이가 조용히 말했다.
"마음이 크다는 거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눈물이 아직 났다.
"눈물이 날 만큼 마음이 큰 거야."
채린이가 말했다.
"그게 나쁜 게 아니야."
서아는 눈물을 닦으면서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물었잖아."
"응."
"몰라."
채린이가 말했다.
"나도 몰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도."
"그래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지금 울고 나면 조금 가벼워질 거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 울고 나면 조금 가벼워진다.
"채린아."
"응."
"고마워."
채린이가 앞을 봤다.
"뭘."
"옆에 있어줘서."
채린이가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바느질을 다시 들었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다 닦았다.
숨을 한 번 내쉬었다.
채린이 말대로.
조금 가벼웠다.
마음이.
밤이 됐다.
정이가 먼저 잠들었다.
채린이도 눈을 감았다.
서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오늘 울었다.
채린이 앞에서.
처음으로.
창밖을 봤다.
별이 떠 있었다.
묘수를 찾았다.
별들의 무리.
여러 별이 모여 있는 것.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별들의 무리라는 이름이 좋았다.
혼자가 아닌 것들이 모여 있는.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면서 옆에 있었다.
아무 말 안 해도 옆에 있어줬다.
서아는 그게 고마웠다.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채린이는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옆에 있어줬다.
그게 충분했다.
다음 날이었다.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세자 저하가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바로 말씀하셨다.
"오늘은 이야기가 있다."
서아는 멈췄다.
"무슨 이야기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앉아라."
서아는 앉았다.
돌 의자 한쪽에.
세자 저하도 앉으셨다.
한동안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기다렸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왕위 이양이 빨라질 것 같다."
서아는 그 말이 무겁게 들렸다.
"언제요?"
"이달 안일 수도 있다."
이달 안.
서아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이달 안이면.
지금이 몇 달째인지 생각했다.
궁에 온 지 두 달이 조금 넘었다.
이달 안이면 얼마 남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서아가 말했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그 말뿐이냐."
서아는 세자 저하를 봤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축하드려야 하는데."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해요."
세자 저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그냥 있어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냥 있어도 된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세자 저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이달 안에 이루어진다고 해도."
"예."
"살구나무 마당은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 마당은 있다.
"예."
"내가 왕이 되어도."
"예."
"이 나무는 있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잎이 무성한 나무를.
꽃이 졌다.
잎이 났다.
더 짙어졌다.
그래도 나무는 나무였다.
"예."
서아가 말했다.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걱정되느냐."
"예."
"뭐가."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여기 못 오게 될까봐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내가?"
"예. 왕이 되시면 혼자 움직이시기 어려우실 수도 있어서."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럴 수 있다."
그 말이 부정이 아니었다.
그럴 수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러면."
서아가 말했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요."
세자 저하가 서아를 봤다.
"밤하늘에 별이 있다."
서아는 그 말이 뭔지 알았다.
"낮에 안 보여도 있는 것처럼요?"
"그렇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낮에 안 보여도 있는 것처럼.
여기 올 수 없어도.
살구나무 마당이 있는 것처럼.
별이 있는 것처럼.
"예."
서아가 말했다.
세자 저하가 나무를 봤다.
두 사람이 나란히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런데 그 침묵이.
오늘은 다른 종류였다.
뭔가 끝이 보이는 침묵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끝이 보이는.
서아는 그 침묵이 무거웠다.
그런데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있고 싶었다.
지금 이 자리에.
살구나무 마당에.
왕자님 옆에.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하늘을 봤다.
맑았다.
이달 안에.
왕이 되신다.
그러면 모든 게 달라진다.
이방원 왕자님이 하셨던 말이었다.
달라진다.
그런데 세자 저하가 하셨다.
살구나무 마당은 있다.
이 나무는 있다.
두 사람이 다른 말을 하셨다.
달라진다는 것과 있다는 것.
서아는 그 두 말이 다 맞다고 생각했다.
달라지면서도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
꽃이 지면 잎이 나는 것처럼.
살구나무 마당에서 보낸 시간들이.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설령 더 이상 거기 가지 못하게 되더라도.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어땠어."
"이달 안이래."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살구나무 마당은 있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왕이 되셔도?"
"응."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믿어?"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믿느냐.
"응."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왜."
"왕자님이 하신 말이니까."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 글자가 허락 같았다.
믿어도 된다는.
서아는 채린이가 고마웠다.
더 말하지 않아서.
더 현실적인 말을 하지 않아서.
그냥 그래, 한 마디로.
밤이 됐다.
별을 찾았다.
묘수가 보였다.
별들의 무리.
여러 별이 모여 있는.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이달 안에 왕이 되신다.
살구나무 마당은 있다.
낮에 안 보여도 별은 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채린이는 몰랐다.
세자 저하도 말씀 안 하셨다.
그런데.
모르는 채로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 같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도.
지금은 그냥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 같았다.
언젠가 놓을 때가 오면 놓겠지.
아직은 아니니까.
서아는 그 마음을 가슴 안에 넣었다.
조심스럽게.
깨지지 않도록.
눈을 감았다.
봄이 여름으로 가는 밤이었다.
별들의 무리가 하늘에 있었다.
혼자가 아닌 것들이 모여 있는.
채린이가 옆에서 자고 있었다.
그게 좋았다.
서아는 그 사실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24회 예고
"폐하라고 불러야 하는데 목이 막혔다"
이방과 왕자님이 왕이 되셨다. 정종 폐하. 나는 그 소식을 들으면서 축하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살구나무 마당에서 처음으로 폐하라고 불렀을 때. 목이 막혔다. 왕자님이 나를 보셨다. 괜찮으냐고 하셨다. 괜찮지 않았다.
작가 한마디
서아가 처음으로 채린이 앞에서 울었어요.
채린이가 울어도 된다고 말해줬을 때 저도 같이 울 뻔했어요. 나 이 마음 어떻게 해,
그 질문에 답이 없어도 옆에 있어주는 채린이.
24회에서 드디어 정종이 즉위하십니다. 함께 봐요.
24회 — 폐하라고 불러야 하는데 목이 막혔다
그날이 왔다.
서아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하늘이 맑다는 것을 알았다.
창문 너머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없었다.
이런 날에 오는구나.
그 생각이 먼저 들었다.
채린이가 이미 일어나 있었다.
서아를 봤다.
"알아?"
"응."
두 사람이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냥 일어나서 몸을 단정히 했다.
박 상궁이 수습생들을 모았다.
표정이 단단했다.
"오늘 이방과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신다."
수습생들이 조용히 들었다.
"오늘 하루는 모든 교육이 없다. 처소에 있어라."
"예."
"예법을 갖춰라. 평소보다 더 단정히."
"예."
박 상궁이 나가셨다.
수습생들이 조용히 있었다.
정이가 서아한테 붙었다.
"서아야."
"응."
"이방과 왕자님이 왕이 되시는 거잖아."
"응."
"그러면 이제 정종 폐하가 되시는 건데."
"응."
"서아야, 너 표정이 왜 그래."
서아는 정이를 봤다.
"어떤 표정이야."
"울 것 같은 표정."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울 것 같았던 걸까.
몰랐다.
"아니야."
"진짜로?"
"응."
정이가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정이가 더 말하지 않았다.
오전이 지나갔다.
처소에 있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맑은 하늘이었다.
어딘가에서 의식이 치러지고 있을 것이다.
왕위 이양이.
이방과 왕자님이 왕이 되시는.
서아는 그걸 생각하면서 창밖을 봤다.
기쁜 일이었다.
왕자님이 높은 자리에 가시는 것.
그런데.
왕이 되시면.
폐하라고 불러야 했다.
왕자님이 아니라.
폐하.
그 호칭이 입 안에서 무거웠다.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박 상궁이 다시 오셨다.
"수습생들, 들어라."
모두 모였다.
"오늘 이방과 왕자님께서 왕위에 오르셨다."
그 말이 공식적으로 들렸다.
"이제 정종 폐하시다. 이후로는 폐하라고 불러라."
"예."
박 상궁이 수습생들을 봤다.
"오늘 오후 청소는 한다. 평소대로."
"예."
박 상궁이 나가셨다.
수습생들이 웅성거렸다.
정이가 말했다.
"정종 폐하. 와, 왕이 되셨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정종 폐하.
오후 청소를 하러 나갔다.
북쪽 행각을 쓸었다.
물통을 교체했다.
빗자루를 밀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폐하.
그 말이 입 안에서 굴러다녔다.
왕자님.
그 말이 이제 쓸 수 없는 말이 됐다.
아니.
공식적으로는.
살구나무 마당에서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다.
여기선 괜찮다고.
그런데.
왕이 되셨으니.
그것도 달라지는 걸까.
서아는 빗자루를 멈췄다.
모르겠다.
다시 밀었다.
청소를 마치고 서아는 살구나무 마당으로 걸었다.
갈까 말까 생각했다.
오늘 같은 날에.
왕이 되신 날에.
가도 되는 걸까.
그런데 발이 갔다.
마당에 들어갔다.
세자——아니.
폐하가 계셨다.
돌 의자에 앉아 계셨다.
오늘은 혼자가 아니셨다.
수행 내관 둘이 마당 밖에 서 있었다.
서아는 들어가다가 멈췄다.
내관들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물러서려 했다.
"들어오너라."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폐하의 목소리였다.
낮고 조용한.
예전과 같은 목소리였다.
서아는 걸었다.
내관들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마당 안으로 들어갔다.
폐하 앞에 섰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폐——"
목이 막혔다.
폐하.
그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막혔다.
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로 있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고개 들어라."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예전과 같은 눈빛이었다.
달라지지 않은 눈빛이었다.
"괜찮으냐."
서아는 그 말에 눈이 시려졌다.
괜찮으냐고.
왕이 되신 날에.
나한테.
괜찮으냐고.
"……폐하."
이번엔 나왔다.
떨리면서.
폐하가 서아를 봤다.
"목이 막혔구나."
"……예."
"왜."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왜.
왕자님이라고 부르다가.
폐하라고 부르게 됐으니까.
그게 왜인지는.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잠깐.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앉아라."
서아는 앉았다.
폐하 옆에.
예전처럼.
돌 의자 한쪽에.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내관들이 마당 밖에서 기다렸다.
그 시선이 느껴졌다.
서아는 예전보다 긴장이 됐다.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오늘 어땠느냐."
"처소에 있었습니다."
"힘들었느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힘들었냐.
"…모르겠습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모른다고."
"예. 기쁜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무거운 것 같기도 하고."
폐하가 나무를 봤다.
"나도 그렇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나도 그렇다.
기쁜 것 같기도 하고 무거운 것 같기도 하다고.
왕이 되신 날에.
그게 솔직한 말씀인 것 같았다.
"폐하."
서아가 불렀다.
그 호칭이 이번엔 덜 막혔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오늘 힘드셨겠어요."
"그런가."
"예. 의식이 길었을 것 같아서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길었다."
"피곤하시겠어요."
"조금."
서아는 폐하를 봤다.
눈 아래가 조금 어두웠다.
의식 준비가 며칠 됐겠지.
잠을 충분히 못 주무셨을 것이다.
"쉬셔야 하는 거 아닌가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여기가 쉬는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여기가 쉬는 것이다.
살구나무 마당이.
"그러면 더 계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나무를 봤다.
"그래."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내관들이 마당 밖에 있었다.
그래도.
지금 이 자리는.
예전과 같았다.
나무가 있었다.
바람이 있었다.
폐하가 옆에 계셨다.
서아가 옆에 있었다.
한참 뒤에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여기선."
폐하가 나무를 봤다.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
"예전과 같이."
폐하가 말씀하셨다.
"여기서만은."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가슴이.
"……예."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별자리 계속 가르쳐 주세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소리 없이 웃으셨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그래."
서아도 웃었다.
눈이 아직 조금 시렸지만.
웃었다.
마당을 나오면서 서아는 내관들 옆을 지나쳤다.
내관들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복도로 나왔다.
혼자였다.
서아는 잠깐 멈췄다.
손으로 눈을 눌렀다.
눈물이 나왔다.
마당 안에서 참은 눈물이.
복도에 나오니까 나왔다.
서아는 복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잠깐 그냥 뒀다.
눈물을.
폐하라고 불렀다.
목이 막혔다.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다.
여기서만은.
그 말이 고마웠다.
그리고 슬펐다.
여기서만은.
그 말이 담고 있는 것이.
여기 밖에서는 안 된다는 것이기도 하니까.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한 번.
두 번.
다 닦았다.
숨을 내쉬었다.
걸었다.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갔다 왔어?"
"응."
"뵈었어?"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이 아직 조금 빨간 걸 봤겠지.
그런데 아무 말 안 했다.
"뭐라고 하셨어."
"여기선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여기서만은이라고 하셨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두 사람이 잠깐 말이 없었다.
정이가 교육 방에서 돌아왔다.
"야, 너희 둘 왜 이렇게 조용해."
"그냥."
채린이가 말했다.
정이가 둘을 봤다.
뭔가 있다는 걸 느끼는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은 묻지 않았다.
그냥 자기 자리에 앉았다.
"오늘 되게 이상한 날이다."
정이가 말했다.
"왕이 바뀌는 날이잖아."
"그렇지."
서아가 말했다.
"이상할 수밖에 없지."
정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저녁이 됐다.
교육이 없는 날이라 일찍 자야 했다.
채린이와 정이가 이불을 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하늘이 맑았다.
낮에도 맑더니 밤에도 맑았다.
별이 많이 떴다.
서아는 묘수를 찾았다.
별들의 무리.
오늘 배운 별이 아니었다.
며칠 전에 배운 별이었다.
그래도 찾고 싶었다.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을.
혼자가 아닌 것을.
찾았다.
별들이 모여 있었다.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오늘 폐하가 되셨다.
여기선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다.
살구나무 마당은 있다.
그 말들이 다 사실이었다.
서아는 창문을 닫으려다 멈췄다.
별을 한 번 더 봤다.
"왕자님."
혼자 조용히 불렀다.
아무도 없는 방에서.
창문 너머 별들한테.
"수고하셨어요."
그 말이 닿을 리 없었다.
그래도 했다.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채린이가 말했다.
"자자."
"응."
서아는 눈을 감았다.
폐하라고 불렀다.
목이 막혔다.
왕자님이라고 불렀다.
목이 안 막혔다.
두 호칭이 같은 분인데.
서아한테는 달랐다.
그 차이가.
서아가 이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폐하가 아니라.
왕자님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그 생각을 가슴 안에 넣었다.
깨지지 않도록.
오늘 같은 날에.
이 마음이 깨지지 않도록.
한밤중이었다.
서아는 다시 눈이 떠졌다.
채린이는 자고 있었다.
정이도 자고 있었다.
서아는 조용히 일어나서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묘수를 찾았다.
찾았다.
그 옆에 새 별을 찾아봤다.
필수(畢宿)였다.
며칠 전에 배운 별이었다.
하늘의 그물이라고 불리는.
별들이 그물처럼 이어져 있는.
그 별을 찾았다.
찾았다.
"필수."
혼자 말했다.
하늘의 그물.
별들이 이어져 있는.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이어져 있다는 게.
오늘은 다르게 느껴졌다.
별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이 이어져 있는 것처럼.
살구나무 마당이 있는 것처럼.
여기선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것처럼.
이어져 있는 것들이 있었다.
달라져도.
이어져 있는 것들이.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왕자님이 되셨다.
아니.
폐하가 되셨다.
그런데 여기선 왕자님이었다.
서아한테는.
그게 달라지지 않았다.
서아는 그 사실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오늘이 지나갔다.
이달이 지나갔다.
다음이 올 것이다.
꽃이 지면 잎이 나는 것처럼.
다음이 오는 것처럼.
25회 예고
"왕이 된 후로 웃음이 사라졌다"
정종 폐하가 되신 후로 살구나무 마당에 오시는 날이 줄었다. 오실 때는 더 말씀이 없으셨다. 웃음이 없으셨다. 나는 그게 제일 무서웠다. 왕자님의 웃음 소리를 처음 들었던 날이 생각났다. 낮고 따뜻한 그 소리가.
작가 한마디
폐하라고 불렀는데 목이 막혔던 서아, 왕자님이라고 불렀을 때 목이 안 막혔던 서아. 그 차이가 다 말해주죠.
여기선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신 폐하. 두 사람만의 공간이 살구나무 마당이에요. 25회에서 왕이 되신 후의 변화가 시작됩니다. 함께 봐요.
25회 — 왕이 된 후로 웃음이 사라졌다
달라졌다.
서아는 그걸 조금씩 느꼈다.
한 번에 달라진 게 아니었다.
조금씩.
하루하루.
처음에는 살구나무 마당에 오시는 날이 줄었다.
이틀에 한 번 오시던 게.
사흘에 한 번이 됐다.
그러더니 나흘.
닷새.
서아는 마당에 가서 혼자 있는 날이 늘었다.
나무를 봤다.
잎이 더 짙어졌다.
여름이 오면서 잎이 무성해졌다.
꽃이 있던 때가 오래된 것 같았다.
오시는 날에는 말씀이 줄었다.
예전에는 별자리를 가르쳐 주셨다.
나무 이야기를 하셨다.
무거운 것들을 말씀하셨다.
지금은.
오시면 앉아 계셨다.
나무를 보셨다.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가 말을 걸면 짧게 대답하셨다.
그게 다였다.
그리고.
웃음이 없었다.
서아는 그게 제일 무서웠다.
소리 없이 웃으시는 것도.
소리 내어 웃으시는 것도.
다 없었다.
그냥 앉아 계셨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것은 여전했다.
그런데 그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예전보다 더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열흘이 지났을 때였다.
서아는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폐하가 계셨다.
앉아 계셨다.
나무를 보고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봤다.
"왔느냐."
"예."
서아는 폐하 옆에 앉았다.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한참 있다가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폐하가 서아를 봤다.
"요즘 힘드세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괜찮다."
그 말이 나왔다.
또.
서아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괜찮지 않다는 걸 알았다.
두 번 말씀하시지 않아도.
한 번 말씀하실 때부터.
"왕자님."
"응."
"웃음이 없으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예전엔 있었는데."
폐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런가."
"예. 소리 없이 웃으시던 것도. 소리 내어 웃으시던 것도."
서아는 나무를 봤다.
"저는 그 웃음이 좋았는데."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보면서 말했다.
"왕이 되시면 웃음도 없어지는 건가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나무를 봤다.
"그런 건 아닌데."
"그러면 왜요."
폐하가 잠깐 침묵하셨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무거운 것들이 많아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무거운 것들이 많다.
"어떤 것들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왕이 되면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예."
"그 결정이 많은 사람한테 영향을 준다."
"예."
"그게 무겁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결정이 많은 사람한테 영향을 준다는 것.
그게 무겁다는 것.
"왕자님은 그 무게를 혼자 지고 계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왕이 하는 일이다."
"왕이라도 혼자 지면 무겁잖아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렇지."
"누구한테 말하세요?"
"이방원이 있다."
"이방원 왕자님이요?"
"그 아이한테 의지하는 것들이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한테 의지하신다.
그분이 형님을 걱정하신다고 했었다.
"다른 사람은요?"
폐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여기 오면 조금 가벼워진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여기 오면 조금 가벼워진다.
살구나무 마당이.
"그러면 더 자주 오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요즘 오시는 날이 줄었잖아요."
"그렇구나."
"일이 많으세요?"
"그렇다."
"그래도."
서아가 말했다.
"더 오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여기 오면 가벼워지신다고 하셨잖아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나무를 봤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조용하게 나왔다.
얼마나 있었을까.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별자리."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예."
"참수(參宿)다."
서아는 들었다.
"참수요?"
"하늘의 장수라고 불린다."
"장수요?"
"일곱 개가 모여 있다. 사냥꾼 모양이라고도 한다."
서아는 그 이름을 생각했다.
하늘의 장수.
사냥꾼.
"강해 보이는 이름이네요."
"그렇다."
"어디 있어요?"
"서쪽 하늘이다. 겨울에 더 잘 보인다."
"지금은요?"
"지금은 해 질 무렵 서쪽에서 잠깐 보인다."
"오늘 저녁에 찾아볼게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찾으면 말해라."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찾으면 말해라.
"예. 꼭 말씀드릴게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조용히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웃음이 없다고 했는데."
"예."
"오늘은."
폐하가 나무를 봤다.
"조금 가벼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조금 가벼웠다.
오늘.
살구나무 마당에서.
서아가 옆에 있어서.
그 말을 하지 않으셔도.
그게 그 말이었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다행이에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래."
마당을 나왔다.
복도에 나왔다.
서아는 걸으면서 하늘을 봤다.
서쪽 하늘이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이었다.
참수가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사냥꾼 모양의 별들이.
서아는 서쪽 하늘을 봤다.
보이지 않았다.
아직 밝아서.
그래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있다는 걸 알면.
밤에 찾을 수 있다.
폐하가 하셨던 말이었다.
서아는 그 말을 되새겼다.
있다는 걸 알면.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살구나무 마당?"
"응."
"뵈었어?"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어떠셨어."
"말씀이 적으셨어. 그런데."
"응."
"오늘은 조금 가벼웠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정이가 들어왔다.
"야, 오늘 교육에서 상궁님이 너희 둘 이름 불렀는데 어디 있었어."
"화장실."
채린이가 말했다.
정이가 채린이를 봤다.
"둘 다?"
"응."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앞을 봤다.
"둘 다 화장실."
정이가 이상하다는 눈으로 둘을 봤다.
그러더니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자기 자리로 갔다.
채린이가 서아한테 눈짓을 했다.
괜찮아?
서아는 눈으로 대답했다.
응.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이 됐다.
해가 지고 있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서쪽 하늘을 봤다.
주황빛이 남아 있었다.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서아는 눈을 좁혀 봤다.
서쪽에서.
일곱 개가 모여 있는 별을 찾았다.
사냥꾼 모양.
처음엔 보이지 않았다.
눈을 더 좁혔다.
희미하게.
일곱 개가 모여 있는 것 같은.
"저거다."
혼자 말했다.
참수.
하늘의 장수.
사냥꾼.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강해 보이는 이름.
그런데 저 별들도 모여 있었다.
일곱 개가.
혼자가 아니라.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든 뒤.
서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천장을 봤다.
웃음이 없으셨다.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왕이 된 후로.
무거운 것들이 많아서.
웃음이 없어졌다.
서아는 그게 무서웠다.
왕자님 웃음을 처음 들었던 날이 생각났다.
물통을 쏟고.
바닥을 같이 닦고.
봄 바람이 차다고 하셨던.
낮고 따뜻한 웃음 소리.
그게 아직 귓속에 있었다.
서아는 그 소리를 꺼내서 들었다.
마음속으로.
아직 있었다.
사라지지 않았다.
"왕자님."
혼자 조용히 말했다.
"웃으셔도 돼요."
아무도 없는 방에서.
천장을 향해.
"살구나무 마당에서는요."
대답이 없었다.
당연했다.
그런데.
말하고 싶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내일 마당에 가야지.
모레도.
그 다음날도.
폐하가 오시면.
오늘보다 조금 더 가벼우실 수 있도록.
그걸 바라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며칠이 지났다.
살구나무 마당에서 보내는 시간이 쌓였다.
폐하가 오시는 날.
오시지 않는 날.
다 쌓였다.
오시는 날은 나란히 앉아서 나무를 봤다.
별자리를 하나씩 배웠다.
觜수(觜宿). 정수(井宿).
하늘의 부리. 하늘의 우물.
이름마다 달랐다.
이야기마다 달랐다.
서아는 밤마다 찾았다.
찾으면 다음 날 말씀드렸다.
폐하가 들으셨다.
그렇구나, 하셨다.
그게 다였다.
그런데 오시는 날이.
조금씩 늘었다.
사흘에 한 번이 이틀에 한 번이 됐다.
서아는 그걸 느꼈다.
느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폐하가 마당에 오셨다.
서아도 있었다.
나란히 앉았다.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한참이 지났을 때.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폐하가 나무를 봤다.
"오늘 조용하구나."
"예."
"왜."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그냥 있고 싶었어요."
"그냥."
"예.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것 같아서요. 여기 있으면."
폐하가 나무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폐하가 말씀하셨다.
아주 조용하게.
"그렇구나."
그리고.
입꼬리가 올라갔다.
소리가 없었다.
소리 없이 웃으시는 웃음이었다.
예전처럼.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오래간만이었다.
한동안 없었던 웃음이.
지금 있었다.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그냥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나무를 보셨다.
웃음이 지워졌지만.
아까보다 표정이 부드러웠다.
서아는 그걸 봤다.
웃음이 돌아왔다.
잠깐이었지만.
그게 충분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하늘을 봤다.
맑았다.
저쪽 서쪽 하늘에.
참수가 있을 것이다.
하늘의 장수.
강해 보이는 이름이라고 했는데.
일곱 개가 모여 있었다.
혼자가 아니었다.
서아는 걸으면서 생각했다.
왕이 된 후로 웃음이 사라졌다.
오늘 잠깐 돌아왔다.
내일도 살구나무 마당에 가야지.
모레도.
그 다음날도.
웃음이 조금 더 오래 있도록.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걸었다.
발이 가벼웠다.
처소에 들어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어땠어."
"왕자님이 웃으셨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소리 없이요."
"그래도 웃으셨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서아는 자리에 앉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요즘 어때."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요즘 어때.
"모르겠어."
"좋아?"
"좋은 것 같기도 하고."
"무서워?"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는 것 같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왜."
"좋기만 하면 끝이 무서운 거잖아. 무섭기만 하면 지금이 없는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좋기만 하면 끝이 무섭다.
무섭기만 하면 지금이 없다.
"채린아."
"응."
"너 생각이 깊다는 거 알지."
"몇 번째야 그 말."
"그래도 맞잖아."
채린이가 앞을 봤다.
"자자."
"아직 이르잖아."
"자야 내일 일어나지."
서아는 웃었다.
"맞아."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왕자님이 웃으셨다.
소리 없이.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웃음으로.
그게 귓속이 아니라 눈 앞에 있었다.
서아는 그 웃음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빠르게.
봄이 지나 여름으로 가는 밤이었다.
26회 예고
"서아만 예전이랑 똑같이 대한다"
폐하 주변의 사람들이 달라졌다. 말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보는 눈빛이 달라지고, 거리가 생겼다. 그런데 서아만 예전처럼 대했다. 폐하가 그것을 알고 계셨다. 그래서 오늘 하신 말씀이——
작가 한마디
왕이 된 후로 웃음이 사라졌는데, 살구나무 마당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돌아왔어요.
서아가 있어서 가벼워지신다는 말, 두 사람 다 알고 있잖아요. 26회에서 폐하가 처음으로 서아한테 직접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기대해 주세요.
26회 — 서아만 예전이랑 똑같이 대한다
달라진 게 하나 더 있었다.
사람들이었다.
폐하 주변의 사람들이.
달라졌다.
서아는 그걸 청소하면서 느꼈다.
북쪽 행각을 쓸다가 내관들을 마주쳤다.
예전에는 그냥 지나쳤다.
지금은 달랐다.
폐하 수행 내관들이 지나가면.
다들 멈추고 깊이 숙였다.
지나가고 나면 사람들이 조용히 말했다.
"요즘 폐하가 어떠시다더라."
"어떤 결정을 하셨다더라."
목소리들이 조심스러웠다.
예전에 왕자님이셨을 때와 달랐다.
왕자님이셨을 때는 그냥 지나치던 사람들이.
지금은 시선이 달라졌다.
살구나무 마당에서도 느꼈다.
폐하가 오실 때.
수행 내관들이 마당 밖에 서 있었다.
그 내관들이 서아를 봤다.
처음엔 그냥 보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점점.
뭔가 재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저 수습 궁녀가 왜 여기 있는 거지.
그런 시선이었다.
서아는 그 시선이 불편했다.
그런데 티내지 않으려 했다.
어느 날이었다.
오전 교육을 마치고 복도를 걷는데.
상궁 하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그런데 상궁이 말했다.
"수습."
서아는 멈췄다.
"예."
"이름이 뭐냐."
"윤서아입니다."
상궁이 서아를 봤다.
눈빛이 서늘했다.
최 상궁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상궁이었다.
"어느 구역 담당이냐."
"북쪽 행각입니다."
"그렇구나."
상궁이 서아를 한 번 더 봤다.
그리고 지나쳤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있었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왜 이름을 물어봤을까.
점심을 먹으면서 채린이한테 말했다.
"아까 상궁이 이름 물어봤어."
채린이가 밥을 먹다가 멈췄다.
"어떤 상궁이야."
"처음 보는 분. 눈빛이 서늘했어."
채린이가 생각했다.
"살구나무 마당 때문인 것 같아."
"왜?"
"수행 내관들이 알잖아. 폐하가 그 마당에 가시면 수습 궁녀가 있다는 걸."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게 퍼진 건가."
"퍼졌을 거야. 궁은 작잖아."
서아는 밥을 내려다봤다.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근데."
"응."
"폐하가 오라고 하신 거잖아. 살구나무 마당에."
"그렇지."
"그러면 서아 잘못이 아니잖아."
"그래도."
"그래도는 없어."
채린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폐하가 결정하신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채린이 말이 맞았다.
폐하가 결정하신 것이었다.
우연이 자주 생기는 곳이라고 하셨다.
여기선 왕자님이라고 불러도 된다고 하셨다.
그게 폐하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불편한 시선이 생기면."
"알아."
채린이가 말했다.
"근데 그게 지금 당장 뭔가 되는 건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면 일단은 괜찮아."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청소를 마치고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폐하가 계셨다.
오늘은 혼자였다.
수행 내관이 없었다.
서아가 들어가니 봤다.
"왔느냐."
"예."
서아는 앉았다.
폐하도 앉아 계셨다.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잠깐 있다가 폐하가 말씀하셨다.
"오늘 내관 없이 왔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러셨어요?"
"혼자 오고 싶었다."
서아는 그 말이 뭔지 알았다.
수행 없이.
그냥 혼자.
"왜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여기 오면 수행이 있으면 다르다."
"어떻게 다른데요?"
"있는 것 같지 않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수행이 있으면 온전히 있는 것 같지 않다.
"지켜보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
"그러면 오늘은 온전히 계신 거네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렇구나."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요즘 이상한 시선이 있지 않느냐."
서아는 그 말에 멈췄다.
아셨다.
"……예."
"누가 이름을 물었느냐."
"상궁 한 분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미안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미안하다.
"왜 미안하세요."
"나 때문이다."
"왕자님 때문이 아니에요."
"아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내가 여기 오지 않으면 생기지 않을 일이다."
서아는 그 말이 무거웠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신다는 게.
"왕자님."
서아가 말했다.
"그 시선이 저한테 어떤가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불편하지 않느냐."
"불편하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에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계속했다.
"근데요."
"응."
"그래도 괜찮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왕자님이 여기 오시면 가벼워지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렇다."
"그러면 그 시선은 제가 감당할 수 있어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뭔가를 담고 있었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주변이 달라졌다."
서아는 들었다.
"왕이 되고 나서. 사람들이 다르게 대한다."
"예."
"말하는 방식이 다르고. 보는 눈빛이 다르고. 거리가 생겼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거리가 생겼다.
"예전에 왕자였을 때와 다르다."
"많이 달라요?"
"그렇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그런데."
폐하가 서아를 봤다.
"네가 예전이랑 똑같이 대한다."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가슴이.
"왕자님이라고 부르고."
폐하가 말씀하셨다.
"왜 밥 못 먹으셨냐고 걱정하고."
"그게요."
"웃음이 없다고 말하고."
서아는 뺨이 더 뜨거워졌다.
"그래도 되는 건지 모르면서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되는지 안 되는지가 중요하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중요한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런가."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면 불안하잖아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된다.
"예?"
"예전이랑 똑같이 대해도 된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여기서는."
그 두 글자가 또 나왔다.
여기서는.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여기서는 된다.
살구나무 마당에서는.
예전이랑 똑같이 대해도 된다.
"……예."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서아도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냥 있었다.
그 침묵이.
오늘은 따뜻했다.
한참 뒤에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고맙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고맙다.
"뭐가요."
"예전이랑 똑같이 대해줘서."
서아는 나무를 봤다.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고마운 거 아니에요."
"왜."
"그냥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예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래도 고맙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예."
그것만 대답했다.
더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당을 나왔다.
복도에 혼자 서 있었다.
서아는 손으로 눈을 눌렀다.
눈물이 나왔다.
오늘도 복도에서.
마당 안에서는 참았는데.
나오니까 나왔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예전이랑 똑같이 대한다고 하셨다.
고맙다고 하셨다.
그게 뜨거웠다.
가슴이.
주변이 달라지는 동안.
서아만 달라지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게.
서아한테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폐하한테는 고마운 것이었다.
서아는 눈물을 다 닦았다.
숨을 내쉬었다.
걸었다.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또 울었어."
"복도에서."
"마당 안에서는 참았어?"
"응."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셨어."
서아는 들은 말을 전했다.
주변이 달라졌다는 것.
서아만 예전이랑 똑같다는 것.
고맙다고 하셨다는 것.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말이 없었다.
한참.
"채린아."
"응."
"왜 말이 없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폐하가 서아를 특별하게 생각하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채린이가 말했다.
"주변이 다 달라졌는데 서아만 똑같다고 하시는 거잖아. 그게 고마운 거라고 하시는 거잖아."
"응."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잖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서아야."
"응."
"조심해야 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 때랑 다른 조심이야."
채린이가 말했다.
"그때는 행동 조심이었는데."
"지금은?"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마음 조심."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마음 조심.
"왜."
"마음이 너무 커지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끝이 더 아프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마음이 너무 커지면.
끝이 더 아프다.
"알아."
서아가 말했다.
"그런데 채린아."
"응."
"마음이 이미 큰 것 같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창밖의 하늘을.
"고맙다고 하셨을 때. 눈물이 났어. 마당 안에서."
"참았잖아."
"참았는데. 났어. 안에서."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채린아, 나 어떻게 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지난번에도 그 말 했잖아."
"또 모르겠어서."
채린이가 한숨을 쉬었다.
길지 않은 한숨이었다.
"서아야."
"응."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거 없어."
"응."
"마음을 줄일 수도 없고."
"응."
"그러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냥 가지고 있어."
"또 그 말이야."
"그 말밖에 없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언젠가 놓을 때가 오면 놓는 거야."
"올까?"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와야지."
그 말이 확신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확신이 없으면서도.
와야 한다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
서아를 위해서.
서아는 채린이가 고마웠다.
모른다고 말하면서도.
옆에 있어주는 채린이가.
"채린아."
"응."
"나한테 잘해줘서 고마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뭘."
"진짜로."
채린이가 앞을 봤다.
"됐어."
그러더니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채린이는 이렇게 마무리했다.
언제나.
자자.
그 한마디로.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참수를 찾았다.
일곱 개가 모여 있는.
하늘의 장수.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예전이랑 똑같이 대한다고 하셨다.
고맙다고 하셨다.
서아는 그 말이 아직 귓속에 있었다.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서아는 그 말을 가슴 안에 넣었다.
마음이 크다.
채린이가 맞았다.
눈물이 날 만큼.
그런데.
그게 나쁜 것 같지 않았다.
마음이 크다는 게.
서아는 참수를 봤다.
일곱 개가 모여 있는 별들.
혼자가 아닌 것들이.
가까이 있는 것들이.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예전이랑 똑같이 대해도 된다.
여기서는.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27회 예고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느냐"'
어느 날 폐하가 물으셨다. 다들 나를 어렵게 대하는데, 너는 왜 무서워하지 않느냐고. 저는 잠깐 생각했어요. 그리고 대답했어요.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되는 거라고. 폐하가 오래 저를 보셨어요.
작가 한마디
예전이랑 똑같이 대한다는 말에 눈물이 난 서아.
폐하한테는 고마운 것이 서아한테는 그냥 하고 싶은 것이었다는 게.
두 사람이 서로한테 특별하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잖아요.
27회에서 폐하가 처음으로 직접적인 질문을 하십니다. 기대해 주세요.
27회 —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느냐"
여름이 깊어졌다.
햇살이 강해졌다.
살구나무 잎이 더 짙은 초록이 됐다.
마당에 그늘이 생겼다.
나무 그늘이.
서아는 그 그늘 아래에 앉아서 하늘을 봤다.
맑은 하늘이었다.
구름이 조금 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구름이.
요즘 살구나무 마당에 오는 날이 안정됐다.
이틀에 한 번쯤.
폐하가 오시는 날도 있었다.
안 오시는 날도 있었다.
오시는 날은 나란히 앉아서 있었다.
별자리를 배웠다.
귀수(鬼宿). 류수(柳宿). 성수(星宿).
하늘의 귀신. 하늘의 버드나무. 하늘의 별.
이름마다 달랐다.
이야기마다 달랐다.
서아는 밤마다 찾았다.
그날은 오후였다.
서아가 마당에 오니 폐하가 계셨다.
오늘은 나무 옆에 서 계셨다.
잎을 보고 계셨다.
"왔느냐."
"예."
서아는 폐하 옆에 섰다.
같이 나무를 봤다.
잎이 무성했다.
그늘이 짙었다.
"오늘 잎이 더 짙어진 것 같아요."
"그렇구나."
"여름이라서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
짧은 대화였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폐하가 잎을 보다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오늘 조정에서 일이 있었다."
서아는 들었다.
"어떤 일이요?"
"신하 하나가 결정에 반대했다."
"예."
"그 결정이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가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건 드물었다.
조정 이야기를.
"어떤 결정이었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세금에 관한 것이다."
"예."
"백성들한테 영향이 가는 결정이었는데."
"예."
"그 신하가 반대하면서 말했다. 백성들이 힘들 것이라고."
폐하가 잠깐 침묵하셨다.
"그 말이 맞는 것 같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러면 결정을 바꾸시면 되는 거 아닌가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요?"
"한번 내린 결정을 바꾸면 흔들린다는 인상을 준다."
"흔들리면 안 되는 건가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왕이 흔들리면 주변이 흔들린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이 흔들리면 주변이 흔들린다.
"근데 왕자님."
"응."
"틀린 걸 알면서 안 바꾸는 것도 흔들리는 거 아닌가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틀렸는데 고집하면. 그게 더 흔들리는 것 같아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조용하게 나왔다.
서아는 자기가 너무 많이 말했나 싶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조정 일을 모르면서——"
"아니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들을 말을 했다."
서아는 그 말이 뭔지 알았다.
틀리지 않은 말을 했다는 것.
"그래도요."
"그래도가 없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 말이 맞다."
서아는 뺨이 뜨거워졌다.
나무를 봤다.
한참이 지나서였다.
두 사람이 돌 의자에 앉았다.
나란히.
폐하가 하늘을 보시다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물어봐도 되겠느냐."
서아는 그 말이 뜻밖이었다.
물어봐도 되겠느냐고.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다들 나를 어렵게 대한다."
"예."
"왕이 되고 나서."
"예."
"말도 조심스럽게 하고. 눈빛도 달라지고."
서아는 들었다.
"그런데."
폐하가 서아를 봤다.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느냐."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왜 무서워하지 않느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무섭지 않은 건지.
아니면 다른 건지.
"왕자님."
"응."
"무서운 게 아니에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럼 뭐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걱정이 되는 거예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걱정."
"예."
"무서운 것과 걱정이 다르냐."
"달라요."
서아가 말했다.
"무서우면 거리가 생기는데. 걱정이 되면 더 가까이 가고 싶어지거든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내가 너무 많이 말했나.
"그래서요."
서아가 계속했다.
"왕자님이 웃음이 없으시면 가까이 가고 싶고. 많이 드셨나 걱정되고. 오늘 힘드셨나 생각되고."
서아는 나무를 봤다.
"그게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에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기다렸다.
뺨이 뜨거웠다.
너무 많이 말한 것 같았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그 걱정이."
폐하가 나무를 봤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드는 것 같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 걱정이.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든다고.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그것도 걱정이라고 부를 수 있겠느냐."
폐하가 말씀하셨다.
"예?"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드는 것."
서아는 그 말이 뭔지 알았다.
폐하한테 서아가 있으면 가볍다는 말이었다.
그게 걱정 때문이라는 말이었다.
"……예."
서아가 말했다.
"걱정이라고 부를 수 있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조용하게 나왔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다들 무서워하는 게 피곤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다들 무서워하는 게 피곤하다.
"왜요?"
"항상 조심해야 하는 것들이 많아진다."
"예."
"말도 조심해야 하고. 표정도 조심해야 하고."
폐하가 나무를 봤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아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여기서는 그렇지 않아서.
살구나무 마당에서는.
조심하지 않아도 되어서.
"그래서 오세요?"
"그렇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네가 무서워하지 않아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서아가 무서워하지 않아서.
걱정이 되어서.
그래서 오신다고.
서아는 눈이 더 시려졌다.
참았다.
"왕자님."
"응."
"저는 계속 무서워하지 않을 거예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아무리 높아지셔도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말씀이 없으셨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그 소리가 마당에 울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고맙다."
또.
고맙다.
서아는 그 말이.
오늘은 다른 무게로 들렸다.
어제보다.
그저께보다.
더 무겁게.
더 따뜻하게.
마당을 나오면서 서아는 걸었다.
복도가 조용했다.
오늘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올 것 같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대신.
가슴이 꽉 찼다.
너무 꽉 찬 것 같았다.
서아는 잠깐 멈췄다.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뛰고 있었다.
심장이.
빠르게.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했다.
걱정이 된다고 했다.
폐하가 들으셨다.
그리고 고맙다고 하셨다.
그 말이.
가슴을 꽉 채우고 있었다.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와 정이가 있었다.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오늘 어디 있었어?"
"청소하다가."
"청소 끝난 지 한참 됐는데."
"그냥 좀 돌아다녔어."
정이가 서아를 봤다.
뭔가 말하려다 멈췄다.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정이가 입을 다물었다.
서아는 자리에 앉았다.
채린이가 나중에 조용히 물었다.
"어땠어."
"폐하가 왜 무서워하지 않느냐고 물으셨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라고 했어."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된다고."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폐하가 뭐라고 하셨어."
"그 걱정이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든다고."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오래.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지."
"응."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드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고 있었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서아야."
"응."
"마음 조심하랬잖아."
"알아."
"아는 것 같지 않은데."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폐하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응."
"서아 마음이 더 커지잖아."
"알아."
"그러면 끝이 더 아프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끝이 더 아프다.
"채린아."
"응."
"끝을 생각하면 지금이 없어지잖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가 말했다.
"지금이 있어야 끝도 있는 거잖아."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한숨을 쉬었다.
짧은 한숨이었다.
"그래."
그 한 글자가 허락이었다.
서아는 채린이가 고마웠다.
끝까지 막지 않아서.
그래, 한 마디로 허락해줘서.
"채린아."
"응."
"고마워."
"됐어."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또 자자였다.
채린이는 언제나 자자로 마무리했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든 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귀수를 찾았다.
찾았다.
류수를 찾았다.
찾았다.
성수를 찾았다.
찾았다.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하늘의 귀신. 하늘의 버드나무. 하늘의 별.
이름이 다 달랐다.
같은 하늘에 있는데.
다 달랐다.
서아는 참수를 찾았다.
일곱 개가 모여 있는.
찾았다.
하늘의 장수.
서아는 그 별들을 봤다.
너는 왜 나를 무서워하지 않느냐.
그 질문이 귓속에 있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된다고 했다.
폐하가 들으셨다.
그 걱정이 무거운 것을 가볍게 만든다고 하셨다.
그 말이.
서아한테도 뭔가를 가볍게 만들었다.
무거웠던 것들이.
폐하가 왕이 되셨다는 것.
거리가 생겼다는 것.
멀어질 수도 있다는 것.
그것들이.
오늘은 조금 가벼웠다.
폐하 말씀이 있어서.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된다.
그 말을 안고.
계속 걱정하기로 했다.
무서워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리 높아지셔도.
그게 서아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예전이랑 똑같이 대하는 것.
그게 서아한테는 그냥 하고 싶은 것이었다.
폐하한테는 고마운 것이었다.
그 차이가.
두 사람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고.
가까움이기도 했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그 생각을 안고 있었다.
여름밤이었다.
별들이 하늘에 있었다.
귀수와 류수와 성수와 참수가.
다 다른 이름으로.
같은 하늘에.
28회 예고
"처음으로 왕 앞에서 울었다"
살구나무 마당에서 폐하가 물으셨다. 서아야, 슬프냐고. 왜 슬프냐고 물으셨는지 모르겠다. 아니라고 하려고 했는데. 눈물이 먼저 나왔다. 왕 앞에서. 처음으로.
작가 한마디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된다는 말, 그 차이가 다 담겨 있잖아요.
무서우면 거리가 생기고, 걱정이 되면 더 가까이 가고 싶다는 서아. 폐하는 그 말을 들으셨어요.
28회에서 서아가 처음으로 폐하 앞에서 웁니다. 함께 봐요.
28회 — 처음으로 왕 앞에서 울었다
그날은 비가 왔다.
아침부터 보슬보슬 내리는 비였다.
세차지 않았다.
그냥 하늘이 조용히 젖어 있는 것 같은 비였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살구나무 마당에 가기 어려운 날이었다.
비가 오면 나가기 어려웠다.
그냥 처소에 있었다.
교육을 받고.
청소를 했다.
비 때문에 청소가 평소와 달랐다.
처마 밑으로 다녔다.
젖은 바닥을 조심하면서.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박 상궁이 서아를 불렀다.
"윤서아."
"예."
"잠깐 따라오너라."
서아는 따라갔다.
어디로 가시는 건지 몰랐다.
복도를 걸었다.
동쪽으로.
아니었다.
남쪽이었다.
서아는 걸으면서 주변을 봤다.
낯선 구역이었다.
박 상궁이 멈추셨다.
작은 마당 앞이었다.
살구나무 마당이 아니었다.
다른 마당이었다.
"여기서 기다려라."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누구를요?"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폐하께서 부르셨다."
서아는 굳었다.
"폐하가요?"
"그렇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딱딱하지 않았다.
뭔가 아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예법 잘 지켜라."
"예."
"들어오시면 바로 고개 숙여."
"예."
박 상궁이 돌아가셨다.
서아는 마당 앞에 혼자 섰다.
마당은 살구나무 마당보다 컸다.
나무가 두 그루 있었다.
이름 모르는 나무였다.
잎이 넓었다.
비에 젖어 있었다.
잎 위에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서아는 그 마당을 봤다.
왜 여기에 부르셨을까.
살구나무 마당이 아니라.
다른 마당에.
잠깐 있다가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발걸음이 가까워졌다.
멈췄다.
"고개 들어라."
폐하의 목소리였다.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폐하가 서 계셨다.
오늘은 수행 내관이 마당 밖에 있었다.
마당 안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폐하가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서아도 들어갔다.
나무 앞에 섰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빗방울이 잎 위에 맺혀 있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살구나무 마당에 비가 와서."
"예."
"여기로 왔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나무 마당에 비가 와서.
여기로.
오고 싶으셨다는 것이었다.
"예."
두 사람이 나무 아래에 앉았다.
처마 밑이었다.
비가 처마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용했다.
폐하가 빗소리를 들으시는 것 같았다.
서아도 들었다.
처마에 비가 떨어지는 소리.
규칙적이고 조용한 소리였다.
"비 소리가 좋으세요?"
서아가 물었다.
"그렇다."
"왜요?"
폐하가 처마를 봤다.
"조용해서."
"비 소리가 조용한 건가요. 시끄럽지 않은 건가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둘이 다르냐."
"다른 것 같아요."
"어떻게."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조용하다는 건. 소리가 없는 게 아니라. 다른 것들이 다 잠잠해진다는 뜻인 것 같아서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렇구나."
"비 소리가 나면 다른 소리들이 잠잠해지잖아요. 그래서 비 소리가 조용하게 느껴지는 거 아닐까요."
폐하가 처마를 봤다.
"그렇게 들을 수 있겠구나."
"왕자님은 어떻게 들으세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그냥 비 소리로."
서아는 웃음이 났다.
"그게 더 솔직한 것 같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요즘은 가끔 보였다.
처음에는 없었는데.
살구나무 마당에 오시면서.
조금씩 돌아오는 것 같았다.
한참이 지났다.
비가 조금 굵어졌다.
처마에서 떨어지는 소리가 커졌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요즘 어떠냐."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요즘 어떠냐.
폐하가 서아한테 그 질문을 하시는 건.
처음이었다.
"예?"
"요즘. 지내는 게 어떠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요즘 어떤가.
청소를 했다.
교육을 받았다.
살구나무 마당에 갔다.
채린이가 옆에 있었다.
별을 찾았다.
"괜찮아요."
서아가 말했다.
"괜찮다고."
"예."
"정말이냐."
서아는 그 질문에 멈췄다.
정말이냐고.
폐하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평소보다 더 직접적으로 보는 눈빛이었다.
"정말이냐."
다시 물으셨다.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정말 괜찮은 걸까.
청소를 하면서 가끔 동쪽을 봤다.
밤에 자다가 새벽에 눈이 떴다.
연못이 있는 방향을.
아직도 가끔 생각했다.
새벽에 별을 배우던 것을.
낮고 넓적한 돌 위에 앉아 있던 것을.
"……모르겠어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모른다고."
"아까 괜찮다고 했는데. 정말이냐고 물으시니까."
서아는 처마를 봤다.
"잘 모르겠어요.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안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폐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어떤 게 안 괜찮으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가끔."
"응."
"별자리를 새벽에 배우던 게 생각나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연못가에서요."
서아는 처마를 봤다.
"그때가 생각날 때가 있어요."
폐하가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계속했다.
"지금도 좋아요. 살구나무 마당도 좋고. 낮에 별자리 배우는 것도 좋아요."
"그런데."
"그때도 좋았어서요."
서아는 처마를 봤다.
빗방울이 처마 끝에서 떨어졌다.
하나씩.
"그때가 좋았던 것과 지금이 좋은 것이 다르지 않은데.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어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서아는 처마를 봤다.
"죄송합니다. 이런 말을——"
"아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폐하가 처마를 봤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처마를.
"나도 그렇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나도 그렇다.
"그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조용하고 낮게.
"새벽에 별을 봤던 것."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연못가에 앉아 있었던 것."
폐하가 처마를 봤다.
"지금도 괜찮은데. 그때가 생각날 때가 있다."
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으려고 했다.
항상 참았다.
왕 앞에서.
폐하 앞에서.
눈물을 보이면 안 됐다.
폐하가 서아를 보셨다.
서아는 처마를 봤다.
참으려고.
그런데.
"서아야."
폐하가 부르셨다.
"슬프냐."
그 질문이 나왔다.
슬프냐고.
서아는 아니라고 하려고 했다.
아니라고.
그런데.
눈물이 먼저 나왔다.
소리 없이.
뺨을 타고.
서아는 눈물이 나온 걸 알았다.
손으로 닦으려고 했다.
손이 올라가기 전에 폐하가 보셨다.
"서아야."
폐하의 목소리가 달라졌다.
낮았는데 더 낮아진 것 같았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왜 사과하느냐."
"폐하 앞에서——"
"괜찮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우는 게 잘못이 아니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그런데 멈추지 않았다.
한 번 나오니까 멈추지 않았다.
서아는 손으로 눈을 눌렀다.
참으려고.
"서아야."
"예."
"참지 않아도 된다."
그 말이 나왔다.
참지 않아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손을 내렸다.
눈물이 났다.
소리 없이.
비 소리가 들렸다.
처마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서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울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깨가 조금 흔들렸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옆에 계셨다.
서아는 잠깐 울었다.
길지 않았다.
그냥 나오는 것들이 나왔다.
그리운 것들이.
새벽 연못이.
낮고 넓적한 돌이.
별자리를 배우던 시간이.
왕자님이었던 시간이.
그것들이 눈물이 됐다.
잠깐 났다가 멈췄다.
서아는 눈물을 닦았다.
"죄송합니다."
"됐다."
"폐하 앞에서 이런——"
"됐다고 했다."
폐하가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서아는 입을 다물었다.
비 소리가 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나도 그리울 때가 있다고 했다."
"예."
"그게 지금 이 시간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서아는 들었다.
"그렇죠."
"그냥 좋았던 것이 좋았다는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좋았던 것이 좋았다는 것.
그뿐이라는 것.
"예."
"네가 우는 것도."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리운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리운 것이 있다는 것.
"예."
"그게 잘못이 아니다."
서아는 눈이 또 시려졌다.
"예."
폐하가 처마를 봤다.
비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이 조용히 있었다.
비 소리가 채워주는 침묵 속에서.
한참 뒤에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별자리."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눈이 시린 채로.
"예."
"장수(張宿)다."
서아는 들었다.
"장수요?"
"하늘의 부엌이라고 불린다."
"부엌이요?"
"다섯 개가 모여 있다. 밥을 짓는 곳이라는 뜻이다."
서아는 그 이름을 생각했다.
하늘의 부엌.
"밥 짓는 별이요?"
"그렇다."
"재밌는 이름이에요."
"왜."
"다들 멋있는 이름인데. 부엌은 친근해서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그렇구나."
"하늘의 부엌에서 밥 지으면 뭐가 나올까요."
"별 맛이 나지 않겠느냐."
서아는 그 말에 웃음이 났다.
"예전에 제가 별 맛이 어떤 맛일 것 같냐고 물었잖아요."
"그랬지."
"차갑고 맑은 맛이라고 하셨잖아요."
"기억하는구나."
"왕자님이 하시는 말씀은 잘 기억된다고 했잖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처마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눈이 아직 조금 시렸다.
그런데.
지금은 좋았다.
비 소리가 들리고.
폐하가 옆에 계시고.
별자리를 배우고.
좋았다.
"오늘 밤에 찾아볼게요."
"어느 쪽에 있는지 알겠느냐."
"남쪽이에요?"
"그렇다."
"다섯 개요?"
"그렇다."
서아는 눈을 닦았다.
마지막으로 한 번.
"찾으면 말씀드릴게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래."
그 한 글자가 따뜻하게 들렸다.
마당을 나오면서 서아는 빗속을 걸었다.
우산이 없었다.
처마를 따라 걸었다.
비가 보슬보슬 내렸다.
서아는 걸으면서 뺨을 짚었다.
눈물이 말랐다.
비가 씻어준 것 같았다.
폐하 앞에서 울었다.
처음으로.
참으려고 했는데.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하셔서.
그냥 났다.
서아는 그게 부끄럽지 않았다.
이상하게.
부끄러울 것 같았는데.
부끄럽지 않았다.
폐하도 그리울 때가 있다고 하셨다.
새벽 연못이.
별자리를 배우던 것이.
나도 그렇다고 하셨다.
서아만 그런 게 아니었다.
두 사람이 같이 그리워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위로가 됐다.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울었어?"
"응."
"마당에서?"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폐하 앞에서?"
"응."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처음이지."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라고 하셨어."
서아는 들은 말을 전했다.
요즘 어떠냐고 물으셨다는 것.
새벽 연못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하셨다는 것.
나도 그렇다고 하셨다는 것.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는 것.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채린아."
"응."
"왜 말이 없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평소와 달리.
뭔가 결정한 것 같은 눈빛이었다.
"서아야."
"응."
"폐하가 서아를 특별하게 생각하신다."
"알아."
"그냥 특별한 게 아니야."
채린이가 말했다.
"어떻게."
채린이가 앞을 봤다.
"나도 그렇다고 하셨잖아."
"응."
"왕이 된 분이 수습 궁녀한테 나도 그렇다고 하시는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게."
채린이가 말했다.
"보통 일이 아니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이방원 왕자님이 마음 조심하라고 했잖아."
"응."
"근데 이제."
채린이가 잠깐 멈췄다.
"서아 마음만 조심해야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서아 마음만이 아니라.
폐하 마음도.
"채린아."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채린이가 앞을 봤다.
"폐하도 마음이 있으시다는 말이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도 마음이 있으시다.
"……그걸 어떻게 알아."
"새벽 연못이 그리울 때가 있다고 하셨잖아."
"응."
"나도 그렇다고 하셨잖아."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리운 건 별자리가 아니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새벽 연못에서 서아가 있었잖아."
채린이가 말했다.
"그게 그리운 거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새벽 연못에서 서아가 있었다.
그게 그리운 것이다.
별자리가 아니라.
서아는 한동안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서아야."
"응."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폐하도 마음이 있으시다.
채린이가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더 조심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모르겠어."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한 글자가 이번엔 허락이 아니었다.
그냥 들었다는 것이었다.
서아가 모른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었다.
"채린아."
"응."
"무서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가."
"이 마음이."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알아."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근데."
"응."
"서아야."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울고 나니까 어때."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울고 나니까 어때.
생각했다.
비 소리가 들렸다.
폐하가 옆에 계셨다.
별자리를 배웠다.
장수.
하늘의 부엌.
"가벼워."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됐어."
그 말이 짧았다.
그런데 충분했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서아는 웃었다.
또 자자였다.
채린이는 언제나 자자로 마무리했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눈을 감았다.
비 소리가 들렸다.
처마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조용하게.
다른 것들을 잠잠하게 만드는 소리가.
서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폐하 앞에서 울었다.
처음으로.
참지 않았다.
그런데 부끄럽지 않았다.
가벼웠다.
그게.
오늘이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비 소리가 들렸다.
잠이 왔다.
여름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29회 예고
"둘만 아는 별자리 이야기"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우리만 아는 별자리가 있다. 어떤 별자리냐고 물었더니. 처음 가르쳐 줬던 별이라고. 연못가에서. 기수였다. 나는 그 이름을 들었을 때 왜 눈물이 나올 것 같았을까.
작가 한마디
처음으로 왕 앞에서 운 서아,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 폐하.
채린이가 그리운 건 별자리가 아니라 서아가 있었던 것이라고 말해줬을 때... 우리 다 알고 있었죠?
29회에서 두 사람만의 별자리 이야기가 나옵니다. 기대해 주세요.
29회 — 둘만 아는 별자리 이야기
비가 그쳤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어제 하루 종일 내리던 비가.
새벽에 그쳤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공기가 달랐다.
비 온 뒤의 냄새가 났다.
흙냄새.
풀냄새.
씻긴 것 같은 냄새.
하늘이 맑았다.
구름이 없었다.
서아는 그 하늘을 봤다.
어제 울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늘이 맑았다.
하늘처럼.
씻긴 것 같았다.
아침 교육을 마치고 청소를 했다.
북쪽 행각을 쓸었다.
비 때문에 어제 못 쓴 구석들을 쓸었다.
빗자루를 밀면서 서아는 어제를 생각했다.
폐하 앞에서 울었다.
처음으로.
그런데 부끄럽지 않았다.
이상하게.
폐하가 참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다.
우는 게 잘못이 아니라고 하셨다.
그리운 것이 있다는 것이라고 하셨다.
서아는 빗자루를 멈추지 않았다.
그냥 밀었다.
생각하면서.
청소를 마치고 살구나무 마당으로 걸었다.
비가 그쳐서 갈 수 있었다.
마당 바닥이 아직 조금 젖어 있었다.
나무 잎에 빗물이 맺혀 있었다.
햇살이 그 빗물에 반짝였다.
서아는 그걸 봤다.
예뻤다.
폐하가 계셨다.
오늘도 오셨다.
나무 아래에 서 계셨다.
잎에 맺힌 빗물을 보고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봤다.
"왔느냐."
"예."
"비가 그쳤다."
"예. 하늘이 맑아요."
폐하가 하늘을 봤다.
"그렇구나."
두 사람이 나무 아래에 섰다.
잎에 맺힌 빗물이 햇살에 반짝였다.
"왕자님."
"응."
"어제 감사합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뭐가."
"울어도 괜찮다고 하셔서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감사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어제 울고 나서 어떠냐."
서아는 채린이한테 했던 말이 생각났다.
"가벼웠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가벼워."
"예. 울고 나면 가벼워지는 것 같아요."
폐하가 잠깐 나무를 봤다.
"그렇구나."
"왕자님은 울어보신 적 있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질문이 너무 직접적이었나 싶었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있어요?"
"어릴 때."
"어릴 때요?"
"어릴 때는 울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어릴 때는 울었다.
"지금은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왜요?"
"울어야 할 것들이 있는데."
폐하가 말씀하셨다.
"어디서 울어야 할지 모르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어디서 울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
왕이 되시면.
울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
"왕자님."
"응."
"여기서 우셔도 돼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에서요."
서아가 말했다.
"저는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했잖아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따뜻하게 들렸다.
돌 의자에 앉았다.
나란히.
빗물이 돌 위에도 맺혀 있었다.
서아가 소매로 닦았다.
"앉으세요."
폐하가 앉으셨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빗물이 흔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어제 별자리를 가르쳐 줬는데."
"예. 장수요."
"하늘의 부엌."
"예."
폐하가 하늘을 봤다.
낮 하늘이었다.
"오늘은 다른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서아는 들었다.
"별자리가 아니에요?"
"별자리 이야기다."
"어떤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우리만 아는 별자리."
서아는 그 말이 뜻밖이었다.
우리만 아는 별자리.
"그런 게 있어요?"
"있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처음 가르쳐 줬던 별이 있다."
서아는 생각했다.
처음 가르쳐 주신 별.
"……기수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기억하는구나."
"예. 하늘의 키잖아요."
폐하가 고개를 끄덕이셨다.
"연못가에서."
"예."
"그때 처음 가르쳐 줬다."
서아는 그 날이 생각났다.
새벽 연못.
낮고 넓적한 돌.
처음으로 별자리를 배우던 날.
바람을 맞는 키처럼 기울어진 별.
"예."
"그 이후로 많이 가르쳐 줬다."
"예."
폐하가 나무를 봤다.
"그런데 기수를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서아는 들었다.
"왜요?"
폐하가 잠깐 침묵하셨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가 처음으로 별자리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서아는 들었다.
"그때가 기억에 남는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때가 기억에 남는다.
"……왜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가르쳐 달라고 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처음으로.
누군가가 가르쳐 달라고.
"별자리를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알 것이다. 그런데."
폐하가 서아를 봤다.
"가르쳐 달라고 한 사람이 없었다."
서아는 그 말의 무게를 달았다.
별자리를 아는 것과.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이 다른 것이었다.
가르쳐 달라고 하는 것은.
관심이 있다는 것이고.
왕자님한테.
"……그랬어요?"
"그래서 기억에 남는다."
폐하가 나무를 봤다.
"기수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기수가 기억에 남는다.
하늘의 키.
처음 배운 별.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저도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기수가 기억에 남아요."
"왜."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처음 가르쳐 주셔서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것뿐이냐."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그것뿐이냐.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니요."
"왜."
"바람을 맞는 키라고 하셨잖아요."
"응."
"기울어진 것이 쓸모가 있다고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때 제 이야기를 했어요."
서아가 말했다.
"제가 궁에서 자꾸 사고를 치는데. 그 엉뚱한 것이 오히려 쓸모가 있을 때가 있다고."
폐하가 나무를 봤다.
"기억하는구나."
"왕자님이 하시는 말씀은 잘 기억된다고 했잖아요."
폐하가 소리 없이 웃으셨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좋았다.
그 웃음이.
"그래서 기수가 기억에 남아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가르쳐 주신 첫 번째 별이고. 제 이야기가 담긴 별이라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뭔가를 담고 있는 눈빛이었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러면 그게 우리만 아는 별자리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우리만 아는.
기수.
"예."
서아가 말했다.
"우리만 아는 거예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오늘은 특히 따뜻했다.
우리만 아는 별자리가 있다는 것.
기수.
바람을 맞는 키.
기울어져 있지만 쓸모가 있는.
한참이 지나서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기수 말고도 우리만 아는 것들이 있다."
서아는 들었다.
"어떤 것들이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낮고 넓적한 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연못가의 돌.
"예."
"버드나무 그늘."
"예."
"비가 오면 빗소리."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살구나무 마당."
"예."
서아는 그것들을 하나씩 들었다.
낮고 넓적한 돌.
버드나무 그늘.
빗소리.
살구나무 마당.
"그것들이 다 우리만 아는 거예요?"
"그렇다."
"왜요?"
폐하가 나무를 봤다.
"둘이 함께 있었으니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둘이 함께 있었으니까.
그게 우리만 아는 것들을 만든다는 것.
서아는 눈이 시려졌다.
참았다.
"그러면요."
서아가 말했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앞으로도 우리만 아는 것들이 생겨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나무를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렇다."
부정하지 않으셨다.
앞으로도.
우리만 아는 것들이 생긴다고.
서아는 심장이 더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나무를 봤다.
잎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빗물이 아직 맺혀 있었다.
햇살이 반짝였다.
그날 저녁.
처소에서 채린이와 둘이 있었다.
정이는 교육 방에 있었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채린아."
"응."
"우리만 아는 것들이 있다고 하셨어."
채린이가 바늘을 멈췄다.
"폐하가?"
"응."
"어떤 것들."
서아는 하나씩 말했다.
낮고 넓적한 돌.
버드나무 그늘.
빗소리.
살구나무 마당.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말이 없었다.
한참.
"채린아."
"응."
"왜 말이 없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달랐다.
"서아야."
"응."
"그게 다 무슨 말인지 알지."
"응."
"폐하가 그것들을 기억하신다는 게."
"응."
채린이가 앞을 봤다.
"그냥 기억하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소중하게.
"채린아."
"응."
"무서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가."
"폐하가 저를 소중하게 생각하신다면."
서아는 창밖을 봤다.
"저도 폐하를 소중하게 생각하잖아요."
"알아."
"두 사람이 다 소중하게 생각하는데."
"응."
"이룰 수 없잖아요."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서아가 말했다.
"그게 무서워요."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이룰 수 없다는 걸 왜 알아."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왕이 되신 분이잖아. 왕비가 계실 거고."
"근데."
채린이가 말했다.
"지금 당장은 아무것도 없잖아."
"그렇지."
"지금은 살구나무 마당이 있잖아."
"응."
"그러면."
채린이가 앞을 봤다.
"지금을 이루는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을 이루는 것.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게.
나중 이야기라면.
지금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채린아."
"응."
"그게 맞는 말이야?"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모르겠어."
"모르는데 왜 한 말이야."
"서아가 너무 멀리 보는 것 같아서."
채린이가 말했다.
"나중이 아직 오지 않았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을 봐."
채린이가 말했다.
"나중이 오면 그때 생각하면 되잖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다시 들었다.
"지금은 살구나무 마당이 있어."
"응."
"우리만 아는 것들이 있어."
"응."
"그걸로 충분하잖아. 지금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은 충분하다.
그 말이.
오늘은 달랐다.
예전엔 그냥 위로처럼 들렸는데.
오늘은.
진짜인 것 같았다.
지금은 충분했다.
우리만 아는 것들이 있었다.
기수가 있었다.
살구나무 마당이 있었다.
폐하가 계셨다.
"응."
서아가 말했다.
"지금은 충분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느질을 했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늘이 어두워지면서.
별이 하나씩 나왔다.
서아는 눈을 좁혀 봤다.
남쪽 하늘을 봤다.
장수를 찾았다.
하늘의 부엌.
다섯 개가 모여 있는.
찾았다.
그 옆에.
또 찾았다.
기수였다.
바람을 맞는 키.
기울어진 모양으로.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우리만 아는 별.
처음 가르쳐 주신 별.
폐하가 기억하시는 별.
서아도 기억하는 별.
"기수."
혼자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못 들을 말이었다.
그런데 말하고 싶었다.
그 이름을.
별이 반짝였다.
기울어진 채로.
바람을 맞으면서.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오래.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눈을 뜨고 있었다.
천장을 봤다.
우리만 아는 것들이 있다.
기수.
낮고 넓적한 돌.
버드나무 그늘.
빗소리.
살구나무 마당.
그것들이 다 있었다.
없어지지 않았다.
왕이 되셨어도.
구역이 바뀌었어도.
그것들은 있었다.
서아는 그 사실이 따뜻했다.
채린이 말대로.
지금은 충분했다.
나중이 오면 그때 생각하면 됐다.
지금은.
이것들이 있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기수가 눈앞에 있었다.
기울어진 채로 반짝이는 별이.
우리만 아는 별이.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별이 가득한.
30회 예고
"고백 같지 않은 고백"
살구나무 마당에서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나는 여기 있으면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나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았다.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이었다. 그런데 왜 그게 더 무거웠을까.
작가 한마디
우리만 아는 별자리, 우리만 아는 것들
기수부터 시작해서 살구나무 마당까지, 두 사람이 함께 만든 것들이에요.
채린이가 지금을 보라고 했어요. 지금은 충분하다고.
30회에서 드디어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이 나옵니다. 함께 봐요.
30회 — 고백 같지 않은 고백
여름이 깊어졌다.
햇살이 강해졌다.
낮이 길어졌다.
살구나무 그늘이 짙어졌다.
서아는 그 그늘 아래에 앉는 날이 늘었다.
그늘이 좋았다.
시원했다.
폐하도 그늘 아래를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요즘은 돌 의자보다 나무 아래에 서시는 날이 많았다.
그날은 맑은 날이었다.
오후였다.
서아는 청소를 마치고 살구나무 마당으로 갔다.
폐하가 계셨다.
나무 아래에 서 계셨다.
하늘을 보고 계셨다.
서아가 들어가니 봤다.
"왔느냐."
"예."
서아는 폐하 옆에 섰다.
같이 하늘을 봤다.
맑은 하늘이었다.
구름이 몇 개 있었다.
느릿느릿 움직이는.
"구름이 많이 없네요."
"그렇구나."
"요즘 날씨가 좋아요."
"그렇다."
짧은 대화였다.
그래도 어색하지 않았다.
폐하가 하늘을 보시다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오늘 조정에서 결정을 바꿨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결정을 바꿨다.
"어떤 결정이요?"
"저번에 신하가 반대했던 그것."
"세금 관련이요?"
"그렇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저번에 폐하가 말씀하셨던 것.
틀렸을 수도 있겠다고 하셨던 것.
"바꾸셨어요?"
"그렇다."
"잘하셨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잘했느냐."
"예."
서아가 말했다.
"틀린 걸 알면 바꾸는 게 맞잖아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저번에 네가 그런 말을 했다."
"예."
"틀린 걸 알면서 고집하면 더 흔들린다고."
"예."
폐하가 하늘을 봤다.
"그 말이 기억에 남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기억에 남았다고.
"그래서 바꾸신 거예요?"
"그것만이 아니다. 신하 말이 맞았다."
"그래도요."
"그래도?"
서아는 하늘을 봤다.
"기억에 남으셨다는 게 좋아서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뺨이 뜨거워졌다.
"제 말이 도움이 됐다면 좋은 거잖아요."
폐하가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조용하게 나왔다.
두 사람이 나무 아래 돌 의자에 앉았다.
나란히.
하늘이 보였다.
구름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별자리."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예."
"익수(翼宿)다."
"익수요?"
"하늘의 날개라고 불린다."
서아는 그 이름이 좋았다.
"날개요?"
"그렇다. 스물두 개가 모여 있다."
"많이 모여 있네요."
"날개는 많은 깃털이 있어야 하니까."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날개는 많은 깃털이 있어야 한다.
"날 수 있는 별이에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날 수 있는 별."
"날개가 있으니까요."
"별은 날지 않는다."
"별자리 이름이 날개인데 날 수 없어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날개라는 뜻이지."
"제자리에 있는 날개요?"
"그렇다."
서아는 그 말을 생각했다.
제자리에 있는 날개.
날지 않지만 날개가 있는.
"그러면 언젠가 날 수도 있는 거잖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날개가 있으니까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하늘을 봤다.
"그렇구나."
"왕자님은 날개가 있으세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나는?"
"예. 왕이 되시면 더 높이 가시는 거잖아요. 날개가 있어야 하지 않나요."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글쎄다."
"없어요?"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
서아는 폐하를 봤다.
"저는 있는 것 같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왜."
"매일 결정을 하시잖아요. 많은 사람한테 영향이 가는 결정을. 그게 날개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서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렇게 봐주는구나."
"사실이잖아요."
"그런가."
"예."
폐하가 하늘을 봤다.
"서아야."
"예."
폐하가 잠깐 침묵하셨다.
바람이 불었다.
잎들이 흔들렸다.
그늘이 일렁였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나는."
서아는 들었다.
"여기 있으면."
폐하가 하늘을 봤다.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
여기 있으면.
살구나무 마당에 있으면.
서아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았다.
여기가 좋다는 말이었다.
살구나무 마당이 좋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서아가 있는 이곳이.
좋다는 말이었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뺨이 뜨거웠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보고 있었다.
"서아야."
"예."
"말이 없구나."
"……예."
"왜."
서아는 나무를 봤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요."
폐하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냥 있어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냥 있어도 된다.
"예."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이 오늘은 달랐다.
뭔가로 꽉 찬 침묵이었다.
말 대신 다른 것이 공기 중에 있는 것 같은.
서아는 그게 뭔지 알았다.
이름 붙이지 않았다.
붙이지 않아도 알았다.
한참 뒤에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응."
"저도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저도 여기 있으면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아요."
폐하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뺨이 뜨거웠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말이 나오고 나서.
후회가 될 것 같았다.
그런데 후회가 안 됐다.
사실이었다.
여기 있으면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폐하가 계시는 이곳이.
좋았다.
폐하가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부정하지 않으셨다.
그냥 들으셨다.
그렇구나, 하셨다.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가슴이.
잠깐 뒤에 폐하가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기수 알지."
서아는 그 말이 뜬금없으면서도 뜬금없지 않았다.
"예. 하늘의 키요."
"바람을 맞는."
"예."
폐하가 나무를 봤다.
"오늘 익수를 가르쳐 줬는데."
"예."
"날개라고 했다."
"예."
폐하가 서아를 봤다.
"기수는 바람을 맞는다."
"예."
"익수는 날개가 있다."
"예."
폐하가 잠깐 생각하셨다.
"바람을 맞으면서 날개가 있으면."
서아는 들었다.
"날 수 있겠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바람을 맞으면서 날개가 있으면 날 수 있다.
"……예."
서아가 말했다.
"날 수 있어요."
폐하가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바람을 맞는 기수.
날개를 가진 익수.
두 별이 이어지면.
날 수 있다.
그게 별 이야기인지.
다른 이야기인지.
서아는 알 것 같았다.
알면서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다.
마당을 나오면서 서아는 걸었다.
복도에 나왔다.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었다.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
폐하가 하신 말씀이었다.
서아도 했다.
저도요.
그 말이 나왔을 때.
고백 같지 않았다.
그냥 사실을 말한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더 무거웠다.
고백이었으면 가벼웠을 텐데.
그냥 사실이어서.
더 무거웠다.
서아는 걸었다.
발걸음이 가벼운지 무거운지 몰랐다.
그냥 걸었다.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뭔 일 있었어."
"폐하가 말씀하셨어."
"뭐라고."
서아는 앉았다.
"여기 있으면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채린이가 바느질을 내려놨다.
"그게 다야?"
"응."
"그리고?"
"저도요, 했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한참.
"서아가?"
"응."
"스스로?"
"응."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그 말이 어떤 말인지 알지."
"알아."
"고백이잖아."
"고백 같지 않았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왜."
"그냥 사실이었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게 더 무거운 거야."
"알아."
채린이가 앞을 봤다.
"폐하도 그랬잖아."
"응."
"그냥 사실처럼 하셨잖아."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두 사람이 같은 사실을 말한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같은 사실.
두 사람이.
"그게."
채린이가 말했다.
"고백보다 더 무거운 거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고백은 한쪽이 하는 건데."
"응."
"같은 말을 두 사람이 하면."
채린이가 잠깐 멈췄다.
"그건 고백이 아니야."
"뭔데."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확인이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확인.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라는 것의 확인.
서아는 그 말이 무거웠다.
"채린아."
"응."
"무서워."
"알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또 모른다고."
"모르지. 근데."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지금 어때."
서아는 그 질문을 들었다.
지금 어떠냐고.
생각했다.
폐하가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서아도 그랬다.
채린이가 확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이 같은 마음이라는.
지금 어떤가.
"모르겠어."
서아가 말했다.
"뜨거운 것 같기도 하고."
"응."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응."
"그런데."
서아는 창밖을 봤다.
"좋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좋아."
서아가 다시 말했다.
"지금이 좋아."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그래."
그 한 글자가 이번엔 허락이었다.
지금이 좋아도 된다는.
서아는 채린이가 고마웠다.
언제나 그랬다.
채린이는.
그래, 한 마디로 충분했다.
저녁이 됐다.
정이가 돌아왔다.
"야, 오늘 교육에서 새 예법 배웠는데. 진짜 어려워."
"어떤 건데."
채린이가 물었다.
"폐하께 올리는 예법."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폐하께 올리는 예법.
"어렵긴 어렵겠다."
서아가 말했다.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넌 폐하 뵌 적 있어?"
서아는 잠깐 멈췄다.
"담당 구역이 달라서."
"그렇구나. 나는 멀리서 한 번 봤어. 진짜 무서워 보이시더라."
"그래?"
"응. 눈빛이 날카롭고."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그렇게 느꼈어?"
"응. 너는 어때?"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모르겠어."
그 말이 짧았다.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앞을 봤다.
무서워 보이신다고.
날카롭다고.
서아는 그게 이상했다.
무서운 게 아니라 걱정이 된다고 폐하한테 말했는데.
그 말이 떠올랐다.
다들 무서워하는 분을.
서아만 걱정이 된다고 했다.
그게.
우리만 아는 것 중 하나인 것 같았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별이 보이기 시작했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었다.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남쪽 하늘을 봤다.
익수를 찾았다.
하늘의 날개.
스물두 개가 모여 있는.
찾았다.
"익수."
혼자 말했다.
날개가 있는 별.
제자리에 있는 날개.
그 옆에.
기수를 찾았다.
바람을 맞는 키.
찾았다.
두 별이 있었다.
기수와 익수.
바람을 맞으면서 날개가 있으면.
날 수 있겠지.
폐하가 하신 말씀이었다.
서아는 그 두 별을 봤다.
여기 있으면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했다.
고백 같지 않은 고백.
아니.
채린이 말대로.
확인이었다.
서아는 그 두 별을 봤다.
뭔가 이어져 있는 것 같았다.
기수와 익수 사이에.
보이지 않는 선이.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
그 말을 안고.
지금이 좋다는 것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밤이었다.
별들이 가득한.
31회 예고
"서아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어느 날 살구나무 마당에서 폐하가 말씀하셨다. 조용히. 아주 조용히. 서아야, 네가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그 말을 들었을 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나무를 봤다. 눈물이 났다. 이번엔 참지 않았다.
작가 한마디
여기 있으면 다른 곳에 있고 싶지 않다,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했어요.
고백 같지 않은 고백이 아니라 확인이라고 한 채린이 말이 제일 무거웠어요.
31회에서 폐하가 처음으로 직접적으로 마음을 표현하십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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