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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가져간 무인 (武人)

조선 건국 하이틴 로맨스 웹소설
내 심장을 가져간 무인 (武人)
40화 목록
[1부 - 운명의 시작] 1~10화
1화. 고려의 봄, 낯선 소년과의 첫 만남
2화. 활 하나로 천 명을 압도한 소년
3화. "너는 뭔가 달라" — 무관의 딸, 한아의 직감
4화. 쌍성총관부의 그늘 아래서
5화. 아버지 이자춘의 비밀과 아들의 다짐
6화. 처음으로 느낀 심장 두근거림
7화. 원나라 말발굽 소리와 우리의 거리
8화. "나는 반드시 이 땅을 지킬 것이다"
9화. 한아의 편지, 성계의 첫 답장
10화. 헤어짐 — 고려군 입대 전날 밤
[2부 - 전쟁터의 청춘] 11~20화
11화. 전장에서 피어난 용맹, 소문으로 퍼지다
12화. 여진족 토벌 — 혼자서 적진을 뚫다
13화. 전쟁터에서 받은 한아의 꽃 편지
14화. 홍건적의 난 — 불타는 개경과 성계의 선택
15화. "살아서 돌아와" 한아의 눈물
16화. 최후의 돌격 — 적장을 홀로 쓰러뜨리다
17화. 영웅이 된 소년, 하지만 마음은 하나를 향해
18화. 재회 — 달라진 그와 여전한 그녀
19화. 왜구의 침략, 다시 칼을 들다
20화. 황산대첩 — 역사에 남을 전설의 하루
[3부 - 흔들리는 고려, 흔들리는 마음] 21~30화
21화. 개경으로 돌아온 장군과 달라진 조정
22화. 정몽주와의 만남 — 성계가 처음으로 존경한 사람
23화. "나라가 썩었어" — 부패한 권문세족의 민낯
24화. 한아의 아버지가 권문세족이었다?!
25화. 엇갈린 신분, 흔들리는 감정
26화. 이인임의 음모와 성계의 선택
27화. "너를 지키려면 내가 강해져야 해"
28화. 정도전의 등장 — 새로운 나라를 꿈꾸는 선비
29화. 한아의 갈등 — 아버지의 편 VS 성계의 편
30화. 결국 터진 눈물, 그리고 고백
[4부 - 새벽이 오기 전 가장 어둡다] 31~37화
31화. 위화도 앞에 선 이성계
32화. "회군할 것인가" — 운명의 선택지
33화. 한아의 마지막 편지: "옳은 길을 가세요"
34화. 위화도 회군 — 역사의 물줄기가 바뀌다
35화. 정몽주의 죽음과 성계의 긴 침묵
36화. "당신이 옳았어요" — 한아와의 재회
37화. 새 나라의 문턱에서, 손을 맞잡다
[5부 - 새벽, 조선의 아침] 38~40화
38화. 1392년 7월, 역사가 바뀌는 날
39화. 태조 이성계 — 왕이 된 소년의 눈물
40화. 에필로그: "조선의 첫 봄날, 우리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 작품 소개: 고려 말 격동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소년이 전쟁과 사랑, 신념 사이에서 성장하며 결국 새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청춘 로맨스. 역사 공부도 되고 심장도 두근거리는 중학생 맞춤 웹소설!
내 심장을 가져간 무인 (武人)
1부 — 운명의 시작 (1화~10화 전체)

🌿 1화 — 고려의 봄, 낯선 소년과의 첫 만남
고려 공민왕 5년, 봄.
함경도 영흥 땅에 아직 겨울의 끝자락이 남아 있었다. 녹다 만 눈이 땅 끝에 웅크리고, 이른 아침 바람은 뺨을 스치는 게 아니라 아예 베어버릴 기세였다. 까치 한 마리가 빈 나뭇가지에 앉아 울다가 퍼드덕 날아갔다.
열다섯 살 한아는 언덕 위에 서서 그 까치를 눈으로 쫓았다.
손에는 두꺼운 병서 한 권. 아버지의 서재에서 몰래 꺼내온 것이었다. 표지가 닳고 닳아 글자도 잘 보이지 않는 오래된 책이었지만, 한아는 이 책을 열 번도 넘게 읽었다. 아버지는 딸이 병서를 읽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여자가 전술을 알아 뭣에 쓰냐. 하지만 한아는 생각이 달랐다. 모르는 것보다 아는 게 낫고, 아는 것보다 이해하는 게 낫다. 그게 전쟁이든 살림이든 마찬가지였다.
그때 아래쪽 활터에서 소리가 났다.
슈웅— 퍽.
슈웅— 퍽.
한아가 고개를 내렸다.
활터에 한 소년이 서 있었다. 또래로 보였다. 열대여섯쯤 됐을까. 키가 또래보다 반 뼘은 더 컸고, 어깨가 넓었다. 활을 드는 자세가 어른처럼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뭔가 조금 걸렸다.
한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봤다.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가네.
화살은 정확했다. 백 보 거리의 과녁을 연속으로 맞히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함성을 질렀다. 소년의 친구들로 보이는 아이 몇 명이 손뼉을 치고 소리를 질렀다.
"야, 이성계! 그거 몇 번째야?!"
이성계. 한아는 그 이름을 속으로 되뇌었다. 영흥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집안의 아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아버지 이자춘이 원나라 밑에서 천호 벼슬을 하는 사람. 어중간한 처지의 집안. 하지만 소년의 눈빛은 어중간하지 않았다.
한아는 자신도 모르게 발이 언덕 끝으로 향했다.
"저기 저 애 좀 봐."
목소리가 나왔다. 혼잣말처럼 작게. 그런데 바람이 딱 멈추는 바람에 생각보다 크게 들렸다.
소년이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한아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말했다.
"활 자세가 틀렸는데."
소년의 눈썹이 꿈틀했다.
"……뭐?"
"왼쪽 어깨가 미세하게 올라가. 그래서 화살이 항상 중앙보다 반 푼 위에 꽂혀. 지금은 가까우니까 오차가 없어 보이지만, 삼백 보 넘어가면 달라질걸."
소년은 반박하려다가 멈췄다.
한아는 그 표정을 눈여겨봤다. 화를 내지 않았다. 부정하지도 않았다. 맞는 말이라고 인정하는 침묵이었다.
그냥 고집만 센 애는 아니네.
"……무관 집 딸이야?"
소년이 물었다.
"그러면?"
"그러면 활이나 쏠 것이지, 남의 자세나 구경해?"
한아가 코웃음을 쳤다.
"내가 쏘면 네가 더 창피할 것 같아서 참아주는 거야."
소년의 귀가 눈에 띄게 빨개졌다. 화가 난 건지, 다른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한아는 돌아섰다. 그리고 언덕을 내려가며 혼자 웃었다.
이름이 이성계라고 했나. 특이한 애네.
🏹 2화 — 활 하나로 천 명을 압도한 소년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이성계는 활터에 있었다.
해가 뜨기 전부터 나와서 해가 지고 나서야 들어갔다. 한아가 언덕 위에서 슬쩍 내려다보면 항상 그 자리에 있었다. 아무리 추워도, 아무리 바람이 세도.
그런데 달라진 점이 있었다.
어깨가 내려가 있었다.
한아가 지적한 그 부분. 딱 고쳐져 있었다. 한 번 말했는데 바로 다음 날부터 적용했다는 뜻이었다.
한 번 들으면 고치는 애구나.
한아는 그 사실이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고집 세고 자존심 강해 보이는 애가, 지적은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한아는 많이 보지 못했다. 아버지 밑에서 일하는 군관들은 대부분 윗사람 말은 듣되 옆 사람 말은 무시했다.
"야."
한아가 언덕 위에서 불렀다.
성계가 고개를 들었다.
"어제 고쳤네."
"응."
"잘했어."
"……칭찬이야?"
"그냥 사실 말한 거야."
성계가 다시 활을 들었다. 한아는 그 모습을 보면서 책을 폈다. 어느새 언덕 위에 앉아서 책을 읽는 게 아침 일과가 됐다.
그러다 한아가 고개를 들면 성계가 쏘고 있었다. 성계가 고개를 들면 한아가 읽고 있었다. 서로를 보는 척 안 하면서, 둘 다 알고 있었다. 상대가 거기 있다는 것을.
사흘째 되던 날, 영흥에 장이 섰다.
사람들이 모여드는 장터. 성계의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갔지만 성계는 혼자 활터에 남았다. 한아는 그 모습이 신기해서 내려가 직접 물었다.
"장에 안 가?"
"훈련해야지."
"하루 쉬면 죽어?"
"쉬면 무뎌져."
한아가 성계 옆에 나란히 섰다. 과녁을 바라봤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해? 어디 대회라도 나가?"
성계는 한참 있다가 대답했다.
"언젠가 전쟁터에 나가야 하니까."
"……전쟁터?"
"이 땅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알잖아. 원나라 밑에서, 홍건적이 내려오고, 왜구가 해안을 쑤시고 다니고. 누군가는 싸워야 해."
한아는 그 옆모습을 봤다.
열다섯, 열여섯짜리 소년이 할 말이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말하는 눈빛이 진지했다. 과장이 없었다. 그냥 당연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더 무겁게 들렸다.
"무섭지 않아?"
한아가 물었다.
"무서운데."
성계가 과녁을 향해 활을 당겼다.
"그게 이유가 되진 않잖아."
슈웅— 퍽.
정중앙이었다.
한아는 그 순간,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가 원래 속도로 돌아온 느낌. 뭔가 설명할 수 없는 감각.
이 애, 보통 애가 아니구나.
🌸 3화 — "너는 뭔가 달라" — 무관의 딸, 한아의 직감
한아는 어릴 때부터 사람을 잘 봤다.
아버지 한 첨사는 딸의 그 능력을 대단히 여겼다. 아들이 없는 집안에서 총명한 딸 하나가 컸고, 한아는 아버지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자랐다. 무관 집안이니 병서를 읽었고, 말 타는 것도 배웠고, 활도 배웠다. 그런데 그 모든 것보다 한아에게 더 자연스럽게 붙은 능력이 있었다. 사람을 보면 본질을 꿰뚫는 것.
이성계는 그 능력이 처음으로 흔들린 상대였다.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는 애. 단순할 것 같은데 단순하지 않고, 복잡할 것 같은데 또 단순한 면이 있는 애. 활을 쏠 때는 누구보다 집중하고, 그 외의 시간엔 말이 없고, 그런데 가끔 말을 하면 생각보다 깊은 말이 나오는 애.
장이 서던 날 이후로, 한아는 일부러 언덕에 좀 더 오래 앉아 있었다. 책을 읽는 척하면서 사실은 성계를 관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야, 이성계."
"응."
"너 친구들이 장에 간 거 아깝지 않아?"
"아깝긴 뭐가 아까워."
"재밌잖아, 장. 먹을 것도 있고."
"한아 너는 장 갔다 왔어?"
"아니."
"그럼 넌 왜 안 갔어?"
한아는 대답을 못 했다.
성계가 슬쩍 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아깝지 않잖아."
한아는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왜인지 모르게 귀가 간질간질했다.
아깝지 않은 건 맞는데. 이유가 뭔지는 나도 모르겠는데.
그날 오후, 한아는 집에 돌아와 방에 앉아서 오랫동안 생각했다.
이성계라는 소년에 대해.
활을 잘 쏜다. 고집이 세 보이지만 사실 귀를 열어놓고 있다. 전쟁터를 두려워하면서도 피하지 않으려 한다. 친구들이 놀러 갈 때 혼자 남아서 훈련한다. 근데 그게 외로워 보이지 않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저 나이에 저런 눈을 가진 애가 있나.
열여섯 살 한아는 그게 뭔지 정확히 몰랐다. 다만 직감이 말해줬다.
이 애, 평범하게 살지 않을 것 같다.
⚔️ 4화 — 쌍성총관부의 그늘 아래서
영흥은 겉으로는 고려 땅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쌍성총관부. 원나라가 이 땅에 설치한 행정구역으로, 고려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99년 전에 빼앗긴 땅이었다. 그 아래서 사는 사람들은 고려 사람도 원나라 사람도 아닌 이상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은 그 쌍성총관부 아래서 천호 벼슬을 하고 있었다.
한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 한 첨사가 이자춘 나리에 대해 이야기할 때 들었다. 저분은 이도 저도 아닌 처지야. 원나라 아래 있으면서도 고려 쪽에 마음이 있는 것 같고. 참 묘한 분이지.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아는 생각했다. 이자춘의 아들 성계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어느 날, 성계가 먼저 그 이야기를 꺼냈다.
둘이 언덕 위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해가 지는 중이었고, 영흥 땅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한아야."
"응."
"이 땅, 원래 고려 땅인 거 알지?"
"알아."
"근데 왜 우리가 원나라 밑에 있어야 해?"
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성계가 무릎을 세우고 팔짱을 꼈다.
"우리 아버지가 천호 벼슬이잖아. 원나라 밑에서. 사람들이 우리 집안 이상하게 보는 거 알아. 고려 사람인데 원나라 관리 한다고."
"……."
"근데 나는 그게 부끄럽지 않아. 아버지가 왜 그 자리에 있는지 알거든."
"왜?"
성계가 저 멀리 지평선을 봤다.
"아버지는 이 땅을 떠나지 않으려고 그 자리에 있는 거야. 원나라가 임명하는 자리지만, 그게 없으면 우리 같은 사람들 이 땅에서 더 못 버텨. 버티면서 때를 기다리는 거야."
한아는 그 말을 천천히 소화했다.
"때가 오면?"
"되찾아야지. 이 땅."
성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흥분하지도, 과장하지도 않았다. 그냥 당연한 사실을 말하듯이.
한아는 소름이 돋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저 나이에 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너 그 생각 오래 한 거야?"
"아버지한테서 들었어. 근데 들으면서 내 생각도 같았어."
"무서운 생각이다."
"무서운 게 없으면 이룰 것도 없잖아."
한아는 그 말을 오래 기억했다.
무서운 게 없으면 이룰 것도 없다.
🕯️ 5화 — 아버지 이자춘의 비밀과 아들의 다짐
그 무렵, 영흥에 이상한 기류가 흘렀다.
낮선 얼굴의 사람들이 이자춘의 집을 드나들었다. 밤에도 불이 꺼지지 않았다. 성계는 눈치를 챘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밤.
성계가 마당에서 혼자 달을 보고 있을 때, 아버지 이자춘이 나왔다.
"성계야."
"예."
이자춘은 아들 옆에 서서 같은 달을 봤다.
한참 침묵이 흘렀다.
"개경에서 서신이 왔다."
"……공민왕께서요?"
이자춘이 고개를 끄덕였다.
"쌍성총관부를 되찾으려 하신다. 우리가 안에서 도와야 한다."
성계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지."
"그래도 하실 겁니까."
이자춘이 아들을 바라봤다. 성계는 아버지를 마주 봤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성계는 망설이지 않았다.
"해야죠. 이 땅은 고려 땅이고, 우리는 고려 사람입니다."
이자춘이 피식 웃었다. 자랑스러운 얼굴이었다.
"그래. 아버지도 그 생각이다."
그날 밤, 이자춘은 아들에게 처음으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공민왕의 밀서. 고려 군대가 외부에서 공격할 것이고, 이자춘이 내부에서 성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맡는다는 것. 성공하면 쌍성총관부가 해방된다. 실패하면 역적이 된다.
성계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응."
"저도 함께하겠습니다."
"너는 아직 어리다."
"활은 어른 못지않게 쏩니다."
이자춘은 아들을 한참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함께 하자."
그날 밤, 성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설레는 것과 두렵다는 것이 정확히 같은 비율로 섞여 가슴 안을 채웠다. 뒤척이다 새벽녘에 방에서 나왔다. 마당에 앉아 하늘을 봤다.
별이 많았다.
한아는 지금 뭐 하고 있을까.
엉뚱한 생각이 났다. 성계는 스스로 그 생각에 당황해서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그런 생각 할 때가 아닌데.
그런데 또 생각났다.
무서운 게 없으면 이룰 것도 없다고 했잖아.
나 자신에게 한 말인데, 그 말이 한아에게 가닿아 있었다. 왜 그럴까.
성계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냥 이상한 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장은 이상할 정도로 자기 마음대로 뛰고 있었다.
💓 6화 — 처음으로 느낀 심장 두근거림
봄이 깊어지면서 영흥은 초록빛으로 물들었다.
논에 물이 들어찼고, 산 아래 마을에선 씨를 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냇가에서 물장구를 쳤고, 장터에는 사람이 넘쳤다.
그 속에서 한아와 성계의 매일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처음엔 언덕 위와 활터로 나뉘어 있었다. 그 다음엔 활터 경계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어느새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부분 읽어봐."
한아가 병서를 펼쳐 성계 앞에 들이밀었다.
"지형을 활용한 매복 전술. 산이 많은 이 지역에서 실제로 쓸 수 있는 방식이야."
성계가 책을 받아 읽었다. 눈이 빠르게 움직였다. 이해하는 속도가 빨랐다.
"이건 병력이 적을 때 유효하겠네."
"맞아. 근데 문제가 있어. 매복 지점에 먼저 들어가는 병사들이 발각될 위험이—"
"야음을 이용하면 돼. 밤에 들어가서 낮에 기다리는 거야. 사흘 치 식량만 있으면 충분해."
한아가 눈을 빛냈다.
"오, 맞네. 나는 거기까지 생각 못 했어."
"네가 읽은 책에 있는 내용인데 왜 못 했어."
"읽는 것과 적용하는 건 다르거든."
성계가 책을 돌려주며 말했다.
"너는 전략을 짜는 머리가 있어. 실전 감각은 없어도."
"실전을 해봐야 생기지."
"여자는 전쟁터에 못 나가잖아."
한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가 돌아왔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공부하는 거야."
성계는 그 대답을 듣고 잠깐 한아를 바라봤다. 억울해하거나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방법을 찾는 것. 그 태도가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멋있네."
성계가 저도 모르게 말했다.
한아가 고개를 들었다.
"뭐?"
"아, 아무것도."
성계가 고개를 돌렸다. 귀가 빨개지는 게 스스로도 느껴졌다.
한아는 잠깐 그 옆얼굴을 보다가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멋있다고 했나.
이성계가.
나한테.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었다가 멈췄다.
한아는 그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책의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하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한아는 인정했다.
이상하다. 이 감각이.
이성계를 보는 게 설레는 것 같다.
그것을 인정하고 나서도, 한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내색하는 것은 지는 것이고, 한아는 지는 걸 싫어했다.
🏇 7화 — 원나라 말발굽 소리와 우리의 거리
여름이 왔다.
원나라 관리들이 영흥을 순시하러 내려왔다. 말 탄 병사들이 마을 안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은 길 옆으로 비켜섰다. 아이들은 뒤로 물러섰고, 어른들은 고개를 숙였다.
성계는 길 옆에서 그 행렬을 바라봤다. 표정이 없었다. 감정을 지운 얼굴이었다.
한아가 그 옆에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지나갔다. 흙먼지가 일었다. 행렬이 멀어지고 나서야 사람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화 안 나?"
한아가 낮게 물었다.
"나지."
"표정이 없던데."
"화낸다고 달라지는 게 없으니까."
성계가 발밑 흙을 봤다. 원나라 말발굽에 패인 땅.
"저 사람들이 다니는 이 길이 고려 땅이야. 고려 사람들이 비켜서는 이 땅이. 근데 아무도 이상하다고 안 해."
"익숙해진 거겠지."
"그러면 안 되지."
성계가 고개를 들었다.
"익숙해지면 그냥 그게 당연한 것처럼 돼. 원나라 밑에서 비켜서는 게 당연한 게 아닌데, 당연해진다고."
한아는 그 말을 들으면서 뭔가 뜨거운 것이 목 안쪽에서 올라오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 아버지는 이자춘 나리와 같이 뭔가 도모하고 있는 것 같아."
한아가 조용히 말했다.
성계가 한아를 봤다.
"알고 있어?"
"다 알지. 모른 척하고 있는 거야."
둘의 눈이 마주쳤다.
"괜찮아?"
성계가 물었다.
한아가 잠깐 생각하다 말했다.
"무서워. 하지만 옳은 일이잖아."
성계의 눈이 조금 달라졌다.
무서운 게 없으면 이룰 것도 없다.
그 말을 내가 했는데. 지금 한아가 그 말을 살고 있다.
성계는 말없이 한아 옆에 더 가까이 섰다. 어깨가 닿을 듯 말 듯.
한아는 그것을 눈치챘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았지만, 그 거리만큼이면 충분했다.
🌙 8화 — "나는 반드시 이 땅을 지킬 것이다"
밀서가 도착한 건 한여름 밤이었다.
이자춘이 아들을 불렀다. 성계는 아버지 앞에 앉았다.
"공민왕께서 결정하셨다. 올가을, 고려군이 북쪽에서 내려온다. 우리는 안에서 성문을 열어야 해."
성계의 눈이 진지하게 가라앉았다.
"시기는요?"
"추수가 끝날 무렵이다. 그때까지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
"알겠습니다."
이자춘이 아들을 바라봤다.
"성계야, 이건 위험한 일이다. 실패하면 우리 가문 전체가—"
"알고 있습니다."
성계가 아버지의 말을 자르며 말했다.
"그래도 해야 합니다. 아버지."
이자춘이 오래 아들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성계는 혼자 활터에 나갔다. 달이 밝았다. 과녁은 보이지 않았지만 감으로 시위를 당겼다.
슈웅.
화살이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혼자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한아였다. 잠을 못 자는지 눈 밑이 살짝 부어 있었다.
"너도 못 잤어?"
"응."
한아가 성계 옆에 섰다. 둘 다 어둠을 바라봤다.
"성계야."
"응."
"이게 끝나고 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우리."
우리. 성계는 그 단어에 심장이 한 번 크게 뛰었다.
"……글쎄."
"겁나지 않아?"
"나."
"응."
"나는 반드시 이 땅을 지킬 거야."
성계가 말했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지킨다고. 내가. 어떻게 해서든."
한아는 그 옆모습을 봤다. 달빛에 윤곽이 또렷한 얼굴. 열여섯 살짜리 소년의 얼굴인데, 눈빛만은 그 나이가 아니었다.
저 눈빛은 평생 저렇겠구나.
한아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상하게 든든한 기분을 느꼈다.
💌 9화 — 한아의 편지, 성계의 첫 답장
가을이 왔다.
추수가 끝날 무렵,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자춘의 집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아졌고, 성계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훈련했다. 한아는 그 변화를 느끼며 집에서 조용히 기다렸다.
그리고 어느 날 아침, 성계가 한아에게 편지를 보냈다.
한아에게.
이제 곧 될 것 같아. 무서운데 기대도 돼. 이상하지? 무섭고 기대되는 게 동시에 가능한지 몰랐어. 근데 되네. 끝나고 나면 처음으로 진짜 고려 땅에서 고려 사람으로 서 있을 수 있을 것 같아. 그 느낌이 어떨지 기대돼.
추신: 너는 겁 안 나?
한아는 그 편지를 세 번 읽었다.
추신에서 웃음이 났다. 본 편지는 길게 썼으면서, 하고 싶은 말은 추신에 구겨 넣는 사람.
답장을 썼다.
성계에게.
무섭고 기대되는 게 동시에 가능해. 나도 그래. 끝나면 진짜 고려 땅이 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나지만, 실감은 그때 가서 하면 되니까. 지금은 그냥 잘 해내면 돼. 너희 아버지도, 우리 아버지도.
추신: 다치지 마.
성계는 그 답장을 받고 오래 바라봤다. 네 줄짜리 편지. 그런데 마지막 추신이 유독 눈에 걸렸다.
다치지 마.
겨우 세 글자인데.
심장이 이상하게 오래 뛰었다.
그날부터 성계는 훈련을 더 열심히 했다. 다치지 않기 위해서. 다쳐서 한아 앞에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리고 살아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서.
🍂 10화 — 헤어짐 — 고려군 입대 전날 밤
쌍성총관부 탈환 작전은 성공이었다.
이자춘이 성문을 열었고, 고려군이 밀려 들어왔다. 단 하루 만에 99년간 빼앗겼던 땅이 돌아왔다. 사람들이 울고 웃으며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한아도 그 속에 있었고, 성계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봄.
고려 조정에서 젊은 무사들을 징집한다는 소식이 왔다. 홍건적이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계의 이름이 명단에 올랐다.
입대 전날 밤.
성계는 활터에 혼자 나갔다. 달이 흐린 밤이었다. 바람이 불었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한아였다.
"알고 왔어?"
"어디 있을지 알 것 같아서."
둘은 나란히 섰다. 과녁도 안 보이는 어둠 속에서.
한참 침묵이 흘렀다.
"무서워?"
한아가 물었다.
"응."
"그래도 가?"
"가야지."
"……알아."
한아가 고개를 숙였다.
"그냥 물어본 거야. 막으려는 게 아니라."
성계가 한아를 봤다. 눈물은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눈이 빨개져 있었다.
울고 싶은데 참고 있구나.
"한아야."
"응."
"……돌아올게."
"알아."
"꼭."
"……알아."
한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을 똑바로 봤다. 서늘하고 또렷한 눈. 그런데 그 안에 뭔가 흔들리고 있었다.
"살아서 와."
"응."
"약속해."
"약속해."
성계가 말했다. 한아의 눈을 보면서. 처음으로 시선을 피하지 않고.
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먼저 돌아섰다.
성계는 그 뒷모습을 오래 바라봤다.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한아의 뒷모습을.
보면 안 될 것 같았다. 보면 못 떠날 것 같아서.
그래도 봤다.
사라질 때까지.
다음 날 아침, 이성계는 활 하나를 메고 고려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열여섯 살 소년의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그 눈빛은, 이미 돌아올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것이었다.
작가 노트: 역사 속 이성계의 소년 시절은 기록이 많지 않아요. 하지만 그 시절에도 분명 설레는 봄이 있었고, 두근거리는 감정이 있었을 거예요. 1부는 그 상상에서 시작됐습니다. 한아와 성계, 앞으로 어떻게 될지 기대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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