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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가져간 무인 (武人)

3부 — 흔들리는 고려, 흔들리는 마음 (21화~30화 전체)

🏯 21화 — 개경으로 돌아온 장군과 달라진 조정

공민왕 말년, 개경.

황산대첩의 승전보가 울려 퍼진 지 두 달이 지났다.

이성계는 개경으로 돌아왔다. 말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달랐다. 성문 앞에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관리들이 줄을 섰고, 백성들이 뒤에서 손을 흔들었다. 아이들이 뛰어나와 장군의 말 앞에 꽃을 뿌렸다.

성계는 그 모든 것을 어색하게 받아냈다.

칭송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 도성이 불편했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인데, 개경은 뭔가 이상했다. 표면은 화려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데, 그 안쪽이 텅 빈 느낌.

성계는 말을 천천히 몰면서 개경 거리를 봤다.

시장 골목에는 굶주린 백성들이 있었다. 누더기를 걸친 아이가 땅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그 옆으로 화려한 가마가 지나갔다. 권문세족의 가마였다. 가마 앞뒤로 하인들이 줄줄이 따랐다.

저 아이와 저 가마가 같은 나라 안에 있다.

성계는 그 광경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조정에 들어갔다. 신하들이 늘어선 가운데 왕이 앉아 있었다. 공민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지금의 왕은 우왕이었다. 어린 왕이었다. 눈빛이 흔들렸고, 말할 때 손이 떨렸다.

실권은 왕에게 없었다.

이인임. 그 이름이 조정 곳곳에 박혀 있었다. 권문세족의 거두. 왕 뒤에서 왕보다 더 많은 것을 결정하는 사람.

성계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영흥에서부터. 한아가 말한 적 있었다. 아버지가 그와 가까운 사이라고.

조회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성계의 옆에 사람이 붙었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 옷이 좋았다.

"이 장군, 오랜만이오. 황산 승전 정말 대단했소."

이인임이었다.

성계는 멈추지 않고 걸으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장군 같은 분이 조정에 있어야 하는데. 언제까지 전장에만 계실 겁니까. 슬슬 자리를 잡으셔야지."

"자리는 필요할 때 생기는 겁니다."

"제가 도와드릴 수도 있소."

성계가 걸음을 멈췄다. 이인임을 봤다.

"감사합니다만, 도움은 됐습니다."

이인임의 웃음이 얇아졌다. 잠깐. 그리고 다시 두꺼워졌다.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 오시오."

성계는 대답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막사로 돌아온 성계는 창밖을 한참 봤다.

개경은 썩어가고 있었다. 조금씩. 안에서부터.

그리고 그 썩음이 한아의 아버지와도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가슴 한 켠을 무겁게 눌렀다.

🌿 22화 — 정몽주와의 만남 — 성계가 처음으로 존경한 사람

그즈음, 성계는 한 사람을 만났다.

우연이었다. 조정 뜰을 가로질러 가다가 혼자 서서 매화를 보는 사람을 발견했다. 관복을 입었지만 그 자세가 관료 같지 않았다. 야심이 없는 눈이었다. 그렇다고 무기력한 것도 아니었다. 맑고 단단한 눈.

"장군이 이성계 장군이시오?"

먼저 말을 건 쪽은 그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요."

"정몽주라 하오."

성계는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고려의 대학자. 성리학의 대가. 청렴하기로 유명한 사람. 조정에서 권문세족의 횡포를 정면으로 비판하다가 귀양까지 다녀온 사람.

"아, 포은 선생이시군요."

"황산 이야기는 들었소. 대단하셨소."

"별말씀을요."

정몽주가 다시 매화를 봤다. 성계도 그 옆에 섰다.

"장군은 이 나라를 어찌 보시오?"

직접적인 질문이었다. 성계는 망설이지 않았다.

"썩었습니다."

정몽주가 성계를 봤다.

"그래서요?"

"고쳐야죠."

"어떻게요?"

성계가 잠깐 생각했다.

"아직 방법은 모릅니다. 다만 이대로는 안 된다는 건 압니다."

정몽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같은 생각이오. 이 나라를 고쳐야 한다는 것. 하지만 나는 방법에 대해서 장군과 생각이 다를 수 있소."

"어떻게 다릅니까."

"나는 고려 안에서 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오. 뼈대는 살려야 한다고."

"뼈대가 이미 썩었다면요?"

정몽주의 눈이 흔들렸다가 다시 잔잔해졌다.

"썩었어도 우리 것이오. 남의 뼈대를 가져오는 것보다, 우리 것을 고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오."

둘은 한참 동안 매화를 봤다.

성계는 그 대화를 오래 생각했다.

정몽주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그런데 맞다고도 할 수 없었다. 뼈대가 이미 썩었을 때, 고친다는 것이 가능한가.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 있었다.

이 사람은 진심이다. 이름을 위해서, 권력을 위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나라를 진짜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성계는 살면서 처음으로 누군가를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날 저녁, 한아에게 편지를 썼다.

한아에게. 오늘 정몽주 선생을 만났어. 처음으로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어. 이상하지?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그런 마음이 드는 게. 그분은 고려를 고쳐야 한다고 했어. 나는 고칠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어. 대답은 못 들었어. 하지만 질문이 남았어. 좋은 질문이 남는 사람이 좋은 사람인 것 같아.

💢 23화 — "나라가 썩었어" — 부패한 권문세족의 민낯

개경에 머무는 동안, 성계는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봤다.

권문세족의 집은 궁궐보다 컸다. 담장이 높았고, 그 안에 연못이 있었다. 하인이 수십 명이었다. 잔치가 끊이지 않았다. 밤마다 악기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담장 밖에는 굶는 사람들이 있었다.

땅을 빼앗긴 농민들이었다. 권문세족이 땅을 강제로 사들였다. 헐값에. 아니, 어떤 경우엔 그냥 빼앗았다. 억울해서 관청에 가면 관청이 이미 권문세족 편이었다. 호소할 곳이 없었다.

성계는 그 실상을 직접 봤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관리들이 노인을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다. 노인이 땅문서를 흔들며 소리쳤다.

"이 땅은 내 땅이오! 우리 아버지 때부터 일군 땅이란 말이오!"

관리가 차갑게 말했다.

"이미 이 대감댁 땅으로 넘어간 거요. 문서 봐요, 문서."

"그 문서가 가짜란 말이오! 내가 판 적이 없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눈을 피했다. 성계는 멈췄다.

"무슨 일입니까."

성계의 목소리에 관리들이 굳었다. 장군의 복색이었다.

"아, 이 장군. 별것 아닙니다. 세금 문제로—"

"세금 문제가 아니오!"

노인이 소리쳤다.

"내 땅을 빼앗겼소! 이 장군, 살려주시오!"

성계는 관리들을 봤다. 관리들이 시선을 피했다.

"문서 가져오시오. 내가 보겠습니다."

"장군이 이런 일에 끼어드시면—"

"문서 가져오시오."

차갑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관리들이 어쩔 수 없이 문서를 꺼냈다.

성계가 봤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날짜가 이상했다. 노인이 팔았다는 날짜에 노인의 서명이 있었는데, 노인이 그 날짜에 다른 고을에 있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나.

"이 문서, 관청에 재심 신청 하시오."

성계가 노인에게 말했다.

"재심 신청해도 소용없소. 관청도 그분들 편이오."

노인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성계는 말이 없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관청도 조정도 이미 권문세족 편이었다. 칼로 외적을 물리쳤는데, 정작 나라 안에서 백성이 무너지고 있었다.

그날 밤 성계는 막사 안에서 오래 앉아 있었다.

막동이가 들어왔다.

"장군, 왜 그러십니까."

"나라가 썩었어."

단순한 한마디였다.

막동이가 조용히 앉았다.

"그러게요."

"전쟁터는 적이 누군지 보여. 근데 여기는 적이 안 보여. 아군 안에 숨어 있어."

"그게 더 무섭죠."

"응."

성계가 눈을 감았다.

정몽주 선생은 고쳐야 한다고 했다. 나는 고칠 수 있는지 모른다고 했다. 근데 이걸 보고도 아무것도 안 하면, 그건 포기하는 거잖아.

💔 24화 — 한아의 아버지가 권문세족이었다?!

개경에 머문 지 한 달이 지날 무렵.

한아가 개경으로 올라왔다.

아버지 한 첨사의 일 때문이었다. 조정에서 한 첨사를 개경 관직에 임명한 것이었다. 영흥 무관에서 개경 관리로. 승진이었다.

한아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이상하게 가슴이 무거웠다.

개경에 도착한 날, 성계를 만났다.

둘이 오랜만에 마주 앉았다. 개경 외곽의 조용한 찻집이었다.

성계는 한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알았다.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눈빛이 흔들리고 있었다. 한아는 원래 눈빛이 흔들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 있어?"

"……아버지 일 때문에 왔어."

"알아. 개경 관직 임명됐다고."

"응."

한아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성계야. 우리 아버지가 임명된 자리가 어디 자리인지 알아?"

"어디?"

"이인임 대감 밑이야."

성계가 굳었다.

한아가 계속 말했다.

"처음엔 몰랐어. 영흥에 있을 때는. 그냥 개경에 자리가 생겼다고만 들었어. 근데 여기 와서 보니까 아버지 임명해준 사람이 이인임 대감이더라. 아버지가 그쪽과 교류가 있었던 거야. 예전부터."

성계는 한참 말이 없었다.

한아가 성계를 봤다.

"알고 있었어?"

"……어느 정도는."

"어느 정도?"

"이인임이 영향력 있는 무관들한테 손을 뻗는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한 첨사 어른도 그 중 한 분이라는 소문은."

한아가 눈을 감았다.

"나한테 말 안 했네."

"말하기 어려웠어."

"왜."

"……네가 힘들어할 것 같아서."

한아가 눈을 떴다. 성계를 똑바로 봤다.

"이인임이 어떤 사람인지 너도 알잖아."

"알아."

"그 밑에서 일하는 거잖아. 아버지가."

"……응."

한아가 찻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성계야."

그 말이 너무 솔직하게 나와서, 성계는 오히려 당황했다. 한아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모르겠다고 하는 것을 처음 봤다.

"한아야."

"응."

"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해?"

한아가 망설였다.

"……나쁜 사람은 아니야. 근데 나쁜 편에 서 있어."

"나쁜 편에 선 게 나쁜 사람을 만드는 건 아니야."

"그게 무슨 차이야."

"나쁜 편에 선 걸 알면서도 계속 서 있으면 그때 나쁜 사람이 되는 거야. 아직은 아니야."

한아는 그 말을 오래 들여다봤다.

"……넌 아버지 욕 안 하네."

"욕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냥 다른 길이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한아의 눈이 흔들렸다가 멈췄다.

"고마워."

"뭐가."

"그렇게 말해줘서."

둘은 한참 동안 말없이 차를 마셨다.

창밖으로 개경의 봄이 지나가고 있었다.

🌊 25화 — 엇갈린 신분, 흔들리는 감정

개경에서의 시간이 쌓이면서, 둘 사이의 감정도 함께 쌓였다.

매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성계는 조정 일과 훈련이 있었고, 한아는 아버지를 따라 이런저런 자리에 다녀야 했다. 하지만 시간이 나면 자연스럽게 같은 곳에 있었다.

개경 외곽의 언덕. 영흥의 언덕과 비슷한 곳을 한아가 찾아냈다. 나무가 많고 사람이 없었다. 둘만의 장소처럼 됐다.

그날도 그 언덕에 있었다.

한아가 새 병서를 읽고 있었고, 성계는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야, 자?"

"안 자."

"눈 감았잖아."

"생각 중이야."

"뭔 생각."

성계가 눈을 뜨고 하늘을 봤다.

"정도전이라는 사람 알아?"

한아가 책에서 눈을 들었다.

"들어본 것 같은데. 신진사대부 쪽?"

"응. 새 나라 이야기를 해."

"새 나라?"

"고려를 뒤엎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고."

한아가 책을 덮었다.

"그 사람이 너한테 그 이야기를 한 거야?"

"얼마 전에 만났어. 직접."

한아가 성계를 봤다.

"어떻게 생각해? 네가."

성계는 한참 하늘을 봤다.

"무서운 이야기야. 근데 틀린 이야기는 아니야."

"정몽주 선생은 고려 안에서 고쳐야 한다고 했잖아."

"응."

"둘 다 나라를 걱정하는 건데, 방향이 정반대네."

"그게 문제야."

성계가 일어나 앉았다.

"나는 아직 어느 쪽인지 모르겠어. 근데 한 가지는 알아.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성계야."

"응."

"우리 아버지가 어제 이인임 대감 잔치에 갔어."

성계가 한아를 봤다.

한아의 표정이 복잡했다.

"말리지 않았어?"

"말릴 수 없잖아. 아버지니까. 근데…… 나는 그 잔치에 가고 싶지 않았어. 가면 그쪽 편이 되는 것 같아서."

성계가 잠시 생각했다.

"한아야."

"응."

"너는 네 편이야. 알지?"

한아가 성계를 봤다.

"무슨 말이야."

"아버지 편도 아니고 이인임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니야. 한아 너는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의 편이야. 그걸 잊지 마."

한아의 눈이 흔들렸다.

오래 성계를 바라봤다.

그 눈빛이 너무 진지해서, 성계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도 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야, 이성계."

"응."

"너, 나한테 왜 그렇게 잘해줘."

성계가 잠깐 멈췄다.

"……그냥."

"그냥이 어딨어."

"그냥이야."

한아가 피식 웃었다.

"거짓말쟁이."

성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시 누우면서 하늘을 봤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냥이 아니라는 걸, 둘 다 알고 있었다.

🐍 26화 — 이인임의 음모와 성계의 선택

어느 날 밤, 성계에게 밀서가 들어왔다.

발신인이 없었다. 내용은 짧았다.

장군께서 이인임 대감의 뜻을 거스르고 계신다는 것을 아십니까. 장군의 군권을 박탈하려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조심하십시오.

성계는 그 편지를 읽고 나서 불에 태웠다.

막동이가 눈치를 챘다.

"장군, 무슨 일입니까."

"이인임이 움직이는 것 같아."

막동이가 굳었다.

"군권을 건드리면 큰일인데요."

"알아."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성계가 일어섰다.

"할 것 해야지."

다음 날, 성계는 정몽주를 찾아갔다.

정몽주는 서재에 있었다. 책 더미 속에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장군, 어인 일이오."

"이인임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몽주가 붓을 내려놨다.

"알고 있소."

"아셨습니까."

"조정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드물 거요. 이인임은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사람을 오래 두지 않소."

성계가 앉았다.

"선생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몽주가 잠깐 생각했다.

"나는 할 일을 할 것이오. 옳은 것을 말하고, 그것 때문에 쫓겨나면 또 돌아오고."

"쫓겨나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두렵소. 하지만 두려워서 옳은 말을 안 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거요. 나는 그게 더 두렵소."

성계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두려워서 옳은 말을 안 하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거요.

"장군은요?"

정몽주가 물었다.

"저는……."

성계가 손을 봤다. 활을 수없이 쏜 손. 칼도 잡아본 손.

"저는 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을 할 겁니다."

정몽주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으로 충분하오."

돌아오는 길에 성계는 한아를 만났다.

한아가 시장 골목을 혼자 걷고 있었다. 무언가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아버지 심부름."

성계가 한아 옆에 나란히 걸었다.

"이인임이 나를 보자고 했어."

한아가 멈췄다.

"갔어?"

"안 갔어."

"왜."

"가면 그쪽 편이 되는 것 같아서."

한아가 그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내가 한 말이잖아. 그거."

성계가 슬쩍 봤다.

"네가 한 말이 맞는 말이니까."

한아가 잠깐 성계를 바라봤다. 그리고 다시 걸으면서 말했다.

"야, 이성계. 너 나한테 배우는 거 알아?"

"활 자세 말고는 없어."

"활 자세 말고도 있거든."

"뭐가."

"방금처럼."

성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한아가 그 옆얼굴을 보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 입꼬리가 심장을 흔들어서.

⚡ 27화 — "너를 지키려면 내가 강해져야 해"

봄이 지나고 여름이 왔다.

이인임의 압박이 노골적으로 변해갔다. 성계의 병력 일부가 다른 장수 밑으로 재배치됐다. 이유 없이. 조정 회의에서 성계의 의견이 자꾸 묵살됐다. 눈에 띄지 않게, 하지만 분명하게.

그리고 한아에게도 압박이 왔다.

한 첨사가 딸을 불렀다.

"한아야. 이인임 대감 댁에서 제안이 왔다."

한아가 아버지를 봤다.

"무슨 제안이요."

"대감 조카와 혼사 이야기가 나왔다."

한아의 손이 멈췄다.

"……제 혼사를요?"

"좋은 자리다. 이인임 대감 조카면—"

"싫어요."

한 첨사가 굳었다.

"한아야."

"싫다고요, 아버지."

"왜 싫어. 집안도 좋고, 나이도 적당하고—"

"집안이 좋아도 그 집안이 하는 일이 옳지 않으면 좋은 집안이 아니에요."

한 첨사가 오래 딸을 봤다.

"너는 이성계 장군 생각이 있는 게냐."

한아가 굳었다.

"그건 다른 문제예요."

"다른 문제가 아니야. 이성계는 이인임 대감과 사이가 좋지 않아. 그 장군 편에 서면 우리 집안이 위험해질 수 있다."

"옳은 편이 위험한 편이면, 저는 위험한 편에 서겠어요."

한 첨사가 한숨을 쉬었다.

"……너는 왜 그렇게 고집이 세냐."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한 첨사가 피식 웃었다. 화가 났지만 웃음이 나왔다.

"이야기는 끝나지 않은 거다."

"저도 알아요."

한아는 방에 돌아와서 한참을 생각했다. 그리고 성계를 찾아갔다.

성계는 훈련장에 있었다. 혼자서 말을 달리며 활을 쏘고 있었다.

한아가 그것을 보면서 말했다.

"이인임 대감이 혼사 제안을 했어."

성계가 말을 세웠다.

"누구랑."

"대감 조카."

성계의 눈빛이 달라졌다.

"거절했어."

"알아."

"어떻게 알아."

"네가 거절할 사람이니까."

한아가 훈련장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근데 압박이 계속될 것 같아. 아버지한테도 나한테도."

성계가 말에서 내려 한아 앞에 섰다.

"한아야."

"응."

"내가 더 강해질게."

한아가 성계를 봤다.

"그게 무슨 말이야."

"이인임이 나를 건드리지 못할 만큼. 네 아버지가 그쪽에 기댈 필요 없을 만큼. 내가 더 강해지면 돼."

한아의 눈이 흔들렸다.

"……너 지금 나 지키겠다는 말이야?"

성계가 시선을 피했다. 귀가 빨개졌다.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냥 강해지면 다 해결된다는 말이야."

한아가 성계를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야, 이성계."

"응."

"그냥 지키겠다고 해. 그게 더 멋있어."

성계가 더 깊이 시선을 피했다. 귀가 더 빨개졌다.

한아가 그 모습을 보고 소리 없이 웃으며 돌아섰다.

심장이 세게 뛰었다.

아마 성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 28화 — 정도전의 등장 —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선비

여름이 끝날 무렵, 정도전이 다시 성계를 찾아왔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눈빛이 더 타오르고 있었다. 귀양을 다녀온 흔적이 몸에 새겨져 있었다. 살이 빠지고 얼굴이 거칠어졌지만, 오히려 그게 그 사람을 더 단단해 보이게 했다.

"장군, 오래 생각하셨소?"

단도직입적이었다.

성계가 정도전을 봤다.

"무엇을요."

"새 나라 말이오."

"……그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도 됩니까."

정도전이 주변을 한번 보고 다시 성계를 봤다.

"안전한 곳은 없소. 그러니 어디서든 해야지."

성계는 정도전과 마주 앉았다.

정도전이 품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냈다. 펼쳤다. 글이 가득했다.

"새 나라의 법도를 생각해봤소. 토지는 국가가 관리하고 균등하게 나눈다. 관직은 능력으로 뽑는다. 왕이라도 법 위에 서지 못한다."

성계가 그 글을 읽었다. 천천히.

"이걸 혼자 쓴 거요?"

"생각은 오래 했소. 쓰는 건 귀양 가서 했소."

"귀양 가서요."

"달리 할 것이 없었소. 생각하고 쓰는 것 말고는."

성계가 두루마리를 내려놨다.

"이것을 이루려면."

"장군이 필요하오."

"군사적 힘이 필요하다는 말이오."

"그렇소.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오. 장군의 이름이 필요하오. 백성이 믿는 이름. 이성계라는 이름이 있으면 새 나라를 시작할 수 있소."

성계는 오랫동안 말이 없었다.

이것은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고려를 뒤엎는다는 것. 반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정몽주도, 정도전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나라가 틀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방법이 다를 뿐.

"아직은 모르겠소."

성계가 말했다.

"아직은요?"

"아직은."

정도전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았다.

"기다리겠소. 장군이 결정하는 날까지."

그날 밤, 성계는 한아에게 편지를 썼다.

한아에게. 정도전 선생이 다시 왔어. 새 나라 이야기를 했어. 나는 아직 모르겠다고 했어. 근데 그 글을 읽으면서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어. 두려워서 뛰는 건지, 기대돼서 뛰는 건지 모르겠어. 너는 알 것 같아서. 어떤 것 같아?

😭 29화 — 한아의 갈등 — 아버지의 편 VS 성계의 편

한아는 성계의 편지를 받고 오래 앉아 있었다.

어떤 것 같아?

그 질문이 무거웠다.

한아는 생각했다. 정도전의 이야기. 새 나라. 고려를 뒤엎는다는 것.

그것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한아는 쉽게 판단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무거운 것이 있었다.

아버지가 이인임 편에 서 있다는 사실.

만약 성계가 정도전의 손을 잡는다면. 이인임에 맞서는 쪽에 선다면. 아버지와 성계는 반대편에 서게 된다.

그건 한아에게 어느 한쪽을 선택하라는 말이었다.

한아는 아버지의 서재에 들어갔다.

한 첨사가 문서를 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아버지."

"응."

"이인임 대감이 하는 일이 옳다고 생각하세요?"

한 첨사가 붓을 내려놨다.

"갑자기 왜."

"대답해주세요."

"……옳고 그름이 전부가 아니야, 한아야."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세상은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만 나뉘지 않아. 살아남는 것과 살아남지 못하는 것으로도 나뉘어. 지금 조정에서 이인임 대감과 척지면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도 옳지 않은 것과 손을 잡으면—"

"한아야."

한 첨사가 딸을 봤다.

"아버지가 이러는 게 다 너 때문인 거 알지? 너 혼자 남겨두고 싶지 않아서."

한아가 굳었다.

"……저 때문에요?"

"어머니도 없고. 아버지가 없어지면 너 혼자잖아. 든든한 데 기대놓고 싶어서."

한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버지가 나쁜 사람이 아니다. 나를 걱정하는 거다. 근데 그 방법이 틀렸다.

"아버지."

한아가 눈물이 흐르기 전에 눈을 깜빡였다.

"저를 걱정하는 마음은 알아요. 근데 저는 옳지 않은 곳에 기대고 싶지 않아요. 차라리 아무 데도 안 기대는 게 낫지."

한 첨사가 오래 딸을 봤다.

"……독한 놈."

"아버지한테 배웠어요."

한 첨사가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다시 문서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해봐라. 세상이 책에서처럼 단순하지 않다."

한아는 서재에서 나왔다.

복도에 서서 눈을 감았다.

아버지는 나를 위한다고 한다. 나는 아버지가 틀렸다고 생각한다. 성계는 새 나라를 생각한다. 그 새 나라에서 아버지는 어느 자리에 있을까.

한아는 답장을 썼다.

성계에게. 네 심장이 두려워서 뛰는지 기대돼서 뛰는지 나는 알 것 같아. 둘 다야. 무서운 게 맞는 길이면 그 두근거림이 두 가지가 동시에 온다는 거, 우리 알잖아. 근데 성계야, 한 가지만 물어볼게. 그 길을 가면 후회 안 해? 그것만 생각해봐. 후회 안 하면 가. 나는 응원할게.

편지를 봉하면서 한아는 눈물 한 방울이 편지 위에 떨어지는 것을 봤다.

닦았다. 그리고 봉했다.

나는 응원할게. 그 말이 맞다. 나는 성계 편이야. 아버지 편이기도 하고 싶지만, 그게 안 된다면, 나는 성계 편이야.

💬 30화 — 결국 터진 눈물, 그리고 고백

가을이 깊어지던 어느 저녁.

성계가 한아를 찾아왔다.

평소와 달리 표정이 무거웠다.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뭔가 결정을 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디 가자."

한아가 따라나섰다. 개경 외곽의 언덕이었다. 언제부터인가 둘만의 장소가 된 곳.

가을 바람이 불었다. 풀이 눕고 나뭇잎이 하나씩 떨어졌다.

둘은 나란히 앉았다.

성계가 먼저 말했다.

"한아야."

"응."

"나 결정했어."

한아가 성계를 봤다.

"정도전 선생 손 잡을 거야. 새 나라 쪽으로 갈 거야."

한아는 오래 성계를 바라봤다.

"……언제 결정했어?"

"네 편지 받고 나서. 후회 안 하냐고 물었잖아. 생각해봤어. 안 해."

"확실해?"

"응."

한아가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바람이 지나갔다.

"……그럼 그게 맞는 거야."

"한아야."

"응."

"너한테 말해야 할 것 같았어. 제일 먼저."

한아의 손이 멈췄다.

제일 먼저.

"왜 나한테 제일 먼저야."

성계가 한아를 봤다.

"몰라?"

"……몰라서 물어보는 거야."

성계가 숨을 한번 쉬었다.

"한아야."

"응."

"나 너 좋아해."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람만 지나갔다.

한아가 성계를 봤다. 성계도 한아를 봤다. 둘 다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언제부터."

"영흥에서 활 자세 지적당했을 때부터."

"그때부터?!"

"응."

"그게 몇 년 전인데."

"알아."

"왜 이제 말해."

"말할 타이밍을 몰랐어."

"그게 무슨—"

한아의 목소리가 흔들렸다.

눈물이 났다.

조용히. 소리 없이. 그냥 흘렀다.

성계가 당황했다.

"왜 울어."

"몰라."

"왜 모르는 건데."

"기뻐서인지, 무서워서인지, 늦었다는 건지 모르겠어."

성계가 한아를 봤다. 눈물이 흐르는 얼굴. 서늘한 눈빛이 흔들리는 얼굴.

"늦지 않았어."

"어떻게 알아."

"지금 말했잖아."

한아가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성계를 봤다.

"야, 이성계."

"응."

"나도 좋아해."

"알아."

"언제 알았어?"

"꽃잎 보낼 때부터."

"그때부터?!"

"응."

"그럼 더 늦은 거잖아, 네가!"

성계가 피식 웃었다.

한아가 눈물 자국이 남은 얼굴로 성계를 봤다. 그리고 따라 웃었다.

개경의 가을 하늘 아래, 둘이 나란히 앉아 웃었다.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떨어졌다.

세상이 얼마나 복잡하고 무거운지. 앞으로 얼마나 험한 길이 남아 있는지.

그것을 알면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웃을 수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작가 노트: 드디어 고백이 나왔어요! 활 자세 지적당한 날부터 좋아했다는 성계, 꽃잎 편지부터 알고 있었다는 한아. 둘 다 진작에 알면서 이렇게 돌아왔네요. 세상이 흔들릴수록 마음은 더 선명해지는 법이죠. 4부에서는 드디어 위화도 회군이 시작됩니다. 함께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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