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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가져간 무인 (武人)

2부 — 전쟁터의 청춘 (11화~20화 전체)

⚔️ 11화 — 전장에서 피어난 용맹, 소문으로 퍼지다

고려 공민왕 6년, 늦가을.

북쪽에서 바람이 내려왔다. 풀이 죽고 나무가 비틀렸다. 그 바람을 타고 홍건적이 내려오고 있다는 소문도 함께 퍼졌다.

이성계는 군복을 입은 채 처음으로 개경 이남의 땅을 밟았다.

징집된 병사들이 모인 진영은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말이 제대로 훈련된 병사가 없었고, 장비도 엉망이었다. 어린 병사들은 눈이 풀려 있었고, 나이 든 병사들은 이미 포기한 눈빛이었다. 지휘관들은 자기들끼리 회의 한답시고 막사에 틀어박혀 있었다.

성계는 그 모든 것을 보면서 입을 다물었다.

이게 고려의 군대구나.

실망이 없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실망은 잠깐이었다. 어떤 상황이든 자기가 할 것을 하면 된다. 성계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첫 번째 교전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홍건적 선발대가 국경을 넘었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지휘관들이 우왕좌왕했다. 일부 병사들이 벌써 뒤로 물러섰다. 그 혼란 속에서 성계는 말에 올랐다.

"내가 나가겠다."

낮은 목소리였다. 그런데 이상하게 멀리까지 들렸다.

주변 병사들이 멈췄다.

"……네가?"

나이 든 군관 하나가 눈을 찡그렸다. 성계를 위아래로 봤다. 열여섯짜리 소년 하나가 나서는 꼴이 황당했던 것이다.

"애송이가 무슨—"

성계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말을 달렸다.

슈웅— 슈웅— 슈웅—

화살이 연속으로 날아갔다. 선발대의 선두에 있던 병사 셋이 차례로 낙마했다. 적진에 혼란이 일었다.

막사 앞에서 그것을 본 병사들이 굳었다.

"……저 어린 놈 좀 봐라."

노장 하나가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성계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두 번째 공격 위치로 이동하고 있었다.

그날 전투에서 성계는 말 위에서 스물두 발을 쐈다. 스물두 발이 모두 적을 맞혔다.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병사들이 길을 열어줬다.

소문은 그날 저녁부터 퍼지기 시작했다.

함경도에서 온 열여섯짜리가 혼자서 선발대를 쫓아냈다.

백발백중이래. 말 위에서 달리면서도 안 빗나간다고.

이름이 뭐래? 이성계? 이자춘의 아들?

성계는 그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알았다. 불편했다. 아직 진짜 전쟁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소문부터 퍼지는 것이 썩 좋지 않았다.

그날 밤, 성계는 막사 안에서 한아의 편지를 꺼냈다.

살아서 와. 약속해.

펴서 읽고, 접어서 넣었다. 그걸 세 번 반복했다.

그리고 잠을 청했다.

내일도 쏴야 하니까.

🏹 12화 — 여진족 토벌 — 혼자서 적진을 뚫다

홍건적과의 전투가 한창이던 그 무렵, 북쪽에서 또 다른 문제가 터졌다.

여진족 일파가 고려 북방 마을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마을을 불 지르고 사람들을 끌고 갔다. 조정에서 토벌 명령이 내려왔다. 성계가 속한 부대에도 그 명령이 떨어졌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눈이 내렸다. 나무들이 새하얗게 얼어붙은 산속으로 부대가 이동했다.

문제는 정보였다. 여진족이 어느 골짜기에 숨었는지, 병력이 얼마인지 아무도 몰랐다. 척후를 보내면 돌아오지 않았다. 한 명이 돌아왔는데 화살을 맞은 채였고, 그 병사는 진지 안쪽에 여진족이 있다는 말만 하고 의식을 잃었다.

지휘관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다. 회의는 길어졌다. 결론이 나지 않았다.

성계는 밖에 나와서 눈 위에 쪼그려 앉아 지형을 봤다.

산이 세 개. 가운데 골짜기. 저쪽 능선에 연기가 피어오른다. 적의 진지는 거기다. 병력은…… 연기의 양으로 보면 많지 않다. 이십에서 삼십 명 사이.

우리 병력은 오십.

이길 수 있다. 단, 정면 돌파는 안 된다. 지형을 이용해야 한다.

"내가 들어가겠습니다."

성계가 막사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지휘관이 고개를 들었다.

"혼자?"

"혼자 들어가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고,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그때 본대가 움직이면 됩니다."

"위험하다. 척후들이 다—"

"척후들은 낮에 들어갔습니다. 저는 밤에 들어갑니다."

지휘관이 말을 잃었다.

성계는 그날 밤 혼자 눈 속으로 들어갔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눈이 발목까지 빠졌다. 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성계는 소리를 죽이고 움직였다. 활을 등에 메고, 칼은 손에 쥐고.

골짜기 안쪽으로 들어갔다. 연기 냄새가 났다. 멀리 불빛이 보였다. 스물다섯. 그래, 스물다섯 명 정도.

배치는 이랬다. 진지 앞쪽에 파수 둘. 뒤쪽에 셋. 나머지는 안쪽에 모여 있다.

성계는 머릿속으로 그림을 그렸다. 파수들을 먼저 처리하면 된다. 소리 없이. 활로.

슈웅.

슈웅.

눈 속에서 쏜 두 발. 파수 둘이 소리 없이 쓰러졌다.

성계는 신호 화살을 하늘로 쐈다.

빛이 터지는 신호를 본 본대가 움직였다. 앞뒤에서 동시에 압박이 들어갔다. 여진족은 혼란에 빠졌다. 열다섯 분이 채 안 돼서 전투가 끝났다.

진영으로 돌아온 성계는 눈을 잔뜩 뒤집어쓴 채였다.

부하 하나가 달려와 외투를 덮어줬다.

"장군, 다치신 곳은요?"

"없어."

"하, 진짜 귀신이시네."

성계는 외투를 여미며 막사로 걸어갔다. 몸은 떨렸다. 안에서부터 올라오는 떨림이었다. 무서웠던 것이다. 사실은 들어가는 내내 무서웠다. 하지만 그 무서움이 오히려 감각을 날카롭게 만들었다.

한아 말이 맞네. 무섭고 기대되는 게 동시에 가능해.

막사 안에 들어가 눈을 녹이면서, 성계는 어이없게도 한아 생각을 했다.

네가 전술 짜는 걸 좋아한다고 했지. 오늘 전투 이야기 해주면 좋아하겠다.

그리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 13화 — 전쟁터에서 받은 한아의 꽃 편지

겨울이 깊어질 무렵, 영흥에서 편지가 왔다.

군 보급로를 따라 오는 편지라 한 달이 넘게 걸렸다. 봉투가 구겨지고 한쪽 모서리가 젖어서 말라 있었다. 성계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성계에게.

잘 지내고 있어? 여기는 첫눈이 왔어. 활터에 눈이 쌓였는데 아무도 없더라. 과녁에도 눈이 얹혀서 이상하게 허전해 보였어. 왜 그런지는 모르겠어.

아버지한테 북쪽 전투 소식을 조금 들었어. 홍건적이랑 싸우는 거 쉽지 않다고. 걱정되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야. 근데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까 그냥 여기서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있어.

새로 병서를 구했어. 제갈량의 남만 원정 기록인데, 지형과 기후를 전술에 활용하는 방식이 엄청나. 네가 읽으면 좋아할 것 같아. 돌아오면 같이 읽자.

추신: 매화가 폈어. 원래 봄에 피는데 이상하게 겨울에 한 송이가 피었어. 함께 보여주고 싶어서 꽃잎 하나 넣어.

편지 안에 정말로 작은 매화 꽃잎 하나가 들어 있었다.

마른 꽃잎이었다. 눌려서 납작해진. 그런데 아직 희미하게 향이 남아 있었다.

성계는 그 꽃잎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바라봤다.

한 달이 넘는 길을 달려온 꽃잎. 이미 다 진 매화에서 떨어진 것. 그런데 아직 향이 남아 있었다.

옆에 있던 부하 막동이가 옆에서 힐끔 봤다.

"장군, 그게 뭡니까?"

"꽃잎."

"꽃잎이요? 이 한겨울에?"

"응."

"……누가 보낸 겁니까?"

성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꽃잎을 다시 편지 안에 넣고 품에 넣었다.

막동이가 씩 웃으며 물러섰다. 아, 저거 여자한테서 온 거구나. 말은 안 했다.

그날 저녁, 성계는 답장을 썼다.

한아에게.

잘 있어. 다치지 않았어. 걱정하지 마. 여기 눈도 많이 왔어. 근데 영흥 눈이랑은 다른 느낌이야. 여기 눈은 무거워. 뭔가를 짓누르는 것 같아.

꽃잎 받았어. 향이 남아 있더라. 한 달이 넘게 왔는데도.

제갈량 전술서 이야기 해줘. 궁금해. 돌아가면 같이 읽자.

추신: 여기서도 별은 같은 별이야. 영흥에서 보는 별이랑 같은 거더라. 이상하게 그게 위안이 됐어.

답장을 쓰고 나서 성계는 봉투를 닫으며 생각했다.

추신에 그 말을 쓰는 게 맞았나.

썼다 지웠다를 세 번 반복했다. 결국 그냥 뒀다.

어차피 한아는 이미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이 편지가 단순한 안부가 아니라는 것을.

🔥 14화 — 홍건적의 난 — 불타는 개경과 성계의 선택

공민왕 10년.

홍건적의 2차 침입이 시작됐다.

이번엔 달랐다. 규모가 달랐고, 속도가 달랐다. 십만이 넘는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군이 막으려 했지만 밀렸다. 방어선이 무너졌다. 개경까지 위험하다는 급보가 올라왔다.

공민왕이 피란을 떠났다.

진영은 혼란이었다. 어떤 장수는 개경을 버리자고 했고, 어떤 장수는 끝까지 지키자고 했다. 병사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일부는 밤 사이에 도망쳤다.

성계는 그 혼란을 보면서 생각했다.

겁이 나서 도망치는 건 이해해. 나도 무서워. 근데 도망치면 이 땅은 누가 지키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전방에 서겠습니다."

지휘관이 굳었다.

"전방은 이미 무너졌다. 무모한 짓이야."

"무너진 곳을 다시 세우면 됩니다."

"병력이 없어!"

성계가 돌아섰다.

"저를 따를 사람. 나와라."

병사들이 서로를 봤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성계는 다시 말하지 않았다. 혼자 말에 올랐다. 그리고 출발했다.

열 걸음쯤 갔을 때.

"……저도 가겠습니다."

한 명이 나왔다. 스무 살 정도의 젊은 병사였다.

그 다음 또 한 명.

그 다음 또.

성계가 돌아보지 않은 채 계속 걸었다. 그 뒤로 스물두 명이 따라붙었다.

스물셋.

개경 외곽에서 홍건적과 맞닥뜨렸다.

수백 명의 적이 앞에 있었다. 스물셋 대 수백.

성계는 말 위에서 활을 들었다.

"물러서지 마라. 쏜다."

그 한마디가 전장에 울렸다.

슈웅— 슈웅— 슈웅—

말을 달리며 쏘는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적진이 흔들렸다. 혼란이 일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스물두 명이 앞으로 나아갔다.

싸움은 치열했다. 성계의 팔에 칼이 스쳤다. 피가 났다. 멈추지 않았다. 왼손으로 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계속 쐈다.

결국 홍건적이 물러섰다.

스물셋이 수백을 막아냈다.

진영으로 돌아왔을 때 병사들이 몰려왔다. 성계의 팔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장군, 팔이—"

"괜찮아. 얕은 거야."

성계는 그 자리에서 수건으로 팔을 묶었다. 손이 떨렸다. 아드레날린이 가라앉으면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것보다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한아한테 다친 거 말하면 안 되겠다.

😢 15화 — "살아서 돌아와" 한아의 눈물

개경이 함락됐다는 소식이 영흥에 전해진 건 늦겨울이었다.

한아는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가 조용히 이야기해줬다. 홍건적이 개경을 점령했다고. 공민왕은 피란 중이라고. 고려군이 반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이성계 장군은요?"

한아가 물었다. 아버지가 잠깐 멈칫했다.

"살아 있다는 소식은 들었다."

"부상은요?"

"……팔에 가벼운 부상이 있다고."

한아는 그 말에 눈을 감았다.

아버지가 방에서 나간 뒤, 한아는 오래 앉아 있었다.

가벼운 부상. 살아 있다. 그 말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런데 동시에 얼마나 두려운지. 살아 있는 지금도 다쳤는데, 앞으로 더 큰 전투가 남아 있다면.

한아는 편지를 썼다.

성계에게.

팔 부상 들었어. 괜찮아? 아프진 않아? 가벼운 거라고 했는데 가벼운 게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어서 계속 신경 쓰여.

개경이 함락됐다는 소식도 들었어. 무서웠겠다. 아니, 무서울 틈도 없었겠다. 그게 더 무서운 거야. 무서운 것도 모를 만큼 바쁜 상황이라는 게.

성계야.

살아서 돌아와. 그것만 생각해. 이기는 것보다 살아서 돌아오는 것. 알겠어?

나는 여기서 기다릴게. 반드시 기다릴게.

편지를 다 쓰고 나서 한아는 붓을 내려놨다.

눈물이 흘렀다.

소리도 없이.

기쁜데 왜 눈물이 나는지 모르겠다고 했잖아.

지금은 기쁜 것도 아닌데 눈물이 났다. 무서워서. 그리고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을 것 같은 예감이 가슴을 조여서.

한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았다.

이러면 안 되지. 울 시간에 기도하는 게 낫지.

그녀는 편지를 봉하면서 속으로 말했다.

이성계, 죽으면 안 돼. 나 아직 할 말 많거든.

🌟 16화 — 최후의 돌격 — 적장을 홀로 쓰러뜨리다

공민왕 11년, 봄.

고려군의 반격이 시작됐다.

정세운 장군이 총지휘를 맡았고, 이성계는 전방 돌격대를 이끌었다. 나이 열여덟. 하지만 진영 내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개경 탈환 작전이었다.

홍건적은 도성 안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었다. 성벽이 높았고, 방어가 촘촘했다. 정면 돌파는 큰 희생이 따랐다.

성계는 지형을 봤다.

동문이 가장 경비가 약하다. 새벽에 치면 된다.

그의 의견이 채택됐다. 새벽 기습.

동이 트기 직전, 성계가 선두에 섰다.

성벽 위에서 파수꾼의 횃불이 흔들렸다. 성계가 손을 들었다. 모두 멈췄다. 그가 손을 내렸다.

달려갔다.

성문에 부딪히는 소리. 위에서 화살이 쏟아졌다. 병사들이 방패를 들었다. 성계는 말 위에서 성벽을 향해 쐈다. 파수꾼들이 쓰러졌다.

문이 열렸다.

도성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홍건적은 예상보다 빨리 대응했다. 좁은 골목에서 접전이 벌어졌다. 칼 소리, 비명 소리, 말발굽 소리. 모든 것이 뒤섞였다.

그때였다.

홍건적의 적장이 나타났다. 덩치가 크고 갑옷이 두꺼웠다. 그가 나타나자 흩어지던 홍건적들이 다시 모였다.

저 놈을 쓰러뜨리면 된다.

성계는 말을 달렸다.

좌우에서 홍건적 병사들이 달려왔다. 성계는 왼쪽 병사를 피하면서 오른쪽 병사의 창을 흘렸다. 말이 비명을 질렀다. 성계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땅에 착지하면서 활을 들었다.

적장의 눈과 마주쳤다.

슈웅—

화살은 적장의 투구 틈새를 뚫었다.

적장이 쓰러졌다.

그 순간 전장이 바뀌었다. 머리를 잃은 홍건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고려군이 밀고 들어갔다.

개경이 탈환됐다.

성계는 도성 안 광장에 서서 주변을 봤다.

불에 타고 약탈당한 개경.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숨어 있던 백성들이었다. 울면서 나왔다. 어떤 사람은 군사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았다.

성계는 그 광경을 보면서 눈을 감았다.

이래서 싸우는 거구나.

🌸 17화 — 영웅이 된 소년, 하지만 마음은 하나를 향해

개경 탈환 이후, 성계의 이름은 고려 전체에 퍼졌다.

어디서든 이성계 장군 이야기가 나왔다. 열여덟 살에 개경 탈환 선봉을 맡았다고. 말 위에서도 화살이 빗나가지 않는다고. 혼자서 적장을 쓰러뜨렸다고.

진영 안에서도 달라졌다. 나이 많은 장수들이 성계에게 먼저 의견을 물었다. 병사들은 그의 명령이라면 두말없이 따랐다.

성계는 그 변화를 느끼면서도 편하지 않았다.

이름이 커질수록 무게가 늘었다. 기대가 늘었다. 실패했을 때 쓰러지는 것도, 주변 사람들도 같이 쓰러진다는 것을 알았다.

어느 날 밤, 막동이가 술을 들고 왔다.

"장군, 한 잔 하시죠."

"나 안 마셔."

"에이, 오늘 같은 날은 마셔야죠. 개경 탈환한 날이잖습니까."

성계가 막동이를 봤다. 이 녀석은 영흥에서부터 같이 온 친구였다. 가장 먼저 따라나선 병사이기도 했다.

"……한 잔만."

막동이가 씩 웃으며 따랐다.

성계가 한 모금 마셨다.

"장군은 무서운 적 없습니까?"

막동이가 물었다.

"있지."

"예? 진짜요?"

"왜. 없을 것 같아?"

"뭐가 무섭습니까?"

성계는 잔을 내려놓으며 잠깐 생각했다.

"실망시키는 것."

"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실망시키는 것."

막동이가 잠자코 들었다.

"전쟁터는 사실 두렵지 않아.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면 되니까. 근데 그걸 믿고 따라오는 사람들이 다치거나 죽으면…… 그게 무서워."

막동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더 잘 하시는 거 아닙니까."

성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날 밤 성계는 편지를 썼다.

한아에게.

개경을 되찾았어. 다들 기뻐해. 나도 기뻐야 하는데 이상하게 조용한 기분이야. 이기고 나서 이런 기분이 드는 게 맞는 건지 모르겠어.

한아야, 나 영웅 소리 듣고 있어. 이상하게 들려. 나는 그냥 할 것 했는데, 영웅이라는 말이 붙으면 달라지는 것 같아서.

추신: 꽃잎은 아직 가지고 있어. 아직 향이 조금 남아 있어.

보내고 나서 성계는 천장을 봤다.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영흥의 활터로. 언덕 위에서 팔짱을 끼고 병서를 읽는 그 애한테로.

⚡ 18화 — 재회 — 달라진 그와 여전한 그녀

전투가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 성계는 짧은 귀환 허가를 받았다.

열흘이었다. 열흘 안에 돌아와야 했다.

말을 달려 영흥으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보다 길게 느껴졌다. 몇 년 만이었다. 정확히는 이 년 반이었다.

영흥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알아봤다. 이성계 장군이 왔다! 소리가 났다. 마을 사람들이 나와서 손을 흔들었다. 성계는 어색하게 인사를 받으면서 말을 달렸다.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먼저 간 곳이 있었다.

활터.

그리고 언덕.

언덕 위에 사람이 있었다.

한아였다.

여전히 병서를 들고 있었다. 여전히 팔짱을 끼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었다.

한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멈췄다.

이 년 반이 흘렀다. 성계는 더 커졌고 더 넓어진 어깨를 가진 청년이 됐다. 눈빛이 더 깊어졌고, 얼굴에 세월이 새겨졌다. 전쟁터의 흔적이 있었다.

한아는 더 또렷해진 눈매를 가진 젊은 여인이 됐다. 서늘한 눈빛은 여전했다.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한참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밥은 잘 먹었어?"

한아가 먼저 말했다.

성계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편지에 쓴 것과 똑같은 말. 변하지 않은 한아였다.

"응. 잘 먹었어."

"살도 쪘네."

"야."

"좋다는 말이야."

한아가 얼굴을 돌렸다. 귀가 빨개진 것을 들키기 싫어서였다.

성계도 시선을 앞으로 향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 수백 명의 홍건적 앞에서도 이렇게 뛰지 않았는데.

"꽃잎."

성계가 품에서 꺼냈다.

납작하게 눌린 매화 꽃잎. 한아가 보낸 그것.

"아직 갖고 있었어?"

"응."

"향도 다 날아갔겠다."

"조금 남아 있어. 맡아봐."

한아가 꽃잎을 받아 코에 댔다.

희미했다.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하지만 분명히 있었다. 그 향이.

한아의 눈이 흔들렸다.

"……바보."

"뭐가."

"이걸 끝까지 갖고 있었어."

"버릴 이유가 없잖아."

한아가 꽃잎을 돌려줬다.

둘은 언덕 위에 나란히 앉았다. 활터가 내려다보였다. 아무도 없는 활터. 눈이 녹은 자리에 새 풀이 올라오고 있었다.

"힘들었지?"

한아가 물었다.

"응."

"무서웠지?"

"응."

"그래도 잘 했어."

성계가 한아를 봤다.

한아는 시선을 앞으로 향한 채였다. 옆모습이 저녁 빛에 물들어 있었다.

이 사람이다.

성계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처음으로. 뚜렷하게.

돌아갈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이름도 아니고 전공도 아니었다.

이 언덕이었다. 이 사람이었다.

🌊 19화 — 왜구의 침략, 다시 칼을 들다

열흘은 짧았다.

마치 꿈처럼 지나갔다. 어머니 얼굴을 봤다. 영흥 밥을 먹었다. 활터에서 오랜만에 혼자 쐈다. 그리고 한아와 이야기를 나눴다.

전술 이야기를 했다. 제갈량 남만 원정 이야기를 했다. 한아가 읽은 병서들 이야기를 했다. 성계가 겪은 전투 이야기를 했다. 밤이 깊어지도록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다.

그리고 열흘째 아침.

성계가 다시 말에 올랐다.

한아가 마당 앞에 나와 있었다.

"또 가네."

"응."

"이번엔 왜구야?"

"응."

"왜구가 홍건적보다 더 빠르다고 들었어."

"알아."

"기동전이니까 말 잘 다뤄야 해."

"알아."

한아가 성계를 올려다봤다.

"야, 이성계."

"응."

"이번에도 살아서 와."

"응."

"그리고."

한아가 잠깐 망설였다.

"……빨리 와."

성계의 손이 고삐를 꽉 쥐었다.

"응. 빨리 올게."

말이 움직였다. 성계는 돌아보지 않았다.

한아는 그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빨리 오라고 했다. 처음으로.

창피했지만.

해야 할 것 같아서.

왜구는 달랐다.

홍건적은 수가 많았다. 왜구는 수는 적었지만 빨랐다. 치고 빠지는 전술이 능숙했다. 해안을 따라 이동하면서 마을을 습격했다. 쫓아가면 바다로 빠졌다. 다시 다른 곳에서 나타났다.

성계는 그 패턴을 분석했다.

다음엔 어디 나타나냐.

해안 지형. 조류. 바람 방향. 마을까지의 거리.

여기다.

성계는 먼저 이동했다. 왜구가 오기 전에 매복했다.

왜구가 배에서 내리는 순간, 화살이 쏟아졌다.

슈웅— 슈웅— 슈웅—

예측하지 못한 공격에 왜구가 혼란에 빠졌다. 절반이 배로 돌아가기도 전에 쓰러졌다. 나머지는 다시 바다로 도망쳤다.

성계가 만든 전술이었다. 추격하지 않고 예측해서 막는 것.

이 전술이 효과를 보자, 왜구 피해가 눈에 띄게 줄었다.

다시 소문이 퍼졌다.

이성계 장군이 왜구 전술을 읽는다. 나타나기 전에 막는다.

성계는 그 소문보다, 한아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한아야, 네가 제갈량 전술서 이야기 해줬잖아. 거기서 힌트 얻었어. 추격이 아니라 예측. 네 덕분이야.

🌅 20화 — 황산대첩 — 역사에 남을 전설의 하루

공민왕 9년, 황산.

이 이름은 훗날 역사책에 선명하게 남는다.

왜구의 세력 중 가장 강한 무리가 내륙 깊숙이 침입했다. 이제까지의 해안 습격이 아니었다. 수천 명이 내륙으로 향했다. 지나는 마을마다 불을 질렀다. 고려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총지휘는 이성계.

스물다섯 살이었다. 홍건적과 싸우던 열여섯이 이제 스물다섯이 됐다.

황산에서 맞닥뜨렸다.

왜구의 수장은 아지발도. 스무 살이 채 안 된 소년 장수였다. 하지만 그 용맹이 하늘을 찔렀다. 갑옷이 두꺼워 화살이 튕겨냈다. 말이 빠르고 창이 날렵했다. 고려군 장수 몇이 덤볐다가 쓰러졌다.

병사들의 얼굴에 공포가 번졌다.

성계가 말을 앞으로 냈다.

"비켜라."

낮은 한마디였다.

병사들이 길을 열었다.

성계와 아지발도의 눈이 마주쳤다. 전장 한가운데에서. 수천 명이 둘러싼 가운데에서. 그 순간 전장이 잠깐 숨을 멈춘 것 같았다.

아지발도가 창을 들었다. 성계가 활을 들었다.

성계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갑옷이 두껍다. 화살이 튕기는 걸 봤다. 그렇다면 갑옷 틈새를 노려야 한다. 투구와 갑옷이 맞닿는 부분. 목 부분은 가린다. 그렇다면……

눈.

아니면 투구 가장자리. 충격이 전달되는 부분.

아지발도가 달려왔다. 말발굽 소리가 땅을 울렸다. 창끝이 성계를 향했다.

성계는 움직이지 않았다.

달려오는 말. 가까워지는 창끝. 병사들이 숨을 멈췄다.

지금.

슈웅—

화살은 아지발도의 투구 가장자리를 정확히 뚫었다. 충격이 안쪽으로 전달됐다.

아지발도가 말에서 떨어졌다.

잠깐의 정적.

그리고 적진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잃은 군대처럼, 왜구가 혼란에 빠졌다. 고려군이 밀고 들어갔다. 황산의 전투는 압승이었다.

황산대첩.

전투가 끝나고 성계는 전장에 혼자 남아 섰다. 노을이 황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발밑에 수많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부서진 창. 쓰러진 말. 그 모든 것의 무게가 발끝부터 가슴까지 올라왔다.

강해진다는 게 이런 건가.

이기고 나서도 가슴이 먹먹한 이 감각.

성계는 오랫동안 그 자리에 섰다가, 말에 올랐다.

개경으로 돌아가는 길에 편지를 썼다. 말 위에서. 흔들리는 글씨로.

한아에게.

황산에서 이겼어. 크게 이겼어. 근데 이상하게 조용해. 이길 때마다 이렇더라. 처음엔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이게 맞는 감각인 것 같아.

개경으로 돌아가면 잠깐 올 수 있을 것 같아. 네가 보고 싶어.

추신: 이번엔 추신 없어. 그냥 보고 싶다고.

편지를 접으면서 성계는 생각했다.

처음으로 추신 없이 본 편지에 하고 싶은 말을 다 썼다.

보고 싶다.

그 세 글자가, 황산에서의 어떤 화살보다도 더 오래 손끝에 남았다.

작가 노트: 전쟁터에서도 사람의 마음은 살아 있었을 거예요. 화살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니까요. 성계가 꽃잎을 끝까지 간직했다는 것, 한아가 빨리 와라고 했다는 것. 그 작은 것들이 이 이야기의 진심입니다. 3부도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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