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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고양이 사이, 털 뭉치들


[제2부] 일상의 희노애락: 웃다가 울다가 털을 뿜다가
제11회: 털갈이 시즌의 비극 – 된장찌개에서도 털이 나오는 마법
1부가 가족이 되어가는 '정신적' 적응기였다면, 2부의 시작인 11회는 '물리적' 적응의 끝판왕이자 반려인들의 영원한 숙제인 '털갈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꽃이 피는 봄이나 찬바람 부는 가을이 오면, 우리 집에는 예고 없이 '세 번째 식구'가 등장합니다. 바로 거실 바닥을 굴러다니는 거대한 '털 뭉치(Tumbleweed)'들입니다.
1. 눈 내리는 거실: 계절의 전령사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는데 입술에 무언가 보드라운 것이 달라붙었습니다. 떼어보니 마루의 하얀 털 한 가닥이더군요.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 했지만, 거실로 나가는 순간 깨달았습니다. 드디어 그분이 오셨다는 것을요.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는 마치 민들레 홀씨처럼 털들이 유유히 유영하고 있었고, 검은색 소파는 어느새 '그레이' 톤으로 리모델링되어 있었습니다. 마루가 꼬리를 한 번 흔들 때마다 공중에는 보이지 않는 입자들이 폭죽처럼 터졌고, 미오가 기지개를 켜면 노란 털들이 조용히 낙하했습니다.
2. 된장찌개와 털의 상관관계
반려 생활 100일이 넘어가면 웬만한 위생 관념은 해탈의 경지에 이릅니다. 하지만 그날은 좀 충격적이었죠. 오랜만에 정성 들여 끓인 된장찌개를 한 숟가락 뜨려는데, 국물 위로 아주 익숙한 색깔의 실 하나가 떠 있었습니다.
"마루야... 너 된장찌개에 지분 넣었니?"
마루는 식탁 밑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주방 문을 닫고 조리했는데, 털들은 환풍기를 타고 넘었는지 아니면 내 옷에 붙어 잠입했는지 기어이 국물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이제 우리 집에서 '순수한 음식'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요리에는 약간의 단백질(털)이 첨가된 '마루·미오 정식'이 기본값이 되었죠.
3. 빗질 전쟁: 생산직 집사의 하루
나는 결국 '죽은 털 제거기'라 불리는 강력한 빗을 꺼내 들었습니다. 먼저 마루를 마당(혹은 베란다)으로 소환했습니다. 빗질을 슥슥 시작하자마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빗질 한 번에 강아지 한 마리가 새로 태어날 기세로 털이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건 거의 양털 깎기 수준인데?"
마루의 몸에서 나온 털을 모으니 커다란 쿠션 하나는 거뜬히 만들 수 있는 양이었습니다. 옆에서 구경하던 미오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고양이 털은 강아지 털보다 가벼워서 공중에 훨씬 잘 뜹니다. 미오를 빗길 때마다 녀석은 "내 소중한 옷을 왜 벗기냐"며 솜방망이를 휘둘렀지만, 빗겨져 나온 부드러운 속털들은 내 콧구멍 속으로 무임승차를 시도했습니다.
4. 돌돌이(테이프 클리너)는 나의 구원자
이제 내 외출 가방의 필수품은 지갑도, 핸드폰도 아닌 '돌돌이'입니다. 현관문을 나서기 전, 나는 마치 전장에 나가는 전사처럼 온몸에 돌돌이 질을 합니다. 하지만 신기한 건, 엘리베이터 거울을 보면 어느새 어깨 위에 미오의 노란 털이 '나 여기 있지롱' 하며 붙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회사 동료들은 이제 제 옷만 보고도 우리 집 애들의 컨디션을 맞춥니다.
"어, 오늘 마루가 좀 많이 비볐나 봐요?"
"미오 털이 오늘은 더 노랗게 보이네요?"
이쯤 되면 털은 단순한 이물질이 아니라, 내가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사랑의 낙인'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5. 털 속에서 찾은 행복
청소기를 하루에 세 번 돌리고, 공기청정기가 빨간불을 내뿜으며 비명을 질러도, 털이 뿜뿜하는 이 시기가 싫지만은 않습니다. 빗질을 마친 마루의 매끈해진 등을 쓰다듬을 때의 감촉, 그리고 털을 뿜어내고 한결 가벼워진 몸으로 우다다를 하는 미오의 활기찬 모습 때문이죠.
저녁이 되어 거실 한구석에 굴러다니는 털 뭉치를 보며 생각합니다. 이 털 한 가닥 한 가닥이 녀석들이 나에게 준 온기의 흔적이라고 말이죠. 비록 내 검은 정장은 포기해야 했지만, 내 삶은 녀석들의 털만큼이나 풍성해졌습니다.
"그래, 털 좀 날리면 어때. 너희만 건강하면 됐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오늘도 인터넷 쇼핑몰에서 '초강력 흡입 청소기'를 장바구니에 담으며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작가의 사후 기록]
털갈이 시즌에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재채기'입니다. 한 번 재채기를 시작하면 공중에 정체되어 있던 털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비상하며 지옥의 연쇄 반응을 일으키거든요. 아, 그리고 니트 재질의 옷은 이 시기에 절대 금지입니다. 털들이 니트 조직 사이사이로 이사를 가거든요.
제12회: 나 잡아봐라 – 거실 우다다 타임의 공포
털갈이의 폭풍이 지나가고 평화로운 저녁이 찾아오는가 싶었지만, 반려 생활의 밤은 낮보다 뜨겁습니다. 해가 지고 가로등이 켜질 무렵, 녀석들의 몸속에 잠들어 있던 야생의 피가 끓어오르는 시간. 이른바 '우다다 타임'이 시작됩니다.
1. 전조 증상: 엉덩이 실룩과 확대된 동공
우다다의 시작은 아주 미세한 변화에서 감지됩니다. 소파 위에 얌전히 식빵을 굽고 있던 미오의 동공이 갑자기 검은 블랙홀처럼 커지기 시작하죠. 꼬리는 채찍처럼 바닥을 '탁, 탁' 치며 리듬을 탑니다.
그 신호를 가장 먼저 읽는 건 역시 마루입니다. 낮잠을 자던 마루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앞발을 낮게 숙이는 '플레이 바우(Play Bow)' 자세를 취합니다. 녀석들 사이에는 나만 모르는 '출발 신호탄'이 터진 셈입니다.
2. 거실은 이미 서킷(Circuit)
"후다닥!"
시작은 미오였습니다. 녀석은 거실 바닥을 딛지도 않은 채 소파 등받이를 타고 점프해 커튼을 타고 천장 근처까지 솟구쳤습니다. 마루는 20kg의 덩치를 잊은 채 그 뒤를 쫓기 시작했죠. 문제는 우리 집 거실이 올림픽 경기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마루가 급커브를 돌 때마다 발바닥 패드와 마루바닥이 마찰하며 "끼이익!" 비명 소리를 냈습니다. 드리프트를 시도하던 마루의 엉덩이가 거실 테이블 모서리를 강타했고, 그 충격으로 내 소중한 머그컵 속 커피는 파도를 치며 바닥으로 다이빙했습니다. 하지만 녀석들에게 미안함 따위는 없었습니다. 오직 '잡느냐, 잡히느냐'의 생존 게임만이 존재할 뿐이었죠.
3. 수직과 수평의 대결
미오는 영리했습니다. 마루의 덩치와 힘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수직 공간'을 적극 활용했죠. 바닥에서 마루가 코앞까지 쫓아오면 미오는 번개처럼 식탁 위로, 다시 냉장고 위로, 마지막엔 캣타워 꼭대기로 피신했습니다.
마루는 밑에서 "멍! 멍!"(야! 비겁하게 위로 가기 있냐!) 소리를 지르며 제자리 점프를 반복했습니다. 그러면 미오는 높은 곳에서 아주 여유롭게 솜방망이를 내밀어 마루의 콧등을 톡 건드리고 다시 도망갔습니다. 마루는 그 도발에 넘어가 다시 미친 듯이 거실을 질주했죠. 이쯤 되면 이건 놀이가 아니라 고도의 심리전이자 유산소 운동이었습니다.
4. 집사는 장애물일 뿐
이 광기 어린 질주 속에서 나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그저 '움직이는 장애물 1'에 불과했습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려던 나는 내 배를 밟고 지나가는 미오의 날카로운 발톱과, 내 무릎을 들이받고 지나가는 마루의 묵직한 어깨를 견뎌야 했습니다.
"얘들아! 제발 좀 멈춰! 아랫집에서 올라오겠어!"
나의 절규는 녀석들의 질주 본능에 기름을 부을 뿐이었습니다. 마루는 내가 소리를 지르자 자기를 응원하는 줄 알았는지 꼬리를 더 힘차게 흔들며 거실 카펫을 뭉개버렸습니다.
5. 갑작스러운 종전 선언
약 15분간의 광란이 지나면, 거짓말처럼 정적이 찾아옵니다. 미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캣타워에서 내려와 우아하게 세수를 시작하고, 마루는 혓바닥을 길게 뺀 채 거실 바닥에 '철퍼덕'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쉽니다.
난장판이 된 거실. 삐뚤어진 카페트, 바닥에 흩뿌려진 커피 자국,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장난감들...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걸레를 들었습니다. 녀석들이 에너지를 발산하는 건 건강하다는 증거라지만, 내 멘탈은 매일 밤 이렇게 조각납니다.
하지만 잠시 후, 숨을 고른 마루가 내 다리에 머리를 기대고, 미오가 내 팔사이에 파고들어 자리를 잡을 때면 모든 화가 눈 녹듯 사라집니다.
"그래, 너희가 즐거웠으면 됐다. 근데 내일은 제발 밖에서 뛰자, 응?"
[작가의 사후 기록]
우다다 타임을 줄이기 위해 저녁 산책 강도를 높여봤지만, 마루는 밖에서 운동하고 들어와 '리프레시'된 기분으로 집에서 2차 우다다를 시작하더군요. 고양이 미오의 '밤의 본능'은 그 어떤 과학적 방법으로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저는 층간 소음을 위해 거실 전체에 두꺼운 매트를 깔기로 결심했습니다. 인테리어는 포기했습니다.
제13회: 간식 앞에서 평등 – “앉아, 기다려, 그리고 냥펀치”
거실을 초토화했던 ‘우다다’ 광풍이 지나가고 나면, 녀석들을 순식간에 고분고분한 양으로 만드는 유일한 마법이 있습니다. 바로 주방 서랍장 두 번째 칸, 그곳에 잠들어 있는 ‘간식 봉지’가 부스럭거리는 소리입니다. 이 소리 앞에서는 강아지의 충성심도, 고양이의 도도함도 모두 평등해집니다.
1. 소머즈급 청력: 봉지 소리의 마법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숨소리조차 죽이며 서랍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0.1초도 안 되어 거실 끝에서 코를 골며 자던 마루의 귀가 쫑긋 서더니, '타다닥' 발톱 소리와 함께 녀석이 내 무릎 앞에 대기했습니다. 캣타워 꼭대기에서 깊은 잠에 빠졌던 미오 역시 어느샌가 식탁 위로 순간이동해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죠.
"너희 자는 거 아니었어?"
녀석들의 눈빛은 마치 "우리는 24시간 간식 모니터링 중이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2. 마루의 정공법: "나는 배운 강아지입니다"
먼저 마루에게 간식을 주기로 했습니다. 마루는 그동안 갈고닦은 개인기를 뽐낼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마루, 앉아!"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마루는 이미 다음 단계를 예상합니다.
"손! 반대 손! 코! 엎드려!"
마루는 20kg의 몸을 바쁘게 움직이며 온갖 재롱을 떨었습니다. 간식을 향한 녀석의 눈동자는 마치 금방이라도 레이저를 쏠 것처럼 강렬했죠. 녀석은 입가에 침을 한 방울 흘리면서도 "기다려"라는 내 명령에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참아냈습니다. 그 인내심은 가히 고행 중인 수도승 급이었습니다.
3. 미오의 실전법: "기다리는 건 하수나 하는 짓"
반면 고양이 미오에게 "기다려"는 사전에도 없는 단어였습니다. 내가 마루에게 간식을 주는 꼴을 지켜보던 미오는 참을성이 바닥났는지, 식탁 위에서 내 팔을 향해 기습적인 솜방망이를 날렸습니다.
"냥!" (내놔라, 인간아.)
미오는 마루처럼 앉거나 손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가 들고 있는 간식 봉지를 향해 앞발을 뻗어 '낚시'를 시도할 뿐이었죠. 내가 미오에게도 "앉아 봐"라고 하자, 미오는 아주 차가운 눈빛으로 나를 한 번 보더니, 옆에 있던 마루의 뒤통수를 툭 쳤습니다. 마치 "야, 너만 먹냐? 집사한테 똑바로 말 안 해?"라고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죠.
4. 간식 앞에서 무너진 평화
드디어 간식을 배급하는 순간! 마루에게 먼저 북어 트릿을 하나 던져주었습니다. 마루가 공중에서 그것을 '넙죽' 받아먹는 찰나, 미오가 번개처럼 마루의 입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고양이용 츄르를 짜주려는데, 마루가 그 향기에 취해 미오의 전용 그릇으로 코를 들이밀었죠.
"안 돼! 마루, 그건 동생 거야!"
결국 나는 왼손으로는 마루의 가슴팍을 막고, 오른손으로는 미오에게 츄르를 조공하는 '양손 분리 배식' 기술을 선보여야 했습니다. 마루는 미오가 츄르를 '챱챱' 소리 내며 먹는 것을 보며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표정으로 신음 소리를 냈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간절한지, 결국 마루에게도 고구마 말랭이 하나를 더 얹어주고서야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5. 먹고 나면 다시 '남남'
간식 주머니가 비어버리자, 녀석들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습니다. 마루는 "더 없어요?"라며 내 빈 손을 몇 번 핥더니 쿨하게 자기 방석으로 돌아가 다시 잠을 청했고, 미오는 내가 부르기도 전에 캣타워로 올라가 뒷발로 귀를 긁으며 나를 투명인간 취급하기 시작했습니다.
"너희 정말... 자본주의(간식주의)적인 동물이구나?"
허탈한 웃음이 나왔지만, 간식을 먹을 때만큼은 세상 누구보다 친한 척하며 나란히 앉아 있던 녀석들의 뒤태가 떠올라 마음이 몽글몽글해졌습니다. 서로 다른 종이고, 성격도 극과 극이지만 '맛있는 것' 하나로 마음이 통하는 그 순간만큼은 우리가 완벽한 가족이라는 느낌이 들거든요.
비록 내 지갑은 녀석들의 고급 간식비로 가벼워지고 있지만, 오물오물 맛있게 씹는 그 입 모양을 보기 위해 나는 내일도 기꺼이 서랍장 문을 부스럭거리며 열 것입니다.
[작가의 사후 기록]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마루는 제가 부엌 근처만 가도 자다가 '앉아' 자세를 취하고 있더군요. 조건반사의 무서움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미오는 제가 간식을 안 주면 제 핸드폰 충전기 줄을 씹는 '인질극'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무서운 녀석들입니다.
제14회: 택배 박스의 미학 – 비싼 집보다 종이박스가 좋은 이유
집사 생활이 길어질수록 쇼핑 리스트는 점점 화려해집니다. 북유럽풍 디자인의 원목 캣타워, 메모리폼이 내장된 강아지용 마약 방석, 그리고 정수기까지. 큰맘 먹고 거금을 들여 집안을 ‘반려동물 호텔’처럼 꾸며주었지만, 정작 녀석들이 가장 열광한 것은 그 비싼 물건들을 담아온 ‘택배 박스’였습니다.
1. 10만 원짜리 방석 vs 0원짜리 골판지
커다란 택배 상자가 거실에 도착했습니다. 마루는 꼬리를 세차게 흔들며 “또 내 장난감이 왔나?” 하는 기대를 품었고, 미오는 벌써부터 박스 주변을 탐색하며 발톱으로 ‘드르륵’ 긁어댔습니다.
상자를 뜯어 야심 차게 준비한 벨벳 방석을 꺼내 거실 정중앙에 놓았습니다. 하지만 마루는 방석에 코를 한 번 대보더니 슥 지나쳐 버렸고, 미오는 방석보다는 비닐 포장지에 더 큰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는 약속이라도 한 듯, 텅 빈 종이 상자 속으로 미오가 먼저 ‘점프’해 들어갔습니다.
2. 미오의 요새: “나 여기 없다”
미오에게 박스는 완벽한 요새였습니다. 좁은 공간에 몸을 꽉 끼워 넣은 채 눈만 빼꼼히 내민 미오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평온해 보였습니다.
“미오야, 캣타워는 어쩌고 거기 들어가 있어?”
녀석은 대답 대신 박스 옆면을 ‘냥냥펀치’로 때리며 자기만의 인테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이빨로 박스 모서리를 뜯어 ‘창문’을 만들고, 바닥을 긁어 ‘카페트’를 까는 모습이라니. 10만 원짜리 방석은 거실의 짐이 되었고, 다 찌그러진 택배 상자가 거실의 주인공이 된 순간이었습니다.
3. 마루의 질투와 파괴 본능
문제는 마루였습니다. 덩치 큰 마루도 미오가 들어간 그 아늑한 공간이 탐났던 모양입니다. 마루는 미오가 잠시 물을 마시러 나간 사이, 조심스럽게 박스 안으로 머리를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20kg의 덩치가 들어가기에 택배 상자는 너무나 가냘팠습니다.
‘우드득-’
불길한 소리와 함께 박스 옆구리가 터져버렸습니다. 마루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터진 박스를 아예 ‘해체’하기로 마음먹은 듯했습니다. 녀석은 앞발로 박스를 짓누르고 이빨로 종이를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습니다. 미오에게는 ‘집’이었던 것이 마루에게는 거대한 ‘종이 껌’이 되어버린 것이죠.
4. 거실에 내린 종이 눈꽃
퇴근 후 돌아온 거실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습니다. 마루가 정성껏(?) 파쇄한 골판지 조각들이 거실 전체에 흩뿌려져 있었고, 미오는 자기 집이 없어진 것에 분노했는지 식탁 위에 올라가 마루를 노려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또 대청소 날이구나.”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빗자루를 들었습니다. 비싼 장난감은 구석에서 먼지만 쌓여가는데, 고작 종이 상자 하나에 온 집안이 들썩이는 녀석들을 보며 삶의 단순함을 배웁니다. 녀석들에게 중요한 건 브랜드나 가격이 아니라, ‘내가 지금 얼마나 즐거운가’ 하는 본질적인 만족감이었던 것이죠.
5. 행복의 기준은 우리가 정한다
결국 나는 며칠 뒤 또 다른 택배를 시켰습니다. 이번엔 내용물보다 ‘박스 크기’를 먼저 확인했죠. 이제 우리 집 거실 인테리어는 ‘골판지 빈민가’ 스타일로 변해가고 있지만, 그 속에 몸을 구겨 넣고 행복해하는 미오와 종이 조각을 물고 신나게 뛰어다니는 마루를 보면 인테리어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박스면 어떠냐. 너희가 이렇게 좋아하는데.”
오늘도 나는 거실 한복판에 놓인 찌그러진 상자를 차마 버리지 못한 채, 그 옆에 조심스럽게 발을 딛고 지나갑니다.
[작가의 사후 기록]
비싼 방석은 결국 제 발받침대가 되었습니다. 가끔 마루가 미안한지 그 위에 앞발 하나를 걸치고 자긴 하지만, 메인 침대는 여전히 제가 덮으려고 꺼내놓은 무릎 담요 위더군요. 역시 반려동물 용품의 최고의 미덕은 ‘집사가 탐낼 만큼 좋아야 하지만 정작 애들은 박스를 좋아한다’는 모순에 있는 것 같습니다.
제16회: 고양이의 선물 – 자고 일어나니 머리맡에 둔 '벌레' 보은
장마가 그치고 습기가 가시자, 집 안에는 활기가 도는 대신 불청객들이 찾아왔습니다. 바로 열린 창문 틈이나 하수구를 통해 잠입한 여름 벌레들이었죠. 그리고 이 불청객들은 고양이 미오에게는 아주 훌륭한 '사냥감'이자, 집사에게 줄 '깜짝 선물'의 재료가 되었습니다.
1. 밤의 사냥꾼, 미오의 눈빛
어느 날 밤, 거실 불을 끄고 누웠는데 복도 쪽에서 "탁, 타닥!" 하는 기묘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미오가 평소의 우다다와는 다른, 아주 절제되고 날카로운 움직임으로 무언가를 쫓고 있었죠.
어둠 속에서 미오의 눈은 형광등처럼 빛났고, 꼬리 끝은 살랑살랑 흔들리며 목표물을 조준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저 '혼자 신나게 노나 보다' 생각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다음 날 아침에 벌어질 비극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2. 아침의 비명: "이게 뭐야!"
아침 햇살에 눈을 떴을 때, 머리맡 베개 옆에 무언가 검고 길쭉한 물체가 놓여 있었습니다. 처음엔 내 머리끈인가 싶어 손을 뻗으려던 찰나, 본능적인 공포가 손끝을 멈추게 했습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다리가 여러 개 달린 거대한 그리마(돈벌레)였습니다. 그것도 아주 정성스럽게 사냥당해 기절(혹은 사망)한 상태로 말이죠.
"으아아악!"
나의 비명 소리에 거실에서 자던 마루가 놀라 달려왔고, 침대 발치에서 세수를 하던 미오는 아주 당당하게 나를 쳐다봤습니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어때? 밤새 내가 사냥한 거야. 너 먹으라고 가져왔어."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3. 보은(報恩)인가, 테러인가
고양이의 세계에서 사냥감을 집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최고의 애정 표현이라고들 합니다. 사냥 못 하는 불쌍한 '큰 고양이(인간)'를 위해 직접 단백질을 조공하는 지극한 효심인 것이죠.
하지만 인간인 나에게 그것은 애정이라기보다 심장 마비에 가까운 고문이었습니다. 휴지를 뭉쳐 벌레를 치우는 내 손은 덜덜 떨렸고, 미오는 자기가 준 선물을 왜 버리느냐는 듯 서운한 표정으로 내 뒤를 졸졸 따라다녔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마루는 그 벌레가 먹는 건 줄 알았는지 입을 벌리고 다가오다가, 나의 "안 돼!" 소리에 깨갱하며 꼬리를 내렸습니다. 우리 집은 아침부터 벌레 한 마리로 인해 대혼란의 장이 되었습니다.
4. 멈추지 않는 조공 릴레이
한 번 사냥의 맛을 본 미오는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은 베란다에서 잡은 파리, 그다음 날은 정체 모를 나방 날개... 매일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베개 주변을 수색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한 번은 미오가 아주 커다란 바퀴벌레를 입에 물고 당당하게 내 무릎 위로 올라온 적이 있었습니다. 녀석은 입에 문 것을 내 무릎에 '툭' 떨어뜨리더니, 칭찬을 기다리며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죠. 나는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녀석의 저 초롱초롱하고 순수한 눈망울을 보니 차마 화를 낼 수 없었습니다.
"고... 고마워, 미오야. 근데 다음부턴 그냥 네가 먹거나 밖으로 버려주면 안 될까?"
5. 마루의 질투: "나도 선물 줄래!"
미오가 연일 선물을 공세하며 나의 관심을 독차지하자, 질투심 많은 마루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마루는 사냥 실력은 없었지만, 대신 '수집'에 소질이 있었습니다.
내가 퇴근하고 돌아오면 마루는 꼬리를 흔들며 입에 무언가를 물고 나타났습니다. 주로 자기가 아끼던 낡은 양말, 혹은 쓰레기통에서 몰래 꺼낸 요플레 껍데기 같은 것들이었죠. 마루는 그것을 내 발등 위에 정성스럽게 올려두고는 "나도 선물 줬다!"라며 칭찬을 요구했습니다.
벌레보다는 양말이 백배 나았지만, 침이 한가득 묻은 축축한 양말을 선물로 받는 것도 집사로서는 꽤나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6. 그래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벌레 보은과 침 묻은 양말. 누군가에게는 기함할 일이지만,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이 작은 생명체들이 자기들이 가진 가장 소중한 것을 나에게 주고 싶어 한다는 사실이 뭉클하게 다가왔습니다.
미오에게는 목숨 걸고 잡은 사냥감이었을 것이고, 마루에게는 가장 아끼는 보물이었을 테니까요. 그 서툴고 이상한 사랑의 방식이 이제는 우리 집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래, 얘들아. 선물은 마음만 받을게. 제발 살아있는 건 가져오지 마!"
오늘도 나는 잠들기 전, 방문을 꼭 닫으며 미오에게 당부합니다. 하지만 미오의 눈은 이미 거실 구석에서 움직이는 작은 그림자를 쫓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엔 또 어떤 '서프라이즈'가 기다리고 있을까요?
[작가의 사후 기록]
고양이의 보은을 거절할 때는 절대 화를 내면 안 된다고 합니다. "고마워!"라고 말하고 몰래 치우는 것이 정석이죠. 덕분에 저는 세상에서 가장 연기력이 뛰어난 집사가 되었습니다. 바퀴벌레를 보고도 미소를 지으며 "어머, 대단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경지에 올랐거든요.
제17회: 목욕의 날 (물귀신 2탄) – 한층 영악해진 녀석들과의 지능전
첫 목욕 때의 처참한 패배 이후, 저도 나름의 전략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녀석들도 바보는 아니었죠. 이제 ‘목욕’이라는 단어는 우리 집에서 금기어가 되었고, 목욕을 시키려는 자와 피하려는 자 사이의 고도의 심리전이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1. 평화로운 주말의 함정
화창한 일요일 오후, 저는 아주 자연스럽게 수건을 꺼내고 욕실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마루는 거실 한복판에서 배를 보이고 누워 낮잠을 즐기고 있었고, 미오는 햇볕이 잘 드는 창틀 위에서 꼬리를 살랑이고 있었죠.
저는 마치 산책이라도 가는 것처럼 경쾌한 목소리로 마루를 불렀습니다.
"마루야~ 간식 먹을까?"
평소 같으면 빛의 속도로 달려올 녀석이, 그날따라 눈만 한 번 뜨더니 다시 감아버리는 게 아니겠습니까? 녀석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집사가 간식을 줄 때 내는 목소리에는 특유의 ‘설렘’이 섞여 있는데, 지금 제 목소리엔 ‘비장함’이 섞여 있다는 것을요.
2. 마루의 ‘나무 늘보’ 전략
결국 강제로 마루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20kg의 리트리버 믹스가 작정하고 몸에 힘을 빼자 녀석은 거대한 모래주머니처럼 변했습니다. 아무리 밀고 당겨도 바닥에 찰떡처럼 붙어 움직이지 않는 마루.
"마루야, 제발! 너 어제 진흙탕에 굴렀잖아!"
사정사정하며 녀석을 끌고 욕실 앞까지 왔지만, 마루는 문지방을 붙잡고(사실은 발톱을 박고) 버텼습니다. 녀석의 눈빛은 마치 "차라리 나를 죽여라"라고 말하는 순교자 같았죠. 겨우 욕실 안으로 밀어 넣었을 때, 저는 이미 땀으로 목욕을 마친 상태였습니다.
3. 미오의 고공 감시: "멍청한 멍멍이 같으니"
지난번 목욕 때 구경만 하던 미오도 이번엔 좀 달랐습니다. 혹시라도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 봐, 아예 욕실에서 가장 먼 장롱 꼭대기로 피신했죠.
미오는 장롱 위에서 아주 작은 소리로 "냐아오오오..." 하며 마루를 비웃는 듯한 소리를 냈습니다. 마루가 젖은 털을 흔들며 물보라를 일으킬 때마다 미오는 솜방망이로 공중을 휘저으며 ‘물방울 방어막’을 치는 흉내를 냈습니다. 고양이의 영악함은 정말이지 혀를 내두를 정도였습니다.
4. 물귀신의 진화: ‘탈출의 달인’
샴푸 거품을 내고 마사지를 시작하자, 마루는 갑자기 순순해졌습니다. '아, 이제 포기했나 보다' 하고 안심하며 샤워기를 든 순간, 마루의 기습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녀석은 젖은 몸으로 제 다리 사이를 뚫고 욕실 밖으로 돌진했습니다!
"안 돼! 마루야! 거품 묻었어!"
거실로 탈출한 마루는 '파다다다닥!' 몸을 흔들었고, 우리 집 거실은 순식간에 버블 파티장이 되었습니다. 소파 위로 튄 거품을 보며 제 멘탈은 가루가 되었죠. 젖은 마루를 다시 욕실로 유인하기 위해 저는 츄르 세 개를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5. 보송보송한 엔딩과 뜻밖의 동맹
우여곡절 끝에 드라이기 사투까지 마치자, 마루는 다시 향긋한 인절미로 돌아왔습니다. 기력이 다한 제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있자, 장롱 위에 있던 미오가 슬금슬금 내려왔습니다.
미오는 젖은 냄새가 가신 마루의 귀를 핥아주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엔 그렇게 싸우더니, 목욕이라는 거대한 고난을 이겨낸 동지애였을까요? 마루도 미오의 그루밍이 기분 좋은지 꼬리를 천천히 흔들었습니다.
"그래, 둘이 친해졌으면 됐다. 거실 청소는 내가 할게..."
거울을 보니 제 몰골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지만, 서로를 의지하며 낮잠에 든 털 뭉치들을 보니 허탈한 웃음이 나왔습니다. 목욕은 여전히 힘들지만, 씻기고 난 뒤의 그 보송보송한 온기는 세상 그 어떤 피로 회복제보다 강력했습니다.
[작가의 사후 기록]
목욕 후 가장 힘든 건 사실 제 허리 통증입니다. 20kg 강아지를 씻기는 건 스쿼트 500개를 하는 것과 맞먹는 에너지 소모죠. 다음번엔 꼭 강아지 전용 셀프 목욕장을 이용하리라 다짐하지만, 집에서 녀석들과 투닥거리는 이 시간이 사실은 조금 즐겁기도 하다는 걸 저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18회: 범인은 이 안에 있어 – 찢어진 휴지와 모른 척하는 눈빛
평화로운 퇴근길, 오늘은 녀석들이 무엇을 하며 나를 기다렸을까 설레는 마음으로 현관문을 열었습니다. 하지만 도어록 소리와 함께 들려와야 할 우렁찬 발소리 대신, 기분 나쁜 정적이 집안을 감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코끝을 스치는 묘한 종이의 향기. 직감했습니다. 무언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을요.
1. 거실에 내린 때늦은 눈보라
거실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내가 남극에 온 줄 알았습니다. 바닥에는 하얀 눈송이들이 가득했죠. 아니, 자세히 보니 그것은 눈이 아니라 3겹 화장지 두 롤이 갈기갈기 찢겨나간 처참한 잔해였습니다.
거실장부터 소파 밑, 심지어 식탁 다리 사이사이까지 화장지 조각들이 마치 현대 미술 작품처럼 흩뿌려져 있었습니다. 범인은 이 안에서 아주 열정적으로 ‘휴지 파티’를 즐긴 것이 분명했습니다.
2. 용의자 A: 고개를 돌리는 마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소파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마루였습니다. 평소 같으면 현관까지 마중 나와 꼬리를 흔들었을 녀석이, 웬일인지 벽을 보고 앉아 있었습니다.
"마루야, 이거 누가 그랬어?"
내 부름에 마루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렸습니다. 하지만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는 못하고, 시선을 45도 아래로 내린 채 눈동자만 굴리고 있었죠. 녀석의 입가에는 미처 털어내지 못한 하얀 휴지 조각 하나가 훈장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마루의 꼬리는 바닥을 아주 작고 조심스럽게 '톡... 톡...' 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명백한 '유죄'의 신호였습니다.
3. 용의자 B: 당당한 방관자 미오
반면, 고양이 미오는 캣타워 꼭대기에서 아주 우아한 자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녀석의 표정은 평소보다 더 도도했고, 심지어 귀찮다는 듯 하품까지 내뱉었죠.
"미오, 너도 같이 했지?"
미오는 대답 대신 앞발을 들어 얼굴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나는 수직 공간의 지배자다. 바닥에서 벌어지는 천박한 휴지 파티 따위엔 관심 없다"라고 말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보았습니다. 미오의 앞발 발톱 사이에 끼어 있는 가느다란 휴지 섬유를요. 마루가 바닥에서 휴지를 풀고 달렸다면, 미오는 위에서 낚시하듯 휴지를 낚아채 찢었을 공산이 컸습니다. 이른바 '합동 범죄'였던 것이죠.
4. 심문과 자백: 침묵의 카르텔
나는 두 녀석을 거실 한복판에 앉혔습니다.
"마루, 이거 네가 했지? 미오, 너는 왜 안 말렸어?"
마루는 점점 더 몸을 낮추더니 급기야 바닥에 납작 엎드려 앞발로 얼굴을 가리는 '자기방어' 기술을 시전했습니다. 반면 미오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소파 등받이 위로 폴짝 뛰어올라 꼬리로 내 뺨을 툭 치고 지나갔습니다. 심문은 실패였습니다. 녀석들은 굳건한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었죠.
5. 증거 인멸은 집사의 몫
결국 나는 한숨을 내쉬며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위이잉 소리가 나자 마루는 기회는 이때다 싶은지 내 발치에 와서 "내가 도와줄게요!"라는 표정으로 청소기 헤드를 쫓아다녔습니다. 미오는 청소기 소리가 시끄러운지 냉장고 위로 피신해 여전히 관전 모드를 유지했습니다.
휴지 조각을 치우느라 한 시간을 허비했지만, 청소를 다 끝내고 나니 녀석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내 옆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마루는 미안한지 내 손등에 턱을 얹었고, 미오는 내 종아리에 몸을 비볐습니다. 사고를 칠 때는 웬수 같다가도, 이렇게 애교를 부리면 "그래, 스트레스가 풀렸다면 됐다" 하고 항복하게 되는 것이 집사의 운명인가 봅니다.
"그래도 다음부턴 키친타월은 건드리지 마라. 그건 좀 비싸거든."
[작가의 사후 기록]
이날 이후로 저는 모든 화장지를 욕실 상부장 깊숙한 곳으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미오가 화장실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어 휴지 끝자락을 낚아채 거실까지 '카펫'을 깔아놓은 것을 보고 깨달았습니다. 녀석들에게 휴지란 멈출 수 없는 중독이라는 것을요.
제19회: 재택근무의 방해꾼 – 키보드 위의 고양이와 발등 위의 강아지
세상은 바야흐로 'N잡러'와 '재택근무'의 시대라지만, 반려인들에게 집은 더 이상 효율적인 업무 공간이 아닙니다. 모니터 앞에 앉는 순간, 우리 집의 두 털 뭉치들은 제가 '돈을 벌러 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기들과 24시간 놀아줘야 하는 풀타임 엔터테이너'로 전직한 줄 알기 때문입니다.
1. 고양이의 키보드 침공: "내 몸이 곧 메시지다"
중요한 화상 회의를 앞두고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습니다. 미오가 슬금슬금 책상 위로 올라오더니, 수만 개의 빈 공간을 놔두고 하필이면 '맥북 키보드' 정중앙에 식빵을 굽고 앉았습니다.
"미오야, 비켜봐. 지금 급해!"
미오를 들어 바닥에 내려놓으면, 녀석은 0.1초 만에 다시 올라와 이번에는 모니터 앞을 가로막고 섭니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화면의 절반을 가리는 통에 저는 엑셀 숫자 대신 미오의 복슬복슬한 꼬리털만 감상해야 했죠. 결국 녀석이 키보드를 밟고 지나가는 바람에 단체 채팅방에는 의미불명의 외계어가 전송되었습니다. 상사에게 "이건 저희 집 고양이의 의견입니다"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2. 강아지의 '발등 침대': "가지 마오, 집사여"
책상 위가 미오의 영토라면, 책상 밑은 마루의 점령지였습니다. 마루는 제가 의자에 앉자마자 제 발등 위에 자기의 묵직한 턱을 얹거나, 아예 제 발을 베개 삼아 누워버립니다.
20kg의 묵직한 온기가 발등에 전해지면 처음에는 뭉클하고 따뜻하지만, 30분이 지나면 발에 쥐가 나기 시작합니다. 살짝 발을 빼려 하면 마루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버리고 일을 하러 갈 셈인가요?"라는 슬픈 눈빛을 발사하죠. 결국 저는 기괴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업무를 이어가며 강제로 요가 수련을 하게 됩니다.
3. 화상 회의의 예기치 못한 게스트
가장 아찔한 순간은 역시 화상 회의 시간입니다. 이어폰을 끼고 진지하게 팀장님의 브리핑을 듣고 있는데, 갑자기 화면 뒤로 마루의 커다란 엉덩이가 지나가거나 미오가 카메라 렌즈 바로 앞에서 코를 킁킁거리는 장면이 송출됩니다.
"아, 저... 팀장님, 죄송합니다. 저희 집 고양이가 좀 관종이라서요."
하지만 의외의 반응이 돌아왔습니다. 딱딱했던 회의 분위기는 미오의 핑크빛 코가 화면을 가득 채우자마자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어머, 고양이 너무 귀여워요!", "마루도 한 번 보여주세요!" 업무 회의는 순식간에 '랜선 집사 정모'로 변질되었고, 녀석들은 본의 아니게 팀의 마스코트가 되어버렸습니다.
4. 장난감 배달 서비스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해 타자 소리가 빨라질 때쯤, 마루는 꼭 '삑삑이' 인형을 물고 옵니다. 내 무릎 위에 침이 한가득 묻은 인형을 툭 던져놓고는, 꼬리를 바닥에 치며 '탁! 탁! 탁!' 소리를 냅니다.
"마루야, 지금 바빠. 나중에 놀자."
거절하면 마루는 포기하지 않고 인형을 다시 물어 제 팔꿈치 밑으로 밀어 넣습니다. 마우스 클릭을 하려는데 삑삑 소리가 나면, 옆에서 구경하던 미오도 자극을 받았는지 책상 위에 있는 펜을 바닥으로 하나씩 떨어뜨리는 '중력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5. 방해꾼이 주는 뜻밖의 휴식
재택근무는 끝이 없습니다. 사무실처럼 퇴근 시간이 명확하지 않아 자칫하면 밤늦게까지 모니터를 보게 되죠. 그럴 때마다 녀석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저를 쉬게 해줍니다.
미오가 노트북 폐열을 즐기며 잠들고, 마루가 내 발치에서 규칙적인 코골이 소리를 낼 때, 저는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을 내려놓습니다. "아, 이제 그만하고 애들이랑 좀 놀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죠. 녀석들은 어쩌면 제가 워라밸(Work-life balance)을 잃지 않도록 파견된 신의 사절단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돈 벌어서 사료 사줘야지. 조금만 더 힘내볼게!"
오늘도 저는 키보드 위 미오의 발을 조심스럽게 피하고, 발밑 마루의 코골이를 배경음악 삼아 열띤 업무의 세계로 뛰어듭니다. 방해꾼들이 있어 조금 느리지만,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사무실입니다.
[작가의 사후 기록]
결국 저는 마루를 위한 전용 방석을 책상 바로 옆에, 미오를 위한 바구니를 책상 모퉁이에 설치했습니다. '근접 관찰 구역'을 지정해주니 확실히 방해는 줄었지만, 가끔 녀석들이 나란히 잠든 모습을 멍하니 구경하다가 업무 시간을 다 보내버리는 게 새로운 문제입니다. 최고의 방해꾼은 녀석들이 아니라 녀석들을 보며 정신 못 차리는 '제 자신'인 것 같습니다.
제20회: 나만의 힐링 시간 – 슬플 때 가장 먼저 다가오는 따뜻한 코끝
[제2부]의 마지막 이야기는 조금은 뭉클한 기억으로 마무리하려 합니다. 털갈이와 우다다, 그리고 휴지 파티로 이어지는 요란한 일상 속에서도, 제가 이 녀석들을 '상전'으로 모시며 살 수밖에 없는 진짜 이유에 대해서 말이죠. 바로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고 느껴지는 순간, 말없이 제 곁을 지켜준 녀석들의 위로에 관한 기록입니다.
1. 말하지 않아도 아는 마음
회사에서 크게 꾸지람을 듣거나, 인간관계에 치여 몸도 마음도 너덜너덜해진 채 귀가한 날이었습니다. 평소 같으면 현관문을 열자마자 "간식 내놔라!", "산책 가자!"며 난리 법석을 떨었을 녀석들이었죠. 그런데 그날은 집안 공기부터가 달랐습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마루가 평소처럼 요란하게 달려들지 않았습니다. 녀석은 아주 천천히, 조심스럽게 다가와 제 무릎 사이에 자기 머리를 슬쩍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제 체온을 느끼며 기다려 주었습니다.
2. 츤데레 미오의 위로법
고양이 미오는 또 다른 방식이었습니다. 녀석은 평소 제가 부르면 못 들은 척하던 '도도함의 결정체'였죠. 하지만 제가 소파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내쉬자, 미오는 캣타워에서 조용히 내려와 제 어깨 위로 올라왔습니다.
보통은 간식을 달라고 보챌 때나 하는 행동인데, 그날 미오는 제 어깨에 몸을 비비며 "고로롱, 고로롱" 기분 좋은 진동음을 들려주었습니다. 그 작은 몸에서 전해지는 규칙적인 진동은 마치 "별일 아니야, 인간아. 다 지나갈 거야"라고 속삭이는 자장가처럼 들렸습니다.
3. 눈물 닦아주는 젖은 코끝
참았던 눈물이 한 방울 툭 떨어지자, 마루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젖은 코끝을 제 뺨에 갖다 댔습니다. 강아지의 코는 항상 차갑고 촉촉하죠. 그 차가운 감촉이 뺨에 닿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뜨거워졌습니다.
마루는 커다란 눈망울로 저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왜 울어? 내가 있잖아."라고 말하는 듯한 그 맑은 눈을 보니, 나를 힘들게 했던 세상의 소음들이 아주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미오는 어느새 제 무릎 위로 내려와 솜방망이를 제 손등 위에 툭 얹었습니다. 평소엔 발톱을 세우던 녀석이, 그때만큼은 발톱을 쏙 숨긴 채 부드러운 젤리만 닿게 해주었죠.
4.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처방전
어떤 위로의 말보다 강력한 것은 누군가의 조용한 곁(Presence)이라는 것을 그날 깨달았습니다. 녀석들은 제가 사회적으로 어떤 위치에 있는지, 오늘 어떤 실수를 했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자기들과 함께 숨 쉬고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만을 온전히 사랑해주었죠.
한참을 그렇게 녀석들과 엉겨 붙어 있다 보니,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털 범벅이 된 소파도, 텅 빈 통장 잔고도, 내일의 출근도 잠시 잊은 채 저는 녀석들의 보드라운 털 속에 얼굴을 묻었습니다.
5. 비로소 완성된 ‘우리’
반려동물과 산다는 것은 단순히 동물을 키우는 행위가 아니라,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유할 수 있는 소중한 파트너를 얻는 일입니다. 2부를 지나오는 동안 녀석들은 저에게 많은 인내심을 요구했지만, 정작 제가 무너질 것 같을 때 저를 지탱해준 것은 녀석들의 작은 발바닥과 따뜻한 숨결이었습니다.
"고마워, 마루야. 고마워, 미오야."
내 말에 대답하듯 마루는 꼬리를 바닥에 '탁' 쳤고, 미오는 제 손가락을 살짝 깨물며 애교를 부렸습니다. 이제 우리는 서로를 길들이는 단계를 넘어,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진짜 가족이 되었습니다.
[작가의 사후 기록]
우울한 날 녀석들을 껴안고 있으면 신기하게도 심박수가 안정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는 과학적 근거보다, 제 눈물을 핥아주는 마루의 거친 혀와 미오의 부드러운 골골송이 훨씬 더 믿음직스럽습니다. 이 녀석들이 없는 삶을 이제는 상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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