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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님은 나만 모른다

11회 — 이방원 왕자님은 왜 나를 보는 걸까

이방원 왕자님을 복도에서 마주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서아는 오전 교육을 마치고 점심 심부름을 가던 길이었다. 동쪽 내전 쪽이 아니라 북쪽 행각 쪽이었다. 평소에 잘 다니지 않는 구역이었다.

발걸음이 빨랐다. 점심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였다.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멈췄다.

복도 저쪽에서 걸어오는 사람이 있었다.

서아는 그 사람을 알았다.

잊을 수 없었다.

첫날에 발을 밟았던 분.

정안군. 이방원 왕자님.

서아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멈추고, 눈을 아래로.

박 상궁이 가르쳐 주신 대로.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지나치셨다.

서아는 숨을 참았다.

지나가셨구나, 이제 가도 되겠다, 하고 고개를 드는데——

"거기."

멈췄다.

목소리가 들렸다.

이방원 왕자님 목소리였다.

이방과 왕자님이랑 다른 목소리였다. 좀 더 날카롭고, 좀 더 빠른 목소리.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돌아서 계셨다.

서아를 보고 계셨다.

눈이 마주쳤다.

서아는 그 눈빛에 순간적으로 숨이 막혔다.

차가웠다.

이방과 왕자님이 살얼음 같다면, 이방원 왕자님은 칼날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 긴장이 됐다.

"수습 궁녀냐."

"예."

"이름이 뭐냐."

"윤서아입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훑는 시선이었다.

평가하는 것 같기도 했다.

서아는 그 시선이 불편했지만 티내지 않으려고 했다.

"동쪽 내전 담당이냐."

서아는 잠깐 놀랐다.

어떻게 아시지.

"예, 그렇습니다."

"박 상궁 아래냐."

"예."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아무 말씀 없이 돌아서셨다.

걸어가셨다.

뒷모습이 담벼락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숨을 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무서웠다.

이방과 왕자님이랑 같은 형제인데 이렇게 다른가.

점심을 먹으면서 채린이한테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 봤어."

채린이가 수저를 내려놨다.

"어디서."

"북쪽 행각 복도."

"뭐라고 하셨어?"

"이름이랑 담당 구역 물어보셨어. 그리고 그냥 가셨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왜 그러셨을까."

"나도 모르겠어."

"혹시 어제 최 상궁 일 때문에?"

서아는 그 말을 듣고 멈췄다.

최 상궁.

이방과 왕자님이 최 상궁한테 서아 편을 들어주셨다.

그 일이 이방원 왕자님 귀에 들어갔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이방원 왕자님이 형님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하던데."

"관심이 많아?"

채린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방원 왕자님이 실권을 갖고 계시잖아. 태조 임금의 신임을 많이 받으시고. 그러니까 형님들 일도 다 알고 계시는 것 같다고."

서아는 그 말이 좀 무겁게 들렸다.

"그러면 이방과 왕자님이 수습 궁녀 편을 드셨다는 것도 아실 수 있겠네."

"그렇겠지."

"그래서 나를 확인하러 오신 건가."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확인?"

"어떤 애인지."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럴 수 있어."

서아는 밥을 한 숟갈 떴다.

입맛이 없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형님 일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이방과 왕자님이 서아한테 신경 쓰신다는 걸 눈치채셨을 수도 있었다.

그 생각이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오후 청소를 하러 나갔다.

동쪽 내전을 쓸고 물통을 교체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을 지나가는데 문이 열려 있었다.

왕자님이 안에 계셨다.

오늘은 책이 아니라 붓을 들고 계셨다.

무언가를 쓰고 계셨다.

서아는 지나치려다 멈췄다.

"왕자님."

왕자님이 붓을 멈추고 서아를 봤다.

"왔느냐."

"예. 청소하러요."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붓을 움직이셨다.

서아는 청소를 시작했다.

복도를 쓸면서 왕자님이 무언가를 쓰시는 소리를 들었다.

붓이 종이 위를 지나가는 소리.

조용하고 규칙적인 소리.

"왕자님, 무엇을 쓰세요?"

"글씨 연습이다."

"글씨 연습이요? 왕자님이요?"

"왜."

"잘 쓰실 것 같아서요."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잘 쓴다고 연습을 안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긴 하네요."

서아는 빗자루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저는 글씨를 잘 못 써요."

"배웠느냐?"

"조금요. 아버지가 가르쳐 주셨는데, 삐뚤빼뚤해서 혼났어요."

왕자님이 소리 없이 웃으셨다.

"얼마나 삐뚤빼뚤하냐."

"왕자님이 보시면 놀라실 것 같아요."

"그렇구나."

서아는 청소를 하다가 말했다.

"왕자님."

"응."

"오전에 이방원 왕자님을 봤어요."

왕자님의 붓이 잠깐 멈췄다.

아주 잠깐.

그러더니 다시 움직였다.

"어디서."

"북쪽 행각 복도에서요. 심부름 가다가."

"무슨 말씀을 하셨느냐."

"이름이랑 담당 구역 물어보셨어요."

왕자님이 붓을 내려놓으셨다.

서아를 봤다.

"그뿐이냐."

"예. 그리고 그냥 가셨어요."

왕자님이 잠깐 생각하시는 것 같았다.

표정이 평소와 같았다.

그런데 눈빛이 조금 달랐다.

"알겠다."

"왕자님, 혹시 이방원 왕자님이 왜 그러신 건지 아세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모르겠다."

그 말이 모르는 것 같지 않았다.

서아는 더 묻지 않았다.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려는데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이방원이 또 말을 걸거든."

"예."

"평소대로 해라."

"평소대로요?"

"특별히 조심하려고 하면 더 어색해진다. 그냥 평소대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특별히 조심하려고 하면 더 어색해진다.

왕자님이 서아를 걱정하시는 거였다.

이방원 왕자님 앞에서 서아가 어색하게 굴지 않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예."

왕자님이 잠깐 멈추셨다.

"이방원이 뭔가 물으면, 솔직하게 대답해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잠깐 생각했다.

솔직하게.

숨기려 하지 말고.

"예."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시고 다시 붓을 드셨다.

서아는 나오면서 생각했다.

왕자님이 이방원 왕자님을 잘 아시는 거겠지.

형제니까.

그래서 어떻게 대하는 게 좋은지 아시는 거겠지.

그 조언이 고마웠다.

그런데 동시에——

왕자님 표정이 붓을 내려놓으셨을 때 달랐다는 게.

그게 마음에 남았다.

이틀 뒤였다.

서아는 오후 청소를 마치고 박 상궁께 보고하러 가는 길이었다.

복도를 걷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단단한 발걸음.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옆으로 비켰다.

발걸음이 서아 앞에서 멈췄다.

"윤서아."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었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셨다. 수행 내관이 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예, 왕자님."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아까처럼 훑는 시선이었다.

"잠깐 걸어라."

서아는 잠깐 놀랐다.

걸으라고 하셨다.

"예."

두 사람이 복도를 걸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앞서고 서아가 따랐다. 수행 내관들은 거리를 두고 뒤따랐다.

잠깐 걷다가 이방원 왕자님이 멈추셨다.

마당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넓은 마당에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마당을 보면서 말씀하셨다.

"형님을 자주 보느냐."

서아는 잠깐 멈췄다.

형님.

이방과 왕자님을 말씀하시는 거였다.

"담당 구역이 동쪽 내전이라, 청소할 때 마주치는 경우가 있습니다."

"청소할 때만이냐."

서아는 심장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칼날 같은 눈빛이었다.

거짓말을 알아채는 눈빛 같았다.

서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왕자님이 솔직하게 대답하라고 하셨으니까.

그러나 새벽 연못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새벽에 수습 궁녀가 내전 구역을 돌아다니는 건——

그건 서아 잘못이었다. 변명할 수 없는.

이방원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서아는 그 시선 아래서 최대한 평온하게 있으려고 했다.

평소대로 해라.

왕자님 말씀이 떠올랐다.

이방원 왕자님이 다시 마당을 봤다.

"형님이 요즘 다르다."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하긴 했는데, 요즘은 더 조용하다. 다른 종류의 조용함이다."

서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대답할 수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모른다고."

"예."

"그런데 표정이 아는 것 같다."

서아는 심장이 철렁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날카로웠다.

아주 날카로웠다.

서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제가 왕자님 마음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런가."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한 번 더 봤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형님이 웃으신다."

서아는 그 말에 뭔가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 같았다.

"……예?"

"요즘 형님 표정이 달라. 내가 아는 형님 표정이 아니다. 어릴 때도 잘 안 웃으셨는데."

이방원 왕자님이 마당을 봤다.

소나무 사이로 바람이 지나갔다.

"그게 네 덕이냐."

조용하고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니라고 해야 하는 건지.

그냥 모른다고 해야 하는 건지.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더니 걸으셨다.

뒤따르던 내관들이 따라갔다.

서아는 그 자리에 남겨졌다.

마당의 소나무 세 그루가 바람에 흔들렸다.

서아는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형님이 웃으신다.

그 말이 귓속에서 울렸다.

저녁에 채린이한테 털어놓았다.

채린이는 서아 이야기를 다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형님이 웃으신다고 하셨어."

"응."

"그게 네 덕이냐고 물으셨고."

"응."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서아야."

"응."

"이방원 왕자님이 알고 계신 것 같아."

"뭘."

"형님이 수습 궁녀한테 마음이 생겼다는 거."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마음이 생겼다.

이방과 왕자님이.

서아한테.

"……그걸 이방원 왕자님이 알고 계신다는 게."

"응."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나쁜 것 같아."

단호하게 말했다.

서아는 알고 있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알고 계신다는 건——

이 일이 왕자님 귀에 들어갔다는 거였다.

수습 궁녀가 왕자와 가깝게 지낸다는 것.

그게 좋은 소문이 아니었다.

"어떡하지."

"모르겠어."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서아야."

"응."

"이방원 왕자님이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잖아."

"응."

"그게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닌 것 같아."

"왜?"

채린이가 생각했다.

"두 가지 중 하나야. 이미 알고 계시니까 대답이 필요 없다는 거. 아니면——"

"아니면?"

"아직은 두고 보겠다는 거."

서아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두고 보겠다.

이방원 왕자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말이었다.

서아를.

그리고 이방과 왕자님을.

그날 밤.

서아는 오래 눈을 뜨고 있었다.

이방원 왕자님 눈빛이 자꾸 떠올랐다.

칼날 같은 눈빛.

형님이 웃으신다.

그 말이 무거웠다.

기쁜 말이었다.

왕자님이 웃으신다는 게.

그런데 동시에 무서운 말이었다.

그걸 이방원 왕자님이 알고 계신다는 게.

서아는 눈을 감았다.

내일 새벽.

연못에 나갈 것이다.

발이 갈 것이다.

마음이 갈 것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방원 왕자님이 지켜보고 계신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다.

기다리는 사람이 더 빛난다고 했다.

직녀성처럼.

서아는 지금 빛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타고 있는 걸까.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내일 새벽 연못가에, 왕자님이 먼저 와 계실 거라는 것.

낮고 넓적한 돌 위에.

그것만 생각하면서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봄밤이었다.

12회 예고

"서아야, 선 넘지 마 (나도 알아, 근데 왜 자꾸…)"

이방원 왕자님이 나를 부르셨다. 단둘이. 그리고 하신 말씀이——형님과 가까이 지내지 마라. 알겠습니다, 라고 했다. 근데 그날 새벽에도 연못에 갔다. 나 왜 이러는 걸까.

작가 한마디

이방원 왕자님 등장으로 긴장감이 올라가기 시작했어요. 형님이 웃으신다는 말 한마디로 이방과 왕자님 마음이 얼마나 변했는지 느껴지죠?

12회에서 이방원 왕자님이 직접 경고를 하십니다. 서아가 어떤 선택을 할지, 함께 봐요.

12회 — 서아야, 선 넘지 마 (나도 알아, 근데 왜 자꾸…)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부르신 건 사흘 뒤였다.

아침 교육이 막 끝난 참이었다.

박 상궁이 수습생들을 내보내면서 서아를 따로 불렀다.

"윤서아, 잠깐."

수습생들이 나가고 박 상궁과 서아만 남았다.

박 상궁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딱딱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부드럽지도 않았다.

뭔가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정안군 나리께서 너를 부르신다."

서아는 굳었다.

"정안군 나리께서요?"

"심부름이나 전달이 아니다. 직접 오라고 하셨다."

"……예."

"예법 잘 지켜라. 이방원 왕자님은——까다로운 분이시다."

박 상궁이 그 말을 하시면서 서아를 봤다.

무슨 일인지 아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그런데 묻지 않으셨다.

"예. 알겠습니다."

이방원 왕자님의 처소는 서쪽 내전에 있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와는 반대편이었다.

서아는 걸으면서 숨을 골랐다.

평소대로 해라.

이방과 왕자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평소대로.

긴장하면 더 어색해진다.

그냥 솔직하게.

처소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렸다.

"윤서아,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었다.

이방원 왕자님의 처소는 이방과 왕자님 처소와 달랐다.

더 넓었다. 정돈되어 있었는데 서늘한 느낌이었다. 책이 있었지만 쌓여있지 않고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창문은 닫혀 있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앉아 계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앉아라."

서아는 조심스럽게 앉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지난번처럼 훑는 시선이었다.

서아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 고개를 들고 있었다.

피하면 더 이상해 보일 것 같았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이방원 왕자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형님을 얼마나 자주 보느냐."

지난번에도 하셨던 질문이었다.

서아는 대답했다.

"청소 때 처소 앞을 지나가면서 가끔 뵙습니다."

"가끔."

"예."

"청소 외에는?"

서아는 잠깐 멈췄다.

서책 전달할 때. 차 올릴 때.

"업무상 전달 사항이 있을 때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뿐이냐."

칼날 같은 질문이었다.

서아는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예."

거짓말이었다.

새벽 연못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한참 봤다.

그 눈빛이 서아 안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서아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시선을 거뒀다.

창밖을 봤다.

"형님이 요즘 새벽에 자주 나오신다."

서아는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연못 쪽으로."

서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가끔 나오셨는데, 요즘은 매일이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 수행하는 내관한테 들었다."

서아는 그 말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았다.

이방원 왕자님은 이미 알고 계셨다.

다 알면서 묻고 계셨다.

서아가 어떻게 대답하는지를 보시는 거였다.

서아는 눈을 내리깔지 않았다.

"왕자님."

"응."

"솔직하게 말씀드려도 됩니까."

이방원 왕자님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해봐라."

서아는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새벽에 연못에 나간 적 있습니다. 처음엔 우연이었고, 그 이후로도 몇 번 나갔습니다. 규정에 어긋나는 일인 건 알고 있습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형님이 계셨느냐."

"예."

"형님이 오라고 하셨느냐."

"아니요."

"그러면 네가 먼저 나간 것이냐."

"……예."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그 침묵이 무거웠다.

혼나겠구나 했다.

아니면 박 상궁한테 이를 것이다.

처소에서 쫓겨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방원 왕자님이 하신 말씀은 예상과 달랐다.

"솔직하게 말했구나."

"예."

"형님한테서 솔직하게 대답해도 된다고 들었느냐."

서아는 잠깐 놀랐다.

"……예."

이방원 왕자님이 소리 없이 웃었다.

소리 없이 웃는 게 이방과 왕자님이랑 비슷했다.

그런데 느낌이 달랐다.

이방과 왕자님의 웃음은 따뜻했는데, 이방원 왕자님의 웃음은——뭔가 알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형님답구나."

그 말이 짧게 나왔다.

이방원 왕자님이 다시 서아를 봤다.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아까보다 날카로움이 덜했다.

그렇다고 부드러운 건 아니었다.

"윤서아."

"예."

"너, 형님한테 마음이 있느냐."

서아는 그 질문에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이방원 왕자님은 돌려 말하지 않으셨다.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대답 못 하는 것도 대답이다."

서아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말이 맞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선 넘지 마라."

낮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그냥 사실을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담담함이 오히려 더 무거웠다.

"형님은 왕자시다. 곧 이 나라가 어떻게 흘러갈지 모른다. 형님이 서 계실 자리가 어디인지도 모른다. 그 자리에 수습 궁녀가 있을 자리는 없다."

서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손이 조금 떨렸다.

"형님이 다쳐서는 안 된다."

그 말이 마지막이었다.

형님이.

이방과 왕자님이.

다쳐서는 안 된다.

서아는 그 말이 자기를 향한 경고인 동시에——이방원 왕자님이 형님을 걱정하는 마음이라는 걸 알았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방원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가봐라."

처소로 돌아오는 길이 길었다.

발이 무거웠다.

선 넘지 마라.

형님이 다쳐서는 안 된다.

그 말들이 발걸음마다 무겁게 눌렸다.

서아는 알고 있었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맞다는 걸.

왕자님과 수습 궁녀.

이루어질 수 없는 거리.

채린이도 말했다. 다칠 사람은 서아라고.

이방원 왕자님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셨다.

형님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서아가 다치는 건 상관없다는 뜻이 아닌 건 알았다.

다만 왕자님이 더 걱정되신다는 것.

그것도 알았다.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옆에 앉았다.

서아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한동안 둘이 조용히 있었다.

창밖에서 바람이 불었다.

채린이가 먼저 말했다.

"뭐라고 하셨어."

"선 넘지 말라고."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다쳐서는 안 된다고."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어떻게 할 거야."

서아는 손을 봤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

아까 이방원 왕자님 앞에서 떨었던 손.

"몰라."

"모른다고?"

"응. 지금은 모르겠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말했다.

"오늘 새벽엔 안 나갈 거지?"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이방원 왕자님이 아셨어. 형님이 새벽에 연못 나오신다는 거."

"알아."

"수행 내관한테 들으셨다고?"

"응."

"그러면 이제 나가면 안 돼. 더 이상."

서아는 알고 있었다.

채린이 말이 맞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아셨다.

이제 더 나가면——

이방과 왕자님한테도 영향이 갈 수 있었다.

선 넘지 마라.

그 말이 다시 귓속에 울렸다.

"……응."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 나갈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진짜로?"

"응."

채린이가 잠깐 더 서아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어."

그날 밤.

서아는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다.

안 나간다.

내일 새벽에.

이방원 왕자님이 아셨다.

수행 내관이 알고 있었다.

나가면 왕자님한테 피해가 간다.

안 나가는 게 맞다.

안 나가야 한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숨을 골랐다.

연못을 생각했다.

버드나무가 드리워진 연못.

낮고 넓적한 돌.

그 위에 먼저 와서 앉아 계신 왕자님.

내일은 그 자리에 서아가 없을 것이다.

왕자님이 기다리셔도.

서아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게 맞는 일이었다.

서아는 눈을 꽉 감았다.

새벽이 됐다.

서아는 눈이 떠졌다.

하늘이 어두웠다.

별이 보였다.

채린이는 자고 있었다.

서아는 천장을 봤다.

안 나간다.

그렇게 다짐했다.

눈을 다시 감았다.

오 분이 지났다.

십 분이 지났다.

서아는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있었다.

왕자님이 나오셨을까.

지금 연못가 돌 위에 앉아 계실까.

서아를 기다리실까.

아니면 혼자 별을 보고 계실까.

서아가 오지 않아도, 왕자님은 그냥 혼자 계실 거였다.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신 분이니까.

그런데.

그런데 왜.

서아는 손으로 눈을 눌렀다.

왕자님이 혼자 계신 게 왜 이렇게 마음에 걸리는 거지.

이방원 왕자님 말씀도 들었는데.

선 넘지 말라고 하셨는데.

채린이도 말했는데.

안 나가야 한다는 거 알면서.

서아는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멈췄다.

다시 앉았다.

이불을 끌어당겼다.

나가지 않을 거야.

오늘은 진짜로.

삼십 분이 지났다.

서아는 복도에 서 있었다.

덧옷을 걸쳤다.

발이 왔다.

또 발이 먼저였다.

서아는 복도에서 멈췄다.

돌아가야 했다.

그런데 발이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도, 뒤로도.

서아는 담벼락에 등을 기댔다.

차가운 돌이 등에 닿았다.

눈을 감았다.

선 넘지 마라.

형님이 다쳐서는 안 된다.

그 말을.

온전히, 다시 한번 되새겼다.

이방원 왕자님이 걱정하시는 게 이방과 왕자님이라는 걸 알았다.

왕자님이 다치신다.

서아 때문에.

수습 궁녀 때문에.

그게 싫었다.

왕자님이 다치시는 게.

서아는 눈을 뜨고 하늘을 봤다.

별이 보였다.

직녀성이 보였다.

기다리는 사람이 더 빛난다.

서아가 한 말이었다.

기다리면서 빛나는 것도.

지켜보면서 빛나는 것도.

빛이라면.

왕자님이 다치지 않도록 지켜보는 것도.

빛나는 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아는 담벼락에서 등을 뗐다.

돌아갔다.

처소로.

이불 속에 들어갔다.

채린이는 자고 있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안 나갔다.

왕자님이 혼자 계실 거였다.

기다리셨다면——미안했다.

그런데 이게 맞았다.

서아는 그렇게 다짐하고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

자는 척하던 채린이가 조용히 말했다.

"잘했어."

서아는 깜짝 놀랐다.

"깨어 있었어?"

"응."

"처음부터?"

"나갈까봐."

서아는 채린이가 자지 않고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워."

"뭘."

"지켜봐줘서."

채린이가 아무 말도 안 했다.

잠깐 있다가.

"서아야."

"응."

"잘 버텼어."

그 말이 서아 가슴 한편을 꾹 눌렀다.

잘 버텼어.

버텼다.

나가지 않았다.

그게 버티는 일이었다는 게.

채린이가 알아줘서.

서아는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나오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눈을 감았다.

다음 날 아침.

청소를 하러 동쪽 내전에 갔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을 지나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서아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그냥 지나쳤다.

복도를 쓸고 물통을 교체했다.

돌아가는 길에——

처소 문이 열렸다.

이방과 왕자님이 나오셨다.

서아와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이 멈추셨다.

서아도 멈췄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어제 새벽."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나오지 않았구나."

"예."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왕자님이 어떤 표정을 하고 계신지 볼 수 없었다.

"이방원이 불렀느냐."

"예."

왕자님이 침묵하셨다.

서아는 그 침묵이 어떤 침묵인지 알 수 없었다.

화가 나셨는지.

예상하셨는지.

괜찮으신지.

왕자님이 조용히 말씀하셨다.

"알겠다."

그게 다였다.

더 물으시지 않았다.

더 말씀하시지 않았다.

그냥 알겠다, 하시고 걸으셨다.

서아는 그 뒷모습을 봤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부르고 싶었다.

부를 수 없었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이 떠올랐다.

선 넘지 마라.

서아는 손을 꼭 쥐었다.

왕자님 뒷모습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졌다.

서아는 그 자리에 잠깐 서 있었다.

알겠다.

그 두 글자가.

이해한다는 말인지.

괜찮다는 말인지.

서운하다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뭔가 끊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직 끊어지면 안 되는 것이.

서아는 빗자루를 들고 걸었다.

걸으면서 하늘을 봤다.

맑은 하늘이었다.

봄 하늘.

이상하게 눈이 시렸다.

바람 때문이겠지.

바람이 불고 있었으니까.

13회 예고

"궁궐에도 봄이 온다"

매화꽃이 다 졌다. 봄이 깊어지면서 궁 안에 새 꽃들이 피었다. 왕자님을 새벽에 안 뵌 지 열흘이 됐다. 청소할 때 마주치면 왕자님은 평소와 같으셨다. 근데 왜 나는 평소와 같지 않은 걸까.

작가 한마디

알겠다, 그 두 글자에 얼마나 많은 게 담겨 있는지... 왕자님도 아셨을 거예요. 이방원이 불렀다는 걸. 그래서 더 아무 말씀 안 하셨던 거겠죠. 서아가 버텼어요. 채린이가 지켜봐줬고요. 13회에서 봄이 깊어지면서 두 사람 사이에 조용한 변화가 생깁니다. 기대해 주세요.

13회 — 궁궐에도 봄이 온다

매화꽃이 다 졌다.

어느 날 아침 매화나무 아래를 지나가다 보니, 가지에 꽃이 하나도 없었다. 꽃잎들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밟히고 바래서 갈색이 되어 있었다.

서아는 그 나무를 잠깐 봤다.

꽃이 질 줄은 알았다.

봄꽃은 다 지니까.

그런데 막상 보니 마음 한편이 꾹 눌리는 것 같았다.

서아는 걸음을 옮겼다.

청소할 시간이었다.

열흘이 지났다.

새벽에 연못에 나가지 않은 지 열흘이 됐다.

처음 사흘은 힘들었다.

새벽마다 눈이 떠졌다. 창문 너머 어두운 하늘을 봤다. 별이 보였다. 손발이 먼저 움직이려 했다. 이불을 꽉 쥐고 버텼다.

채린이가 처음 사흘은 자지 않고 지켜봤다.

말은 안 했다.

그냥 같이 깨어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도움이 됐다.

나흘째부터는 조금 나아졌다.

눈이 떠져도 발이 덜 움직이려 했다.

대신 오래 눈을 뜨고 있었다.

별을 봤다.

직녀성을 봤다.

남두육성을 봤다.

왕자님이 가르쳐 주신 별들을 하나하나 찾으면서 밤을 보냈다.

그게 위로가 됐다.

이상하게.

이방과 왕자님과는 청소할 때 마주쳤다.

하루에 한 번, 많으면 두 번.

처소 앞을 지나가면 문이 열려 있을 때가 있었다.

서아가 지나가면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왔느냐."

서아가 대답했다.

"예."

"청소 잘 됐느냐."

"예."

"수고했다."

그게 다였다.

예전처럼 길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왕자님이 말씀을 줄이신 건지.

서아가 거리를 두는 건지.

둘 다였다.

그 짧은 대화가 서아한테는 충분하기도 하고 부족하기도 했다.

충분한 건——그래도 뵐 수 있다는 것.

부족한 건——그뿐이라는 것.

봄이 깊어졌다.

궁 안에 꽃이 많아졌다.

매화는 졌지만 진달래가 피었다. 살구꽃이 피었다. 담벼락 너머로 복숭아꽃 가지가 넘어왔다.

서아는 청소를 하면서 꽃들을 봤다.

예뻤다.

개경 저잣거리에도 봄은 왔겠지.

골목 고양이들이 햇살 아래 늘어져 있을 것이다.

두부 심부름을 가면서 그 고양이들을 보러 갔던 게 벌써 오래된 일 같았다.

서아는 진달래 한 송이를 보다가 지나쳤다.

꺾으면 안 됐다.

그냥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날 오후였다.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서아는 동쪽 내전 마당을 지나쳤다.

마당 한켠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살구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분홍빛이었다. 하얀 매화와 달리 연한 분홍이었다.

서아는 그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몇 장 떨어졌다.

살구꽃 향기가 났다.

매화 향기랑 달랐다. 더 달고 포근한 냄새였다.

서아는 그 꽃을 한동안 봤다.

"살구꽃을 좋아하느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돌아봤다.

이방과 왕자님이었다.

어디서 오셨는지 모르겠다.

마당 어귀에 서 계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살구꽃."

"……예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구나."

왕자님이 살구나무 쪽으로 걸어오셨다.

서아 옆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셨다.

같이 꽃을 봤다.

열흘 만에 이렇게 가까이 서는 것 같았다.

청소할 때 잠깐 문 너머로 말하는 것 말고.

진짜로 같은 공간에서, 같은 것을 보면서.

서아는 그게 이상하게 어색했다.

예전엔 어색하지 않았는데.

"매화랑 다르네요."

서아가 먼저 말했다.

"뭐가."

"냄새가요. 매화는 차갑고 서늘한 냄새인데, 살구꽃은 달아요."

"그렇구나."

"왕자님은 어느 쪽이 더 좋으세요?"

이방과 왕자님이 살구꽃을 봤다.

"매화."

"왜요?"

"겨울 끝에 피니까."

서아는 그 대답을 들었다.

겨울 끝에 피는 꽃.

아무것도 없는 계절이 끝날 때 피는 꽃.

그래서 좋다는 것.

"저는 살구꽃이 좋아요."

"왜."

"지금 피고 있어서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꽃을 보면서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 있는 게 좋아요. 매화는 이미 졌잖아요. 살구꽃은 지금 피어 있고요."

왕자님이 잠깐 침묵했다.

그러더니 살구꽃을 봤다.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나쁜가요?"

"나쁘지 않다."

바람이 또 불었다.

꽃잎이 떨어졌다.

서아 어깨 위에 한 장 내려앉았다.

서아가 손으로 떼려는데——

왕자님이 먼저 손을 뻗으셨다.

서아 어깨 위의 꽃잎을 집어 드셨다.

그 손끝이 어깨에 아주 살짝 닿았다.

아주 살짝.

서아는 굳었다.

왕자님이 꽃잎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봤다.

분홍빛 작은 꽃잎.

"살구꽃은 금방 진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매화보다 더 빨리."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살구꽃은 금방 진다.

지금 피어 있어서 좋다고 했는데.

금방 진다고 하셨다.

그게 꽃 이야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래도 지금은 피어 있잖아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꽃잎을 쥔 채로.

눈이 마주쳤다.

열흘 만에 제대로 마주치는 눈빛이었다.

왕자님 눈이——뭔가 달랐다.

예전보다 더 많은 걸 담고 있는 것 같은 눈이었다.

서아는 그 눈빛에서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왕자님이 먼저 시선을 거뒀다.

꽃잎을 살구나무 아래에 내려놓으셨다.

"청소 다 됐느냐."

"예."

"들어가라."

"예."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몇 걸음 걸었을 때.

"서아야."

멈췄다.

"예."

"살구꽃."

"예."

"지금은 피어 있다."

그 말이 조용하게 나왔다.

서아가 한 말을 왕자님이 되돌려 주셨다.

지금은 피어 있다.

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예."

그것만 대답하고 걸었다.

마당을 나올 때까지.

나오고 나서도.

한참 동안 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지금은 피어 있다.

그 말이 꽃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서아는 알았다.

저녁 교육이 끝나고 채린이와 둘이 처소에 있었다.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서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채린아."

"응."

"왕자님이 오늘 살구꽃 보셨어."

채린이가 바느질을 멈추지 않았다.

"같이?"

"응. 마당에서."

"뭐라고 하셨어."

"살구꽃은 금방 진다고."

채린이가 잠깐 바늘을 멈췄다.

"그게 다야?"

"지금은 피어 있다고도 하셨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 말이."

"응."

"꽃 얘기가 아닌 것 같지?"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그렇지?"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러더니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서아야."

"응."

"이방원 왕자님이 선 넘지 말라고 하셨잖아."

"알아."

"근데 왕자님이 먼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면서 말했다.

"선이 어디 있는 건지 모르겠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선이 어디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방원 왕자님이 선 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이방과 왕자님이 지금은 피어 있다고 하셨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 건지.

"채린아, 나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바느질을 멈추고 서아를 봤다.

"글쎄."

"글쎄가 뭐야."

"나도 모르겠어. 진짜로."

채린이가 무릎을 끌어안았다.

"이방원 왕자님 말씀은 맞아. 선 넘으면 안 되는 거 맞아. 근데."

"근데?"

"이방과 왕자님이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게——왕자님도 마음이 있으신 거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게 더 무서워."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왜."

"내가 마음을 접으려면, 내 마음만 접으면 되잖아. 근데 왕자님도 마음이 있으시다면——내 마음 접는 게 왕자님한테 상처가 될 수 있잖아."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너 생각이 많이 깊어졌다."

"좋은 의미야?"

"모르겠어."

채린이가 다시 바느질을 시작했다.

"한 가지만 말해줄게."

"응."

"지금 당장 결정 안 해도 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지금 당장 결정 안 해도 된다.

"선을 넘지도 말고, 마음을 다치게 하지도 말고. 그냥 지금처럼 있어봐."

"그냥 지금처럼이 뭔데."

"청소하고, 교육받고, 마주치면 인사하고. 그게 다야."

서아는 그 말이 단순한데 어려웠다.

지금처럼.

아무것도 더하지도, 빼지도 않고.

"할 수 있을까."

"해야지."

채린이가 짧게 말했다.

서아는 웃음이 났다.

"채린아, 너 가끔 무서워."

"알아."

"무섭다는 게 칭찬이야."

채린이가 서아를 힐끗 봤다.

"알아."

밤이 됐다.

채린이가 잠들고 나서 서아는 창밖을 봤다.

별이 떠 있었다.

남두육성이 보였다.

살구꽃은 금방 진다.

지금은 피어 있다.

그 두 마디가 교차했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지금처럼 있자.

채린이 말대로.

청소하고, 교육받고, 마주치면 인사하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그렇게 해보자.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해보자.

눈을 뜨면 또 새벽이 올 것이다.

새벽이 오면 또 버텨야 할 것이다.

그래도.

지금 이 봄 하늘에 별이 떠 있었다.

왕자님이 이름을 알려주신 별들이.

서아는 별을 하나하나 찾았다.

남두육성. 기수. 심수. 방수. 각수.

찾다 보니 눈이 무거워졌다.

잠이 왔다.

서아는 그 별들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오늘 하루가 지나갔다.

살구꽃이 피어 있는 하루가.

다음 날 아침.

서아는 청소를 하면서 살구나무를 지나쳤다.

어제보다 꽃이 조금 더 피어 있었다.

활짝.

서아는 그 꽃을 봤다.

지금은 피어 있다.

그래.

지금은 피어 있어.

그걸로 충분하자.

서아는 빗자루를 들고 걸었다.

며칠이 더 지났다.

아침 교육에서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다음 주부터 수습 기간이 중반에 접어든다. 지금까지는 기본 교육이었다면, 앞으로는 실제 업무 비중이 늘어난다."

수습생들이 긴장한 기색이었다.

"잘하는 아이들은 좀 더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될 것이다. 그렇지 못한 아이들은 기본 청소만 하게 된다."

서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조용히 다짐했다.

잘해야지.

지금처럼만.

아니, 지금보다 더.

교육 시간에 집중했다.

청소할 때 더 꼼꼼히 했다.

빗자루질 각도, 물통 교체 순서, 복도 청소할 때 기둥 사이 구석까지.

박 상궁이 교육 중에 서아를 봤다.

"윤서아."

"예."

"요즘 나아지고 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박 상궁이 잠깐 서아를 보다가 넘어가셨다.

채린이가 옆에서 눈으로 말했다.

잘했어.

서아는 눈으로 대답했다.

고마워.

그날 오후.

청소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이방과 왕자님을 마주쳤다.

처소 앞이 아니었다.

동쪽 내전 끝 담벼락 길이었다.

왕자님이 혼자 걷고 계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왕자님이 멈추셨다.

"청소 끝났느냐."

"예."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잠깐 봤다.

"살구꽃이 더 폈다."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예. 오늘 아침에 봤어요. 더 활짝 폈더라고요."

"그렇구나."

왕자님이 걸으셨다.

서아도 걸었다.

같은 방향이었다.

나란히 걷게 됐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색하지 않았다.

열흘 동안 거리를 뒀는데.

그래도 이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

서아는 그게 신기했다.

"왕자님."

"응."

"어깨는 다 나으셨어요?"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다 나았다."

"다행이에요."

"활도 다시 시작했다."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잘됐어요. 보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기억하고 있었느냐."

"예. 어깨 나으시면 보여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왕자님이 잠깐 침묵하셨다.

"……아직 많이 쏘진 않는다."

"괜찮아요. 천천히 나으시면서 하세요."

왕자님이 앞을 봤다.

담벼락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

서아는 저쪽 모퉁이에서 갈라지게 될 거였다.

서아는 처소 쪽, 왕자님은 다른 쪽.

모퉁이가 가까워졌다.

서아는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모퉁이에서 멈추지 않으려고.

그냥 자연스럽게 갈라지려고.

모퉁이가 됐다.

"그럼 들어가겠습니다."

서아가 말했다.

"그래."

왕자님이 대답하셨다.

서아는 오른쪽으로 걸었다.

왕자님은 왼쪽으로 걸으셨다.

등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앞을 봤다.

처소 쪽 복도가 보였다.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늘은 돌아보지 않기로 했다.

그냥 걸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살구꽃 향기가 실려 왔다.

지금은 피어 있다.

그 말을 안고 걸었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나란히 누워서 서아가 말했다.

"오늘 왕자님이랑 같이 걸었어."

"어디서."

"담벼락 길에서. 같은 방향이라서."

"뭐라고 하셨어?"

"살구꽃 더 폈다고. 어깨 나아서 활 다시 시작하셨다고."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평범한 대화였네."

"응."

"어색하지 않았어?"

"응. 어색하지 않았어."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그게 더 무서운 것 같은데."

"왜."

"특별한 일이 없어도 같이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그냥 같이 있는 게 자연스러운 것.

그게 더 깊은 거라고 채린이가 말하는 것 같았다.

"채린아."

"응."

"나 어떻게 될 것 같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한참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모르겠어."

"진짜로."

"진짜로. 근데."

"응."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서아야, 봄이잖아."

"응."

"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있어도 괜찮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있어도 괜찮아.

"채린아, 너 가끔 시인 같아."

"시인은 무슨."

"진짜로. 그런 말 어디서 배웠어."

채린이가 서아를 힐끗 봤다.

"그냥 생각한 거야."

서아는 웃었다.

조용하게, 밤에.

채린이도 웃는 것 같았다.

소리는 안 났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누워서 천장을 봤다.

봄밤이었다.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살구꽃 향기가 희미하게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있어도 괜찮다.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14회 예고

"실수로 손이 닿았을 때"

서책을 전달하다가 손이 닿았다. 왕자님 손과 내 손이. 순간이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 왕자님이 손을 거두지 않으셨다. 나도 거두지 못했다.

작가 한마디

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있어도 괜찮아, 채린이가 한 말인데 제가 더 위로받은 것 같아요.

살구꽃은 금방 지지만 지금은 피어 있는 두 사람.

14회에서 드디어 손이 닿는 장면이 나옵니다. 짧지만 긴 그 순간, 기대해 주세요.

14회 — 실수로 손이 닿았을 때

서책 전달 심부름이 생긴 건 오전이었다.

박 상궁이 서아를 불렀다.

"이방과 왕자님께 서책 꾸러미를 전달해 드려라."

"예."

"오늘은 꾸러미가 아니라 낱권이다. 세 권."

"예."

"조심히 들고 가거라. 표지가 얇은 책들이다."

서아는 책 세 권을 두 손으로 받았다.

얇은 표지였다. 오래된 책 냄새가 났다. 귀한 책인 것 같았다.

서아는 조심스럽게 들고 걸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섰다.

문을 두드렸다.

"서아입니다. 서책 전달하러 왔습니다."

"들어오너라."

문을 열었다.

왕자님이 창가에 앉아 계셨다.

오늘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봄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살구꽃 향기가 섞인 바람이었다.

서아는 책을 들고 왕자님 가까이 다가갔다.

"서책 가져왔습니다."

왕자님이 손을 뻗으셨다.

서아가 책을 건넸다.

첫 번째 권.

두 번째 권.

세 번째 권을 건네는데——

세 번째 권이 얇고 미끄러웠다.

서아가 건네는 순간 책이 살짝 기울었다.

왕자님이 받으려고 손을 더 뻗으셨다.

서아도 놓치지 않으려고 손을 더 뻗었다.

두 손이 같은 책 위에 얹혔다.

왕자님 손 위에 서아 손이.

아주 잠깐.

서아는 굳었다.

손을 빼야 했다.

바로 빼야 했다.

그런데——

빠지지 않았다.

왕자님도 손을 거두지 않으셨다.

책을 사이에 두고.

왕자님 손과 서아 손이.

겹쳐 있었다.

방 안이 조용했다.

봄바람이 들어왔다.

창문이 살짝 흔들렸다.

서아는 숨을 참았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왕자님 손이 뜨거웠다.

아니, 뜨겁다기보다——따뜻했다.

새벽에 팔목을 잡으셨을 때와 다른 따뜻함이었다.

그때는 놀라서 뜨거웠는데.

지금은——

그냥 따뜻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일 초.

아니면 십 초.

서아한테는 한참인 것 같았다.

왕자님이 천천히 손을 거두셨다.

책을 가져가시면서.

서아 손이 허공에 남겨졌다.

서아는 그 손을 내렸다.

무릎 옆으로.

왕자님이 책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셨다.

침묵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귀까지 뜨거웠다.

"……감사합니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책을 받으셔서 감사하다고.

"예."

서아는 그것만 대답했다.

목소리가 떨릴 것 같아서.

처소에서 나왔다.

복도에 서자마자 벽에 등을 기댔다.

숨을 내쉬었다.

손을 봤다.

왕자님 손이 닿았던 손.

아무것도 없었다.

자국도 없었다.

그런데 아직도 따뜻한 것 같았다.

서아는 그 손을 반대 손으로 감쌌다.

심장이 아직도 빠르게 뛰었다.

왕자님도 손을 거두지 않으셨다.

그게 자꾸 생각났다.

실수였겠지.

책이 기울어져서.

그냥 받으시려다 그렇게 된 거겠지.

그런데.

왕자님이 손을 거두지 않으신 게.

실수였을까.

서아는 눈을 감았다.

모르겠다.

모르겠는데.

이 따뜻함이.

아직 손에 남아 있었다.

점심이 됐다.

채린이 옆에 앉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왜."

"뭐가."

"얼굴."

서아는 손으로 뺨을 짚었다.

아직 뜨거웠다.

"서책 전달하다가."

"응."

"손이 닿았어."

채린이가 수저를 내려놨다.

"왕자님 손이랑?"

"응."

"어떻게."

"책이 기울어져서. 같이 잡으려다가."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거기서 끝이야?"

"응."

"왕자님이 손 안 거두셨어?"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었다.

채린이가 수저를 다시 들었다.

"밥 먹어."

"응."

"밥은 먹어야지."

"알아."

채린이가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얼마나?"

"뭐가."

"얼마나 있었어. 손이."

"……잠깐."

"얼마나 잠깐."

"모르겠어. 나한테는 길게 느껴졌는데."

채린이가 밥을 한 숟갈 먹었다.

아무 말도 안 했다.

서아도 밥을 먹었다.

한 숟갈 먹고 채린이를 봤다.

"채린아."

"응."

"왕자님이 실수로 그러신 걸까."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글쎄."

"글쎄가 뭐야."

"모르지. 나는 왕자님 마음을 알 수 없어."

"추측이라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그게 실수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거야?"

서아는 그 질문에 멈췄다.

중요한 게 뭔지.

실수인지 아닌지.

아니면——

그 따뜻함이.

"……모르겠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밥 먹어."

오후 교육이 끝나고 자유 시간이 잠깐 생겼다.

서아는 혼자 동쪽 내전 쪽으로 걸었다.

청소는 아침에 다 했다.

볼 일이 없었다.

그냥 발이 그쪽으로 갔다.

담벼락 길을 걸었다.

살구나무 마당 앞에서 멈췄다.

꽃이 더 폈다.

어제보다 오늘이 더 활짝이었다.

서아는 꽃을 보면서 서 있었다.

"또 왔구나."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돌아봤다.

이방과 왕자님이 마당 어귀에 서 계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왕자님."

"살구꽃 보러 왔느냐."

"그냥 지나가다 봤습니다."

왕자님이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살구나무 앞에 서셨다.

서아도 나무 앞에 서 있었다.

나란히.

꽃을 봤다.

봄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흔들렸다.

서아는 오전의 일이 생각났다.

왕자님 손이 닿았던 것.

왕자님이 손을 거두지 않으셨던 것.

말해야 할까.

아니면 모른 척해야 할까.

왕자님이 먼저 말씀하셨다.

"오전에."

서아는 굳었다.

"예."

"책이 기울었다."

"예."

왕자님이 살구꽃을 보셨다.

"미안하다."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예?"

"손이 닿아서."

그 말이 나왔다.

미안하다고.

서아는 그 말의 무게를 달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손이 닿은 게 실수였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손을 거두지 않은 게 미안하다는 말일 수도 있었다.

"……괜찮습니다."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괜찮으냐."

"예."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다시 꽃을 봤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응."

"저도 미안하지 않았어요."

말이 나왔다.

왜 나왔는지 몰랐다.

그냥 나왔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꽃을 보면서 말했다.

"손이 닿은 게. 미안하지 않았어요."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서아는 꽃을 봤다.

뺨이 뜨거웠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야.

윤서아, 너 지금——

"……그렇구나."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더니 꽃을 보셨다.

서아도 꽃을 봤다.

봄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흔들렸다.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그런데 이 침묵은——

뭔가 가득 찬 침묵이었다.

말 대신 다른 것이 공기 중에 있는 것 같았다.

서아는 그게 뭔지 알았다.

이름 붙이지 않았다.

붙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한참 뒤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별자리."

"예?"

"아직 다 못 가르쳐 줬다."

서아는 그 말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몰랐다.

갑자기 별자리 얘기가.

"예."

"새벽에 못 나오니까."

그 말이 조용하게 나왔다.

새벽에 못 나오니까.

연못에 못 나오니까.

별자리를 못 배우고 있으니까.

서아는 그 말이 단순한 사실 전달이 아닌 것 같았다.

"……예."

왕자님이 하늘을 봤다.

낮 하늘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는.

"낮에도 별자리를 배울 수 있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낮에요?"

"별의 위치를 알면, 낮에도 어디 있는지 알 수 있다. 지금 저 하늘 어딘가에 남두육성이 있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파란 하늘이었다.

"보이지 않는 별도 있는 거네요."

"그렇다. 낮에는 안 보이지만 있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낮에는 안 보이지만 있다.

그게 별 얘기만은 아닌 것 같았다.

"왕자님."

"응."

"낮에도 가르쳐 주실 수 있어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새벽이 아니라도."

"예."

왕자님이 잠깐 생각하셨다.

"청소할 때."

"예."

"처소 앞 지나갈 때 하나씩 가르쳐 주면 되겠느냐."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청소할 때마다.

처소 앞 지나갈 때마다.

하나씩.

"예. 좋아요."

왕자님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리고 살구꽃을 한 번 더 보셨다.

"오늘은 여기서 하나 배워라."

서아는 눈을 밝혔다.

"지금요?"

"낮에 별자리 보는 법이다."

왕자님이 하늘을 봤다.

서아도 하늘을 봤다.

"지금 시각, 남쪽 하늘 저쪽에 여수(女宿)가 있다."

"여수요?"

"하늘의 여인이라고 불린다. 넷이 작은 마름모 모양으로 있는 별자리다."

서아는 파란 하늘을 봤다.

보이지 않았다.

별이 없는 낮 하늘이었다.

"안 보여요."

"안 보여도 있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거기 있다는 걸 알면, 밤에 찾을 수 있다."

서아는 하늘을 봤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별.

거기 있다는 걸 알면.

밤에 찾을 수 있다.

"오늘 밤에 찾아볼게요."

왕자님이 소리 없이 웃으셨다.

"그래."

마당을 나오면서 서아는 생각했다.

오전에 손이 닿았다.

오후에 살구꽃 앞에서 또 나란히 섰다.

낮에도 별자리를 배우기로 했다.

새벽 연못은 안 된다.

그런데 낮에 하나씩은 괜찮다고.

왕자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

서아는 그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왕자님도 방법을 찾고 계신 거였다.

새벽 연못은 안 되지만.

낮에 하나씩은 할 수 있는.

방법을.

서아는 그 사실이 뜨겁게 느껴졌다.

왕자님이 찾고 계신다는 게.

방법을.

서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처소에 돌아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뭔 일 있었어."

"살구꽃 봤어."

"왕자님이랑?"

"응."

"오전 손 얘기 나왔어?"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뭐라고 하셨어."

"미안하다고."

"그게 다야?"

서아는 잠깐 망설였다.

"내가 말했어."

"뭐라고."

"저도 미안하지 않았다고."

채린이가 한동안 서아를 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는 채린이 표정을 읽으려 했다.

뭐라고 하려나.

선 넘지 말라고 할까.

이방원 왕자님 말씀 기억하라고 할까.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너 용감하다."

서아는 그 말이 의외였다.

"용감해?"

"그런 말 하기 쉽지 않잖아."

"그냥 나왔어."

"그게 용감한 거야."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잘 됐으면 좋겠다. 진짜로."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현실적인 말을 안 했다.

선 넘지 말라는 말도 안 했다.

그냥.

잘 됐으면 좋겠다고 했다.

서아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채린아."

"응."

"고마워."

"됐어."

채린이가 돌아누웠다.

서아는 천장을 봤다.

손이 닿았던 게 미안하지 않다고 했다.

왕자님이 그렇구나, 하셨다.

부정하지 않으셨다.

낮에도 별자리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방법을 찾고 계신다.

서아는 손을 봤다.

여전히 따뜻한 것 같은 손.

오늘 밤에 여수를 찾아볼 것이다.

하늘의 여인.

낮에는 안 보이지만 있는 별.

거기 있다는 걸 알면 밤에 찾을 수 있는.

서아는 눈을 감았다.

거기 있다는 걸 알면.

찾을 수 있다.

그 말이 별 얘기가 아니라는 걸.

서아는 알았다.

왕자님도 알고 계신다는 걸.

알면서.

눈을 감았다.

봄밤이었다.

바람이 살구꽃 향기를 데려왔다.

서아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잠 속으로 들어갔다.

손이 아직 따뜻했다.

밤 늦게.

서아는 살며시 일어났다.

창문을 조금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남쪽 하늘을 봤다.

어딘가에 여수가 있을 것이다.

작은 마름모 모양.

넷이 모인.

서아는 눈을 좁혀 봤다.

찾았다.

희미하게.

마름모 모양으로 모인 별 넷이.

"찾았다."

혼자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못 들을 말이었다.

그런데 말하고 싶었다.

왕자님한테 말하고 싶었다.

찾았다고.

여수 찾았다고.

내일 청소할 때 말해야지.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손이 따뜻했다.

하늘의 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낮에는 안 보여도 있는 별처럼.

지금 이 마음도.

보이지 않아도.

있었다.

15회 예고

"왕자님이 웃었다, 나한테"

여수를 찾았다고 했더니 왕자님이 웃으셨다. 소리 없이 웃는 게 아니라——진짜로, 소리 내어 웃으셨다. 나 그 웃음 처음 들었다. 왕자님이 소리 내어 웃으신다는 걸 나는 몰랐다.

작가 한마디

미안하지 않았다는 서아 말에 그렇구나 하신 왕자님... 낮에도 별자리 가르쳐 주신다는 것도... 왕자님이 방법을 찾고 계신 거 다들 느끼셨죠?

15회에서 왕자님이 처음으로 소리 내어 웃으십니다. 그 장면 정말 기대해 주세요.

15회 — 왕자님이 웃었다, 나한테

다음 날 아침.

청소를 하러 나갔다.

서아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동쪽 내전에 도착했다.

복도를 쓸고, 물통을 교체하고, 낙엽을 치웠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왔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서아는 청소를 하면서 말했다.

"왕자님."

"응."

"어젯밤에 여수 찾았어요."

안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찾았느냐."

"예. 남쪽 하늘에서요. 마름모 모양이 맞죠?"

"그렇다."

서아는 빗자루를 움직이면서 말했다.

"처음엔 못 찾겠어서 한참 봤는데요. 찾으니까 되게 작더라고요. 근데 분명히 마름모 모양이었어요."

"잘 찾았다."

"별자리 찾는 게 점점 재밌어요. 처음엔 다 똑같은 별 같았는데."

서아는 빗자루를 멈추고 하늘을 봤다.

낮 하늘이었다.

"지금도 저 어딘가에 있겠죠."

왕자님이 잠깐 침묵하셨다.

"들어오너라."

서아는 빗자루를 들고 들어갔다.

왕자님이 창가에 앉아 계셨다.

창문이 열려 있었다.

봄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왕자님이 하늘을 보셨다.

"지금 이 시각, 남동쪽 하늘이다."

서아는 왕자님 옆에서 같은 방향을 봤다.

파란 하늘이었다.

"보이지 않지만 있는 거죠?"

"그렇다."

"어제 왕자님이 말씀하신 것처럼요. 거기 있다는 걸 알면 밤에 찾을 수 있다고."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잘 기억하는구나."

"왕자님이 하시는 말씀은 잘 기억돼요."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그 말이 너무 직접적이었나 싶었다.

"왕자님 말씀이 재밌어서요. 별 얘기마다 이야기가 있어서."

왕자님이 하늘을 봤다.

"오늘은 무수(虛宿)다."

"무수요?"

"하늘의 빈 곳이라고 불린다."

"빈 곳이요?"

"별이 드문 자리다. 그래서 빈 곳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아는 그 이름을 생각했다.

하늘의 빈 곳.

별이 드문 자리.

그런 곳에도 이름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별이 없는 곳에도 이름을 붙였네요."

"그렇다."

"왜요? 별이 없으면 그냥 빈 곳이잖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빈 곳도 하늘의 일부니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빈 곳도 하늘의 일부.

별이 없어도.

이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네요."

서아가 말했다.

"빈 곳이라는 이름이 슬프기도 하고 좋기도 해요."

"왜 좋으냐."

"빈 곳도 인정받는 것 같아서요. 거기도 있다고."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잠깐 머물렀다.

"그렇구나."

서아는 꽃을 봤다.

창문 너머로 살구꽃이 보였다.

"왕자님."

"응."

"어젯밤에 여수 찾고 나서 뭔가 말하고 싶었어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누구한테."

"왕자님한테요."

왕자님이 잠깐 침묵하셨다.

"찾았다고."

"예. 그냥 그 말 하고 싶었어요. 찾았다고. 왕자님한테."

왕자님이 서아를 보셨다.

오래.

서아는 그 시선을 받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다음에 찾으면."

"예."

"찾았다고 해라."

서아는 그 말이 좋았다.

"예."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봄 햇살이 왕자님 옆모습에 내려앉았다.

그날 오후였다.

서아는 오후 청소를 하다가 실수를 했다.

물통을 교체하면서 뚜껑을 제대로 닫지 않았다.

물통을 들다가 뚜껑이 열렸다.

물이 쏟아졌다.

서아 발 앞에 물 웅덩이가 생겼다.

"……아."

서아는 황급히 물통을 세웠다.

반 이상 쏟아졌다.

복도 바닥이 흥건했다.

서아는 걸레를 가지러 갔다가 빠른 걸음으로 돌아와서 닦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걸레를 밀었다.

열심히 닦았다.

그런데 물이 많았다.

한 번에 안 됐다.

걸레를 짜러 가야 했다.

서아가 일어서는 순간——

발이 젖은 바닥에 미끄러졌다.

"앗——!"

균형을 잃고 옆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누군가 팔을 잡았다.

서아는 쓰러지지 않았다.

눈을 떴다.

이방과 왕자님이었다.

언제 나오셨는지 모르겠다.

서아 팔을 잡고 계셨다.

두 사람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이 서아를 일으켜 세우셨다.

팔을 잡으셨다가 놓으셨다.

서아는 굳어 있었다.

왕자님이 바닥을 봤다.

물 웅덩이가 있었다.

"물통이 쏟아졌느냐."

"……예. 죄송합니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다치지 않았느냐."

"예. 왕자님이 잡아주셔서요."

왕자님이 바닥을 봤다.

그러더니 처소 안으로 들어가셨다.

잠깐 있다가 나오셨다.

손에 천이 들려 있었다.

왕자님이 그 천을 바닥에 내려놓으셨다.

발로 밀면서 물을 닦으셨다.

서아는 눈을 크게 떴다.

"왕자님, 제가 하겠습니다——"

"됐다."

"하지만 왕자님이 이런 걸 하시면——"

"바닥이 더 젖어 있다."

왕자님이 천으로 바닥을 밀면서 말씀하셨다.

서아는 얼른 걸레를 들고 반대쪽을 닦기 시작했다.

두 사람이 바닥을 닦았다.

말이 없었다.

왕자님이 물 닦는 소리.

서아가 걸레 미는 소리.

봄 햇살이 복도에 내려앉아 있었다.

물이 다 닦였다.

서아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걸레를 밀었다.

"다 됐습니다."

왕자님이 손에 든 천을 봤다.

"이건 내가 빨겠다."

"제가 빨겠습니다."

"괜찮다."

서아는 왕자님 손에서 천을 받으려고 했다.

왕자님이 천을 건네지 않으셨다.

"왕자님."

"수고했다."

왕자님이 그 말씀을 하시고 처소 안으로 들어가시려는데——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

왕자님이 멈추셨다.

"감사합니다."

"뭘."

"잡아주셔서요. 또."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또."

"예. 저번에도 잡아주셨잖아요. 서책 전달할 때."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또 미끄러지지 마라."

"노력하겠습니다."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다."

서아는 그 말이 너무 정확해서 웃음이 났다.

"……맞아요. 발이 먼저 미끄러지고 나서 제가 아는 것 같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달라졌다.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 같았다.

아주 조금.

그러더니——

소리가 났다.

작은 소리였다.

웃음 소리였다.

낮고 짧은.

그런데 분명히.

소리가 있는 웃음이었다.

서아는 굳었다.

왕자님이 소리 내어 웃으셨다.

처음이었다.

항상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가셨는데.

지금은——

진짜로 웃으셨다.

서아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낮고 따뜻한 웃음 소리.

짧았다.

금방 사라졌다.

왕자님이 입을 다물고 서아를 봤다.

서아가 멍하니 있자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왜 그러느냐."

"……왕자님이 웃으셨어요."

"웃으면 안 되느냐."

"안 되는 게 아니라요."

서아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처음 들었어요."

"뭘."

"왕자님 웃음 소리요. 소리 나는 웃음."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런가."

"예. 항상 소리 없이 웃으셔서요."

왕자님이 시선을 거뒀다.

복도 끝을 봤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담담하게 나왔다.

그런데 귀가——

귀가 빨개지고 있었다.

서아는 그걸 봤다.

낮 햇살 아래서 분명히 보였다.

귀가 빨개진 게.

서아는 웃음이 났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아지지 않았다.

"왕자님."

"응."

"귀가 빨개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뭐?"

"귀요. 빨개요."

왕자님이 손으로 귀를 짚으셨다.

그러더니 시선을 돌리셨다.

"……바람이 차다."

서아는 웃음이 완전히 났다.

소리 없이, 그런데 어깨가 흔들리게.

"봄 바람이요?"

"차다."

"봄 바람이 차서 귀가 빨개지는 건 처음 들었어요."

"그런 경우도 있다."

"그래요?"

"있다."

왕자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서아는 웃음을 참으려고 입을 가렸다.

그런데 어깨가 흔들렸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웃는 것이냐."

"아니요."

"어깨가 흔들리는데."

"……바람이요."

"방금 바람 차다고 했는데 그 바람이냐."

서아는 결국 웃음이 터졌다.

소리 없이, 그런데 분명히.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또 웃으셨다.

이번엔 더 길게.

낮고 따뜻한 웃음 소리가.

봄 햇살이 내려앉은 복도에 울렸다.

서아는 그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생각했다.

이 소리를 처음 들었다.

왕자님 웃음 소리를.

이 소리가.

이렇게 좋을 줄 몰랐다.

두 사람이 웃음을 멈추고 나서.

왕자님이 처소 안으로 들어가시면서 말씀하셨다.

"다음엔 물통 뚜껑 먼저 확인해라."

"예."

"미끄러지면 또 내가 나와야 한다."

그 말이——

불평이 아니었다.

또 나올 수 있다는 말이었다.

서아는 그걸 알았다.

"왕자님이 나오시지 않아도 됩니다."

"바닥이 젖어 있으면 나온다."

왕자님이 문을 닫으셨다.

서아는 닫힌 문을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내내 웃고 있었다.

걸으면서.

담벼락 모퉁이를 돌면서.

처소 복도를 걸으면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왕자님 웃음 소리가 귓속에 남아 있었다.

낮고 따뜻한.

짧았지만 분명한.

서아는 손으로 귀를 막았다.

지워지지 않도록.

그 소리가.

처소에 들어오니 채린이가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눈이 커졌다.

"뭔 일이야."

"왕자님이 웃으셨어."

"웃으셨다고?"

"소리 내서. 진짜로."

채린이가 잠깐 말을 멈췄다.

"소리 내서?"

"응. 항상 소리 없이 웃으셨는데. 오늘은 소리가 났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한참 봤다.

"왜 웃으셨어?"

서아는 물통 쏟은 것부터 설명했다.

미끄러진 것. 왕자님이 잡아주신 것. 바닥 같이 닦은 것. 봄 바람이 차다고 하신 것.

채린이가 다 듣고 나서 말했다.

"봄 바람이 차다고."

"응."

"귀가 빨개서."

"응."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그러더니 말했다.

"서아야."

"응."

"왕자님 귀 빨개진 거 봤어?"

"응. 봤어."

"그리고 봄 바람이 차다고 하셨어?"

"응."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왕자님도 사람이시구나."

서아는 그 말이 웃겼다.

"당연히 사람이시지."

"그냥 하는 말이야."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서아야."

"응."

"오늘 어땠어? 솔직히."

서아는 생각했다.

솔직히.

물통을 쏟았다. 미끄러졌다. 왕자님이 잡아주셨다. 같이 바닥을 닦았다. 왕자님이 소리 내어 웃으셨다.

"좋았어."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좋았어."

서아가 다시 말했다.

"오늘이 좋았어. 그냥."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더 말하지 않았다.

서아는 그게 좋았다.

좋았다는 말 하나로 충분했다.

밤이 됐다.

채린이가 잠들고 나서 서아는 창문을 열었다.

하늘을 봤다.

별이 가득했다.

남쪽 하늘을 봤다.

여수를 찾았다.

마름모 모양.

그 옆에——무수가 있을 것이다.

별이 드문 자리.

빈 곳도 하늘의 일부.

서아는 별이 드문 곳을 봤다.

있었다.

별이 없는 곳이.

그런데 그곳도 하늘의 일부였다.

서아는 그 빈 곳을 봤다.

왕자님이 웃으셨다.

소리 내서.

처음으로.

나한테.

서아는 그 사실이 뜨거웠다.

가슴 한가운데가.

뜨겁고 꽉 찬 것 같았다.

이게 뭔지 알았다.

좋아한다는 거였다.

이방과 왕자님을.

처음에 인정했을 때보다.

지금이 더 깊었다.

서아는 그걸 알았다.

무서웠다.

그런데 무섭기만 한 게 아니었다.

살구꽃이 금방 진다고 하셨다.

그래도 지금은 피어 있다.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왕자님 웃음 소리가 아직 귓속에 있었다.

낮고 따뜻한.

서아는 그 소리를 안고 눈을 감았다.

16회 예고

"이건 그냥 친한 거야, 분명히"

채린이가 물었다. 서아야, 너 왕자님이랑 그냥 친한 거야? 그렇다고 했다. 분명히. 근데 왜 왕자님이 웃으실 때 내 심장이 이렇게 뛰는 거지. 이게 그냥 친한 거 맞아?

작가 한마디

왕자님이 소리 내어 웃으셨어요!!!! 🥹 귀가 빨개진 것도 봄 바람 탓으로 돌리시는 것도 너무 귀여워서 제가 다 설렜습니다.

바닥이 젖어 있으면 나온다는 말도... 방법을 찾고 계신 거 맞죠? 16회에서 서아가 스스로한테 솔직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기대해 주세요.

 

 

 

16회 — 이건 그냥 친한 거야, 분명히

아침 교육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었다.

수습생들이 마당에 나와 있었다.

봄 햇살이 따뜻했다.

정이가 서아 옆에 앉으면서 말했다.

"서아야, 요즘 표정이 좋다."

"그래?"

"응. 밝아. 궁에 처음 왔을 때보다."

서아는 그 말이 신기했다.

밝아 보인다고.

"그냥 적응이 됐나봐."

"그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정이가 서아를 봤다.

눈이 반짝였다.

"혹시 좋아하는 사람 생겼어?"

서아는 빗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갑자기 무슨."

"얼굴이 그런걸."

"무슨 얼굴."

"두근거리는 사람 있는 얼굴."

서아는 정이를 봤다.

정이가 활짝 웃고 있었다.

"아니야."

"진짜로?"

"응."

"그런데 왜 부정하면서 뺨이 빨개지는 거야."

서아는 손으로 뺨을 짚었다.

뜨거웠다.

"햇살이 따뜻해서."

"봄 햇살이 뺨에만 영향을 미치냐."

서아는 그 말이 어디서 들어본 것 같았다.

아, 채린이가 했던 말이랑 비슷했다.

채린이가 옆에서 조용히 끼어들었다.

"정이야, 그만해."

"왜, 궁금한데."

"서아 불편하잖아."

정이가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 너는 알아?"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몰라."

그 한마디가 너무 단호해서 정이가 더 말하지 못했다.

서아는 채린이한테 눈으로 고마웠다.

채린이는 앞을 봤다.

점심이 끝나고 서아는 채린이랑 처소로 돌아왔다.

채린이가 문을 닫으면서 말했다.

"서아야."

"응."

"정이가 눈치챈 것 같은데."

서아는 앉으면서 한숨을 쉬었다.

"나도 알아."

"정이가 입이 가벼운 편이야."

"알아."

"조심해야 해."

"……알아."

채린이가 서아 옆에 앉았다.

"서아야."

"응."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너 왕자님이랑, 그냥 친한 거야?"

서아는 그 질문에 멈췄다.

그냥 친한 거.

채린이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서아는 대답을 생각했다.

그냥 친한 거.

청소하다 마주치고, 낮에 별자리 배우고, 살구꽃 같이 보고, 바닥 같이 닦고.

그게 그냥 친한 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냥 친한 거야."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진짜로?"

"응."

"왕자님 웃음 소리 들었을 때 심장이 뛴 건?"

"……놀라서."

"왕자님 귀 빨개진 거 보고 웃은 건?"

"재밌어서."

"왕자님이 바닥이 젖어 있으면 나온다고 하셨을 때 좋았던 건?"

서아는 대답하지 못했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냥 친한 거야?"

서아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잠깐 아무 말도 안 했다.

"……모르겠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아는데 모른 척하는 거잖아."

"……그렇지."

채린이가 한숨을 쉬었다.

길지 않은 한숨이었다.

"서아야."

"응."

"그냥 친한 거 아니잖아."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린이가 말했다.

"그냥 친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 다른 거 알잖아."

"알아."

"어느 쪽이야."

서아는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후자."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알고 있었어?"

"응."

"언제부터."

"살구꽃 볼 때쯤."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나는 더 전부터 알고 있었어."

서아는 고개를 들었다.

"더 전?"

"여수 찾았다고 말하고 싶었다고 했을 때."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여수를 찾았을 때.

왕자님한테 말하고 싶었을 때.

"그때부터야?"

"아마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이제 모른 척 안 해도 돼."

서아는 그 말이 뭔지 잠깐 생각했다.

모른 척 안 해도 된다.

스스로한테.

인정해도 된다.

"이방원 왕자님이 선 넘지 말라고 하셨잖아."

"알아. 근데 그건 행동 얘기야."

채린이가 말했다.

"마음까지 선 넘지 말라고 하신 건 아니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행동 얘기.

마음이 아니라.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채린이가 말했다.

"응."

"그러니까 마음은 그냥 있어도 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다만."

"응."

"행동은 조심해야 해."

"알아."

"마음이 커진다고 행동까지 따라가면 안 돼."

"알아."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면 됐어."

그리고 일어섰다.

"오후 교육 들어가야 해."

서아도 일어섰다.

걸으면서 말했다.

"채린아."

"응."

"고마워."

"뭘."

"모른 척 안 해도 된다고 해줘서."

채린이가 서아를 힐끗 봤다.

"마음은 네 거야. 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

"그래도."

"됐어."

채린이가 앞서 걸었다.

서아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생각했다.

좋아한다.

이방과 왕자님을.

오늘부터는 모른 척 안 하기로 했다.

스스로한테는.

오후 교육이 끝나고 청소를 하러 나갔다.

동쪽 내전을 쓸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왔다.

문이 열려 있었다.

서아는 청소를 하면서 말했다.

"왕자님."

"응."

"오늘 별자리 하나 더 가르쳐 주세요."

안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위수(危宿)다."

"위수요?"

"하늘의 지붕이라고 불린다."

서아는 청소를 멈추고 들었다.

"지붕이요?"

"세 개가 세모 모양으로 있다. 집 모양처럼."

"집 모양이요?"

"별자리 중에 가장 높이 있다고 해서 지붕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아는 그 이름이 좋았다.

하늘의 지붕.

가장 높은 곳.

"오늘 밤에 찾아볼게요."

"그래."

서아는 빗자루를 들었다.

"왕자님."

"응."

"어제 소리 내어 웃으셨잖아요."

안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랬느냐."

"예. 기억 안 나세요?"

"……기억한다."

"좋았어요."

왕자님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계속했다.

"그 소리가 좋았어요. 왕자님 웃음 소리."

안에서 아무 소리가 안 났다.

서아는 청소를 마저 했다.

뭔가 말씀하실 것 같아서 기다렸다.

그런데 말씀이 없으셨다.

청소를 다 마치고 서아가 말했다.

"다 했습니다."

"수고했다."

서아는 걸었다.

몇 걸음 걷다가——

"서아야."

멈췄다.

"예."

"……나도."

말이 거기서 멈췄다.

서아는 기다렸다.

"나도 좋았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아주 짧게.

서아는 그 말이 귀에 들어오는 순간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나도 좋았다.

왕자님 웃음 소리가.

나도 좋았다.

서아가 있어서.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데 둘 다인 것 같았다.

서아는 돌아보지 않았다.

"예."

그것만 대답하고 걸었다.

빠르게.

담벼락 모퉁이를 돌아서.

아무도 없는 곳에서.

멈췄다.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나도 좋았다.

그 말이.

귓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저녁이 됐다.

교육이 끝나고 수습생들이 처소로 들어갔다.

정이가 서아 옆에 붙었다.

"서아야, 아까 교육 때 봤는데."

"응?"

"웃고 있었어."

"내가?"

"응. 혼자서. 선생님 말씀 듣다가."

서아는 당황했다.

"아, 그게——말씀이 재밌어서."

"어떤 부분이?"

"그냥."

"그냥이 어딨어."

정이가 서아를 봤다.

눈이 반짝였다.

"서아야, 나한테 말해줘도 돼."

"뭘."

"좋아하는 사람."

서아는 정이를 봤다.

정이가 진지했다.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말하면 안 됐다.

정이는 입이 가볍다고 채린이가 했다.

궁에서 소문이 나면——

"없어."

서아가 말했다.

"진짜로?"

"응."

"그런데 왜 혼자 웃어."

"그냥 오늘 좋은 일이 있었어."

"어떤."

"말하기 뭐해."

정이가 서아를 봤다.

한참 봤다.

그러더니 말했다.

"알겠어.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고마워."

"근데 서아야."

"응."

"행복해 보여."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행복해 보인다.

"그래?"

"응. 궁에 처음 왔을 때 되게 긴장해 있었잖아. 근데 요즘은 달라. 뭔가 기다리는 게 있는 것 같아."

서아는 정이를 봤다.

정이가 웃었다.

"좋은 거야. 행복해 보이는 거."

서아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고마워."

정이가 어깨를 으쓱했다.

"별거 아니야."

그날 밤.

채린이와 나란히 누웠다.

채린이가 불을 끄면서 말했다.

"정이가 또 물어봤어?"

"응."

"뭐라고 했어?"

"없다고 했어."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잘했어."

"근데 채린아."

"응."

"정이가 행복해 보인다고 했어."

채린이가 천장을 봤다.

"그래."

"나 행복해 보여?"

"응."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행복해 보인다.

"나 행복한 거 맞지?"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채린이가 다시 천장을 봤다.

"행복한 것 같은데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좋은 것 같은데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서아가 말했다.

"그게 다 섞여 있어."

채린이가 말했다.

"그게 맞는 것 같은데."

"왜."

"마냥 좋기만 하면 조심을 안 하게 되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무서운 게 섞여 있어야 조심할 수 있다는 것.

"채린아, 너 진짜 생각이 깊다."

"아니야."

"아니긴. 나보다 훨씬."

"그냥 현실적인 거야."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자자."

"응."

서아는 눈을 감았다.

나도 좋았다.

왕자님 말씀이 아직 귓속에 있었다.

행복해 보인다고 정이가 했다.

모른 척 안 해도 된다고 채린이가 했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생각했다.

좋아한다.

이방과 왕자님을.

그냥 친한 게 아니라.

분명히 좋아하는 거라고.

오늘부터 스스로한테 솔직해지기로 했다.

그게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마음은 가지고 있기로.

서아는 그 마음을 가슴 안에 조심스럽게 넣어뒀다.

깨지지 않도록.

부서지지 않도록.

자정이 넘어서였다.

서아는 눈이 떠졌다.

하늘을 봤다.

별이 보였다.

남쪽 하늘을 봤다.

여수가 보였다.

그 위로 눈을 올렸다.

세모 모양으로 모인 별 세 개를 찾았다.

"위수다."

혼자 조용히 말했다.

하늘의 지붕.

가장 높은 곳.

그 별을 봤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

거기서 내려다보면 뭐가 보일까.

왕자님이 있는 처소가 보일까.

서아가 있는 처소가 보일까.

서아는 위수를 봤다.

아주 오래.

채린이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렸다.

봄밤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서아는 별을 보면서 생각했다.

그냥 친한 거 아니야.

분명히.

그냥 친한 거랑 좋아하는 거랑 달라.

이건 후자야.

분명히.

서아는 눈을 감았다.

나도 좋았다.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아침.

청소를 하러 나갔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왔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서아는 청소를 하면서 말했다.

"왕자님."

"응."

"위수 찾았어요."

안에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찾았느냐."

"예. 세모 모양이 맞죠?"

"그렇다."

"하늘의 지붕이요."

"그래."

서아는 빗자루를 움직였다.

"왕자님."

"응."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별에서 내려다보면 뭐가 보일까요."

왕자님이 잠깐 침묵하셨다.

"글쎄다."

"저는 궁이 보일 것 같아요."

"궁이."

"예. 지붕들이 보이겠죠. 기와 지붕들이. 그리고 살구나무도 보이고."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서아도 보이겠구나."

서아는 빗자루를 멈췄다.

"예?"

"살구나무 앞에 서 있는."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위수에서 내려다보면.

살구나무 앞에 서 있는 서아가 보이겠구나.

왕자님이 그 말씀을 하셨다.

서아는 심장이 쿵 하는 소리를 들었다.

빗자루를 다시 움직였다.

뺨이 뜨거웠다.

"……왕자님도 보이겠죠."

서아가 말했다.

"처소 창가에 앉아 계신 왕자님도."

왕자님이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청소를 계속했다.

말이 없었다.

두 사람 다.

그런데 이 침묵이.

오늘은 특히 가득 찬 침묵이었다.

뭔가로 꽉 찬.

서아는 그게 뭔지 알았다.

이름 붙이지 않았다.

붙이지 않아도 알았다.

청소를 다 마치고 나오면서.

서아는 조용히 말했다.

"다 했습니다."

"수고했다."

"예."

걸었다.

이번엔 뒤를 돌아봤다.

처소 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왕자님이 창가에 앉아 계셨다.

서아를 보고 계셨다.

눈이 마주쳤다.

서아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왕자님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셨다.

서아는 걸었다.

이번엔 멈추지 않았다.

멈추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걸었다.

봄 햇살이 따뜻했다.

살구꽃 향기가 났다.

서아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걸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냥 친한 게 아니야.

분명히.

그렇지만.

이건 지금 피어 있는 거야.

살구꽃처럼.

금방 지더라도.

지금은.

피어 있어.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걸었다.

봄이었다.

17회 예고

"궁궐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궁 안이 평소와 달랐다. 사람들이 조용히 움직이고, 낮에도 무장한 병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뭔가 일이 생길 것 같아. 그리고 그날 밤——

작가 한마디

위수에서 내려다보면 서아도 보이겠구나, 그 말 한마디에 저도 심장이 쿵 했어요.

왕자님이 먼저 서아 이름을 말씀하신 거잖아요.

이제 3부가 시작됩니다. 역사의 큰 사건이 다가오고 있어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변화가 생길지, 함께 봐요.

17회 — 궁궐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처음 이상함을 느낀 건 작은 것에서였다.

아침 교육을 마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평소에 없던 내관이 서 있었다. 두 명이었다. 한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서아는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도 있었다.

그다음 날에도.

서아는 채린이한테 말했다.

"저쪽 복도에 내관이 항상 서 있어."

"나도 봤어."

"왜 있는 걸까."

"모르겠어."

채린이가 낮게 말했다.

"근데 서아야."

"응."

"서쪽 내전 쪽도 요즘 사람이 많아."

서아는 그 말에 멈췄다.

서쪽 내전.

이방원 왕자님이 계신 쪽.

"많아?"

"응. 낮에도 수행하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것 같아. 평소보다."

서아는 그 말이 뭔가 걸렸다.

그런데 뭔지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냥 업무가 많으신 건 아닐까."

"그럴 수도 있는데."

채린이가 말을 멈췄다.

"뭔가 다른 것 같아."

사흘 뒤였다.

오후 청소를 하러 나갔다.

동쪽 내전 복도를 걷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무거운 발걸음.

서아는 옆으로 비켰다.

내관 셋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뭔가를 들고 있었다.

문서 같은 것이었다.

서아는 그 뒷모습을 봤다.

서쪽으로 향하는 방향이었다.

이방원 왕자님 처소 쪽이었다.

서아는 청소를 계속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오늘은 열려 있지 않았다.

서아는 문을 두드렸다.

"왕자님, 청소 왔습니다."

안에서 잠깐 있다가 말씀이 들렸다.

"들어오너라."

서아가 들어갔다.

왕자님이 앉아 계셨다.

평소와 달리 책이 없었다.

창문이 닫혀 있었다.

방 안이 조용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평소와 달랐다.

무거웠다.

서아는 청소를 시작했다.

말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몰랐다.

왕자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 생각이 많은 표정이었다.

서아는 조용히 청소를 했다.

한참 있다가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청소는 됐다."

서아는 멈췄다.

"아직 다 못 했는데요."

"오늘은 됐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왕자님이 창문 쪽을 보고 계셨다.

닫힌 창문.

"왕자님, 괜찮으세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괜찮다."

"아닌 것 같은데요."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괜찮다."

두 번 말씀하셨다.

서아는 더 묻지 않았다.

"예. 그러면 나가겠습니다."

나오면서 문을 닫으려는데——

"서아야."

"예."

"내일은 이쪽 청소 안 해도 된다."

서아는 그 말이 이상했다.

청소 안 해도 된다고.

"왜요?"

"내일 이쪽이 복잡할 수 있다."

"복잡하다고요?"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냥."

그 두 글자가 아무것도 없는 대답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예. 알겠습니다."

문을 닫았다.

복도에 나왔다.

복잡할 수 있다고 하셨다.

내일.

서아는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저녁 교육이 끝나고 채린이와 처소로 돌아왔다.

서아는 왕자님이 하신 말씀을 전했다.

채린이가 들으면서 표정이 달라졌다.

"내일 청소 안 해도 된다고?"

"응."

"복잡할 수 있다고?"

"응. 그냥이라고 하셨는데 그냥인 것 같지 않았어."

채린이가 생각하는 얼굴이었다.

"서아야."

"응."

"혹시 이방원 왕자님이 뭔가를 준비하시는 것 아닐까."

"뭘?"

채린이가 목소리를 낮췄다.

"무언가 큰 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무슨 일."

"모르지. 근데 내관들이 자꾸 서쪽 내전으로 드나들고, 복도에 사람이 늘고, 이방과 왕자님이 내일 복잡할 거라고 하시고."

채린이가 말을 멈췄다.

"이상해."

서아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실권을 가지고 계시잖아. 그분이 뭔가를 준비하고 계신다면——"

채린이가 말을 흐렸다.

서아는 채린이 표정을 봤다.

"채린아, 뭔지 알아?"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잘은 모르는데."

"응."

"우리 아버지가 전에 말씀하셨어. 개경에 있다 보면 왕족들 사이에서 큰 일이 생기기도 한다고. 권력 때문에."

서아는 그 말이 무겁게 들렸다.

권력.

왕자들 사이에서.

"이방원 왕자님이랑 이방과 왕자님이랑?"

"그것까지는 모르겠어."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일단 내일 조심하자."

"응."

"박 상궁님이 움직이지 말라고 하시면 움직이지 마."

"알아."

"이방과 왕자님이 내일 청소 오지 말라고 하신 거,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닌 것 같아."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았다.

왕자님이 서아를 걱정하신 거였다.

내일 복잡할 테니 오지 말라고.

"채린아."

"응."

"왕자님이 걱정하신 것 같아."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알아."

"그게 마음에 걸려."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보다가 말했다.

"서아야, 왕자님이 너한테 오지 말라고 하신 거잖아. 그러면 가면 안 돼."

"알아."

"진짜로 알아?"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가 채린이를 봤다.

"가지 않을게."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됐다.

서아는 오래 눈을 떴다.

별을 봤다.

위수가 보였다.

하늘의 지붕.

가장 높은 곳.

지금 저 별에서 내려다보면 궁이 보이겠지.

기와 지붕들이.

살구나무가.

왕자님 처소가.

내일 그쪽이 복잡할 거라고 하셨다.

뭔가 생각이 많으신 표정이었다.

창문이 닫혀 있었다.

평소에 항상 열려 있던 창문이.

서아는 눈을 감았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물었더니 괜찮다고 하셨다.

두 번이나.

두 번 말씀하신 게 괜찮지 않다는 거였다.

서아는 알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자야 했다.

내일 가지 말아야 했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 됐다.

교육이 시작되기도 전이었다.

박 상궁이 수습생들을 모았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단단하게 굳어 있었다.

"오늘 오전 교육은 없다."

수습생들이 웅성거렸다.

"처소에서 나오지 마라. 아무 이유가 없으면 복도에도 나오지 마라."

서아는 채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채린이의 눈이 말했다.

봐라.

"상궁님."

정이가 손을 들었다.

"왜 그런 겁니까?"

박 상궁이 정이를 봤다.

"궁 안에 일이 있다."

"어떤 일이요?"

"알 필요 없다. 지시대로 해라."

박 상궁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알겠느냐."

"예."

수습생들이 대답했다.

박 상궁이 나가셨다.

처소에 남겨진 수습생들이 웅성거렸다.

정이가 서아 옆에 붙었다.

"서아야, 뭔 일인지 알아?"

"몰라."

"채린이는?"

채린이가 말했다.

"몰라."

정이가 불안한 얼굴로 창밖을 봤다.

"무서워."

서아도 무서웠다.

오전이 지나갔다.

처소 안에 있었다.

밖에서 가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빠르고 무거운 발걸음.

여럿이 지나가는 소리.

서아는 창문 틈으로 밖을 봤다.

내관들이 빠르게 걷고 있었다.

뭔가를 들고.

긴장한 표정으로.

서아는 창문에서 물러났다.

채린이가 말했다.

"보지 마."

"응."

"보면 더 불안해."

"알아."

서아는 앉았다.

이방과 왕자님이 생각났다.

어제 닫혀 있던 창문.

무거운 표정.

내일 복잡할 거라고 하셨던 말.

괜찮으신 걸까.

지금 어디 계신 걸까.

"채린아."

"응."

"왕자님이 걱정돼."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이방과 왕자님이?"

"응."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괜찮으실 거야."

"그럴까."

"응."

채린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데 서아는 채린이 눈빛이 확신은 아닌 것 같았다.

위로하려는 것 같았다.

"채린아, 솔직히 말해줘."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무슨 일인 것 같아?"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조용히 말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있어."

"응."

"왕자들이 권력을 두고 다툴 때는 가운데 있으면 안 된다고."

"가운데?"

"이방원 왕자님이랑 다른 왕자님들 사이에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과 왕자님은 가운데 계신 건가."

채린이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는 것도 대답이었다.

서아는 손을 무릎 위에 올렸다.

차가웠다.

손이.

점심이 됐다.

밥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 사람이 평소보다 적었다.

다들 조용히 먹었다.

서아는 밥을 먹으면서 주변을 봤다.

상궁들이 몇 명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정이가 밥을 먹으면서 말했다.

"무서워. 이런 궁은 처음이야."

"나도."

서아가 말했다.

채린이는 밥을 먹으면서 아무 말도 안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는 길에 복도에서 박 상궁을 마주쳤다.

박 상궁이 수습생들을 봤다.

"밥 먹었느냐."

"예."

"처소로 돌아가라. 오늘 오후에도 나오지 마라."

"상궁님."

서아가 말했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왕자님들은 괜찮으십니까."

박 상궁이 잠깐 서아를 봤다.

뭔가 아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다."

"예."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박 상궁이 지나가셨다.

채린이가 서아 팔을 잡았다.

"가자."

오후가 됐다.

처소에 있었다.

밖이 조용해졌다.

발걸음 소리가 줄었다.

그런데 그 조용함이 더 무거웠다.

서아는 창문 너머 하늘을 봤다.

맑았다.

봄 하늘이었다.

이런 날에 왜 이렇게 무거운 걸까.

채린이가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정이가 처소로 들어왔다.

"야, 나 너무 답답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채린이가 말했다.

"모르는 게 나아."

"왜."

"알면 더 무서워."

정이가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 너 뭔가 알아?"

"몰라."

"진짜로?"

"응."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나도 몰라."

정이가 앉았다.

"이상하다. 이런 적이 없었잖아. 궁에 온 지 한 달 됐는데 처음이야."

"그렇지."

"무기 소리 들었어?"

서아는 눈을 깜빡였다.

"무기 소리?"

"응. 아까 서쪽 쪽에서 뭔가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났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 표정이 굳었다.

"언제?"

"점심 먹고 나서 조금 있다가."

채린이가 바느질을 내려놨다.

"정이야."

"응."

"창문 닫아."

"왜?"

"그냥 닫아."

정이가 영문을 모른 채 창문을 닫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말했다.

뭔가 시작됐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심장이 무겁게 내려앉는 것 같았다.

이방과 왕자님이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내일 복잡할 거라고.

그게 이거였다.

저녁이 됐다.

밥을 먹으러 갔다.

식당에서 내관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는 게 들렸다.

서아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들렸다.

"——정도전이——"

"——이방원 왕자님이——"

그 두 이름이 들렸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도 들은 것 같았다.

표정이 굳어 있었다.

밥을 먹고 처소로 돌아왔다.

정이가 앞서 가고 채린이와 서아만 남았을 때.

채린이가 조용히 말했다.

"정도전이 누군지 알아?"

"들어본 것 같은데."

"이방원 왕자님이랑 사이가 안 좋아. 조정에서."

서아는 그 말이 무겁게 들렸다.

"그러면 오늘 일이——"

"조용히."

채린이가 주변을 봤다.

아무도 없었다.

채린이가 서아 귀에 대고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움직이신 것 같아."

서아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이방원 왕자님이 움직이셨다.

그러면 이방과 왕자님은.

"이방과 왕자님은요?"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몰라."

채린이가 먼저 걸었다.

서아는 따라 걸으면서 생각했다.

이방과 왕자님.

어제 닫혀 있던 창문.

무거운 표정.

내일 복잡할 거라는 말.

왕자님이 아셨던 거겠지.

무슨 일이 생길지.

그래서 서아한테 오지 말라고 하신 거겠지.

서아를 걱정하셔서.

그날 밤.

처소에서 채린이와 둘이 있었다.

정이는 일찍 잠들었다.

채린이가 낮게 말했다.

"서아야."

"응."

"오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응."

"이방원 왕자님이 조정에서 적들을 치신 것 같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적들을.

"이방과 왕자님은요?"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형님이시잖아. 이방원 왕자님한테."

"응."

"형제잖아."

"응."

"그러면 괜찮을 것 같은데."

채린이가 확신 없이 말했다.

서아도 확신할 수 없었다.

권력 다툼 앞에서 형제가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서아는 창문을 봤다.

닫혀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닫고 있었다.

열고 싶었다.

하늘을 보고 싶었다.

별을 찾고 싶었다.

"채린아."

"응."

"창문 열어도 될까."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조금만."

서아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차가운 밤바람이 들어왔다.

하늘이 보였다.

별이 보였다.

위수가 보였다.

하늘의 지붕.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지금 저 별에서 내려다보면.

이 궁이 어떻게 보일까.

왕자님이 계신 처소가 보일까.

왕자님이 지금 어디 계신지.

무사하신지.

"왕자님."

혼자 조용히 말했다.

아무도 못 들을 말이었다.

그냥 말하고 싶었다.

위수 별을 향해.

하늘의 지붕을 향해.

"괜찮으세요?"

별이 반짝였다.

대답은 없었다.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왕자님이 괜찮으시기를.

무사하시기를.

그것만 생각했다.

채린이 숨소리가 들렸다.

봄밤 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기도했다.

아무한테 하는 건지 모르겠는 기도였다.

그냥.

왕자님이 괜찮으시기를.

18회 예고

"무기 소리가 들리던 그날 밤"

한밤중에 소리가 들렸다. 무기 소리, 발걸음 소리, 누군가 달리는 소리. 채린이가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왕자님 처소가 있는 동쪽을 봤다.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더 무서웠다.

작가 한마디

드디어 역사적 사건이 시작됩니다. 제1차 왕자의 난이 가까워지고 있어요. 이방과 왕자님이 미리 서아한테 오지 말라고 하신 것, 그게 얼마나 큰 배려인지 18회에서 더 느껴질 거예요. 두 사람이 어떻게 이 밤을 보내는지, 함께 봐요.

18회 — 무기 소리가 들리던 그날 밤

한밤중이었다.

서아는 자고 있었다.

아니, 자는 척하고 있었다.

눈을 감았는데 잠이 오지 않았다.

왕자님이 생각났다.

어제 닫혀 있던 창문이 생각났다.

오늘 낮에 들린 쨍그랑 소리가 생각났다.

정도전이라는 이름이 생각났다.

서아는 눈을 감은 채로 천장을 향해 있었다.

채린이 숨소리가 들렸다.

자는 것 같았다.

정이도 조용했다.

서아만 깨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가 들렸다.

처음엔 작은 소리였다.

발걸음 소리.

빠른 발걸음이 지나가는 소리.

서아는 눈을 떴다.

천장을 봤다.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서아는 다시 눈을 감으려고 했다.

그때——

또 들렸다.

이번엔 더 많은 발걸음이었다.

여러 명이 빠르게 움직이는 소리.

서아는 몸을 일으켰다.

채린이도 눈을 떴다.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눈이 마주쳤다.

채린이가 먼저 말했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서.

"들려?"

"응."

발걸음 소리가 계속됐다.

그리고——

쨍.

금속 소리였다.

무기 소리였다.

정이가 벌떡 일어났다.

"뭐야——"

채린이가 정이 입을 막았다.

"조용히."

정이의 눈이 커졌다.

채린이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세 사람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어둠 속에서.

밖에서 소리가 계속 들렸다.

발걸음.

무기 소리.

그리고 가끔 목소리.

알아들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서아는 창문을 봤다.

닫혀 있었다.

창문 너머가 어두웠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소리들이 잦아들었다.

그런데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가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가끔 목소리가 들렸다.

정이가 채린이 팔을 잡고 있었다.

떨고 있었다.

채린이가 정이 손을 잡았다.

서아는 무릎을 끌어안고 있었다.

손이 차가웠다.

몸이 떨리는 건지 추운 건지 알 수 없었다.

왕자님이 생각났다.

동쪽 내전이 얼마나 멀었지.

여기서 들리는 소리가 저쪽에서도 들릴까.

왕자님 처소는 지금 어떨까.

서아는 창문을 봤다.

열면 안 됐다.

박 상궁이 나오지 말라고 하셨다.

채린이도 창문 닫으라고 했다.

그런데 손이 창문 쪽으로 가고 싶었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응."

채린이가 서아 손을 잡았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고개를 저었다.

열지 마.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시간쯤 지났을까.

소리가 많이 줄었다.

가끔 발걸음 소리가 들리는 것 외에는 조용해졌다.

정이가 조용히 말했다.

"끝난 건가."

채린이가 말했다.

"모르겠어."

"밖에 나가봐야 하지 않을까."

"안 돼."

단호했다.

"박 상궁님이 나오지 말라고 하셨잖아."

"그래도."

"정이야."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나오지 말라고 하셨으면 이유가 있어서야."

정이가 입을 다물었다.

세 사람이 다시 조용해졌다.

서아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창문을 봤다.

어두웠다.

왕자님.

지금 어디 계세요.

안에서 소리가 들렸다.

처소 문 바깥에서 발걸음 소리가 났다.

세 사람이 굳었다.

발걸음이 처소 앞에서 멈췄다.

노크 소리가 났다.

"박 상궁이오. 들어가겠습니다."

채린이가 안도하는 숨을 내쉬었다.

"들어오세요."

박 상궁이 들어오셨다.

손에 등불을 들고 계셨다.

표정이 평소보다 지쳐 있었다.

그런데 단단했다.

"괜찮으냐."

"예."

세 사람이 대답했다.

박 상궁이 주변을 살피셨다.

"아무도 다치지 않았느냐."

"예."

"잘했다."

박 상궁이 등불을 내려놓으셨다.

"오늘 밤 궁 안에 일이 있었다."

세 사람이 조용히 들었다.

"왕자님들 사이에서 일이 생겼다. 자세한 건 알 필요 없다."

박 상궁이 세 사람을 봤다.

"너희는 수습이다. 이런 일에 끼어들면 안 된다."

"예."

"내일 아침까지 처소에 있어라."

"예."

박 상궁이 일어서시면서 서아를 봤다.

잠깐.

서아는 그 눈빛을 받았다.

뭔가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씀을 안 하셨다.

그냥 나가셨다.

문이 닫혔다.

정이가 말했다.

"왕자님들 사이에서 일이 생겼다고."

채린이가 말했다.

"응."

"어떤 일."

"몰라."

채린이가 이불을 당겼다.

"자자."

"지금 잠이 와?"

"안 자도 되는 건 아니잖아."

정이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채린이도 누웠다.

서아는 한동안 앉아 있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누워."

"응."

서아는 누웠다.

천장을 봤다.

왕자님들 사이에서 일이 생겼다.

이방원 왕자님이 움직이셨다.

이방과 왕자님은.

박 상궁이 서아를 봤을 때 그 눈빛이.

뭔가 말씀하시려다 안 하신 것이.

서아는 그게 마음에 걸렸다.

새벽이 됐다.

서아는 한숨도 못 잤다.

눈을 감았다 떴다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채린이는 언제 잠들었는지 모르겠다.

정이는 자다가 가끔 뒤척였다.

서아는 조용히 일어났다.

창문을 아주 조금 열었다.

새벽 공기가 들어왔다.

차가웠다.

하늘을 봤다.

별이 보였다.

위수가 보였다.

하늘의 지붕.

서아는 그 별을 봤다.

저 별에서 내려다보면 지금 궁이 어떻게 보일까.

조용한 것 같으면서 조용하지 않은.

무거운 것 같으면서 무거운.

서아는 동쪽을 봤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가 있는 방향이었다.

어두웠다.

불빛이 없었다.

그냥 어두운 밤이었다.

"왕자님."

혼자 조용히 말했다.

"괜찮으세요?"

대답이 없었다.

별만 반짝였다.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다시 누웠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이 됐다.

박 상궁이 오셨다.

"밥 먹으러 나가도 된다. 그 외에는 처소에 있어라."

"상궁님."

서아가 말했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왕자님들은 무사하십니까."

박 상궁이 잠깐 서아를 봤다.

"정안군 나리는 무사하시다."

이방원 왕자님이 무사하시다고.

"이방과 왕자님은요."

박 상궁이 잠깐 멈췄다.

"……무사하시다."

그 잠깐의 멈춤이 서아 마음을 조였다.

"정말이요?"

"그렇다."

박 상궁이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박 상궁이 나가셨다.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야, 이방과 왕자님이 왜."

채린이가 말했다.

"밥 먹으러 가자."

밥을 먹으러 갔다.

식당이 평소보다 조용했다.

다들 말없이 먹었다.

서아는 밥이 넘어가지 않았다.

그냥 조금씩 먹었다.

채린이가 서아 밥그릇을 봤다.

"먹어."

"먹고 있어."

"제대로 먹어."

서아는 한 숟갈 더 먹었다.

밥을 다 먹고 나오는 길에 복도에서 내관 둘이 이야기하는 것이 들렸다.

이번엔 귀를 기울이지 않으려 해도 들렸다.

"——정도전이 죽었다고——"

"——이방원 왕자님께서——"

"——이방과 왕자님은 괜찮으시다고——"

서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들었다.

정도전이 죽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하셨다.

이방과 왕자님은 괜찮으시다.

채린이가 서아 팔을 잡았다.

"들었지?"

"응."

"걸어."

서아는 걸었다.

처소로 돌아왔다.

정이가 말했다.

"정도전이 죽었대. 이방원 왕자님이."

"응."

채린이가 말했다.

"그게 어젯밤 일이었구나."

"이방원 왕자님이 그런 분이었어?"

정이가 말했다.

채린이가 정이를 봤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 행동하시는 분이야."

정이가 조용해졌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봄 하늘이었다.

어젯밤과 같은 하늘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맑았다.

정도전이 죽었다.

그 이름을 복도에서 들었을 때부터.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았다.

이방원 왕자님이 움직이신다고.

그게 어젯밤이었다.

이방과 왕자님은 괜찮으시다.

내관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서아는 직접 보고 싶었다.

직접 뵙고 싶었다.

괜찮으시다는 말을 듣는 것과.

직접 뵙는 것이 달랐다.

오후가 됐다.

박 상궁이 오셔서 말씀하셨다.

"오늘 오후부터 청소는 한다. 단, 서쪽 내전은 가지 마라."

"예."

"동쪽 내전 담당은 평소대로 해라."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동쪽 내전.

이방과 왕자님 처소가 있는 곳.

"예."

서아는 청소 도구를 들었다.

채린이가 말했다.

"서아야."

"응."

"가는 거야?"

"청소하러 가는 거야."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그것만이야?"

서아는 잠깐 채린이를 봤다.

"응."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조심해."

"응."

동쪽 내전 복도를 걸었다.

평소보다 조용했다.

내관이 두 명 서 있었다.

서아가 지나가자 눈으로 봤다.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청소를 시작했다.

복도를 쓸었다.

물통을 교체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왔다.

문이 닫혀 있었다.

서아는 문을 두드렸다.

"서아입니다."

안에서 아무 소리가 나지 않았다.

서아는 다시 두드렸다.

"청소하러 왔습니다."

잠깐 있다가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너라."

서아는 문을 열었다.

들어갔다.

이방과 왕자님이 창가에 앉아 계셨다.

오늘은 창문이 열려 있었다.

봄바람이 들어오고 있었다.

왕자님이 창밖을 보고 계셨다.

서아는 문을 닫고 청소를 시작하려다 멈췄다.

왕자님 표정이 보였다.

평소보다 지쳐 있었다.

눈 아래가 어두웠다.

잠을 못 주무신 것 같았다.

서아는 청소를 시작했다.

말하지 않았다.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

그냥 청소를 했다.

빗자루를 밀었다.

물통을 교체했다.

창문 쪽 먼지를 닦았다.

왕자님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도 말이 없었다.

그냥 같이 있었다.

청소를 다 마쳤다.

서아는 나가려다 멈췄다.

말하고 싶었다.

"왕자님."

왕자님이 창밖에서 서아를 봤다.

"괜찮으세요?"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괜찮다."

"정말요?"

"그렇다."

서아는 왕자님 얼굴을 봤다.

지쳐 있었다.

눈 아래가 어두웠다.

그런데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어젯밤에 무서웠어요."

서아가 말했다.

"무기 소리가 들려서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다치지 않았느냐."

"예. 처소에 있었어요. 왕자님이 오지 말라고 하셔서."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그래서 안 온 것이냐."

"예. 처음엔 걱정이 돼서 가고 싶었는데."

서아는 잠깐 멈췄다.

"채린이가 잡아줬어요."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잘 됐다."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였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네가 다치지 않아서.

잘 됐다고.

서아는 눈이 시렸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참았다.

"왕자님이 걱정됐어요."

서아가 말했다.

"어젯밤 내내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눈이 시린 걸 참으면서 왕자님을 봤다.

왕자님 눈빛이.

뭔가 담겨 있었다.

말하지 않는 것들이.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고맙다."

서아는 그 두 글자를 들었다.

고맙다.

처음에 들었을 때와 달랐다.

지금은 그 두 글자가 훨씬 무겁게 들렸다.

"왕자님."

"응."

"어젯밤에 많이 힘드셨겠어요."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봄바람이 들어왔다.

살구꽃 향기가 실려 왔다.

"……그랬다."

처음으로 힘들었다고 하셨다.

부정하지 않으셨다.

서아는 그 말이 뜨거웠다.

"저한테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돼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항상 괜찮다고 하시는 것 알아요. 근데 저한테는."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안 괜찮아도 된다고."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눈이 더 시려졌다.

눈물을 참았다.

울면 안 됐다.

왕자님 앞에서.

왕자님이 더 힘드실 텐데.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고맙다. 그 말."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더 말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청소 다 됐습니다."

"수고했다."

서아는 문 쪽으로 걸었다.

문을 열었다.

"서아야."

멈췄다.

"예."

"내일은 별자리 하나 더 가르쳐 주겠다."

서아는 그 말이 너무 왕자님다웠다.

힘드셨을 텐데.

지치셨을 텐데.

그래도 내일 별자리 가르쳐 주겠다고 하셨다.

서아는 웃음이 났다.

눈이 시린 채로.

"예. 기다리겠습니다."

문을 닫았다.

복도에 나왔다.

서아는 손으로 눈을 눌렀다.

눈물이 나오려 했다.

참았다.

왕자님이 괜찮으셨다.

직접 봤다.

지치셨지만 눈빛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내일 별자리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서아는 숨을 한 번 내쉬고 걸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살구꽃 향기가 났다.

눈이 아직 시렸다.

그런데 발걸음이 가벼웠다.

왕자님이 괜찮으셨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처소로 돌아오니 채린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봤어?"

"응."

"어떠셨어?"

"지쳐 보이셨어. 근데 괜찮으셨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서아는 자리에 앉았다.

눈이 아직 조금 시렸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울었어?"

"아니."

"울 것 같았어?"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참았구나."

"응."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보다가 말했다.

"잘했어."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왕자님 앞에서 울면 왕자님이 더 힘드시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채린이가 알고 있었다.

서아가 왜 참았는지.

"채린아."

"응."

"고마워."

"뭘."

채린이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내일 별자리 배운다고 했어?"

"응."

"잘됐네."

채린이가 누웠다.

서아도 누웠다.

천장을 봤다.

어젯밤과 같은 천장이었다.

그런데 다른 밤이었다.

왕자님이 괜찮으셨다.

내일 별자리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봄바람이 불었다.

살구꽃 향기가 희미하게 들어왔다.

서아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생각했다.

어젯밤은 지나갔다.

무기 소리가 들리던 그 밤이.

왕자님은 괜찮으셨다.

내일이 왔다.

별자리를 배울 내일이.

서아는 그 생각을 안고 눈을 감았다.

잠이 왔다.

어젯밤엔 오지 않던 잠이.

오늘 밤엔 왔다.

19회 예고

"왕자님,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며칠이 지나도 궁 안이 무거웠다. 왕자님은 청소할 때 마주쳐도 말씀이 없으셨다. 별자리를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는데. 그러다 그날, 왕자님이 처소에 혼자 계셨다. 아무것도 안 하시고. 그냥 앉아 계셨다. 목소리가 떨렸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작가 한마디

안 괜찮아도 된다고 말해준 서아, 그 말에 고맙다고 하신 왕자님.

힘든 밤을 보내셨는데 내일 별자리 가르쳐 주겠다고 하시는 왕자님이 너무 왕자님다웠어요. 19회에서 왕자님의 진짜 감정이 처음으로 드러납니다. 함께 봐요.

19회 — 왕자님, 괜찮으세요? (목소리가 떨렸다)

며칠이 지났다.

궁 안이 여전히 무거웠다.

사람들이 조용히 다녔다.

웃음 소리가 없었다.

밥을 먹을 때도, 교육을 받을 때도, 복도를 지날 때도.

다들 뭔가를 조심하는 것 같았다.

서아는 그 무게를 느끼면서 청소를 했다.

교육을 받았다.

밥을 먹었다.

이방과 왕자님은 청소할 때 마주쳤다.

처소 문이 닫혀 있는 날이 많았다.

두드리면 들어오라고 하셨다.

들어가면 창가에 앉아 계셨다.

책을 읽으실 때도 있었다.

그냥 창밖을 보실 때도 있었다.

서아가 청소를 하면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왔느냐."

"예."

"수고했다."

그게 다였다.

별자리 얘기가 없었다.

왕자님이 먼저 꺼내지 않으셨다.

서아도 꺼내지 못했다.

왕자님이 바빠 보이지 않으셨다.

그런데 멀어 보이셨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계신 것 같은.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오후 청소를 하러 나갔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 앞에 왔다.

문을 두드렸다.

"서아입니다."

안에서 대답이 없었다.

서아는 다시 두드렸다.

"청소하러 왔습니다."

역시 대답이 없었다.

안 계신가.

서아는 잠깐 기다렸다.

그때 소리가 들렸다.

아주 작은 소리였다.

뭔가 움직이는 소리.

서아는 다시 두드렸다.

"왕자님, 서아입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잠깐 있다가.

"……들어오너라."

목소리가 달랐다.

평소보다 낮았다.

무거웠다.

서아는 문을 열었다.

들어갔다.

이방과 왕자님이 앉아 계셨다.

창가가 아니었다.

방 한가운데.

바닥에 앉아 계셨다.

등이 기둥에 기대어 있었다.

눈을 감고 계셨다.

무릎 위에 손을 올려놓고.

그냥 앉아 계셨다.

서아는 문을 닫고 멈췄다.

청소 도구를 들고 서 있었다.

왕자님이 눈을 뜨지 않으셨다.

"왕자님."

서아가 불렀다.

왕자님이 눈을 뜨셨다.

서아를 봤다.

눈 아래가 더 어두워져 있었다.

며칠 전보다.

잠을 못 주무신 게 쌓인 것 같았다.

"왔느냐."

"예."

서아는 청소를 시작하려다 멈췄다.

왕자님이 평소 자리가 아닌 곳에 앉아 계셨다.

바닥에.

기둥에 기대어.

그냥.

서아는 청소 도구를 내려놨다.

왕자님 앞에 가서 앉았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청소——"

"잠깐만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입을 다물었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지쳐 있었다.

며칠 전에도 지쳐 보이셨는데.

지금은 더 했다.

눈빛이 흔들리지 않는 건 여전했다.

그런데 그 흔들리지 않는 눈빛이.

오히려 더 마음이 쓰였다.

얼마나 힘드셔야 흔들리시는 걸까.

"왕자님."

"응."

"많이 힘드세요?"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괜찮다."

서아는 그 대답을 들었다.

또 괜찮다고 하셨다.

"저한테는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안 괜찮아도 된다고 했잖아요."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침묵이 흘렀다.

봄바람이 창문을 흔들었다.

왕자님이 눈을 내리깔았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힘없이 나왔다.

서아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왕자님 목소리가 이렇게 힘없는 건 처음이었다.

서아 목소리가 떨렸다.

"왕자님, 괜찮으세요?"

이번엔 달랐다.

아까 물었던 것과.

이번엔 진짜로 묻는 것이었다.

괜찮으세요.

정말로.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 목소리가 떨렸다는 걸 알아채신 것 같았다.

눈빛이 달라졌다.

"목소리가 떨린다."

"……예."

"왜."

"걱정이 돼서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러더니 기둥에 기댄 등을 바로 하셨다.

"앉아라."

"앉아 있는데요."

"더 가까이."

서아는 잠깐 멈췄다.

더 가까이.

서아는 조금 더 앞으로 왔다.

왕자님 가까이.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많이 걱정됐느냐."

"예."

"며칠 동안."

"예."

왕자님이 눈을 내리깔았다.

"미안하다."

서아는 그 말이 뜻밖이었다.

"왜 미안하세요."

"걱정을 끼쳐서."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걱정이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왕자님이 잠깐 서아를 봤다.

"그렇구나."

"왕자님이 미안하실 게 없어요."

왕자님이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창밖을 보셨다.

살구꽃이 보였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뭔가 말씀하시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런데 말씀을 안 하셨다.

서아는 기다렸다.

한참.

왕자님이 입을 여셨다.

"서아야."

"예."

"이방원이."

그 이름이 나왔다.

서아는 조용히 들었다.

"어릴 때는 그냥 동생이었다."

예전에도 하셨던 말이었다.

매화나무 아래에서.

"지금도 동생이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그런데."

서아는 기다렸다.

"그 아이가 한 일이."

왕자님이 잠깐 멈추셨다.

"옳은 건지 모르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이방원 왕자님이 한 일.

정도전을 죽인 것.

그게 옳은 건지 모르겠다고.

"동생이 한 일인데 옳은지 모르겠고."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그 일에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말이 멈췄다.

서아는 기다렸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맞는 건지."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그것도 모르겠다."

서아는 그 말들이 무거웠다.

동생이 한 일.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

옳은지 모르겠다.

맞는지 모르겠다.

왕자님이 며칠 동안 바닥에 앉아 기둥에 기대어 계셨던 이유였다.

서아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옳다고 할 수 없었다.

그르다고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왕자님."

"응."

"그 생각을 며칠 동안 하고 계셨어요?"

"그렇다."

"혼자서요?"

"그렇다."

서아는 그게 더 마음이 쓰였다.

옳은지 그른지를.

며칠 동안.

혼자.

"저한테 말씀하셔도 됐는데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네가 알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말씀하시면 제가 들을 수 있잖아요. 답을 드릴 수는 없어도."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오래.

"들어줄 수 있느냐."

"예."

"답 없이."

"예."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창밖을 봤다.

"이방원은 원하는 것이 있다."

서아는 들었다.

"그 아이는 어릴 때부터 그랬다. 원하는 것을 알고, 그걸 향해 간다. 내가 없는 것이다. 그게."

왕자님이 말을 멈추셨다.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부럽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부러운 건 왜예요?"

"원하는 게 있다는 게."

"두려운 건요?"

왕자님이 잠깐 침묵하셨다.

"그 원하는 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서아는 그 말의 무게를 느꼈다.

이방원 왕자님이 원하는 것이 어디로 향하는지.

그게 어디인지.

서아도 알 것 같았다.

"왕자님."

"응."

"왕자님은 원하는 게 없으세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있다."

"뭔데요?"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창밖을 봤다.

살구꽃이 바람에 흔들렸다.

"조용히 있는 것."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조용히 있는 것.

"그게 전부예요?"

"지금은."

지금은.

그 두 글자가 무거웠다.

나중에는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지금 이 순간만 바라보고 계신다는 말인지.

"왕자님."

"응."

"조용히 있고 싶으시면."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제가 옆에 있어도 돼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말 안 해도 되고요. 그냥 같이 있어도 되는 거니까."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 눈빛이.

오래 머물렀다.

"……그렇구나."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창밖을 봤다.

서아도 창밖을 봤다.

살구꽃이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말이 없었다.

그냥 같이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서아야."

"예."

"별자리 가르쳐 주겠다고 했는데."

서아는 그 말이 반가웠다.

"예."

"며칠이 지났구나."

"괜찮아요."

왕자님이 창밖을 봤다.

낮 하늘이었다.

"실수(室宿)다."

서아는 들었다.

"실수요?"

"하늘의 집이라고 불린다."

"하늘의 집이요?"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다. 집의 두 기둥처럼."

서아는 하늘을 봤다.

낮 하늘이었다.

보이지 않았다.

"오늘 밤에 찾을게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어느 쪽 하늘에 있어요?"

"북쪽에서 조금 서쪽."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거죠?"

"그렇다."

서아는 그 별을 생각했다.

하늘의 집.

두 기둥처럼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별.

"왕자님."

"응."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으면 그 사이에 집이 있는 거잖아요."

"그렇다."

"집이 있으면 사람도 있겠네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창밖을 봤다.

"하늘의 집에 사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요."

왕자님이 잠깐 생각하셨다.

"……따뜻한 사람이겠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따뜻한 사람.

"왕자님 같은 사람이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창밖을 보면서 말했다.

"왕자님이 따뜻하신 것 알아요."

"그런가."

"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때 편 들어주시고, 바닥 젖으면 같이 닦아주시고, 봄 바람 차다고 귀 빨개지시고."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게 따뜻한 것이냐."

"예."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왕자님이 창밖을 보고 계셨다.

귀가 조금 빨개진 것 같았다.

봄바람 때문이 아닐 것이다.

서아는 그걸 알았다.

"왕자님."

"응."

"며칠 동안 혼자 있으셨잖아요."

"그렇다."

"더 힘드셨을 것 같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혼자 있으면 생각이 더 많아지니까요."

왕자님이 말씀이 없으셨다.

서아는 계속했다.

"앞으로는 혼자 있지 않으셔도 돼요. 제가 청소하러 오잖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청소만 하러 오는 게 아닌 것 같다."

서아는 그 말에 뜨거워졌다.

뺨이.

"청소도 하고요."

"그리고?"

"그리고……같이 있기도 하고요."

왕자님이 소리 없이 웃으셨다.

눈가에 주름이 잡혔다.

서아는 그 웃음을 봤다.

며칠 만에 보는 웃음이었다.

소리는 없었지만.

분명히 웃으셨다.

서아는 그 웃음이 뜨거웠다.

가슴이.

얼마나 더 있었을까.

창밖이 조금 어두워지기 시작할 때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청소해야 하지 않느냐."

서아는 그제야 청소 도구를 들었다.

"예. 하겠습니다."

청소를 시작했다.

왕자님이 기둥에서 등을 떼고 창가 자리로 가셨다.

평소 자리로.

서아는 청소를 하면서 그 모습을 봤다.

왕자님이 창밖을 보셨다.

살구꽃이 보였다.

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몇 장 떨어졌다.

청소를 마쳤다.

서아가 나오면서 말했다.

"다 했습니다."

"수고했다."

"예. 내일 또 올게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 짧음 안에 뭔가 있었다.

서아는 그걸 느꼈다.

문을 닫았다.

복도에 나왔다.

숨을 내쉬었다.

왕자님이 웃으셨다.

며칠 만에.

서아한테.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가 충분했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하늘을 봤다.

해가 지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이었다.

서아는 북쪽에서 조금 서쪽 하늘을 봤다.

아직 낮이었다.

별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어딘가에 실수가 있을 것이다.

두 기둥처럼 마주 보는 두 별이.

하늘의 집.

따뜻한 사람이 사는 집.

서아는 그 방향을 봤다.

왕자님이 며칠 동안 혼자 앉아 계셨다.

바닥에.

기둥에 기대어.

생각하면서.

그게 마음에 걸렸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

서아가 청소하러 오니까.

같이 있어도 된다고 했으니까.

서아는 걸음을 옮겼다.

처소가 보였다.

채린이가 처소 앞에 서 있었다.

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서아 얼굴을 보더니 말했다.

"어땠어."

"왕자님이 웃으셨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다."

두 사람이 처소 안으로 들어갔다.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고 나서.

서아는 창문을 조금 열었다.

북쪽에서 조금 서쪽 하늘을 봤다.

별이 있었다.

두 개가.

마주 보고 있었다.

기둥처럼.

"실수."

혼자 조용히 말했다.

하늘의 집.

두 기둥 사이에 집이 있다.

따뜻한 사람이 사는.

서아는 그 별을 오래 봤다.

왕자님이 웃으셨다.

며칠 만에.

그 웃음이 아직 눈앞에 있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웃음.

소리는 없지만 온몸으로 웃는.

서아는 창문을 닫으려다 멈췄다.

실수를 한 번 더 봤다.

두 별이 마주 보고 있었다.

기둥처럼.

그 사이에 집이 있다.

서아는 생각했다.

두 기둥이 마주 보고 있어서 집이 되는 거겠지.

하나만 있으면 집이 안 되는 거겠지.

서아는 그 별을 보면서.

뭔가 알 것 같았다.

그게 뭔지 말로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냥 알고 있기로 했다.

창문을 닫았다.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눈을 감았다.

왕자님 웃음이 아직 눈앞에 있었다.

그게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서아는 그 온기를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봄밤이었다.

20회 예고

"방과 왕자님이 왕이 된다고요?!"

청소를 하러 갔더니 왕자님 처소에 사람들이 많았다. 무슨 일인지 몰랐다. 박 상궁이 나를 불렀다. 표정이 달랐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이방과 왕자님이 세자가 되신다고. 왕이 되신다고. 나는 그 말을 듣고 왜 기쁘지 않은 걸까.

작가 한마디

두 기둥이 마주 보고 있어서 집이 되는 거겠지, 혼자만 있으면 집이 안 되는 거겠지... 서아가 말로 안 했지만 우리는 다 알죠? 하늘의 집, 실수. 왕자님과 서아 두 사람을 닮은 별자리예요. 20회에서 역사의 큰 변화가 시작됩니다. 함께 봐요.

20회 — 방과 왕자님이 왕이 된다고요?!

소문은 아침부터 돌았다.

서아는 교육이 시작되기 전에 복도에서 들었다.

상궁 둘이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지나치려다 귀에 걸렸다.

"——세자 책봉이——"

"——이방과 왕자님이——"

서아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 말이 머릿속에 남았다.

세자 책봉.

이방과 왕자님이.

교육이 시작됐다.

박 상궁이 평소와 달리 교육을 짧게 마치셨다.

"오늘은 여기까지다."

수습생들이 눈을 깜빡였다.

교육이 반도 안 됐는데.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오늘 궁 안에 중요한 일이 있다. 청소는 하되, 내전 주요 구역은 가지 마라."

"상궁님."

정이가 손을 들었다.

"무슨 일이요?"

박 상궁이 정이를 봤다.

"알 것이다. 조금 있으면."

그리고 나가셨다.

수습생들이 웅성거렸다.

정이가 서아한테 붙었다.

"서아야, 들었어?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

채린이가 말했다.

"세자 책봉인 것 같아."

정이가 눈을 크게 떴다.

"세자요?"

"응."

"누가?"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도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말했다.

"이방과 왕자님인 것 같아."

정이가 입을 벌렸다.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가 되신다고?"

"아직 확실하지 않아."

"근데 왜 그렇게 생각해?"

채린이가 말했다.

"이방원 왕자님이 지난번에 움직이셨잖아. 그 이후로 조정이 많이 바뀌었어. 형님을 세자로 올리는 게 이방원 왕자님한테 유리할 수 있어."

정이가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 너 어떻게 그런 걸 알아."

"그냥 생각한 거야."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눈빛이 말했다.

어떻게 느껴져?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오전이 지나갔다.

청소를 하러 나갔다.

동쪽 내전으로 향하는 길에.

평소보다 사람이 많았다.

내관들이 빠르게 오갔다.

상궁들도 바빠 보였다.

서아는 청소 도구를 들고 걸었다.

이방과 왕자님 처소가 있는 쪽으로.

그런데 중간에 내관이 막았다.

"이쪽은 오늘 출입이 안 됩니다."

서아는 멈췄다.

"청소하러 왔는데요. 동쪽 내전 담당이라서."

"오늘은 안 됩니다."

내관이 단호했다.

서아는 물러났다.

다른 구역 청소를 했다.

그러면서 자꾸 동쪽 방향을 봤다.

왕자님 처소가 있는 방향.

오늘 무슨 일이 생기는 걸까.

점심을 먹고 나서였다.

박 상궁이 서아를 불렀다.

"윤서아."

"예."

"따라오너라."

서아는 채린이와 눈이 마주쳤다.

채린이 눈빛이 말했다.

조심해.

서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따라갔다.

박 상궁이 복도를 걸었다.

서아가 뒤를 따랐다.

한참 걸어서 작은 마당이 있는 곳에 멈추셨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이었다.

박 상궁이 돌아서셨다.

서아를 봤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뭔가 말씀하시려는 것 같은데.

말씀을 고르시는 것 같았다.

서아는 기다렸다.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오늘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로 책봉되신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세자.

이방과 왕자님이.

"예."

서아가 대답했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알고 있었느냐."

"소문으로 들었습니다."

박 상궁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세자가 되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겠느냐."

서아는 그 질문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자가 되신다는 것.

그게 어떤 의미인지.

"……왕이 되실 거라는 뜻이겠죠."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그렇다."

침묵이 흘렀다.

봄바람이 불었다.

마당의 살구꽃이 흔들렸다.

"그리고."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세자가 되시면, 왕자님과 수습 궁녀가 마주칠 일이 더 적어진다."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마주칠 일이 더 적어진다.

"세자궁으로 처소를 옮기실 것이다. 담당 구역도 바뀌게 된다."

서아는 그 말의 의미를 알았다.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가 되시면.

서아의 청소 구역이 거기가 아니게 된다.

마주칠 일이 없어진다.

"예."

서아가 말했다.

박 상궁이 서아를 봤다.

"알겠느냐."

"예."

"담당 구역 변경은 다음 주부터다."

"예."

박 상궁이 서아를 한 번 더 봤다.

눈빛이.

뭔가 더 말씀하시려는 것 같았다.

그런데 말씀을 안 하셨다.

"돌아가라."

"예."

서아는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이 길었다.

발이 무거웠다.

세자가 되신다.

왕이 되실 거라는 뜻.

이방과 왕자님이.

그게 기쁜 일이어야 했다.

왕자님이 높은 자리에 가시는 거니까.

그런데.

서아는 발걸음을 멈췄다.

왜 기쁘지 않은 걸까.

이유를 알았다.

멀어지신다.

담당 구역이 바뀐다는 말은.

더 이상 왕자님 처소 앞을 청소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청소할 때 마주치지 않는다는 뜻이고.

낮에 별자리를 배울 수 없다는 뜻이고.

안 괜찮아도 된다고 말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서아는 손을 꼭 쥐었다.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왕자님이 자기와 같은 자리에 계실 수 없다는 걸.

그런데 막상 오니까.

생각보다 빨리 오니까.

채린이가 처소에 있었다.

서아가 들어오는 걸 보더니 말했다.

"박 상궁님이 뭐라고 하셨어."

서아는 앉았다.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가 되신다고."

"그렇구나."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서아가 말했다.

"담당 구역이 바뀐다고. 다음 주부터."

채린이가 잠깐 말이 없었다.

"……그렇구나."

서아는 무릎을 끌어안았다.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어때."

"모르겠어."

"슬퍼?"

서아는 잠깐 생각했다.

슬프다.

맞는 말인데.

"슬프다고 하기엔 너무 당연한 일이라서."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당연한 일이어도 슬플 수 있어."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당연한 일이어도 슬플 수 있다.

"채린아."

"응."

"나 지금 기쁘지 않아."

"알아."

"기뻐야 하는 건데."

"그렇지."

"왕자님이 높은 자리에 가시는 거잖아. 좋은 일이잖아."

"그렇지."

"근데."

서아가 말을 멈췄다.

채린이가 기다렸다.

"근데 멀어지는 것 같아서."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맞아."

"뭐가."

"멀어지는 거 맞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채린이가 틀리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해."

채린이가 잠깐 생각했다.

"지금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없어."

"응."

"근데 서아야."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아직 다음 주까지는 있잖아."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아직 다음 주까지는.

"지금 당장 멀어지는 게 아니잖아."

"그렇지."

"그러면."

채린이가 말했다.

"남은 시간이 있잖아."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그 시간 동안 잘 있으면 되잖아."

그 말이 단순한데.

뭔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오후가 됐다.

박 상궁이 수습생들을 모았다.

"오늘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로 책봉되셨다."

수습생들이 웅성거렸다.

"앞으로 세자궁 구역이 생긴다. 담당 배치가 바뀔 수 있다."

정이가 서아를 봤다.

서아는 앞을 봤다.

박 상궁이 말씀하셨다.

"오늘 하루는 청소를 쉰다. 내일부터 평소대로 한다."

"예."

박 상궁이 나가셨다.

정이가 서아한테 붙었다.

"서아야, 들었어?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가 되셨대."

"응."

"대단하다. 세자님이 되셨네."

서아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네."

정이가 서아를 봤다.

"왜 표정이 그래."

"어떤 표정이야."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안 좋은 것 같기도 한."

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채린이가 말했다.

"정이야, 우리 차나 마시러 가자."

"어, 응."

채린이가 정이를 데리고 나갔다.

서아한테 눈짓을 했다.

혼자 있어.

서아는 혼자 처소에 남았다.

창밖을 봤다.

봄 하늘이었다.

맑았다.

세자가 되셨다.

이방과 왕자님이.

서아는 창밖을 봤다.

살구꽃이 보였다.

꽃이 많이 졌다.

처음 봤을 때보다.

많이 졌다.

살구꽃은 금방 진다고 하셨다.

왕자님이.

그래도 지금은 피어 있다고 했다.

서아가.

지금은 피어 있다.

그런데.

다음 주부터는.

서아는 창문을 닫았다.

그날 저녁이었다.

청소를 쉬는 날이었지만 서아는 동쪽 내전 쪽으로 걸었다.

볼 일이 없었다.

그냥 발이 갔다.

담벼락 길을 걸었다.

살구나무 마당 앞에 멈췄다.

꽃이 많이 졌다.

처음 봤을 때의 반도 안 남은 것 같았다.

서아는 나무를 봤다.

꽃이 진 자리에 작은 잎들이 나오고 있었다.

연한 초록색 잎들이.

꽃 대신 잎이 나고 있었다.

"살구꽃이 많이 졌구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돌아봤다.

이방과 왕자님이었다.

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세자 저하."

왕자님이 잠깐 멈추셨다.

"……그렇구나."

그 두 글자가 묘했다.

세자 저하라는 호칭을 들으신 게.

낯선 것 같으셨다.

서아는 고개를 든 채 있었다.

왕자님이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살구나무 앞에 서셨다.

서아 옆에.

꽃을 봤다.

"많이 졌다."

"예."

"처음 봤을 때보다."

"예."

왕자님이 나무를 봤다.

"잎이 나고 있구나."

"예. 꽃 대신에요."

왕자님이 나무를 보셨다.

한동안.

"서아야."

"예."

"박 상궁한테 들었느냐."

서아는 잠깐 멈췄다.

"예."

"담당 구역이 바뀐다고."

"예."

왕자님이 나무를 봤다.

서아도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한 장 떨어졌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미안하다."

서아는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왜 미안하세요."

"구역이 바뀌게 돼서."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왕자님이 미안하다고 하셨다.

서아한테.

서아는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이 미안하실 게 없어요."

"그런가."

"예. 당연한 일이잖아요. 세자 저하가 되셨으니까."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래도."

"그래도가 뭐예요."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미안하실 게 없어요. 진짜로."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한동안.

그 눈빛이 뭔가를 담고 있었다.

말하지 않는 것들이.

서아는 그 눈빛을 받으면서 말했다.

"왕자님."

"응."

"축하드려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세자가 되신 거 축하드려요."

왕자님이 한동안 서아를 봤다.

그러더니 살구나무를 봤다.

"고맙다."

그 두 글자가.

이번엔 다른 무게로 들렸다.

"왕자님."

"응."

"다음 주까지는 아직 청소하러 올 수 있잖아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렇다."

"그러면 그때 별자리 다 가르쳐 주세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아직 다 못 배웠잖아요."

왕자님이 잠깐 말씀이 없으셨다.

그러더니 말씀하셨다.

"다 못 가르쳐 줄 수도 있다."

"그러면 그다음에."

"그다음이 있겠느냐."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그다음이 있겠느냐.

담당 구역이 바뀌면.

마주칠 일이 없어지면.

그다음이 없을 수도 있다고.

서아는 그 말이 무거웠다.

그런데.

"있어요."

서아가 말했다.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그다음이 있어요."

왕자님이 서아를 봤다.

한동안.

서아는 왕자님을 봤다.

눈이 마주쳤다.

왕자님이 말씀하셨다.

"……그렇구나."

부정하지 않으셨다.

그다음이 있다고.

그렇구나, 하셨다.

살구꽃이 한 장 더 떨어졌다.

발 앞에 내려앉았다.

서아는 그 꽃잎을 봤다.

집어 들었다.

손바닥에 올려놨다.

분홍빛이었다.

아직 색이 남아 있었다.

왕자님이 그 꽃잎을 봤다.

"가지고 있어라."

"예?"

"다 지기 전에."

서아는 꽃잎을 봤다.

옷자락 안에 넣었다.

"예."

왕자님이 나무를 봤다.

잎들이 나오고 있는 나무를.

"꽃이 지면 잎이 나는구나."

"예."

"그것도 나름이겠지."

서아는 그 말을 들었다.

꽃이 지면 잎이 나는 것도 나름이라고.

"예. 나름이에요."

두 사람이 나무를 봤다.

말이 없었다.

봄바람이 불었다.

꽃잎이 몇 장 더 떨어졌다.

그게 슬프지 않았다.

이상하게.

꽃이 지면 잎이 나는 것처럼.

다음이 있는 것처럼.

그 믿음이.

지금 이 자리를 버티게 해주는 것 같았다.

처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아는 옷자락 안의 꽃잎을 느꼈다.

아직 따뜻했다.

방금 손바닥에 있던 온기가.

채린이가 처소에 있었다.

서아를 보더니 말했다.

"어땠어."

"왕자님 뵀어."

채린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하셨어."

"살구꽃 많이 졌다고."

채린이가 잠깐 서아를 봤다.

"그게 다야?"

"그다음이 있다고 했어."

"네가?"

"응."

채린이가 서아를 봤다.

오래.

그러더니 말했다.

"있으면 좋겠다."

서아는 채린이를 봤다.

채린이가 앞을 봤다.

"진짜로."

그 두 글자가 조용하고 무거웠다.

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밤이 됐다.

채린이와 정이가 잠들고 나서.

서아는 옷자락에서 꽃잎을 꺼냈다.

손바닥에 올려놨다.

분홍빛.

아직 색이 남아 있었다.

서아는 그 꽃잎을 봤다.

세자가 되셨다.

다음 주면 구역이 바뀐다.

마주칠 일이 줄어든다.

그런데.

그다음이 있다고 했다.

왕자님이 부정하지 않으셨다.

꽃이 지면 잎이 나는 것처럼.

다음이 있는 것처럼.

서아는 꽃잎을 책 사이에 넣었다.

마르더라도.

색이 바래더라도.

거기 있을 것이다.

서아는 눈을 감았다.

창밖에서 봄바람이 불었다.

살구꽃 향기가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서아는 그 향기를 맡으면서.

눈을 감았다.

다음이 있다.

그 말을 안고.

잠 속으로 들어갔다.

21회 예고

"왕이 된 사람 옆에 내가 있어도 되나요"

이방과 왕자님이 세자가 되셨다. 담당 구역이 바뀌었다. 더 이상 그 복도를 청소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마주쳤다. 왕자님이 나를 보셨다. 그 눈빛이 예전이랑 같았다. 왕이 될 분 옆에 내가 있어도 되는 걸까.

작가 한마디

꽃이 지면 잎이 나는 것도 나름이겠지, 그 말이 너무 왕자님다웠어요.

그다음이 있다는 서아 말에 부정하지 않으신 왕자님. 21회에서 담당 구역이 바뀐 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우연히 마주치는 장면이 나와요.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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