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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건실에서 줍다 _02

8화

“들켜버린 두 개의 가면”
이도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내 손가락이 가리킨 신문 기사와, 내 입에서 나온 ‘도비Dobby’라는 닉네임. 그는 완벽하게 덫에 걸린 표정이었다.
“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신문은 보건 선생님 책상에 있었고, 도비Dobby는… 내 익명 상담 계정에 쪽지를 보냈어.”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사실은 나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불안했지만, 여기서 물러서면 안 될 것 같았다.
도윤은 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다행히 보건 선생님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는 커튼 안으로 나를 끌어당기더니, 침대에 앉혔다.
“너… 네가 그 계정 주인이야? 수아의 비밀 노트? 네가 왜 그런 걸 해?”
“내가 너한테 물어볼 질문이거든. 왜 나한테 숨긴 거야? 네가 ‘도비’인 거.”
도윤은 한숨을 쉬더니 머리를 쓸어 넘겼다. “내가… 너한테는 솔직해지고 싶었어. 현실의 이도윤이 아닌, 그냥 나 자신으로. 근데 네가 그걸 눈치채면, 네가 날 이상하게 볼까 봐. 내가 가진 약점들을 다 들킬까 봐 무서웠어.”
그의 말이 내 가슴을 쳤다. 그도 나처럼 두려움 속에서 가면을 쓰고 있었구나.
“괜찮아. 나도 마찬가지야.” 내가 말했다. “나는 학교에서 나를 ‘투명 인간’으로 만들고 살잖아. 하지만 익명 계정에서는 세상 모든 고민에 답장할 용기가 생겨. 온라인에서는 용감한 윤수아인 셈이지.”
도윤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웃었다. “진짜 대박이네. 이 학교에서 제일 조용한 애가, 사실은 제일 시끄러운 고민 상담소장이었어?”
“넌 이 학교에서 제일 시끄러운 애가, 사실은 세상에서 제일 조용하게 울고 싶어 하는 애였고.”
우리는 서로의 ‘두 개의 가면’을 확인한 셈이었다. 현실의 모습과, 숨기고 싶은 내면의 모습. 이제 보건실 커튼 안은 단순히 도피처가 아니라, 우리가 진짜 모습을 공유하는 ‘가면 해제 구역’이 된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어떻게 되는 건데?” 도윤이 물었다.
“어떻게 되긴. 비밀을 공유한 공범이 되는 거지.” 내가 말했다. “네가 나한테 ‘도비’인 것처럼, 나도 너한테는 ‘비밀 노트 주인’이야. 우리 서로의 비밀, 철저하게 지켜주자. 대신….”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앞으로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
도윤은 주먹을 불끈 쥐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윤수아. 절대.”
9화

“보건실의 일상, 낯선 설렘”
우리의 공범 관계는 더욱 견고해졌다. 이제 보건실에서는 숨 막히는 긴장감 대신, 왠지 모를 친밀감이 흘렀다.
0교시. 도윤은 캐비닛 뒤가 아니라 내 침대 옆 침대에 대놓고 누웠다.
“오늘 수학 쪽지 시험 망할 것 같아.” 도윤이 한숨을 쉬었다.
“넌 맨날 전교 10등 안에 들면서 무슨 소리야.” 내가 피식 웃었다.
“솔직히 공부는 내 관심사가 아니거든. 축구만 하고 싶어. 근데 내가 축구를 망치면, 적어도 공부는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 그게 나한테 족쇄 같아.”
도윤은 자신의 깊은 속마음을 스스럼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그의 족쇄가 된 ‘완벽해야 한다’는 압박감을 이해했다.
“네가 축구를 진짜 좋아한다는 건 알아.” 내가 말했다. “네가 1년 전 일 때문에 힘든 것도 알지만, 너는 축구 할 때가 제일 멋있어.”
내 말을 들은 도윤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그의 눈이 커져 있었다.
“너… 내 축구하는 거 봤어?”
“어. 체육 시간 같은 때, 운동장에서 얼핏 봤지. 넌 공만 잡으면 다른 사람이 되잖아. 눈빛이 달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그의 경기를 꽤 유심히 봤었다.
도윤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마치 칭찬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야, 너 처음으로 나한테 칭찬했다.”
“뭐가? 그냥 사실을 말한 건데.”
“평소에 남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더니. 너 은근히 관찰력이 좋다? 역시 비밀 노트 소장님다워.” 도윤은 기분 좋은 듯 다시 누웠다.
그날은 유난히 보건실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도윤은 내가 도시락을 먹는 동안, 자신이 좋아하는 축구 선수들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내가 세상에 노출되는 걸 극도로 경계했는데도, 이도윤의 목소리만큼은 나에게 안전하게 들렸다.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도윤이 갑자기 휴대폰을 꺼내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이거 봐. 나만 아는, 진짜 멋있는 축구선수 영상인데. 너한테만 보여주는 거다.”
휴대폰 화면 속에서, 그는 내 옆에 딱 붙어 있었다. 그의 어깨가 내 어깨에 살짝 닿았다. ‘툭’ 하고 작은 전류가 통하는 듯했다. 나는 숨을 멈췄다. 너무 가까웠다. 이도윤의 냄새, 그의 숨소리, 그의 따뜻한 체온.
이건 그냥 ‘공범’ 사이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10화

“첫 번째 위협, 그리고 경고”
보건실에서의 친밀감이 깊어질수록, 밖에서의 위협은 커졌다.
쉬는 시간. 교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반 인기녀 세미가 내 책상에 섰다. 세미는 늘 도윤 주변을 맴도는 애들 중 하나였다.
“야, 윤수아.” 세미의 목소리는 친절했지만, 눈빛은 날카로웠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너, 요즘 이도윤이랑 친해? 보건실에서 같이 있는 거 봤다는 소문이 돌던데.”
내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소문?’ 어떻게 벌써? 투명 인간 놀이의 최대 위기였다.
“무슨 소리야. 나 걔랑 말도 안 섞어.” 나는 최대한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세미는 비웃듯 웃었다. “말도 안 섞는다고? 근데 왜 매일 0교시에 보건실에 같이 가는데? 이도윤은 발목 아프다고 맨날 조퇴하는 척하는데, 너는 왜 거기서 뭐 해?”
세미는 내 비밀스러운 행동까지 꿰뚫고 있었다. 아마도 아침에 내가 보건실로 향하는 걸 누군가 본 모양이었다. 이도윤은 눈에 띄는 핵인싸고, 나는 눈에 띄지 않으려는 투명 인간이다. 그들의 시선은 이도윤에게만 꽂혀 있기에, 나를 따라다니는 시선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별일 아니야. 난 그냥 아침잠이 많아서 잠깐 자는 거야.”
“뻥치지 마. 이도윤은 우리 모두의 것이야. 너처럼 음침한 애가 걔한테 접근하는 거, 딱 봐도 기분 나빠.” 세미는 경고하듯 말했다. “다음에 또 보건실에서 같이 있는 거 걸리면, 선생님한테 네가 이도윤 발목 잡고 꾀어낸다고 말할 거야. 알았지?”
세미가 자리를 뜨자마자, 나는 온몸이 떨렸다. 나에게는 이도윤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이었지만, 이도윤에게는 내가 숨겨야 할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점심시간 10분 전. 나는 보건실로 달려갔다. 이도윤은 이미 침대에 누워 만화책을 보고 있었다.
"도윤아, 큰일 났어. 세미가... 우리가 보건실에 같이 있는 거 알고 있어."
도윤이 만화책을 내려놓고 나를 쳐다봤다.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졌다.
“그래서 네가 뭘 봤다고 했는데.”
“같이 있는 거 봤대. 그리고… 내가 널 꾀어낸다고 소문낼 거래.”
도윤은 갑자기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내 앞에 섰다. 그리고 내가 놀랄 정도로 단호하게 말했다.
“윤수아. 이제부터 보건실에서 보지 마.”
“뭐?”
“세미가 눈치챈 이상, 이 비밀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아. 너한테 피해 가는 것도 싫고, 내 이미지도 망가질 수 없어. 네 투명 인간 놀이가 깨지는 것도 싫잖아. 오늘부로 우리 둘만의 보건실 계약은 파기야.”
그는 철저하게 **‘핵인싸 이도윤’**의 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자신의 안전과 평판을 지키기 위해, 나를 희생시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배신감과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도비'**로서 나에게 의지하던 모습은 거짓이었을까?
“알았어. 계약 파기해.” 나는 이를 악물고 말했다. “하지만 이도윤. 넌 여전히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한 애일 뿐이야.”
나는 보건실을 뛰쳐나왔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나오려던 순간, 가장 믿었던 사람에게 버려진 기분이었다.
11화

“깨져버린 안전지대”
보건실을 뛰쳐나온 후, 나는 이도윤을 완벽하게 피했다. 아니, 그는 이미 나를 피하고 있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그는 나를 투명 인간보다 더 철저하게 없는 존재로 대했다. 그의 시선은 허공을 향했다.
'가면 뒤에 숨은 비겁한 애.' 내가 내뱉은 그 말이, 어쩌면 이도윤의 가장 아픈 곳을 찔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 마음도 그만큼 아팠다. 그는 자신의 안전을 위해 나를 버렸다.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보건실, 그리고 익명 계정 밖에서 용기를 낼 수 있게 해준 유일한 관계까지, 모두 깨져버렸다.
이제 나는 쉬는 시간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보건실은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다시 복도 계단참에 쪼그려 앉아 도시락을 먹으려 했지만, 왠지 모르게 허전하고 외로웠다.
그날 저녁, 익명 SNS ‘수아의 비밀 노트’에 쪽지가 하나 도착했다. 평소처럼 수십 통의 고민 상담 쪽지 사이에, 익숙한 닉네임이 보였다.
[닉네임: 도비Dobby] _내가 너무 이기적이었던 것 같아.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 그 아이한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어. 사실은… 너무 무서워. 다시 혼자가 될까 봐.
나는 쪽지를 읽고 숨을 멈췄다. '그 아이'는 나였다. 이도윤은 현실에서는 나를 피했지만, 여전히 온라인 익명 뒤에서는 나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그의 솔직한 감정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답장하고 싶지 않았다. 현실에서 나를 외면한 그의 비겁함이 떠올라서. 하지만 그의 메시지 속 절망감이 너무 커서 외면할 수가 없었다.
[수아의 비밀 노트] _이기적인 건 나도 마찬가지였어. 난 너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갈 용기를 얻을까 봐 무서웠어. 네가 날 버린 게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이 너무 많았던 것뿐이라고 생각할게. 현실에서 날 피하는 건 이해하지만, 너의 ‘트라우마’에 대해서는 절대 포기하지 마. 도망치지 마.
나는 답장을 보내자마자 휴대폰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에게 용기를 주었지만, 현실의 윤수아는 여전히 눈물을 참고 있었다.
12화

“이도윤의 이상 행동”
보건실 계약 파기 선언 후 며칠. 나는 이도윤을 완전히 무시하고, 다시 투명 인간 모드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도윤이 이상했다. 그는 2번 규칙, ‘공개적인 친절 금지’를 완전히 어기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내가 복도 구석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데, 축구부 친구들과 신나게 떠들던 이도윤이 갑자기 내 앞에 멈춰 섰다.
“야, 윤수아.”
축구부 친구들까지 모두 놀라 도윤을 쳐다봤다. 나는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몸이 굳었다.
“왜… 왜 그래.” 내가 간신히 대답했다.
“너, 그 김치볶음밥 또 먹냐? 질리지도 않아? 이거 먹어.”
도윤은 자신이 먹으려던 새우튀김이 들어간 고급 도시락을 내 도시락과 맞바꾸더니, 내 낡은 도시락을 들고 유유히 축구부 친구들에게 돌아갔다.
“야, 이도윤! 너 지금 뭐 하는…!”
“나 김치볶음밥 좋아해. 너도 새우튀김 먹어. 요즘 단백질 보충 필요해 보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주변 애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이도윤이 윤수아한테 말 걸었어?” “쟤네 사귀는 거 아니야?” “윤수아 대박이다. 킹카가 챙겨주네.”
나는 얼굴이 새빨개졌다. 세미의 경고가 떠올랐다. '네가 이도윤 발목 잡고 꾀어낸다고 소문낼 거야.'
나는 이도윤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수많은 시선이 나를 압박했다. 결국 나는 새우튀김 도시락을 그대로 둔 채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그날 오후. 익명 계정에 쪽지가 도착했다.
[닉네임: 도비Dobby] _미안해. 널 불편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 그냥… 밥이라도 잘 먹었으면 좋겠어서. 내가 너한테 받은 용기를 이렇게라도 갚고 싶었어.
나는 이를 악물었다. ‘용기를 갚아? 이렇게 날 세상 밖으로 끌어내면서?’
현실의 이도윤은 나를 곤란하게 만들고, 온라인의 도비는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나는 그의 이중적인 모습에 혼란스러웠다.
13화

“우리, 친구 할까?”
다음 날 아침, 0교시. 나는 다시 계단참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때,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앉아 있으면 엉덩이 시리다.”
이도윤이었다. 그는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교복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였다.
“야! 너 왜 자꾸 나한테…”
“조용히 해. 아무도 없으니까.” 도윤은 조용히 말했다. “어제 미안했어. 내가 너한테 신경 쓰게 만든 거.”
“네가 뭘 미안해. 네 이미지 지키려고 날 버린 주제에.” 내 목소리는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도윤은 고개를 숙였다. “맞아. 비겁했지. 근데… 세미가 널 협박한 거, 나중에 알았어. 너한테 피해 주는 게 맞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네가 나 때문에 외톨이처럼 혼자 있는 걸 보니까… 내가 더 비참해지더라.”
그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생각했어. 어차피 소문은 돌게 되어 있어. 그럼 차라리 그 소문을 우리가 이용하자.”
“이용하자니? 어떻게?”
“우리 그냥 친구 하자.” 도윤이 말했다. “가짜로 사귀는 건 너무 부담스러울 거고. 그냥 시시콜콜한 거 다 털어놓는 ‘절친’이 되는 거야. 그럼 세미나 다른 애들도 덜 집착할 걸? ‘에이, 걔네 그냥 친한 친구잖아’ 하고.”
나는 그의 제안에 어이가 없었다. “핵인싸가 아웃사이더랑 절친? 네 이미지는 뭐가 되는데?”
“이미지? 어차피 완벽한 척 연기하는 것도 지겨워. 차라리 ‘사차원 친구’ 한 명 둔 걸로 치자. 대신 넌 나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와. 나한테 필요한 건 네 **‘단단한 조언’**이고, 너한테 필요한 건 이 세상의 ‘입장권’이잖아. 어때?”
그의 제안은 너무 충격적이었지만, 동시에 너무나 달콤했다. 이도윤과 함께라면, 정말로 투명 인간 모드를 해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딱… 한 달만이야.” 내가 망설이며 말했다. “한 달 동안, 네가 나한테 세상 사는 법 가르쳐주고, 나는 네 비밀 노트가 되어주는 거야.”
도윤은 활짝 웃었다. 그 웃음은 따뜻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좋아! 오늘부터 우린 ‘보건실 비밀 공유 절친’이다.”
14화

“세상 밖으로, 첫걸음”
이도윤과 '절친 계약'을 맺은 후, 내 중학교 생활은 180도 바뀌었다. 도윤은 3가지 미션을 내게 던졌다.
[미션 1: 급식실 밥 같이 먹기]
점심시간. 나는 온몸에 시선이 박히는 것을 느끼며 도윤과 함께 급식실에 들어갔다. 애들이 수군거렸다. 도윤은 태연하게 내 옆에 앉아 닭볶음탕을 퍼줬다.
“봐봐. 아무 일도 없잖아? 그냥 밥 먹는 것뿐이야.”
도윤 덕분에 나는 처음으로 급식실 밥을 편안하게 먹을 수 있었다. 그의 존재가 나를 지켜주는 튼튼한 방패가 되었다.
[미션 2: 동아리 시간 함께 보내기]
도윤은 축구부였고, 나는 늘 도서부 구석에서 혼자 책만 읽었다. 도윤은 나를 '사진 동아리'로 끌고 갔다.
“너, 은근히 관찰력 좋잖아. 사진 찍는 거 잘할 거야.”
사진 동아리에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애들과 대화하며 뭔가를 함께 만들었다. 어색했지만, 이도윤이 내 옆에서 웃어주자 낯선 공포가 조금씩 희미해졌다.
[미션 3: 나에게 고민 말하기]
가장 어려운 미션이었다. 나는 남의 고민을 들어주는 건 잘하지만, 내 고민을 말하는 건 세상에서 제일 못했다.
“넌 맨날 나한테 조언만 해주잖아. 네가 힘든 건 뭐야?” 도윤이 물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아주 작게 말했다. “내가… 내년에 고등학교에 가서도, 또 투명 인간이 될까 봐 무서워.”
도윤은 잠시 침묵하더니, 내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야. 내가 너를 이렇게 만들었는데, 다시 돌아가게 둘 것 같아? 걱정 마. 넌 이제 더 이상 혼자가 아니야. 윤수아.”
그의 손길과 따뜻한 말이, 어떤 조언보다도 큰 위로가 되었다. 나는 이도윤에게 점점 더 의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우정’일까, 아니면 ‘다른 감정’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15화

“썸과 우정 사이, 두근거리는 거리”
절친 계약 3주차. 우리는 학교에서 가장 이상하고, 가장 비밀스러운 짝꿍이 되었다.
보건실 대신, 우리는 인적이 드문 미술실 구석을 우리의 새로운 비밀 공간으로 정했다.
도윤은 트라우마 때문에 축구 경기를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그는 미술실 구석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불안해했다.
“다시 그때처럼 실수할까 봐 미치겠어. 내가 못 하면 애들이 실망하고, 나한테 등 돌릴 거야.”
“아니야. 넌 이미 너 자신을 증명했어.” 내가 말했다. “도비Dobby한테 조언해 준 것처럼, 실수해도 괜찮아. 넌 완벽하지 않아도 멋있어.”
도윤은 고개를 들어 나를 쳐다봤다. “네가 내 옆에 있어주면 좋겠어.”
그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내가 그에게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당연히 있을게. 내가 네 비밀 노트잖아.”
그 순간, 도윤이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은 따뜻하고 땀이 조금 나 있었다.
“아니, 친구로서 말고.” 도윤이 말했다. “그냥… 윤수아, 너로서. 넌 나한테 너무 특별해졌어.”
내 심장이 쿵쾅거렸다. ‘특별하다’는 말은 ‘친구’를 넘어선 감정이었다.
그때, 미술실 문이 살짝 열리는 소리가 났다. 세미였다.
세미는 우리가 손을 잡고 있는 장면을 정확히 포착했다. 그녀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렸다.
“이도윤! 너 진짜 윤수아랑… 사귀는 거야?” 세미가 날카롭게 물었다.
우리는 동시에 벌떡 일어섰다. 도윤은 내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긴장감이 미술실을 가득 채웠다.
“사귄다고 해? 아니면 그냥 친구라고 해?” 나는 눈빛으로 도윤에게 물었다.
도윤은 세미를 쳐다보더니, 내 손을 꽉 잡았다.
“응. 우리… 사귀어.”
도윤의 입에서 나온 충격적인 대답에 나는 물론이고 세미도 얼어붙었다. 우리의 '절친 계약'은 순식간에 '가짜 연애'로 바뀌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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